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사(당)
安敬思 / 李存孝(이존효)
? ~ 894?
1. 개요
오대십국시대 후당의 명장. 안경사는 본명이고 이존효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극용의 가자(假子:양자)였다. 민간에서는 항우에 비견되는 용맹한 장수로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말년에 모함과 시기로 위협을 느껴 주전충에게 투항했으나 나중에 결국 이극용에게 사로잡혀 거열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대주(代州) 비호현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이극용의 양자가 되었다. 기록에도 대주의 북쪽을 노략질할 때 이극용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말이 좋아서 양자이지 포로 중에서 쓸만한 아이를 입양한 것에 가깝다. 이렇게 안경사는 이존효라는 이름을 받고 이극용의 막부에서 급사가 되었다. 장성해서는 기장(騎將)으로 복무했다.
하동에서 중원으로 뻗기 위해서 주전충과 가장 자주 겨루었던 곳은 흥안령을 사이에 둔 소의군의 관할구역인 택주와 노주였다. 당시 소의군의 절도사는 맹방립이었는데 이를 물리치면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이존효였다. 이극용은 이극수를 소의군절도사로 삼았다가 그가 죽자 이극공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휘하 장수인 풍패가 이극공을 죽이고 노주를 들어 주전충에게 붙어버렸다. 이때 택주를 지키고 있던 것은 이한지였는데 이극용이 이존효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등계균이 나와 싸움을 걸자, 이존효가 창을 춤추듯 휘두르며 나와 그를 잡아 돌아갔다. 이존효의 말이 걸작이다.
주전충이 손규를 노주절도사로 삼아 다시 싸움을 걸자, 이존효도 군사를 이끌고 나서 조정군 손규와 대적하게 되었다. 이존효는 손규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고 300여 명의 병력을 계곡 안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손규가 길을 지나가게 되자, 이존효는 직접 뛰쳐나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적병 500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손규와 동행한 환관 한귀범을 사로잡아 형틀에 채우고 흰색 비단 끈으로 묶어 이극용에게 바쳤다. 이극용은 손규를 회유했으나 손규가 말을 듣지 않아 톱으로 베어 죽였다. 주전충의 장수인 갈종주, 주숭절은 절도사인 손규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변주로 달아났다.내가 여기 온 것은 우리 군대를 '''먹이기 위해서'''이니, 네놈들은 가능하면 '''살찐 자'''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라!
노주 획득에 가장 큰 공이 있었으나 이극용은 그를 배제하고 대동에서 창업할 때부터 그를 따른 공신이었던 강군립을 유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존효는 원망을 품고 며칠을 밥도 못 먹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성품이 많은 장수들과 틈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강군립과 이존신과는 상극이었다.
그는 곧 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명주자사로 옮긴다. 이극용이 조나라를 토벌하려 하자 이존효가 앞장세워 상산(常山), 임성(臨城), 원씨(元氏)를 떨어뜨렸는데, 조나라의 왕용은 그와 더불어 하북에서 가장 큰 세력이던 유주의 이광위에게 원군을 청했다. 형세가 나빠지자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이때를 틈타 이존신이 이극용에게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공격을 미루고 있다고 참소했다. 결국 압박을 견디다 못한 이존효는 조나라와 손잡고 있던 주전충에 투항해 버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번엔 왕용이 유주와 틈이 생겨 주전충을 버리고 이극용과 손을 잡은 것. 결국 조나라와 이극용의 협공을 받은 이존효는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함거에 실려 태원으로 보내져 거열형을 당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극용은 열흘 간 정무를 보지 못했다. 그 후에도 이극용은 술을 마실 때마다 이존효를 떠올리며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3. 평가
원숭이처럼 긴 팔을 가지고 있었고 활을 잘 쏘았는데 몸에 무거운 갑주를 걸치고 활집과 활을 들고 앉아서 창을 썼으며, 손으로 춤추듯 쇠로 된 채찍을 휘두르며 진영 사이를 들락날락하니 항상 말을 두 마리 준비하여 한 마리가 지치면 갈아타고 말을 달리는 것이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왕불과패, 장불과리라는 말이 있는데 (싸움 실력에 있어서) 군주는 패왕(항우)를 능가할 수 없고, 장수는 이존효를 능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4. 미디어 믹스
- 민담이나 민간 설화에서는 항우와 비견될 정도의 명장으로 묘사된다. 감녕이나 장료에 비견하기도 한다. 심지어 거열형을 당할 때에도 힘으로 버티는 바람에 실패하다가 하늘에서 선인이 '정해진 운명이니 반항하지 말라'고 해서야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 원나라 때 이존효에 대한 설화가 많았다고 한다. 희곡가인 관한경은 <<곡존효>>라는 희곡을 썼고, 무명씨의 <<존효타호>>라는 희곡도 있다.
- 잔당오대사연의 등 연의류에서도 그를 초기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많다. 1970년 홍콩 영화 <십삼태보(十三太保, The Heroic Ones, 1970)>에서도 주인공으로 나온다.http://amdb.co.kr/movie.asp?seq=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