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카우지

 


[image]
이름
足利 尊氏(あしかが たかうじ
아시카가 다카우지
초명
足利 高氏(あしかが たかうじ
아시카가 다카우지
신장
180cm[1]
생몰년도
1305년 8월 18일 ~
1358년 6월 7일
재임기간
1338년 9월 24일 ~
1358년 6월 7일
1. 개요
2. 생애
2.1. 성장과 거병
2.2.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겐무 신정
2.3. 거병, 도주, 그리고 재기
2.4. 팡파레는 울렸으나
3. 인물 평가
4. 대중 문화
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가마쿠라 시대 말기, 남북조 시대의 무장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명은 '마타타로(又太郎)', 본 이름은 '다카우지('''高'''氏)'였다. '다카우지('''尊'''氏)'는 개명한 것. 그의 두 이름 모두 편휘를 받아 지어진 이름이다.
첫 이름인 高氏는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 호죠 다카토키(北条高時)에게서 편휘를 받아 지은 이름이고, 바꾼 이름인 尊氏는 협력관계였으나 나중에 적대관계로 돌변한 고다이고 덴노의 휘인 '다카하루(尊治)'에서 편휘를 받은 것이다.

2. 생애



2.1. 성장과 거병


본래 그의 집안은 겐지 계열의 명문 가문으로[2] 시모츠케 국(下野國)[3]의 아시카가 장원을 근거지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 쇼군의 혈통은 끊어지고 본래 헤이시에 해당하는 호조 집안이 싯켄 자리에 있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덴노였던 고다이고가 막부 타도를 목표로 거병하자 가마쿠라의 호조 정권은 다카우지에게 이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다카우지는 당시 아버지의 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이유로 출병을 거부했으나 막부 정권이 다카우지의 정실과 자식을 인질로 잡고 출병을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파병했다고 한다. <고전태평기>라는 사료에서는 이 무렵에 다카우지가 막부 정권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무튼 고다이고의 막부 타도 계획은 실패했고, 막부에 의해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1333년에 유배지를 탈출하여 다시 거병했고, 막부는 다시 다카우지에게 출병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때의 출병에서 다카우지는 덴노의 밀지를 받고 막부를 배반하여 덴노 편에 섰다. 그리고 주변의 영지를 지키던 무사들에게 거병을 촉구하는 서장을 보내 교토 일대를 공격, 교토 주변에서 막부 세력을 소멸시켰다.

2.2.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겐무 신정


그때 간토의 유력 무사 중 하나였던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하자 자신의 적자인 센쥬오(뒷날 2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파견[4]하여 막부 타도의 병력 결집에 공헌했고, 닛타 요시사다 등과 함께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결국 막부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소멸하자 고다이고 덴노는 이른바 '겐무 신정(建武新政)'이라는, 덴노를 중심으로 한 율령국가로의 복귀를 꾀했는데, 다카우지는 이 겐무 정권에서 공신으로서 높은 관직과 영지를 하사받았고, 덴노의 휘인 '다카하루'에서 편휘를 받아 尊氏로 개명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처음부터 헤이시였던 호조 정권을 쓰러뜨리고 겐지의 적통인 자신의 가문이 중심이 되는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고다이고와는 당연히 반목하게 되었고, 겐무 신정에서는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무사 계층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데 힘썼다. 그 와중에 고다이고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과 크게 대립했고, 모리요시는 다카우지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카우지는 고다이고의 첩 중에 자기의 소생인 츠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이 덴노에 오르기를 바라던 아노 야스코와[5] 결탁하여 모리요시 친왕이 황위 찬탈을 시도했다는 죄를 씌우고 포박하여 유폐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호조 잔당들과 친왕이 연계하지 못하도록 부하를 보내 암살해버린다.
그러던 중 1335년 가마쿠라에 있던 호조 정권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카우지는 덴노의 칙명도 없이 출병하여 이 반란을 진압[6]했고 그대로 가마쿠라에 눌러앉아 자기 멋대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을 내렸다. 당연히 고다이고 덴노는 다카우지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무시한다.

2.3. 거병, 도주, 그리고 재기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요시사다 토벌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렸다. 교토에서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를 내세우며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 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 시 스루가 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 고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면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해 12월에 요시사다를 하코네,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마침내 교토에 입성했다. 고다이고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입경의 기쁨도 얼마 되지 않아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오슈에 파견된 구게(公家)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7]와 가마쿠라 토벌전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낸 명장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이 이를 공격하자 이들에게 완패, 다카우지는 교토를 버리고 규슈로 도망쳤다. 그러나 아카마츠 엔신을 비롯한 규슈 일대의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무사들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수습할 수 있었다. 또한 고곤 상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아 나름대로 명분을 확보하기도 했다.[8]
서부 무사들의 지원으로 재기에 성공한 다카우지는 다시 역공을 펼쳐 덴노 지지 무사들을 격파해 나갔고, 1336년 음력 4월에 최대의 적이었던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연합군을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요시사다는 이때 살아서 도망쳤으나 마사시게는 이 전투에서 패해 자결했다. 그리고 이해 6월에 교토로 돌아왔고 고다이고는 또다시 히에이 산으로 쫓겨갔다.
덴노군에 타격을 입힌 다카우지는 히에이 산으로 쫓겨간 고다이고에게 화의를 요구했고 고다이고도 이에 응해 3종 신기를 고곤 상황의 아들인 고묘 덴노에게 양도했으며, 이후 다카우지는 새로운 무가 정권을 선언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양도한 3종 신기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요시노에 정주,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며 요시노에서 또 다른 조정을 수립했다. 이로써 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4. 팡파레는 울렸으나


1338년 다카우지는 고묘 덴노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아시카가 막부를 열었다.[9] 이듬해 다카우지와 항쟁을 계속한 고다이고 덴노가 죽자, 다카우지는 고다이고의 명복을 위해 덴류지를 건립했다.
막부 개설을 전후해서 또다른 숙적이었던 닛타 요시사다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도 모두 패사하여 막부는 안정되는 듯 보였지만 남북조의 대립으로 전란 수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새 막부의 불안정은 내부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본래 다카우지는 신막부를 수립하면서 정무를 자신의 동생인 아시카가 타다요시에게 맡겼고, 자신은 무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는데[10] 이 이원화된 권력이 막부 내부의 대립을 초래하고 말았다. 타다요시에게 반대하는 주요 공신 고노 모로나오를 중심으로 한 당파와 타다요시 지지파간의 대립이 생기고 만 것. 이를 '''간노의 요란(観応の擾乱)'''이라고 한다.
다카우지는 처음에 중립적인 입장을 표시했으나 자신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모로나오[11]를 무시할 수 없었고, 급기야 1349년에는 모로나오 일파의 습격을 받은 타다요시가 다카우지 저택에 숨어들자 모로나오 일파가 저택을 포위하여 타다요시의 은퇴를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타다요시는 출가하여 정계를 은퇴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모로나오와 다카우지가 타다요시를 내치기 위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 후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있던 자신의 적자 요시아키라를 타다요시의 직책에 앉히고, 차남인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해 관동 지방의 통치를 맡겼다. 그런데 1350년 다카우지의 서자로 타다요시에게 양자로 간 아시카가 타다후유가 규슈에서 타다요시 파벌 재흥을 꾀한 일이 발생하자 다카우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러자 타다요시는 '''교토를 탈출해 남조 조정에 가담'''했고,[12] 몇몇 무장들도 타다요시를 따랐기 때문에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 모두 타다요시에게 패배했다. 이렇게 되자 1351년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 형제를 출가시키는 조건으로 동생과 화의를 맺었고, 모로나오는 출가하여 호송되던 중 우에스기 요시노리에게 살해되었다.
타다요시는 요시아키라의 보좌역으로 정계에 복귀했으나 사실 화의는 위기를 넘기기 위한 임시방편이었고, 다카우지는 타다요시를 토벌하기 위해 남조와 일시 화의를 맺은 후 타다요시 군대를 격파하여 그를 붙잡아 유폐시켰다. 타다요시는 유폐되어 있던 중 이듬해인 1352년 급사하는데, 다카우지가 독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어찌보면 최충헌, 최충수 형제와 상황이 비슷한데, 최충헌은 싹이 커지기전에 바로 자른 반면에 다카우지는 오래 질질 끌었다는 차이가 있다.[13]
이렇게 공신들이나 형제까지 제거해 가며 막부의 안정을 꾀했지만 수습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다카우지는 죽을 때까지 남조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고, 서자이자 타다요시의 양자인 타다후유[14]의 토벌을 꾀하다가 결국 1358년 4월에 교토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54세. 그가 수습하지 못한 남북조 전란기의 수습은 손자이자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대인 1392년에 가서야 수습된다.[15]

3. 인물 평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막부 창건자들이 그렇지만 상대한 라이벌들에 비해서 인기가 많이 떨어진다.
요리토모나 이에야스에 비해서도 상당히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막부 창건자인데, 특히 유학이 유입된 에도시대와 덴노 중심사관이 지배했던 메이지 유신 이후, 다카우지의 평가는 글자 그대로 땅바닥을 쳤다. 그 이유야 위에서 나왔듯이 덴노를 거의 능욕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유교적 근왕사상으로 봐도 매우 부정적이고, 근대 제국주의 일본에서는 덴노를 아예 서양식 절대군주를 벤치마킹해 신성시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도 말기에 대정봉환이 이루어진 직후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 요시미츠의 세 쇼군의 목상의 목이 잘려 효수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16] 도쿠가와 요시노부보신전쟁에서 충분히 싸워볼만한 상황인데도 끝까지 항거하지 않고 에도성을 무혈개성한 것도 조적으로 지명받은 상황에서 더 싸워서 다카우지 같은 역적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에는 재평가도 행해졌고 오늘날에는 꼭 '역적'이라고까지 논의되지는 않는다. 한창 재평가가 될 무렵에 이루어진 연구에는 "어쩌다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역적 취급까지 받게 되었는가"라는 주제가 역사학계에서 논의된 적도 있었다고 할 정도. 그리고 요시카와 에이지가 <태평기>를 소설로 쓰면서 이 소설 또한 다카우지의 이미지 개선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줬다고도 하는 모양.
그러나 일대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요리토모나 이에야스에 비해 정권의 창건자치고는 정치적 기량이나 부하 관리능력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는 인상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군사적 능력도 제법 갖추었고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규슈로 도주하는 중에도 다른 무사들의 지원을 받아내는 수완도 있었으며, 자신이 어려울 때에도 부하들에게는 공에 따라 아낌없이 은전을 베풀면서 필요하면 음험한 모략도 구사하는 등 리더로서의 능력이나 자질은 보통 이상이었지만 그것이 난세를 평정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지 같은 막부 창건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상당히 떨어지는 편. 본인의 대에 남북조의 평정을 완료하지 못했던 것도 이야기가 깔끔하게 딱 떨어지지 않아 인기가 낮은 한 요인이다.
다만 요리토모나 이에야스보다 개성적인 점을 들면 풍류인,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이 둘보다 뛰어났다는 것. 무사임에도 시짓기나 그림 그리기 등의 예술활동을 좋아했다고 하며 '츠구바슈(菟玖波集)'라는 남북조시대의 렌가(連歌)집에 60여수의 렌가를 남겼고, '<신센자이와카슈>(新千載和歌集)'라는 와카집을 만들도록 했다. 또한 그림 분야에서는 지장보살을 직접 그리는 등 그가 그린 그림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4. 대중 문화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작품은 1991년 NHK 대하드라마 태평기(메가드라이브, PC엔진으로만의 호화 게임으로도 등장)이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소설 <사본태평기>가 원작. 주연은 사나다 히로유키. 이 작품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남북조 시대 말기~무로마치 막부 초기를 다룬 유일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보통 남북조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다카우지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다카우지보다는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닛타 요시사다의 인기가 많은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악역을 맡곤 한다.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한다. 마사시게와 요시사다와 함께 등장하는데 라이벌들에 비해 능력치도 균형잡혀 있다. 정치 82, 전투 76, 지모 85에 특기도 농업, 외교, 등용, 기동, 공성 특기를 가지고 있다. 전투치는 요시사다를 능가할 정도. 다만 등장시기가 늦어서 보기가 어려운 편. 2시나리오가 1271년 시작인데 다카우지는 1320년에야 등장한다. 예술가로서 제법 소질이 있었던 인물 치고는 문화 특기가 없다.
[image]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열풍전 플레이스테이션판에서는 '제왕(諸王)의 싸움'이라는 일종의 영웅집결 시나리오[17] 플레이 가능한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얼굴은 징기스칸4의 얼굴이다. 여기서 오프닝 이벤트가 제법 개그인데 손자인 요시미츠와 함께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거성으로 쳐들어가서 "내가 세운 아시카가 막부가 요 모양 요 꼴로 돌아가는 걸 못 보겠다! 내가 대신 막부를 다스린다!"며 요시아키의 거성을 탈취해 버린다. 요시아키는 조상님 얼굴을 보더니 그냥 넘겨준다.[18] 맨 위의 개성 넘치는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징기스칸 4의 얼굴과는 달리 람세기에서는 아래쪽의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듯한 비교적 평범한 얼굴로 등장한다.
이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인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도 일종의 고대무장 개념의 추가장수로 등장한다. 징기스칸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의 얼굴은 모두 저 맨 위 초상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차나왕 요시츠네의 작가 사와다 요시후미의 작품 <산적왕>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어쩐지 채치수와 비슷하게 생겼다. 여기서는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할 중요한 5명의 인물이 각각 몸에 별 모양의 점을 가지고 있는데 막부 타도 후에는 이 별이 몸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다카우지의 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를 본 다카우지는 "내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인가?"라고 홀로 생각한다. 호조 정권 타도 시점에서 작품이 끝나서 다카우지의 이후 행보는 나오지 않는다.

5. 여담


[image]
흔히 곱슬머리장발 헤어 스타일인 오른쪽 초상화가 다카우지의 것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것이 다카우지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고노 모로나오(高師直, ?~1351)의 초상화거나 아니면 확인할 수 없는 무사의 초상화라고 간주하고 있다. 다카우지의 초상으로 공인받은 상단의 초상화는 히로시마 현 오노미치 시에 있는 절인 죠도지(浄土寺)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image]
교토 진고지(神護寺)라는 사찰에 소장되어 있는 일명 '진고지 3상(象)' 가운데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것으로 전해지는 이 초상화 역시 사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고, 이 설은 현재 일본 학계에서 차츰 힘을 얻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죠도지 소장 초상화와 미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키가 180cm로 당시 일본인 평균은 물론이며 현재 일본인 평균보다도 크다.[19]

[1] 이 책을 보면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키를 약 180cm로 소개하고 있다.[2] '''하치만타로(八幡太郞)'''라 불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넷째 아들 요시쿠니(義國)가 시모츠케 국의 아시카가(足利)에 뿌리를 내린 뒤 요시쿠니의 둘째 아들인 요시야스(義康)부터 아시카가 씨를 칭하게 되었다. 요시쿠니의 첫째 아들 요시시게(義重)는 닛타 씨(新田氏)를 칭했기 때문에, 아시카가와 닛타는 사실상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집안이었다.[3] 오늘날의 도치기현에 해당한다. 초속 5센티미터의 첫 에피소드에서 이와부네역의 대합실에 아시카가 테마여행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4] 아버지의 대리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장성한 인물이었을 것 같지만 이 당시 센쥬오는 '''3세'''였다. '''다카우지를 대신해서 어린 적자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5] 고다이고 덴노가 붕어하고 뒤를 이은 고무라카미 덴노가 아노 야스코 소생의 황자였다.[6] 막부 개설은 이 뒤의 일이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 때 다카우지가 칙명도 없이 그냥 출병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이대장군 직함을 내렸다. 전장에서는 장군의 명령이 1순위이고 천자의 조칙은 다음이라는 논리.[7] 앞서 가마쿠라에 유폐되어 죽음을 당한 모리요시 친왕의 처남이다.[8] 당시 일본의 덴노 계승은 조금 복잡했는데, 이른바 '다이가쿠지 계통(大覚寺統)'과 '지묘인 계통(持明院統)'이라는 두 개의 황통이 존재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막부 때문에 이 두 황통이 10년간 로테이션으로 덴노직을 맡게 되어 있었다. 당시 덴노였던 고다이고는 다이가쿠지 계통이었고, 고곤 상황은 지묘인 계통.[9] 흔히 아시카가 막부를 '무로마치 막부'라고 부르고, 다카우지 역시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으로 불리지만, '무로마치 막부'란 단어의 어원이 되는 '무로마치'는 손자이자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대에 쇼군의 거처가 되었다.[10] 이를 두고 초기의 아시카가 막부는 다카우지와 타다요시 형제의 일종의 양두 체제였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11] 집안 대대로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執事)를 맡아온 고(高) 가문 출신으로, 이 사람은 군담소설 태평기의 영향으로 "지독하게 못생긴 데다가, 부하들이 사찰이나 신사 같은 남의 땅을 마구 빼앗아도 못 본척 할 만큼 횡포가 심한 인물이어서 주변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던", 신불이나 천황의 권위도 우습게 보는 악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있었지만, 최근의 일본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고, 오히려 그가 정치, 군사 방면에서 실시하고 도입한 여러 가지 정책과 제도들이 무로마치 막부의 초석이 되는 등 막부 혁신파의 명재상이었다는 긍정론이 대두하였다.[12] 일본측 위키백과 설명에 따르면 다카우지와 타다요시 형제는 애초에 나이도 한 살 차이인 연년생으로 사이가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심지어 다카우지가 절에 바친 공양문 가운데 "내가 이승에서 받기로 되어 있는 행운을 모두 타다요시한테로 가게 해 주소서"라고 적은 것도 있다고. 그랬으니 새로운 막부의 정무를 쉽게 맡길 수 있었을 것이고. 타다요시 역시 형과의 정치적 알력 때문에 남조로 망명했을 때도 "막부가 먼저 북조를 해체하고 모든 실권을 남조에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조 조정에 "지금 천하의 안위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것은 북조의 막부와 무사들이니, 남조도 막부와 화의를 맺고 나면 막부의 요구대로 남조도 교토로 돌아가 북조와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형이 세운 막부의 정통성을 옹호했고, 자신이 발급하는 문서에는 모두 북조측에서 쓰던 연호인 '간노(觀應)'를 사용했다고.[13]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현대 정신의학의 기준에서 조울증이 의심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에게 역적으로 몰렸을 때에도 그것을 비관해서 "출가할랜다"는 말을 내뱉거나, 전쟁 도중에 전세가 자신에게 조금만 불리해져도 "할복할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고. 《원위집》(源威集)에는 분나(文和) 4년(1355년) 도지(東寺) 전투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다카우지는 '평소와 같은 미소'로 "'''전투에서 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니 적이 다가오면 자해할 시기만 알려 주면 된다'''"라며 자리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원위집》의 저자는 다카우지는 오니가 다가와도 태평할 것이라며 그의 담력을 극찬하지만, 정말 담이 세서 그랬을지는... [14] <태평기>에는 에치젠노 쓰보네라는 여인의 소생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 다카우지에게 아들로써 인정받지도 못했고 다카우지의 정실이나 그 소생들로부터 지독하게 견제당했는데, 그런 처지를 안타까워한 숙부 타다요시가 양자로 들였다고 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관련해 '간노의 소란'과 아시카가 타다후유의 존재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는데, 간노의 소란으로 막부가 내란을 겪고 타다요시의 죽음으로 타다후유가 막부와 맞서고자 규슈에서 세력을 규합하는 와중에 규슈 지역 무사들 사이에 막부를 따를 것인지 타다후유를 따를 것인지를 두고 지휘계통의 혼선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일부 무사들이 탈주(+타다후유와 맞서던 다자이후 쇼니 씨 세력이 군자금을 목적으로 약탈을 명령)해 고려 및 중국 강남 방면으로 약탈을 간 것이 전기 왜구의 시작이었다는 해석이다.[15] 우연이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다.[16] 요시미츠는 대놓고 덴노를 부정하진 않았으나 명에서 '일본국왕' 지위를 받아 대놓고 덴노 앞에서 사실상의 왕 행세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역적 취급. 물론 명에서도 덴노가 군주라는 건 알고 있었고 언제까지나 진짜 왕이 아니라 실권자라는 의미로 준 것이다.[17] 단순한 군웅집결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 뿐만 아니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삼국지의 군주들과 칭기즈 칸, 남송 마지막 황제, '''광무제'''에다가 심지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까지 일본통일을 노린다는 설정의 막나가는 시나리오다. 거기다가 이 시나리오에서는 '''잔 다르크까지 나온다.''' 그냥 코에이 영웅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이 시나리오는 플레이스테이션, PSP 파워업키트, NDS판에서만 플레이 가능하다.[18] 이 시나리오는 노부나가의 야망 람세기의 PS판에서도 나오는데 손자 요시미츠와 잇큐를 만나는 것과 다짜고짜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거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똑같지만 조상님들 얼굴을 보더니 데꿀멍했던 전작과는 달리 여기서는 요시아키가 '''미친 놈들 취급을 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조상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버린다.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 세력은 다른 거성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게 된다.[19]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중 키가 공개된 유일한 쇼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