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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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알렉시오스 4세(Αλέξιος Δ')
'''휘'''
알렉시오스 앙겔로스(Αλέξιος Άγγελος)
'''생몰년도'''
1182년 ~ 1204년 2월 8일
'''재위기간'''
1203년 8월 1일 ~ 1204년 1월 28일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생애
2.2. 빚쟁이 황제
2.3. 파멸


1. 소개


'''동로마 제국판 회안대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십자군에게 자신이 속한 제국인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원흉.'''
'''이사키오스 2세의 복수'''를 위해 백부인 '''알렉시오스 3세'''를 타도하고, 자신의 제국을 키우고자 했으나 '''외세의 힘'''이라는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어, 제국의 양날의 검이 된 역사적 인물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생애


이사키오스 2세의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황이 황제였던 시절 후계자였으나, 1195년 4월 8일 백부인 알렉시오스 3세가 아버지를 폐위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201년 청년이 된 젊은 알렉시오스는 누이 이리니의 재혼 상대이던 자형 슈바벤의 필립을 찾아가게 된다. 그래서 젊은 알렉시오스는 백부인 알렉시오스 3세의 찬탈에 복수하고 아버지인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키며 자신도 황제자리를 백부로부터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하려는 큰 꿈을 꾸려고 한다.
1203년 7월 17일 알렉시오스는 십자군(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연합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백부인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날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부황이자 장님이 된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키고 얼마 안가서 1203년 8월 1일에 자신은 알렉시오스 4세로 즉위를 하게 된다.[1]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직후 문제가 터지게 되는데.....

2.2. 빚쟁이 황제


알렉시오스는 당초 십자군을 찾아가 자신과 아버지 이사키오스를 복위시키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1. 십자군이 지고 있던 빚 탕감과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2. 이후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만과 기사 500여명을 파견한다.

3.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 통합시킨다.

이제 십자군이 아버지와 자신을 복위시켜줬으니, 그는 마땅히 약속을 지켜야 했다. 문제는 정작 이 세 가지 모두 준수하는게 불가능하다는데 있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어서 20만 마르크를 당장 마련할 길이 없었고 불가리아와의 전쟁과 오랜 내전으로 제국군은 사실상 궤멸되어서 병사 1만 명, 기사 500명을 파견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간의 대립은 수백년 간 이어진 해묵은 문제인데 하루아침에 동방 정교회더러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고 통합하라는 것은 제국의 정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알렉시오스는 일단 새로 세금을 부과하고 금을 징발하여 20만 마르크를 어떻게든 마련해보려 했다. 백성들은 황제가 빚을 갚으려고 특별세를 거두는 데 불만을 터트렸고 주교들은 그가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금까지 거두어 녹이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황제가 자신들을 교황의 산하로 복속시키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자, 정교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알렉시오스의 인기는 점점 추락했고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간의 감정 대립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밤, 십자군 병사들 몇명이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성 이리니 성당 뒤편의 사라센 지구에 있는 조그만 모스크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이후 48시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화재에 휩싸였다. 마침 알렉시오스 3세를 체포하러 출격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알렉시오스 4세는 폐허로 변한 수도에 경악했다. 백성들은 이젠 황제에게 살의에 가까운 적의를 품었고 상황은 극한에 달해 있었다. 며칠 뒤 십자군 세 명과 베네치아인 세 명으로 구성된 십자군 대표단이 황제에게 와서 약속한 돈을 주지 않는것을 지적하고는 빚진 돈을 즉각 내놓으라고 따졌다.[2] 황제는 속수무책이었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그들을 달랠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표단이 황궁에서 떠났을때 성난 군중으로부터 폭행을 당할 뻔하면서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간의 감정 대립은 폭발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2.3. 파멸


1204년 1월 25일, 원로원 의원, 성직자, 일반 백성들이 하기아 소피아에 모여 알렉시오스를 폐위하고 후임자를 선출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사흘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니콜라오스 카나보스라는 인물을 선출하려 했지만, 니콜라오스는 고사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알렉시오스 두카스[3]는 어느 날 한밤 중에 황제의 침실로 가서 황제를 깨우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렸다. 그리고는 유일한 탈출구라면서 황제의 몸을 긴 외투로 감싼 뒤 옆문으로 황궁을 나와 동료 공모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어리석게도 그 말을 믿고 따라갔던 알렉시오스 4세는 붙잡혀서 족쇄로 손발이 묶인 후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는 거기서 두 차례 독살 시도를 넘겼으나 결국 활줄로 교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의 눈먼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도 죽었다. 그 후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5세로 즉위하지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면서 폐위되었다.
[1] 이를 조선의 초기로 비유를 한다면 알렉시오스 4세가 부황인 이사키오스 2세를 즉위시키고, 얼마 뒤에는 알렉시오스 4세가 즉위한 뒤 이사키오스 2세를 태상왕으로 옹립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포지션을 본다면 이사키오스 2세를 태상왕, 알렉시오스 4세가 왕으로 비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사키오스 2세는 장님이므로 알렉시오스 4세가 실권적인 황제로 볼 수 있다.[2] 당시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한 돈을 절반밖에 주지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십자군 측이 약속한 절반을 달라고 했던 것.[3] 당시 프로토베스타리우스(protovestarius)라는 직책을 맡아서 황제의 처소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