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제니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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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대 성 파스칼 1세

'''제99대 에우제니오 2세'''

제100대 발렌티노
  • 생몰년: ? ~ 824년 5월 11일
  • 재위기간: 824년 5월 11일 ~ 827년 8월 27일
파스칼 1세가 사망한 후 후임 교황 선출을 두고 두개의 파벌이 형성 되었는데 산타 사비나 성당의 수석사제였던 에우제니오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진지노였다. 파벌 싸움의 근원은 칼롤링 왕조의 창업자 피핀 3세 때부터 내재된 문제가 불거진 것이었다. 카롤링 왕조를 창업한 피핀 3세나 그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을 강성하게 만든 카롤루스는 기존의 왕조를 무너 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정통성을 확고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정통성을 부여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황에게서 추인을 받고 대관식을 치루는 것이었다. 때문에 피핀 3세는 교황을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지켜주는 한편 교회에 세속적인 영토인 교황령까지 주는 등 파격적 대우를 이어갔고, 이에 대한 답례로 교황은 피핀 3세가 세운 카롤링거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해줬다. 피핀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카롤루스 때에는 그가 이민족을 물리치고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가 되자 교황은 서기 800년에 카롤루스를 신성 로마의 황제로 대관하기에 이른다.
교황과 카롤링거 왕조는 각각 동로마 제국의 간섭 배제와 부실한 왕조의 정통성 확보라는 실리적 목적을 위해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으나 한편으로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세월이 흘러 카롤루스 대제의 치세 때 프랑크 제국이 확고하게 기반을 내렸고,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 때에 이르러서 황제는 차츰 교황에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파스칼 1세의 선종 이후 이러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때에 내재 되어 있던 갈등이 표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황제의 지지를 얻고 있는 로마 귀족들은 진지노를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성직자들은 에우제니오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결국 3개월 간의 다툼 끝에 교황좌에 착좌하는데 성공한다.
에우제니오 2세가 교황이 되긴 하였으나 이미 황제권이 막강해진 상황인데다 로마의 귀족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권위가 필요 했기 때문에 루도비쿠스 1세의 아들인 로타리우스 1세와 로마 헌장을 맺는다. 주요한 내용은 교황 선출권에 대해서는 황제가 관여하지 않고 로마인에 의해 선출되나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황제와 교황의 일을 진행하는 사람은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교회는 주기적으로 황제에게 교회에 관한 보고를 올려야 하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황제가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강화시켰다 볼 수 있다.
비록 황제권에 교황권이 치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였지만 에우제니오 2세는 재임기간 동안 성직자들의 규율을 강화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에우제니오 2세는 3년여간의 임기를 마치고 827년 8월 27일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