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라 전투

 

1. 개요
2. 배경
3. 전투 경과
3.1. 토팔 오스만 파샤의 "유혹"
3.2. 함정에 빠진 나디르 샤
3.3. 루머와 함께 붕괴된 페르시아군
4. 결과


1. 개요


'''승승장구하던 나디르 샤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
'''토팔 오스만 파샤의 종심 전술이 드러난 전투이자, 오스만 제국군이 나디르 샤를 꺾은 유일한, 피로스의 승리'''
사마라 전투(Battle of Samarra)는 1733년 여름에 티그리스 강 근처에 있는 사마라 지역 근처에서 일어난 전투이며, 이슬람 세계 최강의 명장 중 하나인 나디르 샤가 유일하게 패배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나디르 샤는 1733년 1월부터 7월까지 수개월동안 바그다드 공성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바그다드 지역은 오스만 제국이 유럽식 설계로 요새를 건축했기에 방어력이 강력하여 포위전으로 시간을 질질 끈 것이었다. 그렇게 7월 13일이 되자 참다못한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는 협상을 시도하여 만약 8월 11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고관 토팔 오스만 파샤(Topal Osman Pasha)가 8만대군을 이끌고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나디르 샤는 2만명의 병력을 남겨 계속 바그다드를 포위하게 하였고, 본인은 7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여 토팔 오스만 파샤의 군대를 맞이하러 갔다. 그러나,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토팔 오스만 파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며, 그는 의외로 전투 경력이 풍부한 백전노장이었다.

3. 전투 경과


[image]
사마라 전투의 배치도. 붉은색이 오스만 제국군, 파란색이 페르시아군. 위쪽에 있는 진한 붉은색이 오스만 제국군의 예비대 2만

3.1. 토팔 오스만 파샤의 "유혹"


토팔 오스만 파샤는 오스만 제국군을 둘로 나누어 2만을 티그리스 강 남부 근처 후방에 숨겨놓았으며, 나머지 병력은 더 남쪽에 배치하여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과 대치하였다. 당시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은 수 개월간의 바그다드 공성전 과정에서 지쳤으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토팔 오스만 파샤는 전방과 후방 사이에 일부러 빈틈을 형성하여, 나디르 샤가 측면공격을 할 시 예상해놓은 빈틈으로 오게 유도하였다. 예상대로 나디르 샤는 기병대로 오스만 제국군의 좌측 빈틈을 찔러보았으나, 토팔 오스만 파샤가 준비해놓은 포병대에 의해 격퇴당하고 말았다.

3.2. 함정에 빠진 나디르 샤


나디르 샤는 페르시아군 중앙 5만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앞서 후방에 2만명을 따로 빼놓은 토팔 오스만 파샤는 주력군을 서서히 퇴각시키며 지연전을 펼쳤고, 동시에 후방에 있던 예비대 2만을 투입하여 순식간에 숫적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토팔 오스만 파샤의 장기인 종심 전술로서, 병력을 나누어 적군을 속여 천천히 끌어들이다가 순식간에 분리된 예비대를 투입시켜 숫적 우위로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제국군과 페르시아군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이 오스만 제국군에 비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특히 더운 여름에 오스만 제국군은 티그리스 강을 등지고 싸우던 상태였던지라 강물을 계속 공급받을수 있었으나, 페르시아군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3.3. 루머와 함께 붕괴된 페르시아군


비록 여러가지로 페르시아군에게 불리했지만, 여전히 악전고투가 지속되었으며 나디르 샤 또한 말을 타고 직접 전선에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디르 샤가 공격을 받아 낙마해버렸는데, 이 소문이 와전되어 "나디르 샤가 죽었다."라는 괴소문(...)으로 퍼졌으며, 안그래도 갈증과 더위, 질병에 지쳐있던 병사들은 소문을 듣고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나디르 샤는 애써 병사들을 수습하고 지휘체계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한 번 붕괴된 지휘체계는 다시 휘어잡기가 불가능했다. 병사들이 붕괴되어 급히 티그리스 강으로 가서 강물을 마시다가 오스만 제국의 기병대에 의해 살해당하는 병사들이 급증하였다. 결국 나디르 샤는 퇴각명령을 내렸으며, 전장을 떠나 보흐리즈(Bohriz) 지역으로 물러났다.

4. 결과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은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가 무려 3만에 달했으며, 중포 18문과 잠버라크 500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2만에 달하는 병사를 손실하였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나디르 샤가 키워낸 페르시아군의 전술능력이 상당하다는 증거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였다. 나디르 샤는 패잔병을 수습하고 추가병력을 받아 재기를 노렸으며, 토팔 오스만 파샤는 병력의 손실을 시리아 병사들로 채워넣었다. 그리고, 토팔 오스만 파샤가 사용했던 끌어들이기식 종심 전술은 나디르 샤가 예게바르드 전투카르날 전투에서 훌륭하게 써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