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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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5] 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 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 세력은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를 일본이 몸소 이끌어주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놈들이 방해하니까 정의를 위해 반격했다는 것이 일본 우익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대동아 전쟁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근데 어차피 대부분 태평양에 인접한 국가들이다)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태평양 전선 개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전멸당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거듭한 결과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후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유럽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었으며, 전후 미 육군[6] , 미 공군(당시는 미 육군 항공대)[7] , 미 해군, 미 해병대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선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일본 제국 해군 주도하에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과 나아가 상륙전, 대규모 합동작전이 벌어졌다. 특기할 점은 문명화된 지역에서 어느정도 선을 지키며 대결했던 유럽의 서부전선과는 다르게[8] 야만인이라 칭해도 모자랄 정도의 일본군의 비이성적 행동(식인, 포로 학대, 민간인 살해)으로 인해 미군 및 호주군, 영국군은 박멸 식의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고, 2차대전 내에서도 상당히 처절했던 전장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민들이 큰 희생을 당했다.
1.1. "대동아 전쟁"과 명칭에 관하여
전후 GHQ(General Headquarters)는 '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 전쟁(大東亜戦争/たいとうあせんそう)이라는 명칭을 금지하였다. 미 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이라던가 제2차 세계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된다.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흔해빠진 주장부터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여기에서도 '일본이 동남아와 인도의 독립 운동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대동아 공영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도 있다.'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솔직히 일본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는 건 소위 말하는 대동아 공영권과 연관된 것이다. 이 외에도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사상적인 의미가 아닌 단순히 전쟁이 일어난 지역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GHQ가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폐지한 것은 단순히 위처럼 사상적인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인 이들 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 일본 정부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라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본 식민통치를 기억하는 90대 이상의 세대들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경우가 많은 듯하다. 이는 중일전쟁을 일컫는 지나사변이라는 표현과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젊은 시절을 보냈을 당시에는 일제 식민당국이 그런 명칭으로 많이 선전해댔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군함행진곡' 같은 유명 군가를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한자 문화권이든 어디든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국가는 일본뿐이며, 당연하게도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8.15 광복 직후 조선에서는 미일 전쟁(米日戰爭)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
2. 배경
-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 참조.
3. 전개
- 1941년
- 1942년
- 1944년
- 1945년
- 람리 섬 전투
- 페낭 해전
- 도쿄 대공습
- 이오지마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구레 군항 공습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 시탕 만 전투 (링크 참조)
4. 군사력
미국, 일본 제국의 군사무기 생산력 비교 (1939-19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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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취역한 미-일 항공모함의 평형. 보시다시피 격차가 어마어마하다.
일본 제국 측의 무기 생산량 중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잠수함은 82.27%). 하지만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 능력을 배분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올인하였음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다. 미군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 같은 전투기였고, 일본군은 초기부터 개량해서 운용한 제로센이다. 제로센은 초반에는 우세하였지만, 중반부터 더 좋은 성능의 미군 전술기들이 등장하면서 종이비행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살 돌격 전술로 숫적인 우세마저 잃었다. 게다가 파일럿의 생존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 하는 상황에 베테랑 조종사, 숙련된 조종사들이 소모되었다. 여기에 형편없는 공업력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보수, 수리뿐 아니라 전술기 양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종전까지 제로센만 운용한 것은 아니라 시덴카이와 같은 신예기가 훌륭한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생산량 때문에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못했고[13] , 대량으로 생산했어도 숙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해서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제국이 올인을 하는 분야에서조차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인데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이 1944년부터 양산한 M26 퍼싱 중형 전차는 44-45년간 생산량이 약 2,800대로 대전 시기 일본 제국이 생산한 모든 전차, 자주포 총량보다 많았다.[14]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 제국의 무책임한 징병 정책으로 숙련 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 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 산업 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랜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게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트럭이나 야포 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 전장은 바다였고, 해군 전력의 90%는 태평양에 투입되었다. 그 10%도 절대다수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구축함이고, 주력함들은 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다.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15] 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도 매우 컸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 제국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 능력과 전투력 유지에 위기가 닥쳤다. 일본이 원유를 공급받던 유전은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 등에 있었는데 미국은 전쟁 후반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했고, 영국은 코코스 제도에서 전투기를 띄워 계속해서 팔렘방을 두들겼다.[16] 한 마디로, 일본은 안심하고 석유를 퍼올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극심한 석유난으로 인해 전쟁 막바지에는 소나무에서 뽑아낸 송근유를 동원하여 전투기를 가동하려 했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사용되는 자원인데, 일본 제국은 텅스텐 가공 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동부전선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 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수한 산업 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 가지 천연 자원들, 특히 천연 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 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합성 고무를 만들어서 천연 고무를 완전히 대체시켜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 등이야 미국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도 쏟아지는 것들이었다.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산업 능력으로 생산한 화학 살충제였다.
이런 직접적인 전투 장비(무기) 및 전략자원 문제 말고도 양국의 산업력과 기술력의 차이는 이 전쟁에 크게 작용했다. 당장 전황이 아직 불리하지 않던 개전 초인 1942년에는 알류샨 열도 전역을 위해 '''자국의 고양이들을 죄 공출해서 방한복 만드는 소재로 사용'''(#)할 정도로 일본은 전 분야에서 기술력, 산업력, 자원보유량 모두 압도적 열세였다. 고양이 한 마리 잡는다고 모피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또 다른 예로 불도저가 있다. 일본군이 전쟁 기간 내내 인력을 동원해 삽과 곡괭이로 활주로를 만들었다.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지사. 반면 미군은 불도저를 이용하여 단시간에 활주로를 뚝딱 만들어냈다. 과달카날에서도, 알류샨 열도에서도, 전쟁 후반기 괌과 사이판,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도 말이다. 일본 제국은 전쟁 초기 노획한 불도저를 본국으로 가져간 후 그 효율성에 주목하여 고마쓰 중공업에서 카피해내긴 했으나 성능이 제대로 안 나오고, 수량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4.1. 일본군의 한계
일본군은 황실 회의록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스스로도 미국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임을 인지하였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정확하고 신속해야 하며 모든 것이 계획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대립은, 비록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각 군간 대립이 있었다고 하나[19] , 일본군도 이에 지지 않을 정도로 육해군간 대립이 심각했다. '''서로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따로 놀았을 정도로 일본군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20] 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자신들이 완벽한 협력과 통제 아래 진행되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말까한 어려운 작전을 눈 앞에 두고도 일본군의 육해군은 서로 손발이 안 맞다 못해 서로 방해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을 개전할 당시 중일전쟁에서 철수하던가 미국과의 양면전선을 만들던가의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 스스로도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이는 명백하며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할 시 일본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 언급된 황실 회의록의 기록만 보아도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미국이 연합국과 함께 유럽에 최우선적인 역량을 쏟고 있고, 대부분의 물자가 유럽방면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으며,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대하여 동남아시아에서 반미국정서[21] 와 미국 내에서도 탈식민지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미 해군의 심각한 전력공백 상태를 야기한다면 자신들이 유리한 협상위치 정도는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미 해군을 크게 약화시킨 뒤 지속적으로 미 해군의 소모시키고 태평양에서의 패전소식이 지속되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큰 부담이 될테고, 그렇다면 미국 내 여론도 점점 태평양에서 손을 떼고 유럽쪽에 집중하자는 쪽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22] 따라서 일단 미 해군을 섬멸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력공백을 야기한 뒤, 점감요격작전으로 지속적인 미 해군의 피해를 강요하여 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부담을 받고 있는 미국을 단기간 내에 협상테이블로 끌고 나와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용인하게하거나[23] 적어도 동남아 식민지들을 유지시키는 댓가로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재개하게 만드려는 심산이었다.[24]
물론 결과적으로는 선전포고 전 기습공격의 문제와 당시 미국 내 만연하던 인종차별적 성격이 가미된 반일감정에 불을 붙여 결과적으로는 전쟁수행의지를 더 불태우게 만든 꼴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도 미국은 어디까지나 '''참전국'''의 위치에서 유럽의 반인륜적인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간 구원자의 입장이었는데,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갑자기 미국 영토가 공격받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극렬하게 분노하였고, 정치권 역시 만장일치에 가깝게 참전 결의안에 동의하면서 일본의 계획이었던 치명적인 공격을 통해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를 꺾는다는 목표는 첫 발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의 피해도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이것이 장거리에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만 이루어진 공습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고[25] , 미국도 국채를 발행하고 렌드-리스 정책을 통해 전시 경제 체제로 돌입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양의 전력을 단기간에 보충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긁어모은 전력으로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 2개를 수장시키고 일본 해군의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때까지는 지속적으로 수세에서 작전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26]
수송선과 달리 군함은 당장 발주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했고[27]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작전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판도가 다르게 돌아갈 가능성 역시 존재하였다. 더군다나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의 미 해군의 F4F 와일드캣에 대항하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미 해군기에 비해 일장일단이 있는 기체였다. 거기다가 일본 해군은 전함세력이 건재하였던 반면 미 해군의 경우 비교적 구형의 펜실베니아급 전함 USS 펜실베니아(BB-38)만이 진주만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테네시급 전함 USS 테네시(BB-43), 콜로라도급 전함 USS 메릴랜드(BB-46) 및 네바다급 전함 USS 네바다(BB-36)는 1942년까지 수리되어야 했고, 나머지 전함은 이미 미국이 완전히 승기를 굳힌 대전 후반에나 수리를 받고 동원되거나 그대로 폐기되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꺾이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완전히 미 해군에 의해 섬멸되기 전까지는 미 해군에 대하여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태평양 전쟁의 전개와 일본군의 실책 등을 모두 고려하니 '''내가 맛깔나게 싸대기를 때리면 미국이 협상하겠지?'''라는 일본의 방침은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한 뒤 병력을 증강시키기 전에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인 막대한 규모의 함대를 무력화 시키고 증원되는 미국 함대를 각개격파하여, 태평양에 국한시키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지속적으로 전력상 우위 서게 할 경우, 미국은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는, 꽤나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가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28] 물론 일본군이 굳이 하와이를 점령할 필요도 없이, 미 해군이 수세에서도 분전으로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국 국내의 전쟁여론을 반전시키지 못하였다면 일본군이 이루려고 했던 부분이 일정부분은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개전초기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웃음거리로서의 일본군이 아닌 명백한 태평양에서 미국과 연합군에 대한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이미지 중 잔인성을 제외[29] 하면, 멍청하고 무능하며 전근대적인 정신론만 고집하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미국의 전쟁수행의지에 대한 오판과 이후 미 해군의 결사항전 등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장기전이 되면 질 것이라 예상하였던 전쟁이 장기화되어 막장이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결국 일본군은 완벽하게 적은 오차도 용납하기 힘든 어려운 전쟁을 벌여두고는 자신들의 손발도 제대로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20세기 이후 항상 세계 최대의 패권국가의 자리를 놓은 적이 없는 국가인 상태에서, 적인 미 해군의 분전으로 원하던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금수조치 및 일본 자체의 경제력의 한계로 인하여 그에 대처할 계획조차 없었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전쟁이 자신들의 계획에서 틀어지자마자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5. 종전
일본의 항복 문서 참조.
6. 인명 피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6만 여명이다. 전투 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60,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30]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 피해는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 전쟁 미군 전사자 15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 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 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평양 전쟁 내내 미군이 쓰던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라 불렸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육군은 '이건 미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야!'라고 까고, 미 육군 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 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쨌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이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에... 그리고 일본군이 단단히 방어하고 있는 섬 주위의 섬을 미군이 점령하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니, 일본군의 요새 작전은 자기들이 알아서 몰락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보급로가 바다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먹은 '''미군이니까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입은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 포로 사망자만 도합 150만여 명에 달했다.[31]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 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 그래도 동원 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제국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 때문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조선과 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리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 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 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동화 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 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 밑까지 다가오자 결국 방침을 바꿔서 조선인, 대만인들도 강제징집해 전선에 밀어넣고 의무교육제도 및 선거권 도입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동화 정책에 나섰으나, 너무 늦어버렸고, 그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난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당시 심각한 혼란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굶주리는 빈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까지 받아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으니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 폭격, 전쟁 기간 기아와 질병 등으로 군인 375만 명을 포함하여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2,200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독소전쟁을 제외하면 주로 전투 사망자가 다수인 유럽 전선과 달리, 태평양 전선은 아프리카 지역의 내전만큼이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국시대나 임진왜란처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살해/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 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태평양 전쟁만큼은 아니라도 수백만 명씩 죽고 다친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및 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 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최근에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참상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 소련군 포로는 30~57.5% 이상이 사망했고[32]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가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 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33]
7.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분명 물적, 인적 피해는 유럽 전선이 더 컸으나 유럽 전선은 전쟁으로써 참혹했을지언정 어느정도 말과 문화가 통하는 지역이었고, 나치가 패망하면서 보여준 참극은 소련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면서 가장 많이 경험하였지, 미군은 절멸 수용소 등 그 잔재를 보았을 뿐 직접적으로 경험한 바가 적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일본군은 당연하지만 언어의 장벽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양 측 모두 '''항복이라는 개념'''이 배제된 채 서로가 처절하게 그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만 싸웠다. 거기다가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면서 보여준 참상들을 최우선적으로 겪으면서 그 비인간성에 더 학을 떼었던 면도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아버지의 깃발>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7.1. 열악한 지역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매우 덥고 습한 기후에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과 험준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걸 넘어 아예 천만 광년은 떨어진 곳들이었다. 후일 미군이 전쟁을 치른 지역 중 가장 낙후된 아프가니스탄조차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 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격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든 거래를 하든 해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벌이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 건 미군과 일본군 할 것 없이 진흙과 말라리아, 그리고 만연한 전염병 뿐이었다.
그리고 현지 장기 거주자나 원주민이 아닌 이상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당장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늪, 뻘, 그리고 모기, 거머리 등의 독충 뿐.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 자살해 버리는 "장교"가 나오며,[34]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 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다.
7.2. 열악한 보급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아무리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아들에게 본토에서 구운 초콜릿 케이크까지 수송해주는 미군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에서 자체 보급도 어느정도 되고 있었던 지라 미군의 여유로운 보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하다못해 중동이라 해도 곳곳에 소도시와 마을이 있으니 정 안되면 징발이라도 할 수 있다. 대테러 전쟁 당시 아프간/이라크에서 미군도 본격 주둔 이전까지는 보급이 고속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현지인 마을에서 이렇게 징발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35]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빵 한 조각, 휴지 한 장조차 전부 보급선에만 의지해야했던 전장이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 아마존 오지나 다름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섬에 보급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36]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 계획 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 부대의 규모도 유럽 전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으며, 보통의 문명 사회에서 쉽게 징발 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도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게다가 1942~19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꺾기까지는 항상 수세에 있었으므로 일본 해군에 의해 수송선단의 보급계획에는 항상 차질이 발생했다. 특히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 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 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이렇다보니 전쟁 초에는 동남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원을 받았는데도 유럽과는 비교가 힘들정도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는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 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 애초에 육군보다 보급 순위도 밀려서 개전 초에는 사용하는 제식 소총부터 일본군 99식 제식 소총과 별로 다를 거 없는 스프링필드였고, 보급 사정이 나빠지면 식량 보급이 안 되어서 일본군이 패주할 때 남기고 간 쌀과 간장 같은 생소한 식재료만 가지고 상당 기간 배식을 해야했어서 타군에 비해 굶주림이 일상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해병대 병사들이 기회가 되면 육군 보급품을 훔치는 경우가 상당 부분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은 기록도 존재할 지경이었다. [37]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일본군의 경우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개구리 뜀뛰기 작전에 의해 건너뛰어진 섬에 남겨진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식량확보를 위해 '''둔전''', 사냥 및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Rabaul)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38]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겐빌(Bougainville) 섬처럼[39] 전 병력의 1/3 이상이 '''굶어 죽어버린''' 곳도 존재하였다.
7.3. 문화권이 다른 전장의 야만성
당시 유럽 서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은 인종주의에 찌들었지만, 일단 영국인과 미국인[40] 에 대하여는 그저 전쟁에서 적으로 만난 자들일 뿐, 유태계 등 자신들이 열등 인종으로 분류한 집단들과 달리 절멸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화권에 어느정도 공통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화가 어느정도 통하다 보니 비인간적인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애를 상기시킬 수 있는 극적인 이벤트 등이 벌어지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가 완전히 달라 일선의 병사들간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했던 태평양 전장에서는 서로 야만성의 극치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41]
또한 헤이그 조약을 통한 교전권의 개념과 제네바 조약을 통한 포로, 비전투원 및 민간인의 지위에 대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서양문화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일본군의 문화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다. 패색이 확실하면 발악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교전수칙을 따라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도록 세뇌받아왔고 대화도 통하지 않으니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항복하는 척하고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들었다.[42]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지만,[43] 일본군에게 잡히면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개전 초기에는 미군에 포로로 잡히면 자신들의 가족이 본토에서 불명예자의 가족으로 멸시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전쟁 후기에는 미군도 일본군 못지 않은 잔혹성을 보이면서[44] 그러한 귀축영미의 이미지가 일본군의 머리속에 굳어져 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온갖 참상이 발생하였는데, 일본군은 정식 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해낸다던가[45]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극한 상황에서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그 잔인성은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다.''' 오죽하면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위는 동시대의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연합국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언어나 문화가 다르니 민간인들 역시 이를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로 받아들였다.[46] 그렇기에 대전 후기에 이들을 집단 자살하게 만들거나, 패배하여 똑같은 처우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식으로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일본인들[47] 과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은 인간성을 유린당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한 피해도 컸다.
더군다나 점령군인 일본군은 자신들의 점령지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아[48][49] 많은 숫자의 원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착취당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나이 90 이상의 원주민들은 JAPS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하기 바쁠 정도로 악화되었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극히 드물다. 오죽하면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으로 도왔다.[50][51]
7.4. 이성의 증발
위와 같은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도 우생학과 왜곡된 무사도정신이 군대에 퍼져있고 미군에 대한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포로로 잡히느니 미군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동귀어진하려는 집단이었고,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리가 없었던 미군들은 그런 일본군의 행태에 아연실색하여 일본군에 대해 더더욱 적개심을 키우며 잔혹해져갔다. 양 전장에서 서로를 같은 인간이 아닌 자신보다 열등한 무언가로 보고, 전술 및 전략적 목표를 위해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섬 하나 내부의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위해 서로 싸우다 보니 태평양 전역에서는 서유럽 전선에 비해 이성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특유의 잔혹성으로 인하여 부비트랩과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 위반을 매우 자주 저지르는 집단이었고, 비록 전쟁포로 생환율은 유럽전선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생활에 있어서는 훨씬 열악하다보니 미군 역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은 상정 외로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여기에 미군 소대장, 중대장 등 지휘관들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휘하 부대에 항복하거나 잡히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 명령을 내린 배경에는 '''쪽바리같은 인간 이하에게 잡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미군들의 전투의지를 더 고양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 역시 사정이 낫지 않아서 기존에 존재하던 사이비 무사도에 따라 포로로 잡히는걸 수치로 여긴다던가, 일본군 대본영의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자신들이 무너지면 본토에 있는 자신들의 가족이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여자는 강간당할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미군은 말도 통하지 않고, 비록 일본군 스스로에 의해 조장되었다고는 하나 특유의 호전성과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 해병대를 보며 마찬가지로 '''저 귀축영미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라는 공포심 하에 더더욱 잔혹하게 죽을때까지 싸웠다.
그러다보니 태평양 전쟁에서는 고대의 전쟁터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일본군은 포로를 잡아먹거나, 산 채로 해부하거나, 생체실험과 같은 행위까지 저지르고, 미군 포로에 대해 처참한 대우를 하면서 바탄 죽음의 행진등 상당수의 전쟁포로들이 끔찍하게 사망하였다. 거기다가 종종 기록으로도 발견되지만 일본군 장교들이 미군 포로들에 대한 학대 등은 그 참상이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아사하거나 아사하기 직전에 섬을 탈환한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등 태평양 전역의 부족한 보급 문제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학대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다. 거기다가 민간인을 부비트랩으로 사용하고, 미군의 의무병조차 사살하거나 부상병과 자폭시키는 등 일본군의 비이성적인 행보는 태평양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기만 하였다.
미군 역시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성을 상실하자 일본군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이 일선의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에게 만연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포로 학살이 잦았으며 이에 대한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전쟁 후반부에는 미 해병대와 미 육군의 야전 지휘부에서 포로는 필요 없다를 명령하며 일본군에 대한 '''박멸을 지시한 기록'''조차 남아있고, 이에 대해 미군 상층부가 제지시키는 노력을 기울어야 했을 정도로 빈번했던지라[52]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서로를 죽이기만 위한 전쟁으로써 아비규환이었다. 거기다가 일본군을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로 보고 있던 일선 병사들에 의해 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떼어내거나,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의 신체 부위를 절단하여 기념품으로 챙기기도 하였다.[53]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적개심이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쳤고, 그 결과 도쿄 대공습 같은 통상적인 전쟁이라면 상상도 못 할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이들이 속출하고[54] 결국 파일럿들이나 폭격병들이 공감 능력 결여 증세를 호소하며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7.5. 일본군 스스로의 문제
일본군 역시 전쟁 초기의 성공에 의한 오만과 군국주의 교육 하에 이루어진 인종주의 교육관에 의해 야만성이 높은 군대였다. 특히 식민지의 주민으로써 2등 시민 취급이라도 하였던 조선인에 비해 중일전쟁 점령지의 주적인 중국인에 대한 대우는 더욱 더 처참하여 난징 대학살 및 참수시합 등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패전색이 짙어질수록 이들의 야만성의 정도는 광기와 더불어 더더욱 심각해져갔다.
심지어 전쟁 후반부의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이 사건 때문에 1945년 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나치가 수용소에서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점령지인 하얼빈에서 731 부대를 운영하면서 중국인과 러시아인 임신부를 상대로 혹은 갓난 아기와 애 엄마를 같이 생체 실험을 하는 인면수심을 보였다.
또한 일본군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옹호하거나 부정하려는 극우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문제다.[55][56]
8. 인용구[57]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 쇼와 덴노
"1억의 일본인들[58]
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중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카미카제 징집
"우리의 근성은 대단하고, 적의 정신력은 나약하므로, 우리는 백전백승이다."[59]
― 츠지 마사노부
― 히로타 고키를 제외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 사형당하기 직전
― '''히라누마 기이치로'''
―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제독,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것 같은데?"
― '''노부히토'''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1년에서 1년 반 정도는 승산(남방작전, 싱가포르 전투)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60]
"[62]
"대일본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 '''이시와라 간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만 한다. 병기가 없어서, 탄환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63]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다."― '''무타구치 렌야'''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 '''사이온지 긴모치'''
'''"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덴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덴노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64]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
― 왕징웨이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65]
"3천년동안 한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66]
―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서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며 한 연설,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 서두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다시 돌아오겠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라는 언어는 이제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더 죽이는 겁니다!"
―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일본 놈들은 정말 정이 안 가는 놈들이야... 정말 나치와 비교될 만하군. 스테드포드 중위, 그렇지 않나?"
― 제이미 스터딜슨 (필리핀 미군정의 소령)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 '''해리 트루먼'''
"나와 함께 있었던 해병대원들은 18~22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 것임을."
―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내 진정한 바람이자 모든 인류의 소망은 이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피와 대학살을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9. 참고 동영상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NHK 라디오 임시뉴스 방송)
10. 참고 자료
각 전투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이라면 소대나 분대, 나아가 일개 기관총, 박격포반 단위까지(!) 서술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더욱이 함대 구성/군수 보급/야전건설/민사전 등 군사 행정과 전투를 전후한 배경 설명(장군들의 정치적 갈등 등)까지 대단히 꼼꼼하게 서술되어 있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는[70] 2009년경부터 꾸준히(주 2~3회) 이런 연재를 해온 터라 나이도 적지 않고 내공이 풍부한 밀덕 단골 이웃들이 달아대는 부연설명 등 많은 댓글들도 볼 거리. 한국어 웹문서 중 이 정도 퀄리티의 태평양 전쟁사 포스팅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옛 글이라도 의문이나 오류를 지적하면 바로바로 수정하거나 대답을 해준다.
- 서적 (일본군 관련 참고 서적 참조)
-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육·해군이 벌였던 미드웨이·과달카날 등 6개 작전을 분석하면서 일본군이 조직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서술
이노세 나오키 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미국과 총력전에 나설 때 그 예상 경과와 결과를 연구한 총력전 연구소의 시뮬레이션 과정과 실제 일본 정책 결정자들의 전쟁 결정 과정을 서술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어느 하급 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
- 일본 문화론의 대가로 알려진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포병부대의 초급장교로 참전했던 경험을 기록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미드웨이 해전》
- 원제 "Shattered Sword: The untold story of the battle of Midway". 미드웨이 해전의 전개 과정을 기술하면서 해전에 대해 그 동안 잘못 알려졌던 신화들을 하나하나 논파. 해군의 전쟁인 태평양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결전인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설.
우가키 마토메 저 <전초록>
- 'Fading Victory: The Diary of Admiral Matome Ugaki, 1941-1945'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다. 한동안 절판이었으나, 2008년에 다시 출간되었다.
해군반성회
- 전후에 군령부와 연합함대의 의사결정에 참여한 상급 지휘관과 함장들이 비공개 학술대회를 열었고, 녹취 기록으로 남겼다. 이름답게 각자가 이기적인 판단을 한 부분에 대해서 죽은 이와 살아남아 참석한 이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이 많다. 당사자들의 증언이어서 해군선옥론의 느낌이 나는 것은 사실이나, 전술/전략 면에서 계파간의 접근 방식이 어땠는지를 확인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11. 관련 문서
11.1. 교리
11.2. 사건사고
- 설리번 5형제
- 코브라
-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 어뢰 스캔들 : 미 해군 잠수함대와 뇌격기 비행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린 사건이다.
- 벵골 대기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