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게바르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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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게바르드 전투를 묘사한 그림
1. 개요
2. 배경
2.1. 오스만 제국군을 끌어내다
2.2. 압도적인 전력차
2.3. 양측 군대의 배치
2.3.1. 페르시아군의 배치
2.3.2. 오스만 제국군의 배치
3. 전투 경과
3.1. 오스만 파샤의 종심 전술을 활용하다
3.2.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전
3.3. 압도적인 화력
3.4. 결정타
4. 결과


1. 개요


'''나디르 샤의 전술적 역량이 제대로 드러난 승리'''
'''나디르 샤의 전투 중에서도 보병-포병-기병의 삼박자를 맞춘 뛰어난 제병 합동을 보여준 전투'''
예게바르드 전투(Battle of Yeghēvard)는 1735년 7월 19일 아르메니아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 예게바르드(Yeghvard)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이 오스만 제국의 대군을 격파하면서 전세를 크게 뒤집는데 성공하였고, 유리하게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2. 배경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이 1734년 11월부터 다게스탄 지역에 있던 간자(Ganja) 도시지역의 요새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예상보다 강력한 간자 요새의 방어력에 몇달이나 고전하며 발목이 묶여버렸으며, 그러다 1735년 바그다드에 있던 오스만 제국군 8만명이 북상하여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향했다.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 총독 압둘라 코프룰루 휘하의 오스만 제국군 8만을 제압한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게 가능하다고 판단, 결전을 준비하였다.

2.1. 오스만 제국군을 끌어내다


압둘라 코프룰루는 8만 대군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디르 샤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전투에 응하지 않았다. 우선 압둘라 코프룰루는 카르스(Kars) 지역에 들이박혀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는데, 나디르 샤는 곧장 싸우기를 원했었다.
따라서, 나디르 샤는 아르메니아의 예레반(Yerevan) 지역을 포위하였고, 간자 요새와 예레반 지역을 압박함으로서 압둘라 코프룰루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간자, 예레반 지역이 나디르 샤에게 넘어간다면, 오스만 제국의 대 아르메니아 영향력이 크게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2.2. 압도적인 전력차


나디르 샤는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는데, 간자와 예레반을 계속 압박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디르 샤는 4만대군을 후방에 두고 15000~18000의 병력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을 맞이하러 갔다. 압둘라 코프룰루 휘하의 오스만 제국군은 시파히 50000명, 예니체리 30000명, 대포 40문으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2.3. 양측 군대의 배치



2.3.1. 페르시아군의 배치


1735년 7월 19일, 양측 군대는 예게바르드 근처 언덕지대 근처에서 만났다. 나디르 샤의 캠프는 언덕 위에 있었고, 언덕 남쪽 아래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더불어 소수의 엘리트 보병 Jajayerchi부대를 전방에 배치하였고, 양익에도 각각 2000~3000명씩 배치하였다. 더불어 일부 보병대를 근처 숲속과 계곡 등지에 매복시켰다.

2.3.2. 오스만 제국군의 배치


오스만 제국군의 배치는, 우선 전방에 양익 포병대를 배치하였는데, 좌익 포병대는 작은 언덕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주력군이 중앙에 비교적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3.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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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게바르드 전투의 배치도. 붉은색이 오스만 제국군, 파란색이 페르시아군. 붉은/파란 테두리 네모는 해당국의 포병대.

3.1. 오스만 파샤의 종심 전술을 활용하다


나디르 샤가 사마라 전투에서 토팔 오스만 파샤의 종심 전술에 당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를 역으로 활용하였다. 전방에 배치한 소수 병력이 오스만 제국군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오스만 제국군 상당수가 소수 페르시아 보병대에게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3.2.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전


오스만 제국군의 신경이 중앙으로 모이자, 나디르 샤는 양익에 배치된 엘리트 보병대에게 적군의 양익 포병대를 급습하게 하였다. 페르시아 엘리트 보병대는 빛의 속도로 접근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포병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로서 오스만 제국군은 화력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3.3. 압도적인 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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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버라크(Zamburak) 포병의 모습
결국, 중앙에 있던 오스만 제국군이 페르시아군의 중앙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중앙에는 이미 잠버라크 500개가 배치된 상태였으며, 잠버라크의 맹렬한 포격에 오스만 제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채 근접하지도 못하고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앞서 페르시아군 양익 보병대가 오스만 포병들을 제압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이 페르시아군의 잠버라크를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3.4. 결정타


그렇게 오스만 제국군이 뒤로 물러나려 하자, 숲속과 계곡에 매복시켜 놨던 병사들이 일제히 나타나 후퇴하던 오스만 제국군의 후방을 강타하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군은 혼란에 빠졌으며, 뒤이어 나디르 샤가 기병대를 보내 추격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군은 사실상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군은 와해되어 각자 도주하기 바빴으며, 대다수가 페르시아군 기병대의 추격에 의해 도륙당하기 바빴다. 그리고 지휘관 압둘라 코프룰루 또한 도망쳤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지나 계곡으로 가려다 로스탐(Rostam)이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인에게 추격당했고, 결국 둘이 일기토(?)를 벌이다 코프룰루가 낙마하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다. 이때 로스탐이 코프룰루의 머리를 베어서 나디르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탈주하던 오스만 제국군은 서진하다가 아르메니아인들이 막는 바람에 우왕좌왕하다 추격군들에게 죽거나 잡히고 말았다.

4. 결과


결과는 그야말로 희비가 엇갈렸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군의 사상자는 4만에 달했으며, 상당수의 대포를 잃어야 했다. 반면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은 손실이 별로 없었다. 수치상으로만 봐도 차이가 상당하지만, 이번 전투가 가져온 전쟁 차원의 흐름도 크게 변했다. 무엇보다 동쪽에서 주력군을 두차례나 날려먹은 오스만 제국은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러시아 제국과도 싸우는 처지가 되어버렸으며, 나디르 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지게 되었다.
반면, 나디르 샤는 전투에서 완승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동부지역 방어력을 약화시켰으며, 더불어 간자 지역을 손에 넣음으로서 아르메니아 지역에서도 우위를 차지하였다. 비록 반란이 터져 군대를 회군해야 했으나, 유리하게 조약을 맺고 돌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예게바르드 전투에서 나디르 샤가 보여준 제병 합동은 매우 훌륭했다. 보병대가 유인, 급습을 바탕으로 포병(대다수가 잠버라크)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며, 포병의 맹렬한 포격은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질서하게 물러나도록 하였고, 마지막으로 기병의 추격이 매복에 걸려 혼란에 빠진 적군을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게다가 토팔 오스만 파샤의 유인전술(종심 전술)을 나디르 샤 자신의 스타일대로 흡수하여 더 수준높은 전술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