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닌의 난
応仁の乱
1. 개요
1467-1477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란.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키워드는 '하극상'大體今日の日本を知る爲に日本の歴史を研究するには、古代の歴史を研究する必要は殆どありませぬ、應仁の亂以後の歴史を知つて居つたらそれで澤山です。それ以前の事は外國の歴史と同じ位にしか感ぜられませぬが應仁の亂以後は我々の眞の身體骨肉に直接觸れた歴史であつて、これを本當に知つて居れば、それで日本歴史は十分だと言つていゝのであります。
오늘날의 일본을 대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고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오닌의 난 이전에 일어난 일은 외국 역사와 비슷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반면, 그 이후의 일은 우리들의 진정한 신체 곳곳에 맞닿아있는 역사라서 그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으면 그걸로 일본 역사는 충분히 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1467년이 일본의 연호로 오닌(應仁) 원년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름을 따서 '오닌의 난'이라고 한다. 1469년 연호가 '분메이(文明)'로 바뀌었고 내전은 1477년까지 계속돼 학술적으로는 '''오닌-분메이의 난(應仁·文明の亂)'''이라고도 부른다.
미나모토 방계인 호소카와 가문의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호소카와 가에는 옛날에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습니다. '''아,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오닌의 난 때.'''"라는 후덜덜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1] 그는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부친이다.
동시기 조선은 세조, 예종, 성종 때로, 이 난이 발발한 1467년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70년과 1473년에 개략적인 내용이 1476년에 사건의 상세 내용이 조선에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2][3][4] 일본은 오닌의 난으로 내부가 소란스러워 외부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고 중국은 명나라의 치세 아래 안정기가 있어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였던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없이 내부를 다질수 있었다.
2. 발단 및 전개 양상
무로마치 막부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분쟁이 직접적 발단이 되지만, 이미 무로마치 막부는 20년 전부터 망할 날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전제 정치를 하려다 가신 아카마츠 미츠스케 손에 암살당하면서 어린 7대가 쇼군 좌에 올랐다. 7대 역시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동생인 8대 요시마사 역시 어린 나이에 등극한다. 조선에도 미나모토노 요시마사(源義政)로 알려진 인물.
그러나 요시마사가 사치와 연회만 즐기면서 실권이 외척과 가신단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가신단이 서로 갈라지고, 구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으로 옮겨 붙으면서 전 일본을 전쟁을 몰아넣었다. 무로마치 시대는 구세력인 명문 귀족 무사, 공경(문신)들이 새로 등장한 코쿠진(國人), 상인, 대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이다. 단, 신흥 계급 세력도 하극상 형태로 지방에 세력을 잡은 후엔 스스로 자신을 영주(다이묘)라고 이름을 걸었다.
무로마치 막부가 임명한 다이묘를 슈고다이묘라고 하는데 신흥 세력 출신 다이묘들을 이와 구분해 센코쿠다이묘라고 이름한다. 구 세력 내부에서도 슈고다이(守護代, 슈고다이묘의 대리)와 유력가신들이 상전을 쳐내고 스스로 영주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다른 부하에게 배신당하는, 일본은 말그대로 거듭되는 내전으로 빈사 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권위를 잃었다. 가마쿠라 막부 때도 그랬지만 무로마치 막부 역시 겐지 출신 슈고들의 합의 체제였기 때문에 쇼군의 권위가 태생적으로 약했던 데다가, 슈고들 역시 자기 영지의 토착 가문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나마 견제로 작용하는 긍정적 측면마저 오닌의 난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다.
2.1. 쇼군직을 놓고 일어난 갈등
그런 가운데 무로마치 막부의 7대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1년 만에 급사하자 그 뒤를 이어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불과 8살의 나이로 쇼군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불과 8살 나이에 쇼군직을 수행할 수는 없었고, 유력 다이묘와 측신, 유모들이 정치를 대신했다.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무 살 때에 정식으로 쇼군으로 임명되고 히노 도미코(16세)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쇼군 임명 이후에도 그는 정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도나 예술을 좋아하여[5] 누군가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실부인인 도미코와의 사이에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자, 요시마사는 29살 때 출가했던 동생인 기진(義尋)에게 쇼군직을 양위하겠다고 약속한다. 기진은 형에게 만약 아들이 생기면 쇼군직을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고사했지만 요시마사는 '''내가 아들이 생기더라도 쇼군직을 요구할 일은 없다'''라고 재차 설득했기에 기진은 환속하여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로 이름을 바꾸고 형의 양자로 입적하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 후견인으로 유력 다이묘 관령 (쇼군에 이어 넘버2의 자리) 호소카와 가츠모토(細川勝元)가 뒤를 봐주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1465년, 히노 도미코가 아들을 출산,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쇼군으로 만들려는 도미코는 호소카와가와 어깨를 겨루는 실력자 시시키 (군사와 경찰을 담당하는 자리)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에게 백업을 의뢰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후계자 결정을 못 하고 망설이자, 히노 도미코와 아시카가 요시미가 갈등하고 이 갈등은 원래부터 라이벌이었던 두 다이묘의 대립으로 이어지졌으며, 급기야는 전국 다이묘가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무려 27만 명의 군사가 교토에 몰려와 대전투가 벌어지는 내란으로 커져가게 된다.
2.2. 다이묘 가문들의 후계자 다툼
한편, 오닌의 난을 부른 또다른 원인은 유력 다이묘 가문들의 후계자 다툼이었다. 쇼군의 후계자 문제도 있었지만, 다이묘의 집안에서도 상속 문제가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하타케야마(畠山) 가문의 상속 다툼'''. 그런데, 다이묘 집안의 상속이 결정되면 쇼군이 그것을 승인하는 것이 무로마치 시대의 룰이었는데, 그 승인권을 가진 요시마사가 이쪽으로 기울고 저쪽으로 기울고 했다. 이 때문에 쇼군에 대한 신뢰감이 무너졌다.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도 쇼군과 비슷한 문제가 생겨났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畠山持國)는 아들이 없자 동생 모치토요(持富)를 양자로 들였지만, 몇 년 뒤에 친아들이 태어나자 양자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을 취소하고 친아들인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쇼군 요시마사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하타케야마 가문의 유력 가신인 진보(神保) 씨 등이 이를 납득하지 않고 모치토요의 아들인[6] 하타케야마 미사부로(畠山彌三郞)를 후계자로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54년,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미사부로파 가신 진보 쿠니무네(神保國宗)를 주살했다. 이리되자 미사부로는 동생과 함께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와 야마나 소젠(山名宗全; 山名持豐)에게 도망쳤다. 카츠모토와 소젠은 미사부로를 지지했기 때문에 되려 상황이 역전되어 미사부로파가 모치쿠니를 습격했고 모치쿠니는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요시나리도 도망쳤고 쇼군 요시마사는 미사부로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했는데…
요시마사의 변덕이 일을 더 키웠다. 요시마사는 미사부로를 지지한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신들을 처형하라는[7] 명령을 내렸고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이를 받아들이자 야마나 소젠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쇼군에게 반기를 든 탓에 빡친 요시마사가 소젠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카츠모토가 열심히 말린 덕에 사면되어 소젠이 타지마로 내려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미사부로는 다시금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났고, 요시나리가 하타케야마 가문을 접수했다.
이 난리통에 하타케야마 모치쿠니가 1455년 사망하고, 요시나리가 정식으로 하타케야마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요시나리는 눈엣가시같은 미사부로 세력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데, 요시나리는 쇼군인 요시마사에게 '''보고도 안 한 채로 미사부로를 공격하는 게 쇼군의 지시'''라고 구라를 쳐버렸고(!),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던 요시마사가 빡치는 건 당연한 일. 이로 인해 요시나리는 쇼군의 신임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요시나리는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영지인 기즈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카츠모토는 빡쳐서 미사부로의 편을 들어 요시나리를 추방해버리려고 계획했다. 반면 야마나 소젠은 요시나리와 친밀해졌다.
1459년, 미사부로가 사면되고 교토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그만 병으로 죽고 만다. 카츠모토와 미사부로의 가신들은 미사부로의 동생 하타케야마 마사나가(政長)를 옹립하게 된다. 1460년 쇼군 요시마사는 다시 이번에는 마사나가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라고 인정하는 바람에 요시나리는 추방되었고,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2년 여간 내전이 벌어졌다.
이외에도 토가시(富樫), 오가사와라(小笠原), 롯카쿠(六角) 등의 가문에서 가문 내 분쟁이 일어났는데 막부라도 나서서 이걸 잘 조정했다면 몰라도 오락가락하고 일관성없는 행보를 보인 것이 결국 오닌의 난의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후계 계승 문제와 관련해 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에는 당시 일본에서 상속 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상속은 균분 상속으로 딱히 한 명에게 가문을 몰빵시켜주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에서는 대가 내려갈수록 각각의 가문은 점차 세분화되어 약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 시대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한 명에게 상속을 집중시켜서 가문을 유지하려는 형태로 상속 제도가 바뀌어갔다. 이 경우 딱히 장자에게만 상속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상속받게 되면 나머지 형제들은 상속자의 가신이 되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 적자로 상속을 받지 못하면 실로 쩌리나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한 것은 상속을 경쟁하는 형제들이 각각 자신들만의 가신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상속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본인이 쿨하게 양보하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3. 경과
3.1. 분쇼의 정변
이런 가운데 1466년 7월 23일, 쇼군 요시마사는 돌연 가신인 이세 사다치카(伊勢貞親)와 키케이 신즈이(季瓊眞蘂) 등의 간언에 따라 시바(斯波)가의 후계자 자리를 시바 요시카도(斯波義廉)에서 시바 요시토시(斯波義敏)로 바꿔버렸다. 8월에는 시바 요시토시를 에치젠, 오와리, 토토우미의 슈고로 임명했다. 이는 야마나 소젠을 자극했다. 이세 사다치카는 야마나 소젠이 모반하려 한다고 소문을 퍼트렸고, 소젠은 아시카가 요시미의 후견인이던 호소카와 카츠모토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켰다. 9월 6일에 일어난 이 정변의 결과로 이세 사다치카는 오우미로 추방되었고, 쇼군 요시마사의 다수 측근들이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어쩔 수 없이 요시마사는 독자적으로 정치를 펴는 게 불가능해졌다. 권력은 이제 소젠과 카츠모토에게 넘어가게 됐다.
3.2. 고료의 전투
1466년 12월, 야마나 소젠의 지원을 받고 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느닷없이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서 교토 북쪽의 지장원에 진을 쳤다. 이듬해인 분쇼 2년 1월 2일(1467년 2월 6일), 소젠에게 설득당한 쇼군 요시마사는 관령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나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양해도 없이 요시나리를 고쇼로 불렀다. 이어서 요시마사는 마사나가가 관령 관아에서 매년 정월에 행하는 의식인 오나리를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는 요시마사가 마사나가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의 암시였고 결국 사흘 뒤 요시마사는 소젠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요시나리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마사나가에게는 교토의 저택을 양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빡친 마사나가는 관령직을 사퇴했고, 소젠은 낼름 자신의 파에 속한 시바 요시카도를 관령으로 임명해버렸다. 이리되자 소젠에게 권력이 급속도로 기울 것을 우려한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고쇼를 점거하고, 요시마사에게 소젠 토벌령을 내리게 하려 했으나 요시마사의 부인인 히노 도미코가 먼저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소젠에게 정보를 흘리면서 실패하고 만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린 소젠은 자신의 저택 근처의 동맹 슈고 다이묘들의 병력을 규합해 고쇼를 포위하고 '''카츠모토가 하려고 했던 일을 똑같이 하게 된다'''(...). 소젠은 쇼군 요시마사에게 호소카와 카츠모토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추방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요시마사는 카츠모토의 추방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다른 다이묘들이 중립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마사나가를 공격하는 것은 동의했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사나가는 수비하기가 어려운 자신의 저택을 불싸지른 후 고료 신사로 병력을 이동해 전투에 대비했다. 한편 소젠은 덴노와 상황, 황태자를 고쇼에 밀어넣은 뒤 마사나가를 쥐어패기 위해 일어났다. 요시마사는 '''이 싸움은 하타케야마 가문 싸움이니까 절대 다른 다이묘들은 끼어들면 안된다'''라고 명을 내렸으나 소젠편에 선 다이묘중에 이 명령을 '''지킨 다이묘는 없었다.'''(...) 반면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마사나가를 '''버렸다.'''(...) 이때문에 카츠모토는 전투를 피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결국 카츠모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마사나가는 혼자서 요시나리와 소젠 등을 상대하다가 역부족이 되자 한밤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한 것으로 위장해 도망쳤다. 결국 권력은 완전히 소젠에게로 넘어갔지만 희한하게도 카츠모토는 교토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비상시국이라는 명분으로 관령이 하는 직무인 병력 소환이나 훈장 수여 등의 임무를 '''자기 편 다이묘들에게 시행했다.'''
3.3. 폭풍 전야
고료 전투 이후, 카츠모토는 시코쿠 등 자신의 편에 선 9개 지역(쿠니)의 병력을 교토로 소환해 긴장감을 드높였다.
한편 고료의 전투로 교토가 난리통이 되어서 좋지 않다는 이유로 3월 5일에 연호가 분쇼에서 오닌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카츠모토파 군사들이 야마나파의 군사들을 공격해 연공미를 약탈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아시카가 요시미가 조정을 시도했다. 교토에서는 호소카와 쪽 병사들이 각지의 다리를 불태우고 4개 문을 닫았다. 5월에는 카츠모토 파인 전 하리마 슈고였던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하리마로 침입해 이를 탈환했다. 또한 타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와카사에 있던 잇시키 가의 영지로 쳐들어가고, 시바 요시토시는 에치젠을 침공했다. 미노의 토키 가문 일족인 토키 마사야스도 잇시키 가문의 영지였던 이세를 침공했다.
5월 26일에는 무로마치의 서쪽에 있었던 잇시키 요시나오 저택의 정실방(正實坊)을 쇼신인 코센이, 실상원(實相院)을 타케다 노부카타가 점령하고, 노부유키와 호소카와 시게유키의 군사들이 저택을 습격하여 잇시키 요시나오는 습격 직전에 탈출하고 저택이 불타는 것으로 교토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숨어있었던 마사나가를 포함해 전국의 동맹자들을 호출하는 한편, 무로마치를 전화에서 지킨다는 명목으로 쇼군 일행을 확보하고, 자신의 저택에 본진을 차렸다. 무로마치를 탈환한 카츠모토파는 서군쪽에 섰던 막부 봉행중의 책임을 추궁했고, 6월 11일에 온쇼를 관할하던 이노오 스루카즈(飯尾爲數)가 살해당하고 8월에는 만도코로 (政所) 집사 대리였던 이세 사다후지가 추방되었다.
소젠은 5월 20일에 평정을 열고, 이츠츠지 거리 대동궁(大東宮)에 진을 쳤다. 서군은 관령 시바 요시카도의 관령명령장에 의한 지령을 수행했다. 양군의 위치관계에 따라 호소카와 측이 동군, 야마나 쪽을 서군으로 칭하게 되었다. 오닌기에 따르면 동군이 16만, 서군이 11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나,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교토에 집합한 장수들은 호쿠리쿠, 신에츠, 토카이와 큐슈의 치쿠젠, 분고, 부젠 지역이 대다수였다. 지리적으로는 호소카와 일족이 키나이와 시코쿠의 슈고를 맡고 있었던 데다가 그 근처 지역에도 자신들의 세력인 슈고를 배치했었던지라 동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서군은 야마나를 시작으로 호소카와와 그 동맹세력의 대두를 경계하던 지방세력들이 가세했다. 그래서 서군은 쇼군 요시마사의 측근이면서도 타케다 노부카타와의 갈등 때문에 가담한 잇시키 요시나오라든지, 롯카쿠 타카요리나 토키 시게요리 같이 상황에 따라 가담한 자들도 많아 통솔에 불안이 남아있었다.
한편, 간토나 도호쿠, 규슈 남부 등의 지역은 이미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지역내 유력 무사 가문들이 대규모 분쟁을 일으켜, 중앙에서의 분쟁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전란상태에 돌입했다.
4. 본격화된 전쟁
5월 26일, 소젠 저택의 남쪽에 있던 이치조 오미야(一條大宮)의 호소카와 가쓰히사(細川勝久)의 저택을 시바 요시카도의 부하인 아사쿠라 다카카게, 가이씨 등의 서군이 쳐들어갔다. 이들은 응전한 호소카와군과 격전을 벌였고, 동쪽에서 원군으로 온 교고쿠 모치키요(京極持淸)를 거꾸로 물리치기도 했다. 거듭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남하해 오오기마치(正親町)를 지나 이노쿠마(猪熊)를 치고 시바씨 군대를 끌어들이자 호소카와 가쓰히사는 그 틈을 타서 동쪽의 호소카와 시게유키 저택으로 달아났다. 가쓰히사의 저택을 불살라버린 서군은 거듭 시게유키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스모노데라(雲の寺), 햐쿠만벤(百萬遍)의 불전, 혁당(革堂)에도 불을 질러가며 시게유키의 저택을 공격했지만, 동군의 저항으로 결착이 나지 않고 다음 27일에 양군은 물러났다. 이 전투로 북쪽은 후나오카 산(船岡山), 남쪽은 니조 대로까지 타버렸다.
쇼군 요시마사는 28일에 양군에 화목을 명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면서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는 가와치로 내려갈 것을 명하는 한편, 이세 사다치카에게 군을 인솔해 교토로 올라오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6월 3일에 가쓰모토의 요청으로 쇼군의 아기(牙旗)가 동군에 내려지고, 쇼군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에게 서군을 칠 것을 명했다. 6월 8일에는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이치조 오미야에서 야마나 노리유키(山名敎之)를 쳐부수고, 나아가 쇼군 요시마사의 항복 권고에 동요한 시바 요시카도가 자신의 집에 칩거하자 동군은 요시카네의 저택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남북으로 니조에서 고료노 가쓰지(御靈の辻)까지, 동서는 오오토네리마치(大舎人町)에서 무로마치까지 불탔다. 이때까지는 교토에 군세를 모으고 있던 동군이 우세했지만, 6월 14일에 야마토(大和)의 후루이치 다네나가(古市胤榮), 19일에 기이의 하타케야마 마사쿠니(畠山政國) 등 서군의 원군이 차례대로 도착하기 시작했고, 8월 23일에는 스오(周防)에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가 이요(伊予)의 고노 미치하루(河野通春) 등 사이고쿠(西國) 7개 구니의 군세 1만, 2천여 척의 수군을 이끌고 입경하면서 서군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날 천황과 상황이 무로마치정으로 파천하고, 아시카가 요시미가 교토를 빠져나와 기타바타케 노리토모(北畠敎具)를 의지해 이세로 달아났다. 이 시기를 즈음해 서군은 간레이 하지장을 통해 여러 군의 렌쇼(連署)에 의한 지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8월 중에 후나오카 산에 진을 치고 9월 1일에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쳤던 다케다 세력을 축출, 다케다가 버리고 간 산보인(三寶院)에 불을 질렀다. 6일에 쇼군 요시마사가 거듭 요시나리의 가와치 하향을 명했지만 요시나리는 따르지 않았다. 18일에 교토 교외의 난젠지 산(南禪寺山)에서도 전투가 발생했고(히가시이와쿠라 싸움), 10월 3일에 발생한 쇼코쿠사의 싸움은 양군에 많은 사상자를 낸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실된 쇼코쿠사 터에 시바 요시카도군이 진을 치고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야마나 소젠 저택 서쪽으로 옮기면서 동군은 열세에 몰렸다.
조정에 대해서는 10월 3일에 고하나조노 법황이 고후쿠지(興福寺)에 야마나 소젠의 추토를 명하는 치벌 인센(治罰院宣)을 내린 것 말고도 12월 5일(양력 12월 31일)에 오오기마치 산조 긴하루(正親町三條公躬), 하무로 노리타다(葉室敎忠) · 미츠타다(光忠) 부자, 아노 스에토오(阿野季遠) ・ 시미즈타니 사네히사(淸水谷實久) 등 서군파로 몰린 구교의 관직과 작위 박탈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도미코의 친가인 히노 집안과는 대립 관계에 있던 산조 집안의 일족이나, 친척이 대부분 아시카가 요시미를 지지하고 있던 구교들이었다. 오닌 2년(1468년) 3월 17일에 기타오지 가라스마루(北大路烏丸)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와 모리 도요모토(毛利豐元) ・ 고바야카와 히로히라(小早川廣平)가 교전하고, 5월 2일에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시바 요시카도의 저택을 공격하거나 5월 8일에 가쓰모토가 소젠의 진을 치고, 8월 1일에 가쓰모토의 군사가 쇼코쿠사 터의 요시나리의 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투 장소는 점차 도성 밖으로 옮겨갔고, 야마시나(山科), 도바(鳥羽), 사가(嵯峨)에서 양군이 교전했다. 이 해에 시바 요시카도는 막부와 적대하고 있던 간토의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 화목을 제안하고 소젠과 요시나리가 연명으로 서명한 서신을 보냈다.[8] 그러나 쇼군 요시마사는 독단으로 화목을 도모한 시바 요시카도를 7월 10일에 해임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간레이로 임명했으며, 요시카도의 가독 지위와 3개 구니의 슈고직도 마루오마루에게 넘겨버렸다.[9]
오닌 2년 9월 22일, 이세에 체재하던 아시카가 요시미는 호소카와 가쓰모토나 쇼군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동군에 가담했다. 교토로 돌아온 요시미는 요시히사파(義尙派)의 히노 가쓰미쓰(日野勝光)의 배척을 쇼군 요시마사에게 호소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나아가 윤 10월 16일에는 분쇼의 정변에서 요시미와 대립했던 이세 사다치카가 쇼군 요시마사에 의해 정무에 복귀하였고, 11월 10일에는 요시미와 친한 아리마 모토이에(有馬元家)를 살해하는 등 쇼군 요시마사는 확실하게 요시히사 옹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도 요시미를 옹립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출가를 진행시켜, 요시미는 재차 히에이 산으로 출가해야 했다. 11월 23일(양력 12월 19일), 서군은 히에이 산에 사자를 보내 요시미를 맞아들여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하고, 오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등도 이에 편입되어 서군은 '서막부'의 체재를 갖추었고, 요시미가 발급하는 문서에 의해 명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관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동군의 '동막부'에서는 히노 가쓰미쓰, 이세 사다치카 등 요시마사 측근 세력이 커져서 분쇼의 정변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쓰모토로서는 요시미를 굳이 서군에 보냄으로써 소젠에 우호적이었던 히노 도미코를 막부 내에서 고립시키려 했었다고도 추측되고 있는데, 이후 가쓰모토는 서군과의 싸움을 거의 실시하지 않고, 대신 오우치씨와의 전투에 힘을 쏟았다. 이때 오우치 마사히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이미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는 서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교토내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만 일어나는 대신 전장은 셋쓰(攝津) ・ 단바(丹波) ・ 야마시로로 옮겨가 있었다. 때문에 동군은 반오우치 활동을 부추겼는데, 분메이 원년(1469년) 오우치씨 집안의 중신으로 문무양도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던 마스다 가네타카(益田兼堯)가 이와미(石見)에서 오우치를 배반하고 규슈의 오토모 지카시게(大友親繁) ・ 쇼니 요리타다(少弐頼忠)와 함께 오우치 마사히로의 숙부 노리유키(敎幸)를 끼고 서군측의 오우치령에 쳐들어갔고, 분메이 2년(1470년) 2월에는 노리유키 본인이 마사히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반란은 모두 오우치 집안의 스에 히로모리(陶弘護)에 의해 격퇴되었고 오우치 마사히로는 자신의 전력을 따로 끌어올 필요 없이, 7월 무렵까지 야마시로 전역을 서군이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10] 이후 동서 양군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길어진 전란과 도적의 발호는 몇 번이나 전화로 불타버린 교토를 더욱 황폐화시켰다. 교토에 상경해 있던 슈고 다이묘의 영토에까지 전란이 확대되어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슈고 다이묘들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막부 권력 자체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판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츰 동서 양군의 사이에는 전쟁을 혐오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5. 전란의 끝
분메이 3년(1471년) 5월 21일,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으로 서군의 주력이었던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요시마사로부터 에치고 슈고직에 보임되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동군은 결정적으로 유리해졌고, 고가 구보(古河公方) 아시카가 나리우지 추토를 재개할 여유도 생겼다. 한편으로 서군은 옹립을 주저하고 있던 후남조(後南朝) 세력의 오쿠라노미야 황자(小倉宮皇子)라 칭하는 인물을 옹립해 서진남제(西陣南帝)로 삼았으나 곧 내쫓았다. 이 해에 간토의 막부군이 단독으로 나리우지를 물리치고 나리우지의 본거지였던 고가 성(古河城)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는 서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11] 분메이 4년(1472년)에 이르러 가쓰모토와 소젠 사이에 오가기 시작한 화해 교섭도[12] 야마나 가문과 대립하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3월에 가쓰모토는 조카 가쓰유키를 폐적시키고 친자식으로 소젠의 외손자에 해당되는 소메이마루(聰明丸, 호소카와 마사모토)을 옹립한 뒤 삭발했다. 5월에는 소젠이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은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사쿠라이 에이지는 이것을 수타의 의사를 전하는 행위로 보았다).
분메이 5년(1473년) 3월 18일(양력 4월 15일)과 5월 11일(양력 6월 6일), 소젠과 가쓰모토가 차례대로 사망하고, 12월 19일(1474년 1월 7일)에는 요시마사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넘기고 은거했다. 막부에서는 요시히사의 생모인 도미코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요시마사의 실권은 차츰 사라져, 이듬해(1474년) 3월에 요시마사가 오가와(小河)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옮겨가고 무로마치 저택에는 도미코와 쇼군 요시히사 모자만 남게 되었다. 고후쿠지의 벳토(別當)였던 진손(尋尊)은 "천하의 공사가 좋아져 여인에게서 계책이 나오게 되었으며, 구보(요시마사)는 큰 술, 여러 다이묘는 이누가사가게(犬笠懸)와 같이, 천하가 태평한 때와 같이 되었다(天下公事修り、女中御計、公方は大御酒、諸大名は犬笠懸、天下泰平の時の如くなり)"고 평가하였다. 분메이 6년 4월 3일(4월 19일), 소젠의 손자 야마나 마사토요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이에 화목이 성립되었다. 나아가 이 무렵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의 아들 요시하루(義春)가 요시마사 앞으로 출두하고, 단고 잇시키씨 집안도 동군에 귀순했다. 그 후로도 동군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아카마쓰 마사노리, 서군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오우치 마사히로를 중심으로 타성적인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군의 도키 나리요리(土岐成頼)의 가신으로 미노의 슈고 대리였던 사이토 묘슌(齋藤妙椿)은 활발한 군사활동으로 미노 · 오오미 · 이세에 출병해, 에치젠에서는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 가이 도시미츠(甲斐敏光)와 아사쿠라 다카카게를 서로 화목시켰다. 가이 도시미츠는 이듬해인 7년(1475년) 2월에 도토우미 슈고 대리에 임명되면서 동군으로 돌아섰고, 고립한 요시카도는 11월에 오와리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요시토시파의 슈고 대리 오다 도시사다(織田敏定)와 충돌, 이후 행방불명된다.
분메이 7년에는 화목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어 9월에 요시마사가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세상무위(世上無爲)'의 문서를 보내고 12월에는 요시미가 요시마사에게 공순할 것을 맹세했으며 요시마사도 요시미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분메이 9년(1477년) 9월 22일에는 주전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마사나가를 추토한다는 명분으로 가와치로 내려가고, 오우치 마사히로 등의 여러 다이묘도 11월 11일(양력 12월 16일)에 각기 철수하면서 서군은 사실상 해체되어(서군의 해체는 불과 하루만에 끝났다고 한다), 교토에서의 전투는 수습되었다. 요시미도 도키 나리요리와 함께 미노로 갔다. 9일 뒤 막부에 의해 '천하태평'의 자축연이 열림으로써 11년에 이르는 오닌의 난은 막을 내렸다.
6. 영향
이 난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또한 이 난의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격화된 무사들의 분쟁은 결국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무로막치 막부는 사실상 망한 거나 다름 없고 행정력이 교토 근처에만 미칠 정도로 초라한 세력이 되었다.
히노 도미코는 사실상 권력 투쟁에 성공했으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1489년에 병으로 25세로 후손 없이 요절하면서 결국 경쟁자인 요시미의 아들인 요시키(=요시타네)가 다음 쇼군에 오른다.
[1] 아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을 주도한 가문 중 하나'''다.[2] 실록 본문에 오닌의 난 주동자가 두명 나오는데 "야마나도노(山名殿) 사에몬노카미(佐衛督) 미나모토노 모치토요(源持豐) = 야마나뉴도(山名入道)"는 야마나 소젠, "호소카와도노(細川殿) 우쿄노다이부(右京大夫) 미나모토노 카츠모토(源勝元)= 호소카와 우쿄노다이부(細川右京大夫)"는 호소카와 카츠모토다.[3] 둘 다 미나모토의 후손을 칭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둘을 각각 미나모토노 모치토요(源持豐)(야마나 소젠의 이전 이름), 미나모토노 카츠모토(源勝元)로 인식하고 있었다.[4]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야마나 소젠은 사에몬노스케(左衛門佐)를 맡다가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로 승진했다고 나오므로 실록의 좌위독 운운은 실제 야마나 소젠의 환로(宦路)와 어긋난다.[5] 참고로 동시대 조선의 세조와도 교류가 있어 팔만대장경 인쇄본 같은 많은 불교 문화재를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약탈한 건 아니고…[6] 모치토요는 이미 사망[7] 사실 주군에게 반기를 든 셈이긴 하지만.[8] 앞서 막부의 간토 정책의 일환으로서 시바씨의 당주가 된 요시카도였기에 나리우지와 막부의 화목이라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가독에 간레이직의 확보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9] 서신을 보낸 달은 2월부터 3월로 추정되어 쇼코쿠사의 싸움의 뒤에 서군이 유리해진 상황에서 시바 요시카도가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10] 노리유키는 분메이 3년 12월 26일에 부젠에서 자결했다.[11] 특히 간토에 대한 정책으로 지위를 보전하려던 요시카도의 입장이 위험해졌다.[12] 평소 소젠의 아들들이 요시나리 지원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나 야마나 가문 내에서도 전쟁을 혐오하는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