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안대군

 


'''회안공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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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왕자'''
'''회안공
懷安公'''

'''군호'''
회안공(懷安公)
'''시호'''
양희(良僖)
'''본관'''
전주(全州)
'''이름'''
방간(芳幹)
''''''
망우당(忘牛堂)
'''부왕'''
조선 태조
'''모후'''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부인'''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密陽 黃氏)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金浦 琴氏)
'''자녀'''
4남 3녀
'''묘소'''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생몰
기간
'''
'''음력'''
1364년 7월 2일 ~ 1421년 3월 9일
'''양력'''
1364년 ~ 1421년 4월 10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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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4남이고 동생은 조선의 3대 국왕인 이방원이며, 형은 2대 국왕인 정종 이방과이다. 박포가 꼬드겨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귀양을 갔다.

2. 생애


민선의 딸인 민씨와 혼인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조를 건국하고 회안공(懷安公)에 책봉되었다. 이후 1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과 함께 이복동생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중신들을 없애버렸다.
동생 이방원을 지지해 권력을 얻었으나 1400년 박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군사를 모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나름대로 명분 및 지지를 얻을 의도로 당시 조선 2대 임금이던 형 정종 이방과와 이방원을 증오하던 상왕인 아버지 이성계에게 각각 상황을 알렸는데 대략 내용이 이러했다.

(정종에게) 형님, 방원이가 절 죽이려들어서 제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켰으니 놀라지 마십시오.

(태조에게) 아버지, 방원이가 절 죽이려들어서 이대로 당할 수 없어 반격하겠습니다.

정종실록 2년 1월 28일 실록에 따르면 두 사람이 한 말은 대략 이렇다.

정종: (크게 노하며) 네가 헛소리에 홀려서 형제를 해치고자 하니,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 군사를 해산하고 혼자서 대궐로 오면 내가 보호해 주마.

태조: 네가 정안공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위대한 위인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누?

결국은 실패하고 거짓 밀고를 보낸 박포는 사형되었다. 귀양을 간 이방간은 처음에는 황해도 토산군으로 귀양을 갔으며, 이후 안산, 익산, 순천, 전주 등으로 귀양지를 옮겨다녔고 최종적으로 본관인 전주에 정착한다.
사실 살려준 것에는 이방원의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후일담에서 언급하지만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 형제까지 또 죽였다간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이방원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큰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몰고 회안대군의 목숨을 살려준 것. 이성계와 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 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
전적이 있었기에 조정에서는 귀양을 간 이후에도 이방간을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고 태종에게 끊임없이 이방간을 죽일 것을 간언하였으나 태종은 그때마다 물리쳤다. 그런 태종이 1416년 이방간의 공신 녹권과 직첩을 회수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방간이 태조의 사위인 심종(?~1418)[1], 그러니까 이방간 본인과 태종의 매제와 은밀히 거사를 도모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413년 이방간이 심종에게 개인적으로 생강을 선물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심종이 태종과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것을 두고 3년 뒤에 문제삼고 나선 것. 조정에서 처벌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공신 녹권과 직첩을 회수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었으며 마찬가지로 심종 역시 녹권과 직첩을 회수당하고 토산군으로 유배를 가서 1418년 그 곳에서 죽었다. 실록에는 이방간과 심종이 사통(私通)하였다는 표현을 쓰며 죄줄 것을 청했지만, 생강을 주고받았다는 것 외에는 이방간의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서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척끼리 주고 받은 선물을 두고 트집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태종은 이방간의 녹권과 직첩을 거두면서 하도 조정에서 죄를 주라고 여러 번 떠들어서 어쩔 수 없이 특권을 거둘 뿐 편하게 살라며 따로 언질을 주었으며, 심종 역시 유배지를 스스로 고를 수 있게 하여 토산으로 보내주었다.
이후 전주에서 20년 넘게 더 살다가 태종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 와병 중에 태종의 명에 의해 홍주(현 충남 홍성군)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로는 양희(良僖)가 내려졌다. 묘지는 전라북도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 자락에 위치해있다. 완주군 소양면으로 가는 길목에 표지판이 걸려 있다.
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의 가족들을 염탐까지 해가며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도운 맹종은 당연히 아버지를 따라 귀양지에서 지냈으나 세종대왕 시기에 두고두고 후환이 될 수 있다고 본 세종대왕에 의해 스스로 자살한다. 하지만 맹종의 시체를 부관참시하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거부했으며, 맹종의 유족들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아서 혈통이 끊기는 일은 면했다. 하지만 후손들은 형식적으로만 왕족 대우를 받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실질적으로는 왕족 대우를 받지 못했다. 면세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이때 조정에서는 "노역의 의무를 행하는 게 맞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회안대군 후손은 자기들끼리만 왕족이라고 주장한 셈이 되어버렸다. 선조 말기 때부터 꾸준히 복권을 주장하였으나, 정식으로 왕족의 지위를 되찾은 건 숙종 때였다.[2]

3. 평가


사실 난을 일으킨 건, 이방간이 스스로 덫으로 뛰어든거나 마찬가지다. 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이방원이 내세운 명분이 "어리고 공훈이 없는 막내가 형들을 제치고 세자 자리를 가로채서 바로잡는다."였다. 그래서 이방원은 막내인 이방석과, 우유부단하게 가만히 있던 이방번까지 몰아내서 없앴다. 그러나 이방원의 위에는 이방과 외에도 이방의와 이방간이란 두 형이 있어서,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 싶어도 일단 참아야했다. 왕위에 대놓고 눈독 들이면, 이방의와 이방간이 "지가 형들을 제치고 왕위를 가로채면 안 된다고 말한 건 잊어버렸냐?"고 트집잡았을 때 명분상 반박도 못하고 궁지에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방의는 왕위에 욕심이 없었지만, 이방간은 왕위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간이 난을 일으켰으니, 이방원 입장에서는 속으로 절이라도 하고 싶었을 듯. 만약 이방간이 난을 일으키지 않아 이방원의 형이란 위치에 머물고 있었다면,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도 굉장히 골치아픈 사안이 될 수 있었으므로,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을 도와준 일이다.[3][4] 이 때문에 소수 주장으로 '이방원이 판을 깔고 이방간이 난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건 아닐까?'라는 추측도 나온다.
그나마 아버지 이성계와 형 이방과가 자기 편이라도 들어줬다면 모를까 오히려 이방간을 꾸짖었다. 이방원을 증오하기로는 당시 누구에도 지지 않던 이성계가 위에 적힌 말을 할 만큼 이성계의 눈에는 이방간의 난은 아둔하고 욕심만 가득한 꼴이었고,[5] 정종 이방과는 이복형제끼리 골육상쟁을 한 것이 몇 년 전인데 이번엔 친형제끼리 골육상쟁을 일으키려고 하니 한심해서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4. 매체에서


  •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회안대군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배우김주영. 재밌게도 아버지 태조 이성계 역의 김무생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5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같은 역을 맡았는데 전작과는 달리 나름 비중있게 등장한다. 세자 책봉 문제와 사병 혁파 문제로 이방원과 함께 이성계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큰 불만을 나타내며 1차 왕자의 난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이복동생인 이방번을 참살한다.[6] 하지만 권력욕이 커서, 귀양길에 처해 불만이 컸던 박포와 손을 잡아 대대적인 준비 이후에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7] 이방원에게 패하고, 결국은 유배길에 처해진다.[8]

차마 동복동생인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빌 수 없어서 자결까지 하겠다고는 했으나, 아버지는 물론 들인 정종익안대군이 함께 설득하고 참교육을 실천해주는 바람에 결국 그들의 말대로 하여, 이복동생들과는 달리 이방원의 배려로 그나마 끝까지 천수를 누릴 수가 있었다.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정종의 부탁으로 상복을 입도록 허락받은 모습으로 짧게 재등장하며, 나레이션에서 이후 어떻게 됐나 간략하게 언급된다. 그리고 최종화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죽어있는 모습으로 작중에서 완전히 퇴장하며 이방원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다.
잘 생각해보면 짜증나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 하는 짓은 맨날 권력욕을 풀풀 풍기는데 2차 왕자의 난 말고 하는 게 없다. 스스로 밝히는 자기가 집권해야 하는 이유라고는 "난 이방원의 형이야!!" 한 마디(...) 기껏해야 1차 왕자의 난 때 뒤늦게 대궐로 달려온 정도? 진짜로 서열 말고 아무 근거도 생각한 적 없는 듯.
참고로, 배우 김주영은 먼 훗날 <정도전>에서는 조민수를 연기했는데, 재미있게도 조민수이성계에게 당하며 숙청됐다. 그런데 <정도전>에서 이성계를 연기한 배우는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연기했던 유동근이다.
여담으로, 이덕화이방원이나 회안대군으로 캐스팅하려고 했는데 거절하였다 한다.[9]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강신효가 배역을 맡았다.[10] 도리깨나 철퇴같은 둔기를 주로 사용하는 과격한 무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정몽주를 참살한 조영규에게 "너 손맛좀 봤다며?"라고 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했다.[11] 무인정사때는 이근을 붙잡고, 박포에게 이름을 물어보고는 박포가 이근이라고 대답하자, 철퇴로 때려죽이고 이방원에게 이근이라고 알려준다. 무인정사 이후에는 이방원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모습을 보여줘 2차 왕자의 난을 암시했다.

이후 역사대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 난을 일으키는 장면조차 없이(...) 붙잡혀있는 장면부터 등장하여 이방원에게 아주 호탕하고 당당하게 "제발 날 좀 살려다오!"라고 외친다.[12] 역시나 실제 역사대로 정종에게 무식한 놈이라고 디스당한다.
[1] 태조의 둘째 딸인 경선공주의 남편이었던 심종은 심덕부의 6번째 아들로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동생이었다.[2] 중종 때 복권을 청했다가 이후 선조 때 다시 청해서 허락받았지만, 이때는 선조 40년이었고 1년 뒤 선조가 죽자 이들은 광해군에게 다시 청했으나 광해군은 요구를 씹었다. 그러고 수십 년 뒤 인조 말년 즈음에 다시 청했는데, 이때 족보에는 올라가진 못했지만 노역은 면제받았다. 그러고 숙종 때 여러 개로 나뉘어 있던 족보를 통폐합해 새로이 족보를 만들려는 때에 청해서 족보에 편입될 수 있었다.[3] 라고는 하지만 사실 방원은 형 정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고 애시당초 왕위를 좀 더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형한테 잠시 보위를 맡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어차피 방간이 형이라는 점과는 상관없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4] 때문에 2차 왕자의 난이 더더욱 뻘짓으로 평가받는 이유기도 하다. 알다시피 이방원은 초대 임금인 아버지를 상대로 권력다툼에서 승리했으며, 형의 양자로 들어가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도 '오늘부터 동생을 자식처럼 생각하면 되지 않냐' 며 정종이 방원을 두둔해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거기다 조준, 하륜, 이숙번 등등 조정은 이미 이방원 측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 상황이다. 즉, 명분에 밀려 옥좌에 앉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인 임금노릇은 이방원이 이미 다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서열이 빠른 형이라는 것만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그야말로 뻘짓에 지나지 않았다. 용의 눈물도 이런 점을 반영해서인지 이방간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은 이성계가 '이방원을 견제할 자가 없어졌다.'며 탄식하는 모습이 나온다.[5] 비록 이성계가 당시 가장 증오하는 게 이방원이라고는 하나, 이방간 또한 1차 왕자의 난 당시 방원에게 적극 가세했다는 점을 보면 이방간이라 해서 딱히 도와줄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정도만 다를 뿐 같은 놈들로 보일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이복 동생들을 죽이더니 이젠 동복 형제들끼리 싸우는 작태 자체가 한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6] 형식 상으로는 이방원이 말리지만, 전혀 말릴 생각이 없었다.[7] 작품 속 2차 왕자의 난의 경우에는 실록과 현재와 다르게 정말 만만치 않은 반란으로 묘사로 될 정도로 철두철미한 준비로 묘사되었다. 이는 이방간을 작중 태종 입장에서 중간 보스 보정을 주면서 어느 정도는 고증을 희생해서다.[8] 이에 이성계는 그나마 방원을 견제하던 이가 사라졌음에 더욱 분노했고, 퉁두란이 방원의 편을 들고 이성계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를 떠남으로서 혼자 고립된 이성계가 속으로 더 분노와 고통에 곪다가 내부적으로 더 큰 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9] 나무위키 곳곳에 이덕화가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라서 직계 조상의 흑역사를 연기하기가 꺼림칙해서 그렇다는 근거 없는 말이 있는데, 이덕화가 전주 이씨라고 본인이 밝힌 적이 없어 확실한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일부 신문 기사에서는 이덕화가 연안 이씨로 소개된다.[10] 강신효는 1989년생으로, 실제로는 동생인 이방원 역의 유아인보다 3살 어리다.[11] 조영규가 정몽주를 죽일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방간이 가장 주로 사용하는 무기중 하나인 도리깨였기 때문이다.[12] 이방원은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않냐고 어이없어했고 이방간은 이에 동북면 사나이의 기백을 버릴 수는 없지 않냐고 답한다. 결국 개그 캐릭터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