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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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십국시대 후량의 건국자.
본명은 '주온'(朱溫). 본명이나 당나라 정부에서 하사해준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이나 모두 많이 쓰이는 한자라서 황제가 되어서는 피휘를 위해 황(晃)으로 개명했다. 보통 주전충이란 성명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명은 삼(三). 셋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태생이 본디 미천하여 가난한 농부인 주성#s-10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부친이 죽자 가족과 함게 먼 친척뻘인 유숭 밑에 몸을 의탁한다.[1]
속에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주온이었지만, 그는 늘 자신을 게으르게 여기는 주인 유숭에게 욕과 매질을 당하며 지내야만 했다.(崇以其慵惰,每加譴) 매일매일 폭언과 구타, 매질과 욕을 먹으며 주온은 분을 삼켰다. 단지 유숭의 늙은 어머니만이 이 오기가 가득찬 꼬마 아이의 머리를 직접 빗겨주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했을 뿐이다.
2.2. 청년기
하지만 주온은 하라는 농사는 안 하고 학문과 무예에 흥미를 보였다. 장성했을 때, 멸망 직전의 부패한 당 정권에 불만을 품은 황소가 대대적으로 난을 일으키자 형과 함께 참전, 그 밑에서 두각을 세웠다. 880년 황소는 파죽지세로 중앙정부군을 물리쳤고, 이에 놀란 황제 희종은 사천(촉) 지방으로 달아났다. 황소는 장안을 함락시키고, 국호를 '대제'라 정하며 제위에 오른다. 하지만 오합지졸들을 끌어모은 정권이 오래 갈 수는 없는 일. 곧 당 왕조에 충성하는 사타족[2] 출신 독안룡 이극용이 군대를 이끌고와 장안을 공격한다.
더욱이 처음부터 황소는 인망이 있었던 주온을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히 주온도 이를 알아채고 있었다. 이무렵 촉에 있던 당나라 장군 왕중영이 주온에게 밀사를 파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소 교활하고 야심이 있던 주온은 왕중영과 내통하게 되었다. 그 후 주온은 장안에서 황소를 배신하고 반군을 격퇴하여 몰아내었다. 이 전공으로 주온에게는 왕중영은 물론 당나라로부터 사례가 내려졌다. 그리고 황소는 장안을 버리고 도주한 후 산동의 태산 부근에서 자결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주온을 양왕(梁王)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하중행영부초토사의 지위와 함께, '''당나라에게 충성하라'''는 의미가 있는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후 그는 당의 장수로서 주전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3. 장년기
2.3.1. 당을 멸하다
황소까지 무찌르고 두려울 게 없는 데다가, 이미 오늘 내일하는 유약한 왕조를 보며 주전충은 하라는 충성은 안 하고 황제 희종이 하사한 이름인 '전충(全忠)'을 멋대로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고 해석해 버린다.[3] 당시 환관들이 황제 소종을 몰아내고, 그의 장남 이유(李由)를 황제로 세우자 껀수를 잡은 주전충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재상 최윤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환관들을 학살하고 핍박하는 등 온갖 간행을 저지른다.
주전충은 봉상에서 72명의 환관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 잡듯이 장안 등에서 환관을 잡아내 90여 명의 목숨마저 빼앗는다. 이후 황제를 만나 환관 몰살 허락을 공식적으로 얻어낸 주전충은 그날 밤으로 제오가범(第五可范) 등 수백여 명의 환관을 내시성(內侍省)에 몰아 넣었다. 환관들은 저마다 밖으로 울려퍼질 정도로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본래 잔악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주전충은 그런 환관들의 단말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모두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바깥으로 나간 환관들도 잡아 들여 아예 씨를 말려버렸으며, 단지 어리거나 쇠약한 환관 30여 명만 살려두어 청소를 하게 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부러 순박한 촌사람들만 50여 명을 뽑아 새로 환관으로 임명하였다.
지난 100여 년간 당나라 조정을 어둠 속에서 지배한 환관들은 이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조정에서 사라져버렸다. 결국 환관은 송나라 때까지 세력이 커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종을 협박하여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강요한 후, 장안을 무참히 파괴하는 짓을 저질렀다. 또한 장안 궁궐에서 뜯어온 자재들을 이용해서 낙양에 다시 궁궐을 세우게 했다.
마음대로 구체제를 파괴하고 살육하던 주전충의 행보는 여러 절도사들의 어그로를 끌기 충분했고, 당나라 소종 역시 이를 이용하여 절도사에게 구원을 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초에 소종을 이용해 중국 역사상의 유례가 깊은 '체면 차리기'인 선양을 받으려고 했던 주전충은 소종이 예상과는 다르게 시끄럽게 굴자 생각을 고쳤다. 그의 결론은 간단했는데, 바로 자객을 보내 소종의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것. 결국 자객에게 쫓긴 소종은 도망치다가 궁궐 기둥 아래서 그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만다. 환관과 귀족을 죽여 없앴을 때처럼, 영웅인 태종 이세민의 후예도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게 쓰러져 버린 것. 소종을 처리한 주전충은 하루 빨리 황제가 되기 위해 소종 소생의 자식들까지 싸그리 몰살했고[4] 소종의 장례를 관장하면서 거짓으로 통곡하는 척 했다.[5] 그 후 소종의 9남 당애종(또는 당경종)을 옹립했다.
이제 남은 것은 문벌귀족들이었다. 귀족들을 쳐내는 것은 환관들을 쳐내는 일보다도 오히려 간단했다. 이 시기에는 세력을 가진 무인들도, 환관들도 모두 양아들을 대거 받아들여 자신의 사람으로 삼고 세력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난세에도 문벌귀족들은 이러한 '가자' 를 만들지 않았다. 한고조를 비웃었던 그 고귀한 혈통에, 어디에서 온지도 모를 가자 따위를,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대거 받아들인다면 그 문벌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이때 당의 명사 소리를 듣던 고관 38명을 낙양 교외의 백마역(白馬驛)에서 황하에 수장시킨 사건은 당의 몰락을 상징한다. 주전충의 참모였던 이진(李振)의 건의에 따른 것인데, 이진은 앞서 진사(進士) 시험에 몇 번이나 낙방했던 경력 탓에 진사 출신이나 문벌 귀족으로써 당의 고급 관료가 된 자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차여서 주전충에게 "저것들은 더러운 주제에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잘난체하는 놈들인데, 이번 기회에 황하에 던져서 아주 탁류(濁流)로 만들어 버리시죠?"[6] 라고 부추겼고, 주전충은 껄껄 웃으며 이를 허락했다.
환관도, 귀족들도, 지난 수백여 년간을 버틴 이 존재들은 이 파격적인 행보를 자랑하는 폭군 앞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사라졌다. 구체제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주전충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귀족들의 족벌 따위는 그저 '재미삼아' 황하에 내던져 볼만한 구경거리를 만드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 의심 많고 잔혹하며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악랄한 폭군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당제국을 멸망시키기엔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던 것. 조정의 귀족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린 주전충은 어느날 큰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뇌까렸다.
그러나 주전충을 본래 따르던 무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전충 역시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나무라지 않았지만, 눈치를 살피던 유생들은 재빨리 주전충의 비위를 맞추려 과장스럽게 동의했다.이 버드나무로는 의당 차곡(車轂: 수레바퀴의 바퀴통)을 만들어야 한다.(此木宜為車轂)
그러자 갑자기 주전충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렇습니다. 의당 이 나무로는 차곡을 만들어야 합니다!(宜為車轂)
그렇게 말한 주전충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입만 산 서생들이란 작자들이 알지도 못하며 아첨하여 지껄여대는 소리라는 게 바로 이런 것들이다! 망할 놈들, 차곡은 반드시 느릅나무를 끼워서 사용해야 하는데, 어찌 버드나무로 그것을 만들 수 있겠느냐?(書生輩好順口玩人,皆此類也!車轂須用夾榆,柳木豈可為之!)
주전충의 말에 그의 옆에 있던 수십여 명의 병사들은 그 즉시 '버드나무로 차곡을 만들어야 한다.' 던 유생들의 머리채를 끌고 가 때려 죽였다.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냐!(尚何待!)
머지않아 주전충은 마지막 황제 애종으로부터 선양이라는 미명하에 기어코 제위를 찬탈했고, 애제를 조주[7] 로 보냈다가 이듬해 사람을 보내 독살하였다.[8]
2.3.2. 이극용을 몰아내다
한편 이 와중에 주전충은 황소에 대항해 함께 싸웠던 이극용과 당 조정 내부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원래 이극용은 술자리에서 주전충에게 치욕을 주었고, 이에 분노한 주전충이 병력을 이끌고 하동군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기에 둘의 대립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극용은 전쟁에는 강했으나 정략에는 주전충에게 뒤졌고, 또한 그의 갈까마귀군도 그 용맹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난폭함으로 변했기 때문에 조정에서의 평판은 좋지 못했다. 결국 주전충은 이 싸움에서 승리해 이극용을 쫓아버린다.
그러나 그의 세력 범위는 화북 일부에 한정되었고, 각지에는 신-후한, 후한-삼국 교체기 때와 마찬가지로 절도사라는 명목하에 군벌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전충의 후량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주전충에 의해 패배한 이극용은 변경에서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편, 908년 1월에 이극용은 주전충 타도를 아들 이존욱에게 부탁하고 병사했다. 향년 53세였다. 이극용은 죽을 때 존욱에게 화살 3개를 쥐어주며
라고 말했다. 훗날 이존욱은 내분이 일어난 유인공을 멸망시키고 거란을 정벌했으며 골육상잔으로 막장 테크를 타고 있던 후량마저 멸망시켜 아버지의 유언을 모두 지켰다."유인공[9]
부자가 나를 배신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 또한 나와의 맹약을 배신했다. 주전충은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3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번째는 거란에게, 3번째는 주전충을 멸망시킬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2.4. 황제 즉위, 하지만 비참한 최후
황제가 된 주전충은 당의 멸망이 부패한 조정 대신에게 있다고 판단하면서 과거 당의 고관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모두 죽인 뒤 황하에 그 시체들을 던져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버렸다. 더더욱이 당현종처럼 자신의 양자의 아내, 즉 며느리와 간통하는 등 여러모로 막장#s1.2이었다.
한편 이존욱은 아버지 이극용의 원한을 가슴깊이 새겨둔 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는데, 마침 주전충은 향락을 즐기던 와중 정적의 병사 소식을 듣고 '앗싸 좋쿠나 그놈 땅도 내가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대군을 보냈다가 결국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10]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며느리와의 간통도 마다하고 1년간 군사 훈련에 힘쓴 뒤 자기가 직접 전쟁에 나갔으나 역시 참패하고 화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다.
한편 주전충은 친자 외에도 많은 양자를 두었는데 그 중 주우문을 총애했다. 그래서 주우문을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는데 주전충과 열심히 간통하던 며느리 중의 하나가 주우문의 처 왕씨였기 때문이었다. 912년 연로한 주전충은 병이 들어 제위를 양자인 주우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때 불만을 품은 친아들이자 셋째 아들 영왕 주우규(877년 ~ 913년)가 침실에 몰래 들어가 주전충을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결국 일생을 비겁한 꾀와 막장으로 살았던 주전충도 친아들 손에 처참히 목숨을 잃었으며 이후 주우규는 사람을 보내 주우문의 목숨도 끊어버렸다.
2.5. 사후
하지만 주우규 또한 아버지와 똑같은 황음을 일삼다가 겨우 1년 만에 오래 호사를 누리지 못하고, 결국 넷째 아우 균왕 주우정(881년 ~ 923년)에게 살해당했다. 말제 주우정은 사람 됨됨이가 공손하고 검약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능했으며 형제들이 역모를 일으키자 그 후부터 황족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끼리의 권력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2년 후, 또다시 형제들이 역모를 일으켰는데 915년 10월, 막 잠자리에 들던 주우정은 동생이 휘두른 칼에 베일 뻔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이후 그는 매우 포악해져서 남은 형제들을 다 죽이고, 또 자기 말을 안 듣는 사람들도 학살하여 피는 어디 안 간다는 걸 보여주었다.
후량은 형제들의 황권 쟁탈로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한 연왕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해 후당을 세웠다. 이존욱은 후량을 점점 잠식해 나가다가 결국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게 된다. 개봉이 함락되자 주우정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목을 찔러 자결했으며, 이로써 후량은 3대 16년 만에 멸망했다.
일찍이 주전충은 이존욱에게 대패하고 홧병이 나서 와병 중에 ''''내 자식들 중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을 당해 낼 놈이 하나도 없다. 머지 않아 나는 죽은 후에도 묻힐 무덤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실제로 적중하여, 이존욱은 주씨 황족들을 모두 도륙냈으며 주전충 또한 이존욱의 명령으로 부관참시에 쇄골표풍[11] 까지 당했다.
하지만 후량의 멸망은 훗날 북송에 의해 종식될 '''또다른 혼란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평가
전술한 바와 같이 주전충 집안은 이극용 집안에게 처절하게 관광탔지만 이상하게 인지도 측면에서는 주전충이 이극용이나 이존욱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주전충이 비록 제대로 황제 노릇을 못하긴 했지만 당의 숨통을 직접 끊은 당사자라는 점이 더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역사 기술 측면에서 당의 멸망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반드시 주전충이 언급되어야 하니까.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대당제국사』(국내에서는 중국중세사로 출간)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주전충은 개인적인 인성은 영 좋지 않았고 장기적인 왕조를 세우진 못했으나 당말의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일례로 고중세 1,000여 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낙양, 장안이 황폐화되자 개봉으로 천도하는데 이 천도는 중국의 중심이 중원 지역에서 중국 동부로 이동하는 대격변의 시작이 된다. 중국의 지리적인 중심 뿐 아니라 인재풀의 중심도 옮겨버린 인물이다. 황하에 문벌귀족을 대량 투신시킨 일은 굉장히 잔인했지만 그 덕분에 동한 시대부터 1,0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문벌귀족들의 시대는 영원히 다시 오지 않게 되었다. 송대의 사대부, 명 청대의 신사니 향신이니 하는 계층쯤 되면 당연히 어느 정도의 세습된 부나 명예가 있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가문 하나만 가지고 과거에 급제하고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시대는 당나라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권력의 획득 과정이 비열하고 잔인하며 사생활도 막장일로를 달렸으나 나름 능력도 있었고, 마냥 새디스트적인 성격은 또 아니어서 다른 폭군들에 비하면 일반 백성들의 삶을 생지옥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12] 기존 질서의 파괴자이며 피와 눈물도 없는 권력 투쟁가의 측면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애민의식이 있는 국가의 지도자의 면모, 다른 한편으로는 호구같이 당하기만 하는 등 상당히 다채로운 면모를 보이는 군벌이자 군주였다. 허나 주전충은 구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있었지만 당말의 전란을 수습하여 신질서를 창조할 능력은 부족했기에 그는 비참히 최후를 맞고 후량은 단명으로 끝났으며 결국 주전충은 새로운 난세를 열어제낀 찬탈자이자 간웅으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3.1. 애민의식
부하들과 사람들을 마구 죽이던 잔혹무도한 주전충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후대의 같은 성씨의 군주처럼 간혹 백성들에게 동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시장에서 쌀을 약탈하던 병사들을 처벌하거나, 황폐화된 지역을 위문해서 생산력을 올리려는 노력을 하며 의외의 애민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906년의 어느날, 주전충은 유주의 유인공 세력의 영역 중 하나인 창주를 포위하였다. 창주를 지키고 있던 것은 유인공의 아들 유수문으로, 아버지 유인공과 또다른 아들 유수광은 포악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었지만 유수문은 그들과 기질적으로 다른 되바라진 사내였다. 유수문은 아버지 유인공이 겁이 나 구원하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치열하게 버티며 싸웠다. 주전충은 창주를 봉쇄하여 새와 쥐조차도 왕래할 수 없게 만들었기에 성 안에서는 식량이 떨어졌고,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흙을 먹으면서 버텨야 했을 정도였다. 주전충은 유수문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유수문은 성에 올라서서 당당하게 대답했다.지원병은 오지 못한다. 어찌 항복하지 않느냐? (援兵勢不相及,何不早降!)
유수문의 당당한 변론 때문일까, 혹 유인공의 아들이 그토록 당당한 것을 보고 자신의 무능한 자식들에 대해서 생각이 났을까? 주전충은 유수문의 말을 듣자 부끄럽게 여기고 공세를 늦추었다. 이윽고 창주 공격을 중단한 주전충은 귀환하면서 산처럼 쌓아 놓고 배로 가득 실어왔던 군량미를 가져가기 힘들어지자,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불을 질렀다. 그때, 적군이었던 유수문은 귀환하는 주전충에게 서신을 보내 요청했다.저와 유주는 부자관계입니다. 양왕(주전충)께서는 바야흐로 대의를 가지고 천하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고 있는데, 만약 아들에게 부친을 배반하고 오라고 한다면 장차 그를 어찌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僕於幽州,父子也。梁王方以大義服天下,若子叛父而來,將安用之!)
유수문은 적군이었던 주전충에게 식량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전충이 이를 도와줄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주의 백성들이 모두 죽던지 혹은 유랑민이 된다고 해서 주전충이 받을 손해는 이미 더 커지기도 힘든 악명 외에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유인공의 세력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왕께서는 그저 백성이라는 이유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포위망을 풀고 떠나셨으니 이는 왕의 은혜입니다. 성 안에 수만의 사람들은 수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그것들을 불살라서 연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을 가라앉게 하여 진흙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바라고 빌건대 그 나머지로 저들을 구원케 해 주십시오." (王以百姓之故,赦僕之罪,解圍而去,王之惠也。城中數萬口,不食數月矣。與其焚之為煙,沉之為泥,願乞其餘以救之)
그러나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유수문의 말을 들은 주전충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아직 없애지 않은 식량들을 모아 여러 곳간에 남겨 창주로 보내었다. 창주의 백성들은 이 곡식을 통해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저런 예가 아니더라도 다른 소군벌들을 정벌하러 가서 항복을 하던 말던 용서 없이 응징할 것 같이 하다가도 백성이니 인의니를 내세우면서 데꿀멍하는 경우는 그냥 웃으면서 받아주는 예가 종종 있었던 듯 하다.[13] 이러니 뭔가 잔인하고 음탕한 일면으로만 평가하기는 좀 어려운 인물.
4. 여담
- 조선 중종때 채수가 쓴 소설인 『설공찬전』에 이름이 언급된다. 하지만 이름이 언급되는 부분이 당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놔서 결국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설공찬전 항목으로.
5. 둘러보기(계보)
[1] 오대십국 중 후한을 세운 유지원의 동생이자 후한이 망한 뒤 북한(北漢)을 세운 유숭과는 동명이인이다.[2] 투르크계 민족이라고 한다. 돌궐족의 일파.[3] 전충(全忠)을 세로로 써놓고 보면 딱 人王中心이다.[4] 1남부터 10남까지를 죽였다. 단 9남이던 애종은 제외.[5] 주전충은 또 소종을 시해한 이후 자신이 보낸 자객을 제거해버렸다. 사실상 토사구팽.[6] 使為濁流.. 탁류를 위하게 하십시오 내지는 탁류를 도모하게 하십시오 라는 식으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이걸 의역해서 '자칭 청류라는 놈들을 이번기회에 황하의 더러운 물에 던져서 그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해 보시지요'라고 번역한 예도 있다.[7] 현재 하남성 하택[8] 일명 당 18릉으로 불리는 당나라 역대 황릉은 장안 근교에 있다. 그러나 낙양으로 강제 천도 후에 시해당한 소종은 낙양 인근에 묻혔고 독살당한 애종은 황하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소종의 무덤인 화릉은 낙양의 개발과 무자비한 대량 도굴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고 애제의 온릉은 황하 범람으로 소실되고 말았다.[9] 유인공은 원래 노주(盧州) 절도사였으며 연왕을 자칭했다.[10] 이때 패배한 원인이 비수대전 때와 다소 비슷하다. 정확히는 이존욱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대군이 와서 발라버린다고 하자 주전충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가 나중에 후회한 것.[11] 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흩날리는 형벌[12] 주전충을 위해 변명을 해 주자면 주전충의 잔인함은 어느정도 일관성이 있기는 했다. 주전충이 굉장히 잔인할 정도로 제거한 세력은 당나라 황실과 당시의 환관, 그리고 문벌귀족이나 유학자들이었는데 보면 알겠지만 당나라 조정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적대하던 다른 지방의 절도사 세력들이나 자신의 부하들, 혹은 일반 백성들에게 그렇게 잔인한 면모를 보인 일은 많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기존의 장안을 중심으로 한 당 황실의 질서나 분위기 자체를 극혐했던 사람이었을 듯도 하다.[13] 주전충이 왕용이 이극용과 통교를 하였다는 이유로 토벌하니, 왕용이 두려워서 판관 주식을 보내 화친을 구하였다. 주전충이 화를 끝까지 내며 주식에게 말하기를, “내가 누차 편지를 보내어 왕공에게 당부하였음에도 끝내 듣지 않았다. 지금은 군사가 이미 여기에 도착하였으니 기어코 그냥 놓아둘 수는 없다.”라고 하니, 주식이 말하기를, “진주가 태원과 아주 가까워서 침략에 시달리는데 사방의 이웃이 각자 자기들을 보호하느라 서로 구원하는 자가 없으니, 왕공이 그들과 연화를 한 것은 곧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명공께서 과연 남을 위하여 해악을 제거한다면 천하에서 누가 명령을 듣지 않겠으며, 어찌 진주뿐이겠습니까? 단지 만약 위무만을 끝까지 부린다면 진주가 비록 작기는 하나 성이 견고하고 먹을 것이 충분해서 명공께서 비록 10만의 군중이 있더라도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왕씨가 5대에 걸쳐 군기를 잡으면서 그때마다 충효를 숭상해서 사람마다 목숨을 바치고자 합니다. 어떻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전충이 웃으며 주식의 옷소매를 잡고 장막 안으로 맞아들여 말하기를, “공과 농담을 한 것이오.”라고 하고, 이에 사자를 보내어 왕용에게 들어가 보게 하니, 왕용이 그의 아들 절도부사(절도부사) 왕소조(왕소조) 및 대장(대장)의 자제들을 볼모로 삼게 하였다. 치평요람 권95 중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