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5세

 



'''로마 118대 황제
Αλέξιος Ε' | 알렉시오스 5세
'''
[image]
'''제호'''
알렉시오스 5세 (Αλέξιος Ε')
''''''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주플로스
(Αλέξιος Δούκας ο Μούρτζουφλος)
'''생몰 년도'''
1140년 ~ 1205년
'''재위 기간'''
1204년 2월 5일 ~ 1204년 4월 13일
1. 개요
2. 생애
2.1. 즉위 배경
2.2.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
2.3. 항전과 폐위 그리고 몰락
3. 참고문헌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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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차 십자군에 의한 희생된 황제이자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 마지막 황제'''
동로마 제국의 118대 황제. 두카스 왕조의 일원으로 보이나, 종전의 두카스 왕조와 그 일족과는 혈연관계가 증명되지 않고 있다.[1] '''무르주플로스(짙은 눈썹) '''는 알렉시오스 두카스의 별명이다.

2. 생애



2.1. 즉위 배경


1203년 8월 1일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제4차 십자군의 지원을 받아 백부인 큰아버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를 폐위시키고, 부황이자 장님이 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복위시키며 자신도 즉위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제4차 십자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세금 및 황실 재산을 모으려고 했으나 이미 백부인 알렉시오스 3세가 폐위 직전 황실 재산을 대규모로 들고 트라키아 쪽으로 피신을 한 상태였다. 이에 알렉시오스 4세는 제국 시민들의 지지를 잃고만다.
그 틈을 타서 알렉시오스 두카스가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잠재적인 경쟁 인사였던 니콜라오스도 있었으나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4세의 실책에 강하게 반박했다. 그래서 제국 시민들 사이에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시키자는 여론이 대두되면서 알렉시오스 두카스가 이를 이용하게 되었다.

2.2.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


1204년 1월 28일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시민들의 여론을 발판삼아 황제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시키고 투옥시켰다. 이사키오스 2세는 폐위 직후 이미 사망하였으나 알렉시오스 4세는 알렉시오스 두카스의 입장에서는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결국 1204년 2월 5일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5세로 즉위를 한 직후 폐제 알렉시오스 4세의 처분에 대해 논의 끝에 결국 교살시켰다.
알렉시오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각만 주변에 머무르던 제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과의 담화에서 전임 황제인 알렉시오스 4세의 채무 조건은 무효이며 심지어는 자신과 동로마 제국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에게 당장 수도에서 떠나라고 엄포를 내렸다. 이에 베네치아의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Henrico Dandolo, 1107?~1204)와 십자군 지도자들이 분노하며 반발하여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거센 공격을 펼치게 되었다.

2.3. 항전과 폐위 그리고 몰락


알렉시오스 5세는 공성전에서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했다. 그는 위대한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십자군에게 빼앗긴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알렉시오스 5세는 훗날을 기약하며 모시노폴리스에 가서 폐위가 된 전임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와 장인과 사위, 즉 혼인동맹으로 연합하여 십자군과 베네치아에게 빼앗긴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장인인 알렉시오스 3세한테 배신을 당하게 되었다.[2] 결국 알렉시오스 5세는 칭제범으로 몰려 실명이라는 형벌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되었다.
1205년 장님이 되어 폐인이 된 알렉시오스 5세는 모시노폴리스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십자군 일행들에게 발각이 된 후 붙잡혀서 압송당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후 십자군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그들로부터 사형을 선고당하는 모욕을 겪게 되었다. 결국 같은 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심부 안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기둥에서 십자군 병사들한테 사형(추락사)을 당하여 치욕스럽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3. 참고문헌 및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영문, 한글
참고문헌: 존 줄리서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
[1] 쉽게 이해를 한다면 전주 이씨 양녕대군이승만의 경우로 예를 들어본다. 이승만의 경우에는 외국에서는 조선의 프린스라고 할 정도로 왕족 출신을 강조하였지만 정작 해방 후 제1공화국이 성립이 되었을 경우 전주 이씨 왕조보다는 독립운동가 및 공화정의 대통령을 강조하였다. 즉 이승만은 조선 태종과 폐세자인 양녕대군의 후손은 맞지만, 세월이 500여년 가까이 흘러서 왕족이 아니듯이 알렉시오스 5세의 경우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재위: 1059~1067)와 미하일 7세(재위: 1067~1078)의 시기로 보아 100여년 차이가 있어서 비록 두카스 왕조 출신은 맞더라도 증빙할 사료가 없다. 따라서 알렉시오스 5세는 과거 두카스 왕조와는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증빙하기에는 어렵지만, 두카스 왕조 출신의 황족 직계는 아니더라도 먼 방계 출신으로 추증은 할 수 있다.[2] 다만 이는 본인의 자업자득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