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캐스트너
[image]
Erich Kästner, 1899년 2월 23일 ~ 1974년 7월 29일
독일의 문학가(소설가, 시인, 극작가, 풍자가. 위키피디아 기준). 주로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썼으며[1] 유머러스하지만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문체가 특징이며 인류애, 정의로운 사회와 현대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1960년 자서전[2] "내가 어렸을 때에(Als ich ein kleiner Junge war)"로 한스 크리스티안센 메달을 수상했다.
1899년 당시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의 쾨니히스브뤼커 거리(Königsbrücker Straße)에서 태어나고 자랐다.[3] 현재 이 거리에는 캐스트너 박물관이 있는데, 그 위치는 후술될 그의 삼촌 프란츠 아우구스틴(Franz Augustin)의 빌라 1층이다. 아버지 에밀 리하르트 캐스트너(Emil Richard Kästner)는 집안 전통에 따라 가죽 공예 마이스터가 되었는데 당시 산업화의 여파로 직업을 잃고 직공 신세가 되었고[4] 어머니 이다 아말리아 아우구스틴 캐스트너(Ida Amalia Augustine Kästner)는 푸주술 마이스터 집안[5] 이었던 아우구스틴 가문 출신으로 하녀로 일했다가 누나들의 주선으로 에밀 캐스트너를 만나서 결혼했다. 하지만 30대라는 늦은 나이에[6] 미용사가 되었다. 캐스트너 집안은 결코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아파트의 방 세 칸 중 두 칸을 세놓아야 했고[7] 침실의 1/4는 미용실로 개조해야 했다고 한다.
이다 아밀리아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인생에 큰 실망을 하고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쏟아부었는데, 이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고 안정된 직업인 선생을 하겠다던 아들[8] 이 느닷없이 김나지움을 가서 아비투어[9] 를 치고 대학으로 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어도[10] 찬성을 보냈을 정도. 실제로 캐스트너 자신도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 특히 어머니와 친했다고 한다.
어머니 집안인 아우구스트 집안에 대해서는 좀 설명할 게 있는데, 이 집안은 대대로 푸주술 마이스터 집안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토끼 판매로 장사 수완을 보여준 프란츠, 파울, 로베르트 세 형제의 경우[11] 훗날 말(馬) 장사로 아주 크게 성공한다. 파울 아우구스트는 왕실 말 공급인이라고 형제들 사이 조롱삼아 불릴 정도였는데, 프란츠 아우우구스트는 반대로 퉁명스럽고 무례하고 거칠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쉽게 말해 마이 페이스적인 사람이었지만 캐스트너는 이 삼촌을 더 좋아했고, 자서전에서도 프란츠 아우구스트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성공한 이후 자신이 살던 헤히트 거리에서 안톤 거리 1번지의 널찍한 고급 빌라로 이주했고[12] 아내(리나 아우구스트), 가정부, 그리고 딸(도라 아우구스트)하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 딸의 경우 파울 슈리히 선생과 썸을 탔지만 프란츠의 거절로 도로아미타불. 프란츠 아우구스트는 자서전의 묘사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다시 돈을 모았고, 결국 통나무처럼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리나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아서 도라의 아들인 프란츠[13] 를 돌봤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생부는 주치의였던 유대인 메디치날라트[14] 에밀 침머만 선생(1864-1953)[15] 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설이다.
1917년 징병되어 중포병 부대에서 일했으며, 당시 전쟁의 비참함과 군대 생활의 고통은 훗날 그의 반전 사상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자서전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나온 작품이라 전후 혹은 군대 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데,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군대 생활을 보면 그렇게 좋은 생활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예를 들어 연병장에서 98형 기관총을 들고 무릎굽혀펴기 250번(!)을 했다던가, 아버지가 일하던 군수 공장 근처 탄약고가 폭발해서 아버지가 죽을 뻔했다던가(좀 몸이 그을리긴 했어도 멀쩡했다고 한다).
전후 그는 위에서 언급되었듯 시 장학금을 받았으며 191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들어갔다. 1925년 프리드리히 1세와 독일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며, 또한 노이어 라이프치거 차이퉁(Neue Leipziger Zeitung, 굳이 해석하자면 '신 라이프치히 신문' 정도)에서 비평가로 일하다가 1927년 "경솔한" 시를 실어 해고당했다[16] . 같은 해 베를린으로 이주했지만 베르톨트 뷔르거(Berthold Buerger. 뷔르거에는 '시민'이라는 뜻이 있다)라는 가명으로 같은 지에 프리랜서 통신원으로 일했다.
이후 1927년부터 1933년까지는 그의 전성기로 알려진 시기인데, 수많은 시, 신문 칼럼, 기사, 많은 유명 베를린 비평지들에 비평을 남겼다. 현재 약 350건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이보다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4년 2월 전쟁 도중 그의 아파트가 불타서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
그의 첫 번째 책은 1927년 시집인 Herz auf Taille(요부의 심장)이며 33년까지 3권의 시집을 더 냈지만 1928년 어린이용 소설 "에밀과 탐정들(Emil und die Detektive)"로 더 유명하다. 독일에서만 200만 부가 팔리고 5차례나 영화화되었을 정도로 성공했다. 당시 어린이 소설의 트렌드였던 판타지 배경이 아닌 현시대 베를린을 기준으로 묘사한 것과 과도한 도덕적 교훈이 아닌 어린아이들다운 묘사와 말투를 그대로 소설에 담은 것이 독특한 점. 후속작인 "에밀과 세쌍둥이(Emil und die Drei Zwillinge, 1933)"와 더불어 현재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추리 소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당시 유명 작품으로는 <핑크트헨과 안톤>, <하늘을 나는 교실>, <파비앙(Fabian)>[17]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1932년 작품인 <5월 35일>에서는 무려 '''핸드폰'''이 묘사된다! 주머니 속에서 어디로 연결되었을지 모르는 전화선이 연결된 큼지막한 집전화 수화기가 튀어나오긴 하지만. 이 외에도 '하늘에 연기 형태로 떠오르는 신문', '인간이 필요 없는 100% 전자동 도축기' 등도 묘사된다. 1931년작 <에밀과 탐정들> 영화판은 대성공이었는데, 정작 캐스트너 자신은 불만을 품고 이로 인해 극작가가 되었다고.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몰아내고 제3제국을 설립하면서 캐스트너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기에 독재 및 나치에 반대한 문학지성들 중 하나였으며 반(反) 나치 운동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반나치주의 작가들과 달리 망명을 가지는 않았는데, 나치 집권 이후 스위스 메랑(Meran)에서 망명간 작가들을 만난 적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어머니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추측이 있다. 결국 그는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몇차례 받았으며 작가 길드(사실상 어용단체)에서도 쫓겨났고, 그의 작품들이 그 유명한 분서 사건[18] 에서 불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때 캐스트너는 그 장면을 직접 보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1934년 스위스에서 <눈 속의 세 남자(Drei Maenner im Schnee)>라는 비정치적 극본을 출간했으며, 1942년 위에서도 언급된 베르톨트 뷔르거라는 가명으로 뮌히하우젠 남작에 관한 극본을 지었다. 웃긴 것은 이 작품이 괴벨스가 뒤를 봐주었던 Ufa GmbH(당시 이름 Ufa Studio) 25주년 기념으로 쓰였다는 것.
1944년 캐스트너가 당시 베를린에서 거주하던 집이 공습으로 불탔고, 1945년 드레스덴 폭격으로 그의 유년 시절의 집 또한 불탔다. 이 부분은 훗날 출판된 그의 일기 및 자서전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후 그는 서독의 뮌헨에 정착했고 노이어 차이퉁(Neue Zeitung)의 문화부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연극, 연설, 에세이 등의 작품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원래 가명으로 영화 각본으로 썼으나 나치에게 들통이 나서 영화 제작이 중지되고, 전후에야 발표된 <쌍둥이 로테(Das doppelte Lottchen)>(1949)는 인기작으로 몇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그는 반전주의와 평화주의적 성격으로 서독과 동독의 분열에 반대했으며, 훗날의 베트남 전쟁도 비판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출간이 점차 줄어들었고, 50년대 이후로는 전후 서독의 문학 운동에 참가하지 않아 어린이용 소설 작가로만 인정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서독 PEN(국제문인단체)의 의장이 되고[21] 1960년 한스 크리스티안센 메달을 받는 등 작가로서의 영향력은 죽지 않았다. 또한 그의 작품의 영화화도 계속되었으며 자신의 작품도 계속 낭독했다. 1974년 노이펠라흐(Neuperlach) 병원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뮌헨 보겐하우젠(Bogenhausen) 구역의 장크트 게오르게(St.George) 묘지에 묻혔다.
Erich Kästner, 1899년 2월 23일 ~ 1974년 7월 29일
1. 개요
독일의 문학가(소설가, 시인, 극작가, 풍자가. 위키피디아 기준). 주로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썼으며[1] 유머러스하지만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문체가 특징이며 인류애, 정의로운 사회와 현대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1960년 자서전[2] "내가 어렸을 때에(Als ich ein kleiner Junge war)"로 한스 크리스티안센 메달을 수상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899년 당시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의 쾨니히스브뤼커 거리(Königsbrücker Straße)에서 태어나고 자랐다.[3] 현재 이 거리에는 캐스트너 박물관이 있는데, 그 위치는 후술될 그의 삼촌 프란츠 아우구스틴(Franz Augustin)의 빌라 1층이다. 아버지 에밀 리하르트 캐스트너(Emil Richard Kästner)는 집안 전통에 따라 가죽 공예 마이스터가 되었는데 당시 산업화의 여파로 직업을 잃고 직공 신세가 되었고[4] 어머니 이다 아말리아 아우구스틴 캐스트너(Ida Amalia Augustine Kästner)는 푸주술 마이스터 집안[5] 이었던 아우구스틴 가문 출신으로 하녀로 일했다가 누나들의 주선으로 에밀 캐스트너를 만나서 결혼했다. 하지만 30대라는 늦은 나이에[6] 미용사가 되었다. 캐스트너 집안은 결코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아파트의 방 세 칸 중 두 칸을 세놓아야 했고[7] 침실의 1/4는 미용실로 개조해야 했다고 한다.
이다 아밀리아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인생에 큰 실망을 하고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쏟아부었는데, 이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고 안정된 직업인 선생을 하겠다던 아들[8] 이 느닷없이 김나지움을 가서 아비투어[9] 를 치고 대학으로 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어도[10] 찬성을 보냈을 정도. 실제로 캐스트너 자신도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 특히 어머니와 친했다고 한다.
어머니 집안인 아우구스트 집안에 대해서는 좀 설명할 게 있는데, 이 집안은 대대로 푸주술 마이스터 집안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토끼 판매로 장사 수완을 보여준 프란츠, 파울, 로베르트 세 형제의 경우[11] 훗날 말(馬) 장사로 아주 크게 성공한다. 파울 아우구스트는 왕실 말 공급인이라고 형제들 사이 조롱삼아 불릴 정도였는데, 프란츠 아우우구스트는 반대로 퉁명스럽고 무례하고 거칠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쉽게 말해 마이 페이스적인 사람이었지만 캐스트너는 이 삼촌을 더 좋아했고, 자서전에서도 프란츠 아우구스트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성공한 이후 자신이 살던 헤히트 거리에서 안톤 거리 1번지의 널찍한 고급 빌라로 이주했고[12] 아내(리나 아우구스트), 가정부, 그리고 딸(도라 아우구스트)하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 딸의 경우 파울 슈리히 선생과 썸을 탔지만 프란츠의 거절로 도로아미타불. 프란츠 아우구스트는 자서전의 묘사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다시 돈을 모았고, 결국 통나무처럼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리나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아서 도라의 아들인 프란츠[13] 를 돌봤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생부는 주치의였던 유대인 메디치날라트[14] 에밀 침머만 선생(1864-1953)[15] 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설이다.
1917년 징병되어 중포병 부대에서 일했으며, 당시 전쟁의 비참함과 군대 생활의 고통은 훗날 그의 반전 사상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자서전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나온 작품이라 전후 혹은 군대 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데,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군대 생활을 보면 그렇게 좋은 생활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예를 들어 연병장에서 98형 기관총을 들고 무릎굽혀펴기 250번(!)을 했다던가, 아버지가 일하던 군수 공장 근처 탄약고가 폭발해서 아버지가 죽을 뻔했다던가(좀 몸이 그을리긴 했어도 멀쩡했다고 한다).
2.2. 라이프치히 - 베를린 전기(1919 - 1933)
전후 그는 위에서 언급되었듯 시 장학금을 받았으며 191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들어갔다. 1925년 프리드리히 1세와 독일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며, 또한 노이어 라이프치거 차이퉁(Neue Leipziger Zeitung, 굳이 해석하자면 '신 라이프치히 신문' 정도)에서 비평가로 일하다가 1927년 "경솔한" 시를 실어 해고당했다[16] . 같은 해 베를린으로 이주했지만 베르톨트 뷔르거(Berthold Buerger. 뷔르거에는 '시민'이라는 뜻이 있다)라는 가명으로 같은 지에 프리랜서 통신원으로 일했다.
이후 1927년부터 1933년까지는 그의 전성기로 알려진 시기인데, 수많은 시, 신문 칼럼, 기사, 많은 유명 베를린 비평지들에 비평을 남겼다. 현재 약 350건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이보다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4년 2월 전쟁 도중 그의 아파트가 불타서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
그의 첫 번째 책은 1927년 시집인 Herz auf Taille(요부의 심장)이며 33년까지 3권의 시집을 더 냈지만 1928년 어린이용 소설 "에밀과 탐정들(Emil und die Detektive)"로 더 유명하다. 독일에서만 200만 부가 팔리고 5차례나 영화화되었을 정도로 성공했다. 당시 어린이 소설의 트렌드였던 판타지 배경이 아닌 현시대 베를린을 기준으로 묘사한 것과 과도한 도덕적 교훈이 아닌 어린아이들다운 묘사와 말투를 그대로 소설에 담은 것이 독특한 점. 후속작인 "에밀과 세쌍둥이(Emil und die Drei Zwillinge, 1933)"와 더불어 현재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추리 소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당시 유명 작품으로는 <핑크트헨과 안톤>, <하늘을 나는 교실>, <파비앙(Fabian)>[17]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1932년 작품인 <5월 35일>에서는 무려 '''핸드폰'''이 묘사된다! 주머니 속에서 어디로 연결되었을지 모르는 전화선이 연결된 큼지막한 집전화 수화기가 튀어나오긴 하지만. 이 외에도 '하늘에 연기 형태로 떠오르는 신문', '인간이 필요 없는 100% 전자동 도축기' 등도 묘사된다. 1931년작 <에밀과 탐정들> 영화판은 대성공이었는데, 정작 캐스트너 자신은 불만을 품고 이로 인해 극작가가 되었다고.
2.3. 베를린 후기 - 종전(1933-1945)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몰아내고 제3제국을 설립하면서 캐스트너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기에 독재 및 나치에 반대한 문학지성들 중 하나였으며 반(反) 나치 운동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반나치주의 작가들과 달리 망명을 가지는 않았는데, 나치 집권 이후 스위스 메랑(Meran)에서 망명간 작가들을 만난 적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어머니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추측이 있다. 결국 그는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몇차례 받았으며 작가 길드(사실상 어용단체)에서도 쫓겨났고, 그의 작품들이 그 유명한 분서 사건[18] 에서 불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때 캐스트너는 그 장면을 직접 보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1934년 스위스에서 <눈 속의 세 남자(Drei Maenner im Schnee)>라는 비정치적 극본을 출간했으며, 1942년 위에서도 언급된 베르톨트 뷔르거라는 가명으로 뮌히하우젠 남작에 관한 극본을 지었다. 웃긴 것은 이 작품이 괴벨스가 뒤를 봐주었던 Ufa GmbH(당시 이름 Ufa Studio) 25주년 기념으로 쓰였다는 것.
1944년 캐스트너가 당시 베를린에서 거주하던 집이 공습으로 불탔고, 1945년 드레스덴 폭격으로 그의 유년 시절의 집 또한 불탔다. 이 부분은 훗날 출판된 그의 일기 및 자서전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에 캐스트너는 1945년 초 <잘못된 얼굴(Das falsche Gesicht)>라는 필름을 찍는다는 핑계로[20] 스위스 티롤 지방의 마이르호펜(Mayrhofen)이라는 곳으로 도피해 종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정말이지 드레스덴은 멋진 도시였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아니, 내 말을 꼭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자 아버지를 두었어도, 내 말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갈 수는 없다.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단 하룻밤 사이에,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그 도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지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그 도시를 땅 위에서 날려버리기엔 두어 시간으로 족했다. 1945년 2월 13일의 일이었다. 전투기 팔백 대가 수류탄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허벌판만 남았다. 뒤집힌 원앙 어선처럼 보이는 몇 무더기의 거대한 잿더미와 함께. -내가 어렸을 때에[19]
2.4. 전후 - 사망
전후 그는 서독의 뮌헨에 정착했고 노이어 차이퉁(Neue Zeitung)의 문화부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연극, 연설, 에세이 등의 작품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원래 가명으로 영화 각본으로 썼으나 나치에게 들통이 나서 영화 제작이 중지되고, 전후에야 발표된 <쌍둥이 로테(Das doppelte Lottchen)>(1949)는 인기작으로 몇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그는 반전주의와 평화주의적 성격으로 서독과 동독의 분열에 반대했으며, 훗날의 베트남 전쟁도 비판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출간이 점차 줄어들었고, 50년대 이후로는 전후 서독의 문학 운동에 참가하지 않아 어린이용 소설 작가로만 인정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서독 PEN(국제문인단체)의 의장이 되고[21] 1960년 한스 크리스티안센 메달을 받는 등 작가로서의 영향력은 죽지 않았다. 또한 그의 작품의 영화화도 계속되었으며 자신의 작품도 계속 낭독했다. 1974년 노이펠라흐(Neuperlach) 병원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뮌헨 보겐하우젠(Bogenhausen) 구역의 장크트 게오르게(St.George) 묘지에 묻혔다.
3. 여담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asteroid)이 있다. 12318 캐스트너(12318 Kästner).
- 평생 독신이었지만 루이제로테 엔데를레(Luiselotte Enderle)라는 여자와 동거해 [22] 1957년 아들 토마스 캐스트너를 낳았다. 그의 극후반 작품인 <엄지 소년(Der kleine Mann, 1963)> 및 <엄지 소년과 엄지 소녀(Der kleine Mann und die kleine Miss, 1967)>[23] 은 그의 아들에게 바친 작품이다. 어린아이용 작품으로는 이 두 작품이 마지막이다.
- 머리말 쓰기를 정말, 정말 좋아하는 작가다. 소설을 보면 머리말이 두 개 이상 달린 일이 흔하다.
4. 주요 작품
- 시집 "요부의 심장" (Herz auf Taille, 1928년 [24] )
- 에밀과 탐정들 (Emil und die Detektive, 1929년)
- 핑크트헨과 안톤 (Pünktchen und Anton, 1931년)[25]
- 파비안 (Fabian, 1931년)
- 5월 35일(Der 35, Mai, 1931년)
- 마법에 걸린 전화기 (Das verhexte Telefon, 1932년)
- 하늘을 나는 교실 (Das fliegende Klassenzimmer, 1933년)
- 에밀과 세 쌍둥이[26] (Emil und die drei Zwillinge, 1934년)
- 시집 "캐스트너 박사의 가정상비약" (Doktor Erich Kästners Lyrische Hausapotheke, 1936년) [27]
- 동물회의(Die Confelenz der Tiere, 1949년)[28]
- 두 로테 [29] (Das doppelte Lottchen, 1949년)
- 독재자 학교 (Die Schule der Diktatoren, 1957년)
- 내가 어렸을 때에(Als Ich ein kleiner Junge war, 1957년)
- 이발소의 돼지 (Das Schwein beim Friseur, 1962년)
- 엄지소년 (Der kleine Mann, 1963년)
- 엄지소년과 엄지소녀[30] (Der Kleine Mann und die Kleine Miss, 1967년)
[1] 그렇다고 해서 어른을 위한 작품을 안 쓴 것은 아니다.[2] 어린이를 위한 내용이며 자신의 집안 내력부터 1914년 독일의 전쟁 참전에서 끝난다.[3] 원래 두 사람은 되벨른 출신이었는데 부자인 에밀의 친척(이른바 '리델 아저씨')의 권유로 드레스덴으로 1985년 이사왔다.[4] 하지만 그 재능은 아주 훌륭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들에게 매년 선물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주곤 했다고. 마구간이라던가, 맥주통을 실은 마차 등등.[5] 300년 동안 제빵술 마이스터였다가 이다의 외할아버지 때부터 푸주술 마이스터가 되었다.[6] 미용사 조합에서도 이 때문에 반대했지만 이다가 고집을 부린 끝에 결국 미용사 허가를 얻었다고.[7] 이 방은 세 명의 사람을 거쳤는데 이 중 가장 오래 남아 있었고 캐스트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파울 슈리히였다고 한다. 자서전 말미에 징병되었다고 나왔는데 묘사를 보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듯하다.[8] 위에서 언급된 파울 슈리히 선생의 영향을 받은데다 공부도 잘하고(전후 아비투어를 친 뒤 드레스덴 시 장학금을 받았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도 다들 바라던 안정적 직업이 바로 선생이었다. 캐스트너는 1913년 한국으로 따지면 교대 비슷한 곳에 들어갔는데 교생 수업 끝에 자신은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1916년 정교사가 되기 2, 3주를 앞두고 학교에서 나왔다.[9] Abitur. 김나지움 졸업 시험[10] 이게 왜 폭탄선언이었냐면, 지금과 달리 당시 대학의 학비는 캐스트너 집안 같은 평범한 가정에게는 그야말로 살인적이었기 때문.[11] 이 당시 이다와 세 형제는 이 토끼 문제로 싸웠다. 비밀로 하던 토끼 장사를 아버지의 협박 끝에 이다가 다 일러바쳤기 때문. 이다를 포함한 넷 모두 지독하게 맞았고, 이 앙금은 훗날까지 계속되었다.[12] 자신은 그런 걸 못마땅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성화로[13] 도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느 부유한 젊은 사업가와 결혼했는데 첫아들인 프란츠를 낳고 바로 죽었다고 한다. 프란츠 아우구스트와 얼굴이 판박이었던 그는 의학도로 1945년 나치 독일이 헝가리에서 퇴각하기 직전 전사했다고.[14] 의료 활동 공로자들에게 붙는 명예 칭호[15] 캐스트너의 자서전에 메디치날라트 침머만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16] Abendlied des Kammervirtousen. 침실 거장의 저녁 노래[17] 그의 유일한 어른 대상 소설. 사회비판적.[18] 1933년 5월 10일 괴벨스의 명으로 독일학생동맹에서 나치즘과 어긋나는 책들을 분서한 사건. 유대인 저서는 물론 평화주의, 종교,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내용을 담거나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의 저서가 분서되었다. 심지어 외국인의 저서라는 이유로 분서된 책도 있다고. 베를린 등 독일 여러 도시의 대학가에서 시행되었다.[19] 드레스덴이 제대로 복구된 것은 캐스트너가 죽고 20년 넘게 지난 통일 이후이다.[20] 물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필름이다[21] 1961년까지. 이후는 명예 회장.[22] 에리히 캐스트너의 대표작중 하나인 "쌍둥이 로테" (das doppeite lottchen, 1949년, "두 로테", 혹은 "로테와 루이제" 라고도 번역) 의 쌍둥이 주인공 이름이 로테와 루이제이고, 그 이름은 어머니인 루이제로테의 이름을 반씩 나눠가진 것으로 나온다. 이 작품은 에리히 캐스트너가 루이제로테 엔데를레에게 바친 작품이라고 해도 될 듯 하다.[23] 한국어 번역본 기준[24] 이 이후의 모든 연도는 독일어 출판본 기준[25] 실제발음은 퓡크트헨에 가깝다. 점(Pünkt) 과 여자아이(Mädchen) 의 합성어로, 어감상 "점순이" 쯤 된다. 실제로 "점순이와 안톤"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출판본도 있다. ...작품 내에서도 주인공 핑크트헨의 실제 본명은 안나 루이제 (Anna Louise) 이지만,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본명보다 별명으로 주로 부른다... 라고 나온다.[26] 에밀과 탐정들의 속편[27] 원제목을 직역하면 처음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번역된 제목은 "마주보기" 로, 1988년도 국내도서 판매량 2위를 기록한 책이다. 50년 전에 독일에서 발간된 책의 번역서가 그 해 갑자기 화제도서가 된 것이다. 같은 해에 교보문고 기준 도서판매 1,2,3위가 전부 시집이라는 진기록도 세워졌다. 1위 서정윤 - 홀로서기, 2위 에리히 캐스트너 - 마주보기, 3위 도종환 - 접시꽃 당신, 보통의 경우 연간 책판매순위에서 시집은 10위 안에 들어가기도 힘들다.[28] 89년 혜원출판사(2012년 1984로 상호변경)에서 <동물들, 국제회의 열다>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됐으며 이 작품은 혜원출판사의 자회사로 94년 설립된 아동도서전문업체 글동산(2009년 혜원출판사에 흡수합병)에서 '글동산 세계명작' 시리즈 53번째로 99년 재출간됐다[29] 로테와 루이제라는 이름으로도 번역됨[30] 엄지소년의 속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