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 소젠
야마나 소젠
山名宗全
1404년 7월 6일~1473년 4월 15일
야마나 소젠은 무로마치 시대의 슈고 다이묘이다. 원래 야마나 가문은 전국의 6분의 1을 지배하는 슈고 다이묘였는데 무로마치 막부의 계략으로 세력이 축소된 상태였다. 그러나 소젠에 의해 야마나 가문이 다시 부흥하자 이를 경계한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이 깊어졌다. 결국 1467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소젠은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다. 이후 두 가문은 11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에 돌입했다. 소젠과 가쓰모토 두 사람 모두 난의 종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사망하자 난은 곧 종식되었다. 아명은 쇼지로(小次郎), 법명 소젠(宗全)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본명은 모치토요(持豊)이다.
야마나 소젠은 1404년 야마나 도키히로와 야마나 우지키요의 딸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야마나 가문은 고즈케 국 야마나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세이와겐지 닛타 가문의 지류였으며, 닛타 요시시게의 양자인 요시노리를 시조로 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건무신정이 시작되자 무사의 불만을 등에 업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야마나 가문의 마사우지 · 도키우지 부자는 원래 닛타 요시사다가 이끄는 다카우지 토벌군으로 종군하였으나, 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가담하여 아시카가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다카우지가 동생 다다요시와 대립했을 때는 다다요시 편에 가담했으나, 다다요시가 죽은 후에는 단바 · 단고 · 호키 · 이나바 · 미마사카 5개국의 슈고(지방의 군사지휘관이자 행정관) 직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다카우지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아시카가 일족인 시바 가문의 최대 지지세력이 된 야마나 가문은 사사키 다카우지의 세력을 산인 지방에서 몰아내고 지배지 확대를 계속하였다.
야마나 모로요시의 대에 이르렀을 때, 야마나 일족은 11개국을 영유하는 슈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 일본 전국 68국 가운데 6분의 1에 해당했기 야마나 가문은 ‘6분의 1 전하’로 불리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내에서 야마나 가문은 교토의 경비나 재판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에 취임하는 4개 가문(아카마쓰, 교고쿠, 야마나, 잇시키)의 하나가 되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유력한 슈고 집안의 세력 억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야마나 가문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요시미쓰는 우선 3개국 슈고였던 도키 야스유키를 토벌하여 영유 국을 1개국으로 축소시켰다. 그 다음의 목표 가문이 11개국 슈고를 겸하고 있던 야마나 가문이었다. 마침 야마나 일족 가운데 내분이 일어났고, 요시미쓰는 이를 이용하여 야마나 가문 토벌을 획책하였다.
1389년 도키요시가 죽고 나서 도키히로와 우지유키가 영지를 물려받았다. 쇼군 요시미쓰는 도키히로와 우지유키가 막부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야마나 일족인 우지키요와 미쓰유키에게 이들의 토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쫓겨난 도키히로와 우지유키가 쇼군 요시미쓰에게 우지키요를 모함하자 요시미쓰는 도키히로와 우지유키를 사면한 후 이번에는 우지키요의 세력을 축소하려고 하였다. 이에 미쓰유키가 우지키요를 설득하여 막부에 반기를 들고 교토로 쳐들어왔다.
요시미쓰는 오우치 · 하타케야마 · 호소카와 등의 유력 슈고에게 야마나 가문의 토벌을 명하였고 야마나 가문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것이 바로 1391년에 일어난 ‘메이토쿠의 난’이다. 난이 종결된 후 야마니 가문의 영유 국은 다지마 · 호키 · 이나바 3개국으로 감소하였고, 야마나 가문의 다른 영지는 호소카와 · 하타케야마 · 오우치 · 잇시키 · 아카마쓰 가문에게 분할되었다. 메이토쿠의 난으로 야마나 가문의 세력은 일거에 축소되었다.
메이토쿠의 난으로 세력이 줄어들었던 야마나 가문이지만 소젠의 부친 도키히로가 막부 내에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1420년 도키히로의 장남 미쓰토키가 죽고 차남 모치히로가 일족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치히로는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미움을 사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한 채 칩거하게 되었다.
1433년, 3남 소젠이 가장권인 가독을 물려받고 다지마 · 빙고 · 아키 · 이가 4개국의 슈고에 부임하였다. 가독을 계승하지 못한 모치히로는 원한을 품고 1437년 거병하였으나 소젠은 이를 격퇴하였다. 가독을 계승한 소젠이 목표로 한 것은 메이토쿠의 난으로 쇠퇴한 야마나 일족의 부흥이었다. 1440년 소젠은 도키히로 이래 약 26년 만에 교토의 경비나 재판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에 임명되고 야마시로의 슈고직도 겸하였다. 막부에서는 호소카와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 다음 가는 유력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1441년 하리마 슈고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쇼군 요시나리를 살해하는 ‘가키쓰의 난’이 벌어졌다. 사무라이도코로 장관이었던 소젠에게 미쓰스케 토벌의 명이 내려졌다. 소젠은 토벌군을 편성하여 일족 야마나 노리유키와 함께 하리마에 침공하였다. 아카마쓰 가문의 영유 국이었던 미마사카에는 일족 야마나 노리키요를 파견하였다. 하리마에 들어간 소젠은 미쓰스케가 숨어 있던 아마카쓰 성을 함락시켰으며 미쓰스케는 자결하였다. 가키쓰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소젠은 하리마와 이와미의 슈고로 봉해졌고, 미쓰스케의 영유 국이었던 3개국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로써 야마나 일족의 소령은 9개국이 되어 메이토쿠의 난으로 쇠퇴했던 가세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야마나 가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막부 내에서 견제의 대상이 되었고, 소젠은 자신의 세력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8개국을 영유하고 있던 간레이 가문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접근하여 딸을 시집보냈다. 소젠과 가쓰모토는 당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 문제를 둘러싸고 소젠과 가쓰모토 사이는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카마쓰 가문의 구 영지인 하리마를 야마나 일족의 영지로 편입했던 소젠은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에 반대하였지만, 야마나 가문의 세력 축소를 노린 가쓰모토는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1450년 소젠은 출가하였다. 같은 해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일족인 시게유키가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노리고, 미쓰스케의 조카인 노리나오를 아카마쓰 가문의 후계자로 추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가쓰모토와 소젠의 대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1458년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이 정식으로 허가되어 가가의 반국 슈고에 임명되자, 소젠은 가가의 슈고였던 도가시 시게하루와 합세하여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가쓰모토의 양자로 들어가 있던 소젠의 막내아들 도요히사가 가쓰모토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출가하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소젠은 도요히사를 환속시켜 집으로 데려오면서 양자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간레이 가문인 시바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에서 가독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다. 시바 가문에서 가독 요시타케가 후사가 없는 채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토시와 시부카와 가문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카도가 가독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시바 요시카도도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마찬가지로 소젠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고 있었다.
소젠이 시바 요시카도 옹립을 지원하자 막부 만도코로의 집사인 이세 사다치카가 시바 요시토시 옹립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요청하면서 시바 가문의 내분은 점점 커졌다.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모치쿠니에게 가독을 물려받은 요시나리에 반대하는 가신들이 모여서 일족의 마사나가를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사나가는 모치쿠니의 아들 요시나리 파에 밀려서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소젠은 처음에는 마사나가를 지원했지만, 요시나리가 소젠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자 하타케야마 가문의 내분은 더욱 심각해졌다.
가쓰모토가 교토에 군세를 모으기 시작하자 소젠도 여기에 대항하여 군세를 모으기 시작했다. 5월에 호소카와 측의 군사가 야마나 측의 잇시키 요시나오의 저택을 불태워 오닌의 난이 시작되었다. 가쓰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소젠 토벌의 명령을 받는 데 성공하였고, 요시미 · 요시히사 · 히노 도미코도 호소카와 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소젠은 관군에 대항해서 싸우는 형세가 되었다.
오닌의 난이 시작되자 슈고 다이묘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졌다. 호소카와 가문이 이끄는 동군에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카마쓰 마사노리 등 24개국 16만 명이 가담하였고, 야마나 가문이 이끄는 서군에는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 시바 요시카도 등 20개국 11만 명이 가담하였다. 쇼군 요시마사는 아들 요시히사와 함께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였다. 전투 초반은 쇼군 가문을 점거하고 요시마사, 요시히사, 요시미를 확보한 동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소젠이 서국의 다이묘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오우치 마사히로가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대군을 이끌고 서군에 합류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러나 동군과 서군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해가 지났고, 그 후로도 각지에서 작은 전투가 있었지만 뚜렷한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1468년, 원래 동군 진영에 가담하고 있던 요시미가 서군에 합세하자 소젠은 요시미를 서군의 쇼군으로 추대하였다. 1469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 요시히사에게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직을 물려주었다. 같은 해 8월, 구 남조 세력이 남조의 황손 오구라노 미야를 추대하여 기이에서 거병하자, 소젠은 오구라노 미야를 영입하였다.
교토에서는 작은 전투는 일어났지만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고 전투는 이미 고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1472년 소젠은 난을 끝내기 위하여 가쓰모토에게 화해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란은 이미 전국 각지로 번졌기 때문에 교토만 강화를 맺는다고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동군과 서군 양쪽에 가담한 여러 세력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강화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실의에 빠진 소젠은 가독을 손자 마사토요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장남 노리토요는 1467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어 1473년 3월 전란의 종식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젠이 죽고 나서 2개월 후에 호소카와 가쓰모토도 눈을 감으면서 오닌의 난을 일으킨 두 대장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를 계기로 양군에서는 평화를 원하는 기운이 고조되었지만 이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결국 1477년 교토를 장기간 점령하고 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가 자신의 영지로 철수하면서 오닌의 난은 막을 내렸다. 쇼군 요시히사의 모친인 히노 도미코가 오닌의 난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 일천 관문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었으며, 오우치 가문에게는 종사위하 좌경대부의 관위를 내리고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슈고에 임명했다고 한다.
소젠의 뒤를 이은 마사토요는 오닌의 난을 틈타서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점령하고 있던 하리마 · 비젠 · 미마사카를 되찾기 위해 출병하여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마사노리의 반격에 패배하고 하리마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야마나 가문의 영국에서는 가신들이 대두하게 되고 야마나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 후 지배 영역이 사실상 기나이 지역으로 축소된 무로마치 막부를 실력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1493년 도미코와 함께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폐위하고 정적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암살한 후에는 완전히 막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센고쿠 다이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야마나 소젠은 대체로 오만하고 난폭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야마나 가문의 병사들이 가키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아카마쓰 토벌에 나섰는데, 교토 시내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부하의 피로를 핑계로 묵인하였기 때문에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았다. 소젠이 거느리는 영국 내에서도 공가나 절 · 신사의 장원에 대한 침탈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소젠은 1472년 오닌의 난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동군과의 화해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절망한 나머지 할복자살을 기도했으며, 이때 입은 상처가 이듬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풍문도 전하지만 진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닌의 난을 기록한 군기물인 『오닌기(応仁記)』에는 소젠을 ‘아카뉴도(赤入道)’로 칭하고 있는데 얼굴이 붉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총물어(塵塚物語)』에는 야마나 소젠과 어느 귀족 대신의 문답 이야기가 나오는데, 귀족 대신이 과거의 예를 꺼내서 소젠에게 설명하자 소젠은 “예(例)라고 하는 글자를 앞으로는 시(時)라고 하는 글자로 바꾸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귀족이 중히 여기는 과거의 ‘예’보다 현재의 ‘시’의 우위를 강조한 것은 하극상을 정당화하는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오닌의 난’의 경쟁자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문예에 조예가 깊고 다재다능한 문화인이자 모략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면, 소젠은 이와 대비되어 용맹무쌍하고 군사에는 뛰어나지만 정치성은 부족한 전형적인 무인 기질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山名宗全
1404년 7월 6일~1473년 4월 15일
1. 개요
야마나 소젠은 무로마치 시대의 슈고 다이묘이다. 원래 야마나 가문은 전국의 6분의 1을 지배하는 슈고 다이묘였는데 무로마치 막부의 계략으로 세력이 축소된 상태였다. 그러나 소젠에 의해 야마나 가문이 다시 부흥하자 이를 경계한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이 깊어졌다. 결국 1467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소젠은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다. 이후 두 가문은 11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에 돌입했다. 소젠과 가쓰모토 두 사람 모두 난의 종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사망하자 난은 곧 종식되었다. 아명은 쇼지로(小次郎), 법명 소젠(宗全)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본명은 모치토요(持豊)이다.
2. 생애
야마나 소젠은 1404년 야마나 도키히로와 야마나 우지키요의 딸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야마나 가문은 고즈케 국 야마나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세이와겐지 닛타 가문의 지류였으며, 닛타 요시시게의 양자인 요시노리를 시조로 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건무신정이 시작되자 무사의 불만을 등에 업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야마나 가문의 마사우지 · 도키우지 부자는 원래 닛타 요시사다가 이끄는 다카우지 토벌군으로 종군하였으나, 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가담하여 아시카가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다카우지가 동생 다다요시와 대립했을 때는 다다요시 편에 가담했으나, 다다요시가 죽은 후에는 단바 · 단고 · 호키 · 이나바 · 미마사카 5개국의 슈고(지방의 군사지휘관이자 행정관) 직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다카우지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아시카가 일족인 시바 가문의 최대 지지세력이 된 야마나 가문은 사사키 다카우지의 세력을 산인 지방에서 몰아내고 지배지 확대를 계속하였다.
야마나 모로요시의 대에 이르렀을 때, 야마나 일족은 11개국을 영유하는 슈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 일본 전국 68국 가운데 6분의 1에 해당했기 야마나 가문은 ‘6분의 1 전하’로 불리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내에서 야마나 가문은 교토의 경비나 재판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에 취임하는 4개 가문(아카마쓰, 교고쿠, 야마나, 잇시키)의 하나가 되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유력한 슈고 집안의 세력 억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야마나 가문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요시미쓰는 우선 3개국 슈고였던 도키 야스유키를 토벌하여 영유 국을 1개국으로 축소시켰다. 그 다음의 목표 가문이 11개국 슈고를 겸하고 있던 야마나 가문이었다. 마침 야마나 일족 가운데 내분이 일어났고, 요시미쓰는 이를 이용하여 야마나 가문 토벌을 획책하였다.
1389년 도키요시가 죽고 나서 도키히로와 우지유키가 영지를 물려받았다. 쇼군 요시미쓰는 도키히로와 우지유키가 막부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야마나 일족인 우지키요와 미쓰유키에게 이들의 토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쫓겨난 도키히로와 우지유키가 쇼군 요시미쓰에게 우지키요를 모함하자 요시미쓰는 도키히로와 우지유키를 사면한 후 이번에는 우지키요의 세력을 축소하려고 하였다. 이에 미쓰유키가 우지키요를 설득하여 막부에 반기를 들고 교토로 쳐들어왔다.
요시미쓰는 오우치 · 하타케야마 · 호소카와 등의 유력 슈고에게 야마나 가문의 토벌을 명하였고 야마나 가문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것이 바로 1391년에 일어난 ‘메이토쿠의 난’이다. 난이 종결된 후 야마니 가문의 영유 국은 다지마 · 호키 · 이나바 3개국으로 감소하였고, 야마나 가문의 다른 영지는 호소카와 · 하타케야마 · 오우치 · 잇시키 · 아카마쓰 가문에게 분할되었다. 메이토쿠의 난으로 야마나 가문의 세력은 일거에 축소되었다.
메이토쿠의 난으로 세력이 줄어들었던 야마나 가문이지만 소젠의 부친 도키히로가 막부 내에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1420년 도키히로의 장남 미쓰토키가 죽고 차남 모치히로가 일족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치히로는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미움을 사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한 채 칩거하게 되었다.
1433년, 3남 소젠이 가장권인 가독을 물려받고 다지마 · 빙고 · 아키 · 이가 4개국의 슈고에 부임하였다. 가독을 계승하지 못한 모치히로는 원한을 품고 1437년 거병하였으나 소젠은 이를 격퇴하였다. 가독을 계승한 소젠이 목표로 한 것은 메이토쿠의 난으로 쇠퇴한 야마나 일족의 부흥이었다. 1440년 소젠은 도키히로 이래 약 26년 만에 교토의 경비나 재판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에 임명되고 야마시로의 슈고직도 겸하였다. 막부에서는 호소카와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 다음 가는 유력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1441년 하리마 슈고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쇼군 요시나리를 살해하는 ‘가키쓰의 난’이 벌어졌다. 사무라이도코로 장관이었던 소젠에게 미쓰스케 토벌의 명이 내려졌다. 소젠은 토벌군을 편성하여 일족 야마나 노리유키와 함께 하리마에 침공하였다. 아카마쓰 가문의 영유 국이었던 미마사카에는 일족 야마나 노리키요를 파견하였다. 하리마에 들어간 소젠은 미쓰스케가 숨어 있던 아마카쓰 성을 함락시켰으며 미쓰스케는 자결하였다. 가키쓰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소젠은 하리마와 이와미의 슈고로 봉해졌고, 미쓰스케의 영유 국이었던 3개국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로써 야마나 일족의 소령은 9개국이 되어 메이토쿠의 난으로 쇠퇴했던 가세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야마나 가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막부 내에서 견제의 대상이 되었고, 소젠은 자신의 세력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8개국을 영유하고 있던 간레이 가문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접근하여 딸을 시집보냈다. 소젠과 가쓰모토는 당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 문제를 둘러싸고 소젠과 가쓰모토 사이는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카마쓰 가문의 구 영지인 하리마를 야마나 일족의 영지로 편입했던 소젠은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에 반대하였지만, 야마나 가문의 세력 축소를 노린 가쓰모토는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1450년 소젠은 출가하였다. 같은 해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일족인 시게유키가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노리고, 미쓰스케의 조카인 노리나오를 아카마쓰 가문의 후계자로 추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가쓰모토와 소젠의 대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1458년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이 정식으로 허가되어 가가의 반국 슈고에 임명되자, 소젠은 가가의 슈고였던 도가시 시게하루와 합세하여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가쓰모토의 양자로 들어가 있던 소젠의 막내아들 도요히사가 가쓰모토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출가하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소젠은 도요히사를 환속시켜 집으로 데려오면서 양자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간레이 가문인 시바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에서 가독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다. 시바 가문에서 가독 요시타케가 후사가 없는 채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토시와 시부카와 가문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카도가 가독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시바 요시카도도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마찬가지로 소젠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고 있었다.
소젠이 시바 요시카도 옹립을 지원하자 막부 만도코로의 집사인 이세 사다치카가 시바 요시토시 옹립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요청하면서 시바 가문의 내분은 점점 커졌다.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모치쿠니에게 가독을 물려받은 요시나리에 반대하는 가신들이 모여서 일족의 마사나가를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사나가는 모치쿠니의 아들 요시나리 파에 밀려서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소젠은 처음에는 마사나가를 지원했지만, 요시나리가 소젠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자 하타케야마 가문의 내분은 더욱 심각해졌다.
쇼군 가문에서도 후계자 문제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 쇼군 요시마사는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승려가 되어 있던 동생 요시미를 환속시켜서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실 도미코 사이에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자 요시히사를 쇼군에 취임시키고 싶은 도미코와 요시미가 대립하게 되었다.
요시마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요시미는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후견인으로 끌어들이게 되고, 도미코는 요시히사의 후견인으로 야마나 소젠을 끌어들였다. 아카마쓰 가문, 시바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 쇼군 가문을 둘러싼 모든 문제에서 대립하게 된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대립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고 결국 1467년 무력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1년에 걸쳐 진행된 ‘오닌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다.가쓰모토가 교토에 군세를 모으기 시작하자 소젠도 여기에 대항하여 군세를 모으기 시작했다. 5월에 호소카와 측의 군사가 야마나 측의 잇시키 요시나오의 저택을 불태워 오닌의 난이 시작되었다. 가쓰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소젠 토벌의 명령을 받는 데 성공하였고, 요시미 · 요시히사 · 히노 도미코도 호소카와 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소젠은 관군에 대항해서 싸우는 형세가 되었다.
오닌의 난이 시작되자 슈고 다이묘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졌다. 호소카와 가문이 이끄는 동군에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카마쓰 마사노리 등 24개국 16만 명이 가담하였고, 야마나 가문이 이끄는 서군에는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 시바 요시카도 등 20개국 11만 명이 가담하였다. 쇼군 요시마사는 아들 요시히사와 함께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였다. 전투 초반은 쇼군 가문을 점거하고 요시마사, 요시히사, 요시미를 확보한 동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소젠이 서국의 다이묘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오우치 마사히로가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대군을 이끌고 서군에 합류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러나 동군과 서군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해가 지났고, 그 후로도 각지에서 작은 전투가 있었지만 뚜렷한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1468년, 원래 동군 진영에 가담하고 있던 요시미가 서군에 합세하자 소젠은 요시미를 서군의 쇼군으로 추대하였다. 1469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 요시히사에게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직을 물려주었다. 같은 해 8월, 구 남조 세력이 남조의 황손 오구라노 미야를 추대하여 기이에서 거병하자, 소젠은 오구라노 미야를 영입하였다.
교토에서는 작은 전투는 일어났지만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고 전투는 이미 고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1472년 소젠은 난을 끝내기 위하여 가쓰모토에게 화해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란은 이미 전국 각지로 번졌기 때문에 교토만 강화를 맺는다고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동군과 서군 양쪽에 가담한 여러 세력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강화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실의에 빠진 소젠은 가독을 손자 마사토요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장남 노리토요는 1467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어 1473년 3월 전란의 종식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젠이 죽고 나서 2개월 후에 호소카와 가쓰모토도 눈을 감으면서 오닌의 난을 일으킨 두 대장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를 계기로 양군에서는 평화를 원하는 기운이 고조되었지만 이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결국 1477년 교토를 장기간 점령하고 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가 자신의 영지로 철수하면서 오닌의 난은 막을 내렸다. 쇼군 요시히사의 모친인 히노 도미코가 오닌의 난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 일천 관문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었으며, 오우치 가문에게는 종사위하 좌경대부의 관위를 내리고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슈고에 임명했다고 한다.
소젠의 뒤를 이은 마사토요는 오닌의 난을 틈타서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점령하고 있던 하리마 · 비젠 · 미마사카를 되찾기 위해 출병하여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마사노리의 반격에 패배하고 하리마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야마나 가문의 영국에서는 가신들이 대두하게 되고 야마나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 후 지배 영역이 사실상 기나이 지역으로 축소된 무로마치 막부를 실력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1493년 도미코와 함께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폐위하고 정적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암살한 후에는 완전히 막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센고쿠 다이묘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인물
야마나 소젠은 대체로 오만하고 난폭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야마나 가문의 병사들이 가키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아카마쓰 토벌에 나섰는데, 교토 시내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부하의 피로를 핑계로 묵인하였기 때문에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았다. 소젠이 거느리는 영국 내에서도 공가나 절 · 신사의 장원에 대한 침탈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소젠은 1472년 오닌의 난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동군과의 화해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절망한 나머지 할복자살을 기도했으며, 이때 입은 상처가 이듬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풍문도 전하지만 진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닌의 난을 기록한 군기물인 『오닌기(応仁記)』에는 소젠을 ‘아카뉴도(赤入道)’로 칭하고 있는데 얼굴이 붉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총물어(塵塚物語)』에는 야마나 소젠과 어느 귀족 대신의 문답 이야기가 나오는데, 귀족 대신이 과거의 예를 꺼내서 소젠에게 설명하자 소젠은 “예(例)라고 하는 글자를 앞으로는 시(時)라고 하는 글자로 바꾸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귀족이 중히 여기는 과거의 ‘예’보다 현재의 ‘시’의 우위를 강조한 것은 하극상을 정당화하는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오닌의 난’의 경쟁자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문예에 조예가 깊고 다재다능한 문화인이자 모략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면, 소젠은 이와 대비되어 용맹무쌍하고 군사에는 뛰어나지만 정치성은 부족한 전형적인 무인 기질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