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비스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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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사용하던 주소: http://www.altavista.com 접속하면 야후가 뜬다.
구 주소: http://altavista.digital.com[1]
1996년 10월 당시 알타비스타의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1995년 12월 설립된 미국의 검색엔진이다. 90년대 중후반의 인터넷 초창기에는 주요 검색엔진이었지만, 당시의 주요 검색엔진과 인터넷 포털이 그랬듯 강력한 후발주자에 밀려 쇠락하게 되고 결국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2. 역사
2.1. 개발 기간
1995년 봄에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2] )의 개발자들이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검색을 100배 더 빨리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 이를 시험해보기로 한다. 시험 목적으로 1995년 8월에 당시 전 인터넷의 웹문서를 크롤러로 모으는 시도를 하여 약 천만 개의 웹페이지를 모았다. 이후 가을에 DEC는 새로 개발한 시스템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두달간의 내부 시험을 거친 후, 1995년 12월 15일, 알타비스타는 대중 일반에게 서비스를 시작한다.
2.2. 급성장 및 전성기
알타비스타는 대중에게 공개된 첫날부터 30만 건의 검색을 처리하는 등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1996년 말 즈음에는 하루에 1900만여 번, 1997년 말에는 하루에 8000만여 번의 검색 횟수를 기록하는, 명실상부한 90년대 중후반의 인터넷의 주요 검색 엔진이 된다. 이러한 인기와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야후!에 키워드 검색결과를 독점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1998년에 진출하여[3] , 당시 야후!와 함께 많은 사람이 이용했으며 훌륭한 검색 결과로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2.2.1. 성장의 원인
-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대중에게 서비스를 시작할 당시 알타비스타는 약 1600만개의 웹문서를 데이터베이스에 보유하고 있었다. 이 분량의 10분의 1만 모으는 데 성공해도 훌륭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여기던 시대에 이 정도의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한 것은 검색 이용자들에게 말 그대로 완전히 '다른 물'에서 놀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알타비스타의 전성기동안은 계속 유지되었다.
- 앞선 기술력
데이터베이스가 있어도 활용을 못하면 그 데이터베이스는 아무 쓸모가 없다. 하지만 당시 알타비스타의 기술력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충분히 활용하고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시 알타비스타의 기술력을 잘 보여주는 예시로는 스쿠터라는 이름의 크롤러를 들 수 있다. 이 크롤러는 매일 300만개의 웹페이지를 수집하는 능력을 가져 당시 알타비스타의 데이터베이스를 유지,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알타비스타의 검색 기술 역시 다른 업체와의 차별점 중 하나였다. 요즘 '구글에 없으면 인터넷에 없는 거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당시에는 알타비스타가 그 위치에 있었다. 한국에서도 '야후, 엠파스, 까치네, ...(등등 자신이 아는 검색엔진)에서 찾아서 없으면 알타비스타에서 찾으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알타비스타의 기술력은 우수했다.
2.3. 몰락의 시작
점점 기울어져가던[4] DEC는 1998년에 96억 달러에 컴팩에게 인수되었는데, 1999년에 컴팩은 알타비스타의 방문자 수를 늘려서 더 많은 수익을 낼 목적으로 알타비스타를 포털 사이트로 바꾸고, 이름도 알타포탈로 바꿨다. 이후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기 위해[5] DEC에서 독립시켜 독자적인 자회사로 만든다. 이런 준비를 하고 있던 컴팩에게 인터넷 종목 투자기업이었던 CMGI가 접근한다. 컴팩은 1999년 6월에 CMGI에게 알타비스타의 주식의 83%를 넘긴다. CMGI는 알타비스타가 앞으로도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산 것이겠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알타비스타는 주요 검색엔진 중 하나였다. 1999년 8월, 알타비스타의 미국 검색 점유율은 15%로[6] , 검색보다는 인터넷 포털 분야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얼마동안은 1등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인기있는 검색엔진 중 하나였다.
2.4.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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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알타비스타는 구글에 밀려 동시대의 여러 포털사이트와 검색 서비스 제공 업체와 함께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추락의 속도는 다른 검색엔진 및 포털 사이트와 비교해봐도 상당히 빠른 편으로, 1999년 15%였던 검색 점유율은 2004년에는 1%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상황 반전을 위해 2002년에 이미지, 동영상 검색을 추가하고 기계 번역기인 바벨피쉬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반전에 실패한다. 알타비스타는 2003년에 1억 4000만 달러[7] 에 오버추어에 인수되었고, 오버추어는 얼마 안가 야후에 인수되어 알타비스타는 야후의 소유가 된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알타비스타는 야후의 검색결과를 그대로 제공하는, '껍데기만 알타비스타인 야후! 검색'이 되었고 2013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사이트 자체가 폐쇄된다. 현재에는 구 알타비스타의 주소를 치면 야후! 검색으로 리다이렉트 된다.
2.4.1. 몰락의 원인
- 개발 및 운영 회사의 능력 부족
알타비스타를 개발한 기업인 DEC는 본래 정보분석용 미니컴퓨터를 만들던 회사로, 이 분야에서 성공해 80년대에는 주요 컴퓨터 제조 업체 중 하나였다. 하지만 PC시대의 도래에 대한 분석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해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 시대에 뒤쳐지게 되었고, 90년대 초반부터 적자에 시달리게 된다. 이 적자는 계속 이어지게 되었고, 알타비스타를 개발했을 때 DEC는 누적된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정리해고를 하고 내부의 이런저런 사업부를 팔아치우는 등 연구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 DEC는 컴퓨터 제조 업체, 즉, 하드웨어 제조 기업이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였던 DEC에게 알타비스타는 단지 자사의 훌륭한 시스템을 자랑하기 위한 용도의 검색 서비스였을 뿐, 그것 이외의 잠재력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결국 알타비스타의 인기는 많았지만, 정작 그것을 개발한 DEC는 검색엔진의 미래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신경 쓸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1998년 이후 알타비스타의 모회사가 된 CMGI와 컴팩도 알타비스타의 지향점을 검색 기술에서 전자상거래와 광고 위주로 옮기는 등 단기적인 수익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 검색에 대한 투자 부족
이는 당시 웹사이트의 수익 창출 방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시에는 검색 광고라는 걸 아직 생각해내기 전이라 웹페이지에 보이는 배너 광고가 사이트 수익원의 전부였다. 이 광고를 통해 큰 수익을 얻으려면 이용자들이 더 오랫동안 광고에 노출되어야 했고, 포털사이트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용자를 사이트에 더 오래 잡아둘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목적에 적합한 형태였다. 그 때문에 라이코스, 익사이트 등 당시 많은 주요 검색엔진이 본업인 검색보다 당장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줄 수 있는 포털사이트로 전환하거나 운영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당장의 수익을 위해 핵심을 버린 근시안적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검색을 통한 수익 창출 방법이 없다고 여겼던 당시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검색을 통해 수익을 얻는 방법인 '검색 광고'[8] 가 퍼지기 시작하고, 검색 기술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검색 기술 개발에 집중한 기업들이 있었기에 알타비스타를 비롯해 포털사이트로 전환한 수많은 업체들은 얼마 안가 조악한 검색 품질 때문에 시장 점유율을 잃고 모조리 몰락하고 만다.
3. 한글 알타비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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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당시 알타비스타를 소유하고 있던 DEC는 평창정보통신을 대행사로 내세우면서 한글 검색 서비스를 공개하며 정식으로 대한민국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에도 알타비스타는 강력한 검색엔진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1999년에 네티즌들을 상대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도 야후! 코리아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검색엔진 중 하나로 조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후 국내의 포털, 검색엔진들이 공격적인 차별화 공세와 인수합병을 통한 점유율 확장에 나섰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의 본사는 맛이 가고 있었다. 그런 도중에도 알타비스타를 포털사이트로 바꾸면서 새로 붙인 이름인 '알타포탈'이라는 이름의 사용권을 놓고 한국의 대행사와 분쟁이 일어나 아예 2001년에 '알타비스타 코리아'라는 한국 지사를 세워 독자적 운영에 나서지만#, 알타비스타가 2003년에 야후!에 인수된 후 한글 알타비스타 역시 껍데기만 알타비스타인 야후! 코리아 검색사이트가 된다. 현재 한글 알타비스타의 주소 http://www.altavista.co.kr 이나 http://kr.altavista.com을 치면 야후! 사이트의 404 오류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
4. 여담
- DEC 소속의 알타비스타 개발자들은 검색엔진의 잠재력과 개발 방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식견[9] 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서술했듯 알타비스타의 개발사는 검색엔진의 잠재력에 대해 알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성공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 앞서 설명했듯 알타비스타는 주력 서비스라기보다는 DEC의 기술시연용 서비스의 성격이 강했고, 그래서 공식적인 주소도 1995년에서 1998년까지 http://www.altavista.com 이 아니라 DEC의 하위 서비스라는 어조가 담긴 http://altavista.digital.com 이었다. 알타비스타가 서비스 시작 직후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이 때 Altavista Technologies라는, DEC에서 개발한 검색엔진과는 아무 관련 없는 다른 인터넷 기업이 http://www.altavista.com 주소를 소유하고 있어서 얼떨결에 진짜 알타비스타 검색엔진에 접속하려 의도한 트래픽을 공짜로 얻어먹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업체가 이걸 이용해서 사이트의 디자인을 알타비스타 검색엔진과 비슷하게 바꾸고, 자사의 소프트웨어와 광고를 마치 '진짜 알타비스타'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연계해 팔아먹는 등 '짝퉁 알타비스타'로 수익을 내는 행위를 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DEC의 고소+승소. 이 판결에 따라 1997년 3월부터 Altavista Technologies 측의 사이트에는 '이 사이트는 DEC에서 개발, 운영하는 알타비스타 검색엔진과는 무관한 사이트이며, 알타비스타 검색엔진은 altavista.digital.com에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알타비스타에서는 짝퉁 알타비스타로의 링크가 걸려있는 다른 사이트들의 운영자에게 진짜 알타비스타의 링크를 이메일로 알려주는 등 열심히 사이트의 주소를 홍보하는 활동을 벌였다. 1998년 8월에 당시 알타비스타의 운영회사였던 컴팩이 http://www.altavista.com 주소를 330만 달러에 사들이고 공식 주소를 바꾸면서 이 사건은 막을 내린다.#
5. 참고자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005&cid=43659&categoryId=43659
http://www.websearchworkshop.co.uk/altavista_history.php
http://www.company-histories.com/DIGITAL-EQUIPMENT-CORPORATION-Company-History.html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08836&cid=40942&categoryId=32854
http://www.livemint.com/Opinion/h5h8GJT1BuFgQY2qm0bxzI/How-AltaVista-lost-its-mojo-and-Google-found-its.html
[1] 1998년 8월#에 위의 주소로 바꿨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해프닝이 있다. 여담 항목 참조.[2] 메인프레임 시절부터 역사가 오래된 컴퓨터 회사로 90년대 말 PC회사 컴팩(Compaq)에 합병되었다. 이후 컴팩은 휴렛팩커드(HP)에 합병.[3] 이 때 한글 검색을 지원했다.[4] 왜 그렇게 됐는지는 후술하겠다.[5] 닷컴 버블이 본격적으로 생성되던 때라 웬만한 인터넷 기업은 상장만 했다 하면 주식 가격이 팍팍 오르는 때였다.[6] 검색 점유율과 사이트 방문자 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해당 자료에서 당시 야후! 빰치는 방문자 수를 기록했던 라이코스가 검색 점유율에서는 저렇게 야후!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를 보이는 이유도 이것이다.[7] 2000년에 측정된 시가총액의 5%정도밖에 안 되는 값이다.[8] 1998년 쯤에 오버추어라는 기업이 널리 퍼뜨렸다.[9] 당시의 IT관련 인물 중 '검색 권력'이 인터넷 세상을 조종하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얼마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