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해윤

 


성명
엄해윤(嚴海潤)
생몰
1863년 ~ 1909년 11월 30일
출생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사망지
경성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엄해윤은 1863년생이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출신이다. <영월군지>에 따르면, 그는 서자였으며 의원(醫員) 일을 맡았다고 한다. 1906년 가을 노응규가 충북 황간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여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부임해 중군장 서은구, 종사관 노공일과 함께 무기를 수집 제조하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맹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윽고 병력이 증강되자 군사를 파견하여 철도 등 적군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고 일본군의 척후병을 섬멸하여 각처의 의병진과도 연락하며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1907년 1월 노응규가 이끄는 의병진이 밀정에게 탐지되었다. 이때 순검 이연식 등에 의하여 노응규, 노공일 등 주동인물 6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노응규는 옥사했고, 엄해윤 등은 유배형 7년을 선고받고 황해도 장연군 백령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 1908년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다시 이은찬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했다. 그는 이은찬 의병대에서 참모로 활동했으며, 이은찬의 부대에서 이종협(李鍾協) 의병장의 부대가 따로 분리될 때 함께하여 이종협 의병진의 참모로 활동했다. 그러나 1908년 12월 황해도 금천, 토산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 군사경찰대에게 체포되었고, 경성형무소에서 5년간 징역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1909년 4월 14일, 엄해윤은 류문재, 오남석, 이성팔, 유현서 등과 함께 벽을 부수고 탈옥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결국 체포되었고, 1909년 10월 18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11월 30일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엄해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