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피셔
1867~1946 뉴욕 출생. 예일대학교에서 수학·물리학을 공부하고 유럽 유학 후 모교에서 1892∼1895년 수학, 1895∼1935년 경제학을 가르쳤다. 계량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32년 계량경제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경제분석에 수학적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근대경제이론 개척자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화폐이론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물가문제의 분석·대책에 실천적 공헌을 하였고, 뉴딜정책 입안에도 관여하였다.
《화폐의 구매력 The Purchasing Power of Money》(1911), 《이자론 The Theory of Interest》(1930)을 저술하여 피셔의 교환방식으로 널리 알려진 화폐수량설을 전개하였다. 이 이론은 기계론적 수량설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원리적 분석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가치와 가격 이론의 수학적 연구 Mathematical Investigations in the Theory of Value and Prices》(1892)는 수리경제학의 고전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다. 《지수작성법 The Making of Index Numbers》(1922)에서의 지수공식에 관한 연구는 피셔식 지수로 유명하다.
이렇게만 본다면 성공한 경제학자로 보이지만 금융업계에서는 '''주식투자 실패의 아이콘으로 유명하고 경제학자로서의 명성도 같이 날려먹었다'''.
어빙 피셔는 1920년대 주식시장의 활황과 함께 처가집 재산을 종잣돈으로 하여 자신이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미국 주식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였고, 이로 인해 경제학자로써의 명성은 물론 성공한 투자자라는 명성까지 얻었으며 수많은 미국 개미들이 어빙 피셔의 주식투자 전략을 따라했다. 그러나 어빙 피셔는 1929년 주식값이 고점에 다다른 다음에 조금씩 침체되는 양상을 보이자 “주식시장은 앞으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고점에 도달 했습니다.”라는 발언을 남기면서 주식값이 여전히 상승한다쪽에 베팅을 하면서 손절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며 주식값이 미칠듯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미국은 경제 대공황 상태에 빠지게되며 어빙 퍼셔의 전략을 따라하던 개미들은 하루 아침에 집과 직장, 재산을 날리며 알거지가 되는 경우가 속출했고 어빙 퍼셔 본인도 그간 쌓아올렸던 명성은 물론이고 재산까지 까먹으며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어빙 피셔의 집을 구매한 예일대에서 그간의 연구성과를 감안해서 집에서 퇴거당하지는 않았고 예일대에서 계속 임용되어서 지속해서 연구활동을 하며 돈벌이를 했기는 했지만 결국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재산과 명성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이후로 밀턴 프리드먼이 어빙 피셔의 이론에 주목하여 어빙 피셔가 어느정도 재평가받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제 아무리 업적을 남긴 경제학자라고 해도 주식투자에 얼마든지 실패할수있다는 점과 경제학자들이 내놓는 이론들도 현실과 동떨어지면 그 댓가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선례를 단단히 남긴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