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스탈리
재위 1094년 12월 29일 ~ 1101년 12월 12일
생몰 1074년 9월 16일 ~ 1101년 12월 12일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9대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아들로, 형들이 있었음에도 당시 실권자였던 바드르 알 자말리의 사위인 이유로 군부에 의해 추대되었다. 후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곧은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다만 치세 내내 실권은 바드르의 아들 알 아흐달 샤한샤가 쥐고 있었고 이에 알 무스탈리는 종교 활동, 그 중에서도 다와 (선교)에 열중하여 그의 치세에 이스마일파 포교는 활기를 띠었다. 특히 예멘 지방의 술라이히 왕조와의 교류가 많았다. 비교적 어리다는 이유로 칼리파로 옹립된 그는 27세로 요절하였고 5세 아들 알 아미르가 계승한다. 이는 후기 파티마 칼리파들의 특징이 된다.
2. 치세
바드르의 딸 시트 알 물크와의 결혼은 알 무스탄시르 사망 직전에 치러졌다. 무스탈리파에 의하면 결혼식 연회에서 알 무스탄시르가 아흐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거나 알 무스탄시르가 임종 시에 누이에게 아흐마드의 후계자 지목을 유언하였다고도 하지만 이는 정당화를 위해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알 무스탈리의 즉위 직후 와지르 알 아흐달은 니자르, 압둘라, 이스마일 등 그의 형들을 왕궁으로 소환해 신임 칼리파에 복종을 표하도록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각각 자신이 부왕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며 거부하였다. 예상치 못한 반발에 알 아흐달은 당황하였고 그 틈에 형제들은 왕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압둘라와 이스마일은 인근 모스크로, 큰 형 니자르는 카이로를 빠져나갔다.
2.1. 니자르의 반란 (1095년)
그외에도 카이로의 최고 다이[1] 바라카트가 압둘라를 칼리파 '알 무와파크'로 선포하는 등 혼선이 이어졌다. 알 아흐달은 우선 바라카트를 체포하였고[2] 압둘라와 이스마일은 연금되었다가 결국 알 무스탈리를 승인하였다. 이후 알 아흐달은 정부 관료들을 모아 의회를 열었고 알 무스탈리는 별 이견 없이 이맘-칼리파로 선포되었다. 한편 카이로를 빠져나간 니자르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현지 총독(나스르 앗 다울라 아프타킨), 카디 및 여론의 지지를 받아 칼리파 알 무스타파 리 딘 알라로 칭하였다. 2월, 알 아흐달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으나 패하였고 오히려 니자르의 군대가 반격에 나서 카이로 외곽을 습격하였다. 몇달간 군대를 정비하고 아랍 부족들에 뇌물과 선물을 주어 동맹을 맺은 알 아흐달은 마침내 니자르를 격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였다.
몇달 간 이어진 포위 끝에 1095년 11월, 니자르의 심복이었던 베르베르인 이븐 마살이 남은 보물을 챙겨 도시를 탈출하였고 이에 병사들의 급료로 줄 여력이 없어진 니자르는 안전 보장 (아만)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카이로로 연행된 알렉산드리아 총독 아프타킨은 처형되었고 니자르는 종신 연금에 처해졌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서아시아 일대의 이스마일파는 이로써 분열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예멘 등 서부 이슬람권에는 칼리파 알 무스탈리를 지지하는 무스탈리파가 자리잡았고 이란, 이라크 등 동부 이슬람권은 니자르를 정통 이맘으로 인정하는 니자리파가 득세하였던 것이다. 후자는 알라무트의 하산 에 사바흐 하에 통합되어 아사신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그의 후손들이 이맘이 된다. 한편 후세인, 무함마드, 이스마일, 타히르 등의 다른 왕자들도 마그레브로 망명해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니자르의 후손들은 1162년까지 3대에 걸쳐 파티마 조의 불온 세력으로 남았다.
2.2. 십자군의 당도
실권자 알 아흐달은 뛰어난 행정가였고 부친에 이어 안정적으로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한편 말리크샤 사후 시리아는 혼란에 빠졌고 1096년 아파메아가 파티마 조에 복속해왔다. 비록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 대항하여 알레포의 리드완과의 동맹 체결은 실패하였지만 알 아흐달은 티레를 수복하였다. (1097년) 그리고 십자군이 초래한 혼란을 틈타 1098년 8월엔 한달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되찾는데 성공, 약 30년만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대한 파티마 조의 지배를 회복한다. 동시에 알 아흐달은 안티오크에 당도한 십자군이 대셀주크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절되었고, 1년도 안되어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리며 팔레스타인의 패권을 앗아갔다.
십자군을 단순히 동로마측 용병 집단으로만 생각하던 알 아흐달은 당황하여 예루살렘에 원군을 파견했으나 1099년 8월 아스칼론 전투에서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십자군의 기습에 대패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의 존립이 확실시 되었다. 패전 후 알 아흐달은 혼비백산하여 아스칼론도 포기하고 이집트로 도주하였는데 십자군이 내분으로 철수하자 그곳을 요새화 하고 대십자군 요새로 삼았다. 그러던 1101년 9월 베이루트 총독 사드 앗 다울라 휘하의 파티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하였으나 1차 라말라 전투에서 격전 끝에 재차 패하였다. 한편 십자군을 피해 많은 난민들이 시리아에서 몰려왔는데, 1099-1100년 이집트에 흉작이 들어 정부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3. 죽음
십자군이 자리를 잡아가던 1101년 12월 알 무스탈리는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5세 아들 알 아미르가 계승하였고 알 아흐달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20여년 후 하산 에 사바흐의 아사신은 알 아흐달과 알 아미르를 차례대로 암살하며 니자르에 대한 복수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