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여
1. 개요
양진여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양진여의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다가 나라를 구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전남 담양의 삼인산에 풍정암이라는 절을 짓는다. 풍정암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비밀 훈련소였고, 동시에 부인 박순덕과 함께 전 재산을 들여 군자금 확보를 위해 여러 마을에 주막을 짓는다. 또 아들 양상기는 나라를 위해 싸우라는 당부를 받아 1905년경에 서울 시위대에 입대한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강제 해산이 연이어 일어난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결국 의병을 일으키고, 군대 해산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양상기도 의병장으로 활약하는 아버지를 보고 광주경찰서의 총기 수십정을 탈취해 따로 의병을 일으킨다. 두 부자(父子)는 서로 합류해서 활동하는 한편 각각 의병대를 이끌고 활동하기도 한다.
양진여는 정읍, 순창, 고창, 담양 등지의 일본 헌병대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린다. 결국 일본군 광주수비대장이 나서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의병 토벌에 나서게 된다. 양진여는 맞서서 장성군 비치에서 격전을 펼쳤으나 무기의 열세로 수십명이 죽는 피해를 입는다. 다시한번 군자금 조달 및 의병 양성에 노력하며 때를 기다렸고, 인근 의병장 김태원이 지원을 요청하자 50명의 의병을 파견해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준다. 한편 아들 양상기는 나주, 동복, 화순 등지에서 활동한다.
1908년 11월에는 전라남도 지역의 의병들이 담양군 대전면 한재 부근으로 모였다.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가장 큰 걸림돌인 일본 광주수비대를 섬멸하기 위한 것.
연합작전에 참여한 의병은 양진여 300여명, 양상기 200여명, 영광에서 온 전해산 300여명 등 9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일본 광주수비대가 선제공격을 시도했고, 연합 의병대는 11월 23일부터 12일동안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작전은 실패 및 보류되었고 양진여도 총상을 입는다.
거기다 겨울이 오면서 의병들의 사기도 떨어져가고 양진여는 부상당한 몸을 추스리고 소규모 부대를 통한 유격전을 벌이게 된다. 1909년에 광주, 나주, 영광, 장성 등지의 헌병대를 공격해 전과를 올렸으나 또 총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까지 놓인다. 의병들은 갑향골로 데려가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지휘관의 부재는 의병들에게 치명적인 요소로 다가왔고, 설상가상으로 일제가 남한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전국의 의병들을 이 잡듯이 잡기 시작해 은신처마저 드러난다.
1909년 8월 25일 갑향골 주막 주변을 일본 헌병대의 가지무라 중위가 습격했고, 양진여는 거기서 체포된다.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30일에 형이 집행되어 순국한다. 죽기 전에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을 이루지 못함에 슬퍼했다. 아들 양상기도 54차례의 전투를 벌이다 1909년 12월에 체포되고, 사형이 확정되어 1910년 같은 감옥에서 순국한다.
부인 박순덕과 막내아들도 일제의 보복으로 갖은 고초를 받다가 막내아들은 26세에 요절, 박순덕은 1945년 2월에 사망한다. 동생 양서영 또한 독립운동을 하다 유배형을 받는 등 이회영 못지 않은 독립운동 집안이었다.
사후 공적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는다. 아들 양상기도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게 된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64~16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