시라토리 요시에

 



1. 개요
2. 첫번째 탈옥
3. 두번째 탈옥
4. 세번째 탈옥
5. 4번째 탈옥
6. 그 후
7. 창작물 속의 시라토리 요시에


1. 개요


白鳥由栄
시라토리 요시에는 태평양 전쟁기 일본에서 수감된 전설적인 죄수로 ,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연쇄 탈옥'''으로 악명 높은 죄수다.
이렇게만 들으면 무시무시한 흉악범 일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경찰들에게 고문 당해 거짓 자백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살해 혐의로 아오모리 감옥에 수감 되었다. 수감 된 동안 그는 간수들에게 끊임없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고문 당했고, 결국 '''첫번째 탈옥'''을 결심 한다.

2. 첫번째 탈옥


아오모리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샤워 시간에 죄수들에게 지급되는 목욕탕 바가지[1]에 둘러져 있는 철사를 빼내서 즉석 락픽을 만들었고, 간수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감옥의 잠금장치를 해체하는데 성공한다. 밤중에 운 좋게 감옥을 탈출한 그는 해당 교도소 인근 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시라토리는 탈옥 전에 미리 마루바닥을 뜯어 이불 밑에 깔아두었고 간수들은 이를 보고 그가 깊이 자고 있는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교도소에서는 다음날 아침이 밝고 나서야 탈옥 사실을 인지했다.

3. 두번째 탈옥


탈옥에 성공한지 3일 뒤, 병원에서 물건을 훔치려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두 번째로 수감된 후 6년째인 1942년, 그는 아키타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아키타 감옥의 간수들은 시라토리의 탈옥 전적을 알고 있었고,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무참한 고문을 일삼았다. 그가 갇혀 있던 독방은 굉장히 좁고 천장이 높았으며, 문에 달린 쇠창살과 낮에만 햇빛이 들어오는 천장의 쇠창살 구멍만이 유일한 환기구였다. 간수들은 시라토리가 늘 수갑을 차고 있도록 했으며, 수갑을 푸는 것은 샤워시간에만 허락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7월 15일 한밤중에 간수가 시라토리의 방을 들여 보았으나 시라토리는 뜬금 없게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의 방에는 그가 차고 있던 수갑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가 두번째 탈옥을 성공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 1. 몰래 꽁쳐둔 와이어로 락픽을 만들어 수갑을 푼다.
  • 2. 좁은 독방의 구조를 이용해 양팔과 다리로 벽을 짚고 위로 올라가 쇠창살의 창틀을 흔든다.
  • 3. 다시 내려와서 수갑을 찬 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한다.
둘째의 경우는 힘과 기술, 담력이 모두 요구되는 일이다. 자칫하면 천장 부근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고, 간수들에게 들통나기도 쉽기 때문이다.
시라토리는 이짓을 한두번도 아니고 몇날에 걸쳐 밤중에 간수들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반복했고, 인내심 끝에 창틀이 떨어지며 탈출 하는데에 성공 했다. 마침 탈옥하는 날 밤에 폭우가 쏟아져 간수들이 천장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4. 세번째 탈옥


아키타 감옥 탈옥 후 3개월 뒤, 시라토리는 아키타 감옥에서 자신을 담당했던 간수 중 ‘코바야시’ 라는 이름의 간수를 찾아간다. 그는 유일하게 시라토리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챙겨줬던 간수였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찾아갔던 것.
코바야시는 그를 들여보내 식사를 대접했고, 시라토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시라토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간수들의 고문과 학대로 지쳐 탈옥을 결심한 것이고, 그는 이 일본 교도소의 야만적이고 부패한 시스템을 만천하에 밝혀내고 민사소송을 통해 자신의 법적 자유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코바야시에게 털어 놓았으나, 코바야시는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경찰에 신고해 체포되었다.
사실 탈옥의 달인 치고는 굉장히 어리석은 도박이었다. 아무리 선한 인물이었다고는 하나 코바야시는 엄연히 간수였고, 법 집행 기관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탈옥수를 보고 눈감아 줄 리가 없었을 뿐더러, 당시 일본은 철저한 군국주의 사회로 그러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 해줄리가 만무한 사회였다. 시라토리가 얼마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결국 경찰에게 다시 체포된 시라토리는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악명 높은 아바시리 감옥으로 이송 되었다. 최북단에 있는 감옥인 만큼 굉장히 추운 날씨를 자랑했고, 죄수들에게 일절의 난방도 허가해주지 않았다. 또 다시 이어진 간수들의 학대는 물론이고, 락픽으로 열 수 없는 총합 20kg에 달하는 수갑을 각각 시라토리의 팔과 다리에 채우기까지 했다. 이전 감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샤워시간에만 이를 풀어주는 것이 허가되었다.
겨울을 지나 봄까지 겨우겨우 살아남은 시라토리는 마침내 탈옥을 결심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탈옥 방식을 선보인다.
그가 갇힌 아바시리 감옥의 독방 구조는 천장이 높지도 않고, 사람 어깨 넓이 보다 작은 크기의 쇠창살이 박힌 창틀 만이 있었다. 그마저도 팔다리에 20kg 수갑이 채워져 제대로 움직이기는 커녕 밥 한끼도 고개를 처박고 개처럼 먹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면 인내심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시라토리는, 매 끼니마다 제공되는 미소 된장국을 조금씩 남겨 감옥문의 창틀에 뿌렸다. 이 짓을 몇달동안 꾸준히 한 결과로 마침내 녹슨 쇠창틀의 나사가 빠졌고, 다음 해 봄에는 똑같은 방식으로 수갑까지 풀어버린 것이다.
쇠창틀, 수갑까지 모두 제거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은 그의 어깨 너비보다 작은 정문의 구멍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어깨가 통과할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결국 '''어깨를 탈골하여''' 구멍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마침 복도 천장의 창문 중 하나가 깨져 있었고, 그곳으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경찰은 교도소 인근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도시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었고, 시외로 도주했다면 홋카이도의 살인적인 추위와 맹수들이 들끓는 야생에서 살아 남았을 리 없다는[2] 결론을 내리고 수색을 포기에 이른다.

5. 4번째 탈옥


지옥의 아바시리 감옥에서 탈출한 시라토리는 홋카이도의 버려진 광산에서 비밀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었다. 나무열매와 토끼, 너구리 등의 식량으로 2년간 숨어살고 있던 그는 근처 마을로 내려갔고, 이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미군과 신문기사를 통해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미군정이 들어섬에 따라 자신을 추적하는 경찰들이 없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가족이 있는 고향 땅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 15일간의 걸음 끝에 삿포로에 도착한 그는 배가 고픈 나머지 한 농부의 밭에서 몰래 서리를 하다가 농부에게 발각 되었고, 가뜩이나 기승을 부리던 서리 도둑에 혈안이 되어있던 농부가 농기구를 들고 그를 공격하자 의도치 않게 농부를 살해해 버린다.
결국 1947년에 또다시 살해 혐의로 체포된 그는 정당방위였음에도 불구,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삿포로 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번 교도소에서는 그야말로 간수들이 작정하고 있었다. 6명의 무장간수들이 교대로 그를 24시간 감시하고, 쇠창틀 너비도 아바시리 감옥의 것보다 더 작게 설계가 되었으며[3] 무장간수들 또한 이러한 보안 수준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라토리 또한 매번 천장을 바라보며 탈옥 계획을 세워 보려 했으나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라토리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무장간수들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 강제로 이불을 들추었으나, '''첫번째 탈옥 때와 마찬가지로 그곳엔 마루바닥 더미들 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가 탈출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땅굴.'''
창문이나 천장의 철창을 통해 탈출한 것은 간수들에게 익히 알려진 탈옥 경로였고, 이를 예상한 시라토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천장으로 탈출 계획을 세우는 '''척''' 하다가 몰래 꽁쳐둔 국그릇으로 땅굴을 파서 탈출한 것이다. 무장간수들은 시라토리가 씻으러 갈 때마다 방을 점검했으나, 워낙 감옥의 구조와 보안에 대해 큰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시라토리는 늘 천장을 보며 탈출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기에 미처 바닥을 점검할 생각을 하지 못한것이다.

6. 그 후


세월이 흘러 1948년, 시라토리 요시에는 40살의 중년이 되었고 4번의 탈옥과 끊임없는 도망자 인생으로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삿포로에 거주 중이었던 그는 잠시 앉아서 쉬던 와중 한 경찰이 자신의 옆에 앉았으나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듯 하여 별 개의치 않고 있었다.
경찰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침착하게 의심을 받지 않도록 상황을 해결하려 했으나, 갑자기 경찰이 그에게 담배 한대를 권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담배가 굉장히 귀한 물품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선뜻 담배를 권하자, 그동안 간수들에게 받은 갖은 고문과 학대, 오랜 도망자 신세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 있던 시라토리는 눈물을 흘렸다.[4]
결국 긴 도망자 인생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시라토리는 그 자리에서 경찰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자백했다.
시라토리는 다시 도쿄 교도소로 이송되었으나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사법체계의 개혁으로 재판부에서는 그가 삿포로의 농장에서 농부를 살해한 것이 정당방위였음을 인정하고, 총 네 번에 걸친 탈옥에서 단 한번도 교도소의 간수를 해치거나 살해한 적이 없으므로 그의 살해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대신 상습적인 탈옥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시라토리 입장에선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도쿄 교도소 생활도 확연히 달랐다. 따뜻한 봄 시기에 도쿄로 이송되었고, 쌀쌀한 날이면 교도소는 난방이 제공되었으며, 간수들 또한 그들의 통제에 잘 따라주기만 한다면 먼저 폭력을 쓰거나 모욕적인 언행을 내뱉지 않았다.
사형 위기를 벗어나고, 살해 혐의 또한 무죄 선고를 받았으며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교도소 내에서 그는 더이상 탈옥할 이유가 없어져 모범수로서 착실하게 복역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4년 뒤인 1961년, 시라토리는 가석방을 인정 받아 출소했고 마침내 자유인이 되었다.
아오모리에 돌아간 그는 수소문 끝에 자신의 딸을 찾는데 성공했고, 아내는 평생 그를 기다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이야기는 뒤늦게 현대 일본에서 널리 알려졌고 대중들은 그가 일본의 사법체계에 영향을 준 안티히어로쯤으로 인식 하고 있다고 한다.

7. 창작물 속의 시라토리 요시에


골든 카무이의 등장인물 시라이시 요시타케는 시라토리 요시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탈옥왕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관절을 자유자재로 탈골시키는 능력이 있다.
[1]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이는 그 나무 바가지가 맞다.[2] 비록 탈출 시기가 봄 이기는 하지만 홋카이도는 여전히 살인적인 추위를 자랑할 때다.[3] 사람 머리도 들어갈 수 없는 수준의 작은 구멍이었다.[4] 그는 간수들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사법체계에 대한 불만과 상처 또한 품고 있었다. 애초에 살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것도 모자라 자신의 정당방위 마저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순수한 친절을 베푸는 경찰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