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응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가계
노응규는 중종대 문신 노필의 후손이다. 그는 기묘사화 때 탄핵을 받아 고향인 고성 구만촌으로 돌아간 뒤 그곳에 은거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이후 자손들은 대대로 고성 구만촌에 거주했다가 후에 초계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노응규의 6대조인 시혁이 거제도로 옮겨간 후 몇 대 동안은 그곳에 거주했다. 하지만 노응규의 부친인 노이선(盧以善)이 거창 고제면 초계로 다시 이거했다가 인근에 있는 안의현 현내면으로 옮겼다. 그는 이 곳에서 수리관개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2006년 8월, 재야사학자 이태룡은 노응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종증조부라고 주장했다. #[1] 그는 16대 대통령 선거 직후에 '신암 노응규 의병장 문집'을 청와대에 보냈고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고맙다'는 편지까지 받았다고 한다.
2.2. 초년기
노응규는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살림이 곤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호남 지역에 거주하던 그의 일족인 노종룡은 노응규에 대한 제문을 지으면서 그가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라고 밝혔다. 허전은 남인 계통의 유학자로, 3년 동안 김해도호부사를 맡아 김해를 다스리면서 많은 유림들을 모아 학문을 진작시켰다. 이로 인해 경상우도 지역의 많은 유림들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문인들을 수록한 <성재문록>에는 노응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노종룡이 영남 지역의 광주 노씨들 허전의 문인이 많으므로 노응규도 허전의 문인이라고 지레 짐작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현재까지는 확실하지 않다.
노응규는 남인보다는 당시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하던 노론계 인물들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훗날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직후 올린 상소에서 최익현, 송병선(宋秉璿) 등 당시 노론계 유명 인물들의 제자임을 내세웠고, 그에게 가담한 이들 중 정한용, 정재규, 전상무, 권봉희 등도 노론 계열이었다.
2.3. 을미의병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뒤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생들이 이끄는 의병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했다. 노응규도 1896년 음력 1월 초에 그가 거주하는 안의현에서 거병을 결심하고 동지들을 규합한 후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하여 정도현(鄭道玄), 박준필(朴準弼) 등과 함께 진주로 진군했다. 그들은 진주 향교 장의였던 한진완 등과 거사를 논의했고, 진주성내의 동정을 살핀 후 다음날 새벽 진주성을 공격해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때 순검 2명과 중령 1명이 살해되었고, 진주관찰사와 경무관을 비롯한 여러 관리들은 도주했다.
진주성이 의병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도 날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거기에 며칠 후 정한용(鄭漢鎔)이 진주 사람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켜 호응하자, 진주성을 점령한 지 불과 10여일 만에 진주로 몰려든 의병이 1만명에 달했다. 노응규의 진영은 진주성 내에 포진했고, 정한용의 진영은 성 밖에 있는 진주 관아아 포진하여 각각 병영의소, 본주의소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력 1월 14일, 양 의병장은 하늘에 제사지내고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장수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그들은 창의의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의병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각 상소를 올렸다. 의병에 쓰일 군량미는 각처의 창고에 있는 것을 썩고 자금은 각종 상납금을 전용하기로 했다. 또 고을 내의 공의를 거쳐 군량미 2천 석과 돈 2만 량을 본주 부호가에 배정하여 수납하였고, 전주 이외의 다른 고을에도 일정한 수의 병력을 보내 각지의 부호가에서 자금을 거두었다.
한편 노응규와 정한용은 인근 고을의 사림, 이서 등에게 통문을 띄워 고을 단위로 의병을 조직해 고을을 적으로부터 방어하고 진주를 중심으로 서로 연대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많은 고을에서 의병이 조직되지 않자, 정한용은 해당 고을의 아전과 향임들에게 고을 단위의 의병 조직을 독촉하면서 10개 조목의 방수절목도 같이 첨부해 보냈다. 방수절목은 각 고을, 각 면, 동 단위로 오가작통법에 따라 주민들을 통제하되, 적이 침입하면 자체적으로 방어하고, 적이 많으면 인근 고을과 연대하거나 진주 의소로 알려 지원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음력 1월 15일, 노응규는 선봉장 서재기를 단성으로 파견해 군수를 붙잡아오게 한 뒤 개화의 죄를 논하다가 풀어줬다. 뒤이어 하동(河東)·고성(固城)·함안(咸安) 등으로 세력을 뻗쳤으며, 일본인과 결탁한 친일파는 물론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자른 자들을 처단해 반일·반침략 위정척사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통영 통제사에게 연락을 취해 포군 정예병 100명과 돈 3천 관문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진주를 중심으로 의병들이 조직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면서 진주 의병과 관군 사이의 충돌도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예가 음력 1월 17일 의령에서의 충돌이었다. 노응규가 진주성을 공격할 때 대구로 달아났던 진주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에서 군대를 요청해 16일 1백 명을 이끌고 의령군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진주로 향한다고 하면서 의령군수를 협박하고 부형을 결박하고 아전에게서 500냥을 빼앗았으며, 또 군기를 탈취하고 의령 주민들을 강제로 관병에 편입시키려 했다. 의령군수는 겁에 질려 향교로 도피했다가 몰래 진주 창의소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의병이 파견되자, 관군은 급히 의령 외곽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의병 수가 얼마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관군이 다음날 반격해오자, 의병대는 패주했다. 이후 음력 1월 18일 밤, 서재기와 오종근 등 5명의 장령이 이끄는 진주 의병 540명이 추가로 의령읍으로 들어왔다. 관군은 출격해 맞섰지만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해오자 냇물을 건너 대구로 도주했다. 의병은 그들을 추격해 관군 3인을 잡아 참수했다.
이렇게 해서 관군을 격파한 의병대는 기세를 몰아 일본 공관과 일본군이 있는 부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김해군수가 조세를 착복하고 단발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포박하고 세무주사를 잡아 조정에 납부할 세금을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김해군수는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수일 전 부산항에 피신했고, 의병들은 지도부로부터 충분한 금곡을 비축하고 병정을 훈련시켜 이후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고 부교로 철수했다.
음력 2월 28일, 의병대가 다시 김해로 진격했다. 그들 중 약 200명은 구포의 일본군 수비지역 및 부산 거류지를 습격하고자 구포에서 김해에 이르는 선암(仙岩)나루터에 집결했다. 이에 2월 29일 일본의 구포 수비대는 정찰병 1개 분대를 김해 방면으로 파견했다. 그들이 도착하자 김해 주민이 운집하여 성문을 닫고 이들을 막아섰다. 이후 벌어진 교전에서 주민들이 패해 달아났고, 일본군은 김해 장악에 성공했다. 이후 의병대와 일본군은 2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결국 의병대는 부산 진공 계획을 포기하고 진주로 회군했다.
음력 2월 말,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이 전해지고 해산하지 않는 의병에 대해서는 경병을 파견해 토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진주 의병은 3월 초 경병에 맞서 서재기를 안의로, 정한용은 삼가로 이동해 주둔했다. 진주에는 노응규가 겨우 50~60명의 병사를 인솔해 관병의 공격에 대비했다. 음력 3월 12일 밤, 관병 700명이 진주에 와서 먼저 2명의 척후를 파견해 성벽에 올라가 의병들의 동정을 정찰했다. 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관군은 선봉 200명을 파견해 곧바로 성벽을 파괴하고 성내를 향해 발포했다. 당시 성내에 있던 노응규 부자 및 의병들은 남문 밖으로 도주했고, 수백 명의 인민은 포성의 놀라 성밖 강변으로 도망하여 3척의 배에 뛰어들었지만 배가 뒤집혀 모두 익사했다.
노응규는 정한용의 진영으로 도망갔지만 정한용의 군사 역시 일시에 궤주했고, 안의에 주둔하던 서재기도 안의의 향리들에 의해 살해되고 의병은 흩어졌다. 노응규는 삼가로 피신했다가 정한용에 의해 옥에 갇혔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발로 인해 곧 풀려났다. 노응규는 이로 인해 정한용이 자신을 개화파에게 팔아넘기려고 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당시 진주 의병에 가담했던 많은 유생들도 정한용이 나라의 적인 개화파에게 아부했으며 군대가 궤주한 건 정한용이 제멋대로 해산시켰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정한용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이 일부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내려진 것으로 보고 끝까지 근왕 활동을 하려고 군사를 나누어 각 곳에 배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노응규가 쉽게 패해 도망오자 수하의 병사들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을 정한용 본인이 말렸다고 한다. 또한 그가 고종에게 재차 올린 상소에는 아직 국가의 원수를 제대로 갚지 못했으며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아직 피신해 있는 상황이므로 칙교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해산할 수 없으니 용서해달라는 뜻을 밝혔다. 이로 보면 그가 노응규를 감옥에 가둔 건 노응규와 연대와 경병에 맞서면서 근왕활동을 계속하려 했는데 노응규가 패산해 일을 망쳤다고 생각해 제재를 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2.4. 지부자현소
노응규는 삼가에서 풀려난 후 음력 3월 8일에 남은 동지들과 함께 거창으로 가서 자고 이튿날 무촌에 도착했다. 이때 최두언 등이 달려와서 전날 밤에 안의에서 노응규의 부형이 향리들에게 살해되었고 가산이 적몰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노응규는 안의로 들어가지 않고 전라도 무주 등지로 피신했고 다시 충청도 의소로 찾아갔지만 일이 여의치 않자 바로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개성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북쪽 지방 사람들이 아직 강성하니 의병을 일으키면 대사를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정작 북쪽 지방 사람들은 청일전쟁 때 흩어지고 전쟁을 두려워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전라도로 내려와 진도, 보길도 등 여러 섬을 전전하다 제주도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박진길이 말리자 광주 일속촌에 있는 친척들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여름을 보내면서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기우만을 만났고, 그해 7월 순창이석표(李錫杓)의 집에 가서 상당기간 동안 머물렀다. 이듬해인 1897년 4월, 그는 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러나 도중에 자신을 구명하려는 상소를 올리려던 유생들이 서울의 역졸들에게 모조리 축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다시 서울을 벗어나 교하로 가서 여름을 보냈다.
이후 고종이 의병장들의 충정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관직을 내리거나 불러들이자, 그는 10월 1일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과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의 주선으로 도끼를 든 채 궐내에 들어가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렸다.
이에 고종이 비답을 내렸다.신이 삼가 《춘추(春秋)》의 의리를 상고하여 보건대 역적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죽여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의 관동(關東)과 당(唐) 나라의 하북(河北)에서 충의(忠義)로 분개한 의로운 지사들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董卓)과 안녹산(安祿山)을 친 것은 한(漢) 나라의 헌제(獻帝)나 당(唐) 나라의 명황(明皇)의 명령이 없이 한 것이지만 《강목(綱目)》에 크게 기록하고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이 의리로 미루어 볼 때 나라에 있는 역적에 대해서 폐하(陛下)가 치지 못했고 감사(監司)가 치지 못했다고 해서 비록 미천한 유생(儒生)이라도 역시 치지 못한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역적을 치는 큰 의리가 폐하의 명령을 받는 것보다 급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 을미년(1895) 8월의 변란은 천지개벽 이래로 없었던 큰 변란으로서 우리나라의 신하들이 만대를 두고 꼭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폐하는 자신의 몸도 아침저녁으로 보전할 수 없는 형편에서 어느 겨를에 역적을 치고 복수를 할 조치를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감사들은 역적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을 섬기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더구나 역적을 치고 복수할 마음인들 있었겠습니까?
계속해서 11월에 있었던 머리를 깎는 화변은 또한 천하를 끌어다 오랑캐로 만들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짐승과 같은 처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천하에 수치스러운 것이 되지 않겠으며 기자(箕子)와 우리 선대 임금들의 충성과 효성, 예의와 교화는 장차 어디에서부터 그 모범을 본받겠습니까.
다행히도 수도에 있는 한두 명의 관리들이 먼저 역적을 치자고 제창하자 각 고을의 유생들로서 의리를 앞세우고 급히 달려온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비록 부녀자나 아이들과 같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도 오히려 모두 주먹을 부르쥐고 기회를 기다리면서 한번 칼을 휘둘러 역적을 치려고 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옛사람의 글을 읽었으므로 군신간의 의리나 중화와 오랑캐 간의 큰 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또한 가슴속에 분노가 가득 차서 역적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이 어찌 편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으며 한번 가슴속에 들어찬 분노를 폭발시켜 보지 못하겠습니까? 마침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진양(晉陽)에서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한편으로는 밀봉한 상소를 올려 신이 나서는 것의 정당성을 진술하고 피로 쓴 격문을 돌려 수일 사이에 뜻을 같이하여 의를 위해 달려온 선비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며칠 안으로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올라가서 폐하를 뵙고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기다려서 역적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한 후에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죄에 대해 처벌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하에게 글이 채 올라가기도 전에 일이 도리어 잘못되어 군사들이 먼저 무너져서, 충의로 인한 분개는 씻어버리지 못한 반면에 악명만 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변란 속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나 신은 알지도 못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난리 중에 어디로 흩어져 갔는지 신은 또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할 겨를이 없이 매우 급박하여 달아나서 숨는 자가 비록 국모의 원수는 잠시도 살려두어서는 안 되지만 어찌 군부(君父)의 명 또한 엄중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폐하의 명령이 내린 후에 의병(義兵)들을 해산하여 보내고 원한을 품고 원통함을 참으면서 단지 나라에서 역적들을 쳐서 복수하는 날을 바랐을 뿐입니다.
아, 신은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나섰다가 나라의 원수는 갚지 못하고 집안의 화란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위로는 폐하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부모에게 효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첫째 죄입니다.
군사들이 내려오는 날에 신은 비록 감히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았으나 또한 스스로 잡혀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숨겨 멀리 도망친 것이 둘째 죄입니다.
아버지와 형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줄 사람이 없이 지금 이미 1년이 지났는데 아직 상복도 입지 못하여 자식으로서의 의리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옛날의 임금과 부모의 원수를 갚는 사람들은 시퍼런 칼날이나 끓는 물, 타는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신은 구차하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하나의 대책이나 한 가지의 꾀도 내놓지 못하고 자고 먹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보통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넷째 죄입니다.
신은 이처럼 네 가지의 큰 죄가 있으나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있으니 어찌 한 치의 비수나 한 자의 끈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죽는 것도 도리가 있으니 오직 나라의 법에 의해 죽어야만 그 죄를 밝힐 수 있이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나라의 법을 신에게 적용하여 드러내놓고 처단함으로써 세상의 신하와 자식으로 된 사람들로서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할 줄 알게 한다면 신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다.
고종실록 고종 34년 19월 27일자 기사
이후 노응규는 장례를 치르러 부형의 고향인 거창 쾌암 마을에 도착했지만 안의 향리들이 그마저 죽이려 들어 할 수 없이 10월 20일 초계군 관아 근처인 아막골에 장례를 치렀다. 그해 12월, 노응규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기선 등을 만나 주선을 부탁했고, 이듬해 4월 초 부형에 대한 복수문제를 국왕으로부터 재차 허락을 받아냈다. 고종은 노응규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안의의 서리들을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노응규는 1899년 3월에야 비로소 부형의 장사를 제대로 거행했다.네가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으니 가상하다. 깨닫고 개진하는 것이 너의 도리일 것이다.
노응규는 장례를 마친 뒤 귀향하여 수년간 조상의 세거지였떤 초계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들을 모았고, 강학을 통해 문인 사우들과 교류했다. 또한 1902년 10월 규장각(奎章閣)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그뒤 경상남도 사검(査檢) 겸 독쇄관(督刷官)·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동궁 시종관(東宮侍從官)의 중책을 맡아 수행하면서 국왕을 보위했다.
2.5. 을사의병과 최후
노응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재차 거병해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고종은 비밀리에 노응규에게 시찰사(視察使)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거의를 독려했다. 노응규는 족손(族孫)이며 문인인 노공일(盧公一)과 함께 광주에 있는 노종룡(盧鍾龍)을 찾아가 재차 거병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익현이 1906년 6월 4일에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 의진은 당일 태인읍을 점령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고, 뒤이어 정읍, 순창을 공략했다. 그러나 6월 12일 순창에 주둔하고 있다 관군과 대면하자, 최익현은 "어찌 신하된 몸으로 관군에 맞섬으로서 임금께 역심을 보이겠는가."라며 군대를 해산시켰고 얼마 안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노응규는 가까스로 몸을 피해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용배동으로 피신해 다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진행했다. 그 후 1906년 늦가을 충청북도 황간군 상촌면 물한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 밀정이 이 사실을 간파했고, 결국 노응규는 1906년 12월 8일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노응규는 서울 경무청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1907년 1월 4일 옥사했다. 향년 4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노응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