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르 샤
페르시아어 نادر شاه افشار
영어 Nader Shah
생몰: 1688 ~ 1747년
재위: 1736 ~ 17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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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나디르 콜리, 사파비 왕조 건국에 공헌한 튀르크계 아프샤르족 출신으로 고향은 이란의 동북부인 호라산 지방의 다르가즈다. 사파비 왕조의 무장이었던 나디르 샤는 1722 ~ 1729년의 7년여간 이스파한을 점거하며 호타키 왕조를 세우고 이란을 지배한 아프간 족을 축출하고 사파비 왕조를 복원시켰지만,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는 이내 이름뿐인 사파비 왕조를 멸하고 1736년에 제위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건국한다.
그 후로 대정복을 개시하여 인도양에서 잘나가던 오만 제국을 갈아버려 수도를 탄자니아 인근의 잔지바르로 옮기게 만들었고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하였으며 곧바로 1739년, 무굴 제국의 대군을 카르날 전투에서 대파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코이누르 등 무굴 황실의 보물을 약탈하고 개선한다. 1740년에는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까지도 평정한다. 이러한 업적으로 이란에서는 페르시아의 나폴레옹에 비견하며 최고의 전쟁 영웅이자 명장으로 기리고 있다. 그러나 내치에는 실패하여 폭정을 일삼았기에 반란이 잦았다. 1747년,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진중의 반란으로 암살당해 파란마장한 생을 마감한다.
17세기 말 ~ 18세기 초의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 이후 흔들리며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북쪽의 러시아 제국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고 동쪽의 수니파 아프간 족은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강요 정책과 무자비한 수탈에 시달리며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1]
18세기 초, 사파비령 아프간 총독 압둘라 칸에 대한 폭동이 아프간 길자이족의 '미르 바이스'가 주도하는 반란으로 번졌고 9대 사파비 샤였던 '후세인' 술탄은 군대 2만명을 파견하여 겨우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스파한으로 압송된 미르 바이스는 샤의 환심을 사고, 메카를 가서 율법학자에게 '이단인 시아파 정권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답을 듣고 온다.그 후 1709년, 샤의 허락으로 칸다하르에 돌아온 그는 자신을 생포했던 장군 기오르기 한과 부하들을 연회에 초대하고 살해한 후, 아프간 민족에게 메카에서 들은 말을 전하고 재차 봉기한다.
이에 샤는 정예 튀르크 기병(키질바시)와 그루지야, 압달리 아프간 족으로 구성된 3만의 대군을 파견하지만, 사파비 군대는 대패하여 700명만 도주에 성공한다. '미르 바이스'는 페르시아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고 사실상 아프간의 독립을 이루어 낸 채로 1715년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압달리 아프간족도 마음을 바꿔 1717년에 반 사파비 봉기에 동참한다.
바이스의 아들인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는 같은 편인 압달리 족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샤에게 사파비에 대한 적개심을 위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게 힘을 기른 후 1721년, 마흐무드의 2만에 달하는 길자이 아프간 기병은 사파비 국경을 넘어 케르만을 함락시키고 시아파의 탄압에 몸서리 치던 이란 남부의 수니파, 조로아스터 교도들의 협조를 얻어낸다.
1722년, 샤는 뒤늦게 4만 2천명과 24문의 대포로 구성된 군대를 편성한다. 하지만, 같은 해인 1722년 7월에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한 러시아 제국의 군대(당시 원정은 유명한 표트르 대제가 직접 이끌었다...)와 싸우느라 병력이 대부분 서부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아프간족은 그해 3월 8일에 벌어진 '''굴른바드 전투'''에서 빠른 기동력으로 사피비 군대의 포병대를 압도하여 5백명의 손실로 5천명을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두었고, 패잔병들을 이스파한으로 밀어붙이기에 이른다.
이후 6개월 간의 포위 끝에 10만여명이 아사하여 수비 인원이 고갈되자 1722년 9월, 아프간 길자이 군대는 사파비 왕조의 수도이자 아바스 대제 당시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던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호타키 왕조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샤가 항복하자 사파비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화합을 가장한 연회에 초청한 후 도륙하였고 그 자녀들도 무참히 살해했다. 이때에 늙은 샤도 마흐무드가 보는 앞에서 자녀들을 끌어안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정신이상으로 지나친 폭력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칼을 들고 자기의 살점을 직접 잘라내는 등 가학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1725년 마흐무드는 측근들에게 살해되고, 사촌 아시라프가 제위를 계승한다.
한편, 이란에서 사파비 세력이 소멸한 후 거칠 것이 없어진 호타키 군대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넣고 러시아 제국을 격퇴한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도 싸워 승리한다.
그 후, 당시 칼리프 지위를 지니고 있던 오스만 황제에게 이란의 정통 지배자임을 인정받는 대가로 이란 서부를 떼어주는 '하마단 조약'을 맺는다.(1727년) 전쟁을 틈타 잠시동안 사파비의 잔당이 이스파한을 회복하기는 하지만 곧 진압되고, 이란 지역은 아프간 길자이족의 호타키 왕조에 의해 안정을 찾는 듯 하였다.
하지만 시아파 페르시아인들은 수니파 파슈툰인들을 '벼락출세한 이단 야만족'의 정복으로 여겨 경멸하였으며, 아시라프 역시 선대 마흐무드의 측근들이랑 충돌하는 등, 호타키 왕조도 분쟁에 휩싸였다.
수도 이스파한이 함락되자 사파비의 왕위 계승자 타흐마습은 6백명만 데리고 북쪽의 카즈빈을 임시수도로 삼았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지자 1725년에 동쪽의 호라산 지방으로 피신한다.
그는 1722년 12월부터 1723년 3월 28일까지 이어진 라슈트 포위전에서 러시아 제국군에 대항하느라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 제국군과 교섭을 시작했고, 복위를 돕는 대가로 러시아 제국에게 캅카스와 이란 북부 (카스피해 남해안)를 양도한다는 굴욕적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비준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군대는 소규모의 군대만 파견하였고, 그마저도 호타키 군대에 패하였다.
호라산에서 아프샤르족과 쿠르드족 5천여 명의 도적떼를 이끌던 '나디르'를 만나게 되었고, 나디르는 타흐마습의 맘루크, '''나디르 칸'''으로써[2] 몸을 일으켜 1726년부터 그를 도와 길자이 아프간족과의 항쟁과 그의 복수를 돕는다. 도적떼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쌓은 실력으로 여러 차례 호타키 군대를 격파한 나디르는 헤라트를 점령하고, 호라산을 평정한 공으로 사파비 군대의 사령관 자리에까지 올라 마침내 1729년, 수도 이스파한을 회복하고 아시라프를 축출, 추살하여 왕자를 타흐마습 2세로 즉위시킨다.
이로써 나디르는 '''나디르 콜리 벡'''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벡은 이름이 아니고 칸이나 샤처럼 칭호를 의미한다. 벡의 칭호를 가진 다른 예로는 19세기 신장에서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야쿱 벡이 있다.
나디르는 여세를 몰아 호타키 왕조와의 하마단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서부를 회복한 후 이란 내부의 호타키 잔당마저 일소한 1730년, 호라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나디르의 높아지는 인기에 위기감을 느낀 타흐마습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다. (1732년)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1732년에 아라스 강을 국경으로 하는 현상유지의 아메드 파샤 조약을 맺고 물러선다.
타흐마습 2세의 나약한 모습에 분노한 나디르는 그를 폐위시키고 왕자를 아바스 3세로 즉위시킨다. 그리고 아직 걸음마인 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국정을 손에 쥔 채로 섭정이 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오스만과의 전쟁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였는데, 전쟁에 우유부단하다는 이유로 타흐마습 2세를 폐위시켰으니, 승리만이 선왕의 폐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에 이란 서부에서 오스만 군에 대패하자(...) 그는 보복으로 이란의 튀르크인을 추방했다. 이후 반격을 하여 타브리즈를 회복한 후 오스만 제국의 본거지인 터키로 진격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승리에 대한 압박감에 나디르가 병사 시절 때부터 그를 따르던 정예부대는 악귀처럼 싸워댔고 튤립 시대의 사치와 번영으로 느슨해져 있던 오스만 군대[3] 를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 격파하고 캅카스[4] 등을 빼앗아 오스만 정부의 협상 요청을 이끌어 내었다.
1734년 나디르는 옛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랑 아바스 1세가 영유했던 고토 바그다드까지 탈환하고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에게 메소포타미아 땅 대부분을 빼앗겼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휴전을 원하지 않았으나 1735년, 러시아 제국에게 재차 크림 반도를 침공당하는 악재가 겹쳐, 양면 전선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전 협상에 응하였다.
그에따라 1736년에 체결된 코스탄티니예 조약에 따라 나디르는 이란 서부의 양도뿐만 아니라 오스만 령 캅카스까지 이란령으로 만드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5]
연이은 엄청난 승리에 민중과 군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나디르는 1736년, 아라스강 하류 모간 평야의 대회의에서 자신이 4년 전에 옹립한 아바스 3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에서 물러나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으니 현자를 찾아 제위에 세울 것을 권하고 이 심오한 뜻을 깨달은 군민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자 스스로 '나디르 샤'를 선포하고, 왕중왕이 되어 이란의 이슬람화 이후 가장 강력하고 넓은 국가가 될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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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 - 1743)
1737년부터 동쪽으로 진격하여 호타키 왕조에 대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맨 먼저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를 점령하였으며 1738년에 카불을 함락하고 아프간 전역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하고 복수를 마무리한다. 나디르 샤의 아들인 레자 콜리는 발흐를 점령하고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우즈베크족이 세운 부하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하여 우즈베크를 북쪽으로 추방시켰다.[6]
한편, 16 - 17세기 동안 아프간의 대부분은 사파비, 남부와 카불 지방은 무굴 제국이 나누어 지배했는데, 1738년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에 사신을 보내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절대 무굴에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지만 무굴 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는 말로만 그렇게 했을 뿐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받아들였고 화가 난 나디르 샤는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사신은 델리의 궁전에 감금되었고 세번째 사신은 목이 잘린 채로 돌아왔다.
이에 격노하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이란과 대비되었던 인도의 부가 탐났던 나디르 샤는 5만 5천의 군대로 친정하여 카이베르 고개에서 한차례 승리를 거둔 뒤, 술라이만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을 건너 무굴 제국으로 진격하여 펀자브 지역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시크 왕국이 타격을 입은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자 무굴 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는 아프간족과 오스만, 오만 등을 격파한 명성을 익히 들어 기병, 보병, 포병에 전투 코끼리까지 혼합된 30만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나디르 샤를 맞이하러 원정길에 올랐다[7] . 허나 이때 무굴 제국은 쇠퇴기에다가 시크 왕국과 마라타 동맹에게 패한 직후라서 군대의 규모도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약화되어 있었다.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 군대는 피로를 풀 여유도 없이 1739년 델리 인근에 있는 카르날 평원에서 무하마드 샤가 직접 지휘하는 무굴 제국의 대군과 맞부딪혔다('''카르날 전투'''). 그러나 무굴 제국군의 성급함 및 페르시아군의 활과 대포가 사정거리에서 무굴 제국의 활과 대포보다 월등하고 병사들의 백병전 기술도 페르시아군이 강했으며, 더 나아가 무굴 제국군 수뇌부의 정치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주력군이 멀쩡한데도 분열되어 무굴 제국군은 사실상 자멸하고 말았다.[8]
이제 북인도에서 나디르 샤를 막을 자는 없었고 결국 포위당한 무하마드 샤는 항복하였으며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 샤를 사면하였다. 나디르 샤는 델리로 입성하였으나 몇 명의 인도인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그의 보좌관 한명을 죽이자 화가 치민 나디르 샤는 군사들에게 하루종일 인도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문에 무굴 제국 내에서 200여년간 번영을 누리던 델리는 수십일간 약탈을 당하고 3만명의 인도인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델리에서 나디르 샤가 저지른 살육은 이후 인도어에 대량학살을 뜻하는 '나디르샤시(Nadirshahi)'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 나디르 샤의 대침공으로 정예군이 개발살난 무굴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 때에 나디르 샤는 인더스 강 서쪽을 할양받았으며 또 눈독을 들여 가져온 무굴 황실 보물 중에는 공작 옥좌[9] 와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인 '빛의 산' 코이누르[10] 다이아몬드가 있었다.[11] 북인도의 약탈품만으로도 몇년치 국가예산은 충족시켰기에 나디르 샤는 3년여간 제국의 세금을 철폐해도 될 지경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행하였다. '''이 시기가 나디르 샤의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의 영토는 과거 사산 제국에 버금갔다.
1741년에는 나디르 샤가 해군 육성에 직접 개입하였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인더스 강 서부지역의 물자를 바닷길로 수송하기 위해 재해권 장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 지역이 아무래도 해군과는 반쯤 담 쌓고 있었다보니(...) 관련 조선 기술자나 조선소가 없었기에 인도 서부에 있던 조지 2세 하의 영국 동인도 회사에 선박 1척을 주문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건조한 최신식 전함은 매우 우수하였으나, 정작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나디르 샤는 이란 서남부 페르시아 만에 있는 항구도시 부셰르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직접 선박을 건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선 기술자가 부족하였으며, 더불어 페르시아 만 해안지역에는 목재가 없었기 때문에 카스피 해 남부 연안에 있는 마잔다란 숲에서 목재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이란 고원지대의 특성상 수송이 너무 힘들어서 노동자들이 목재를 수송하다가 과로로 죽어나갔다고 한다.
결국, 나디르 샤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추가적으로 선박 14척을 주문하여 총 15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해군을 건설하였다. 비록 급조되긴 했지만 제 값은 했는지 페르시아 해군이 바레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쇠퇴 이후 동아프리카 연안을 지배하며 번영하던 야리바조의 오만 제국을 본거지에서 격파하여, 오만 제국은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긴 후 페르시아 만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란의 오만 원정은 얼마 못가고 1745년 '사이드 가'에게 아프샤르군이 패배하여 오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로써 오만에는 현 왕조인 '사이드 왕조'가 건국되었다.
1740년, 나디르 샤의 불패 군대는 트란스옥시아나의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을 공격한다. 티무르 제국의 본거지였던 그곳은 이미 200여년 간 우즈베크족이 세운 두 칸국들의 소유였다. 나디르 샤 본인의 롤모델이기도 한 칭기즈 칸, 아미르 티무르에게 함락된 과거가 있는 두 도시는 나디르 샤에게도 함락되었다. 이로써 나디르 샤는 중앙아시아도 평정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이래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강)까지 아프샤르 왕조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12]
나디르 샤는 카불 지역을 아프샤르 왕조 동부지역의 핵심이자 주요 행정망으로 삼았으며, 옥수스 강 남부지역과 인더스 강 서부지역 모두 카불 지역의 컨트롤 타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 원정 이후부터 교만해지고 탐욕스러워졌다. 1741년, 터키 원정을 준비하며 정복에 열을 올리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마자다란'에서의 암살 기도였다.
나디르 샤가 말을 타고 숲속을 거닐다 한 아프간인이 나디르 샤를 화승총으로 저격하였으나 총알은 그의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냈으며[13] , 그가 탄 말의 앞머리를 맞추었다. 암살시도는 실패하였지만 그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파멸의 시작인 다게스탄 원정이 진행되던 중, 저격수를 쫓으라고 보낸 추격병들이 저격수를 잡아 나디르 샤의 캠프로 끌고 왔다.[14] '닉 카담'이라 불리는 저격수는 자신이 나디르 샤를 저격한 저격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나디르 샤는 사실대로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말에 저격수 닉 카담은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나디르 샤를 저격하라고 제안한 사람은 다름아닌 나디르 샤의 맏아들 '레자 콜리'였으며, 닉 카담의 친구 한 명이 레자 콜리의 하인이라 둘이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에 크게 분노한 나디르 샤는 닉 카담의 눈알을 뽑아버렸다.
1741년 11월에 나디르 샤가 불렀던 자식들이 도착하였다. 그 중에 레자 콜리도 있었는데, 나디르 샤는 다른 자식들을 반갑게 맞이했나, 유독 레자 콜리를 냉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나디르 샤는 수상한 낌새를 느꼈으며, 레자 콜리는 칼을 뽑아들었다. 나디르 샤가 크게 고함을 치자 레자 콜리는 칼을 바닥에 내리꽂았다고 한다.
레자 콜리는 암살 시도에 대해 전혀 죄책감이 없으며, 나디르 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디르 샤는 그나마 있는 이성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레자 콜리는 완강했다. 이에 나디르 샤는 암살 시도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레자 콜리가 한 말이 가관인데
1743년, 보스포루스부터 인더스 까지의 옛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로 나디르 샤는 다시금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다.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갈아버리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무려 375,000명을 동원하였는데, 덕분에 극심하고 가혹한 징발과[15] 재산 매각 압박이 벌어졌고, 아프샤르 왕조의 시민들은 급격히 빈곤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프샤르 왕조 각지에서 일어나던 반란의 규모와 횟수가 크게 증가하는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스만과의 전쟁은 양측 모두 누구의 승자도 없는 전투가 되어 이 전쟁이 그의 마지막 대규모 원정이자 그가 이기지 못한 유일한 전쟁이었다.[16]
협정을 체결하면서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의 24대 술탄 마흐무트 1세에게 휴전의 의미로 25,000개의 진주로 장식한 황금 도금된 옥좌를 선물하였다. 오스만의 마흐무트 1세도 답례로 나디르 샤에게 에메랄드가 3개 박힌 단검을 선물했다고 한다.[17]
10여년 간 이어진 나디르 샤의 내치는 그의 전쟁 수행 능력과는 현저히 달랐다. 아니 '''완전 막장이었다.''' 튀르크계이며 철저한 수니파 신도였던 그는 시아파를 싫어하여 200여년간 지속된 사파비 지배의 부산물인 이란의 시아파 민중들에게 12이맘파(자파리파)를 수니파의 제 5학파(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에 포함시켜 수니파를 강요하였다.
거기다가 시아파 율법학자들을 탄압했으며 시아파 종교재단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하였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연이은 승전보와 강력한 군대와 장악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영광과 동시에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무리하면서까지[18] 시도한 원정들이 승리했고 약탈품도 많았지만 승전보와 함께 무거운 세금 고지서도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삶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암살 기도 후 공포정치의 정도가 심해져서 불만을 품은 백성들과 제국 내의 소수 민족들이랑 여러 지역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심지어 수도 '마슈하드'에서조차 반란이 일어나자, 나디르 샤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마슈하드의 봉기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각지에서 그의 탐욕스러움과 압제에 항거하는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페르시아는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역사는 훗날 이란에서 시아파 근본주의 및 그로 인한 반수니파 감정이 강하게 뿌리내리는 데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1745년,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에서 일어난 봉기는 특히 격렬하였고, 나디르 샤는 7년 전에 함락했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재함락시키고 가혹하게 응징하였다.
한편, 계속된 반란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고 기회를 잡은 오스만의 반격으로 정복했던 영토를 다시 빼앗기고 말아 결국 나디르 샤는 1746년, 국경을 1639년의 카스리 시린 조약 때로 되돌린다는 '케르덴 조약'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끝냈다.
1747년에는 나디르의 고향 호라산에서마저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나디르 샤는 다문화 다민족 국가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유능하였으나, 정복지를 통치하는 데에는 영 부적격이었다.
1747년, 나디르 샤는 마슈하드에 출병하여 서부 이란의 쿠르드족 반란군을 진압하던 도중, 쿠칭에서 근위대의 반란을 의심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모든 병사와 장교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잔인한 명령은 군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나디르 샤의 병력 중 절대 다수를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나디르 샤는 진 내에서 잠을 자던 중,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때 암살 주모자인 장교 중 한 사람은 "그가 우리를 저녁 식사로 먹기 전에 먼저 그를 아침 식사로 먹자"라는 말을 남겼다고...
나디르 샤 사후 아프샤르 왕조는 어린 손자, '샤 루흐 미르자'가 재위하였으나 급속히 쇠퇴하여 호라산 일부로 축소되고, 트란스옥시아나 등의 지역들은 독립한다.
소국으로 전락한 아프샤르 왕조는 잔드 왕조를 대체하여 이란을 통일하게 되는 카자르 왕조에게 1796년에 멸망당한다.
티무르 제국과 종종 비교당한다. 하지만 영토는 일부 잃었지만 티무르 사후 40여년간 패권을 유지했던 티무르 제국과는 달리 아프샤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처럼, 기반이 부실했기에 바로 무너져 내렸다. 실질적 2대 통치자가 '샤 루흐'인 점은 닮긴 하다.[19] 실제로 나디르 샤의 모델이 티무르이긴 했다.
나디르 샤는 전쟁을 매우 좋아하는 엄청난 전쟁광이었다. 이슬람 율법학자와의 대화에서 나디르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율법학자가 천국은 72명의 미녀들이 시중을 들며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모든 쾌락을 누리는 곳이라고 설명하자 나디르 샤는 '''"그럼 전쟁이 없고 환락만 있다는거 아니오? 그곳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소?"''' 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20]
전쟁
공성전
야전
영어 Nader Shah
생몰: 1688 ~ 1747년
재위: 1736 ~ 17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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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나디르 콜리, 사파비 왕조 건국에 공헌한 튀르크계 아프샤르족 출신으로 고향은 이란의 동북부인 호라산 지방의 다르가즈다. 사파비 왕조의 무장이었던 나디르 샤는 1722 ~ 1729년의 7년여간 이스파한을 점거하며 호타키 왕조를 세우고 이란을 지배한 아프간 족을 축출하고 사파비 왕조를 복원시켰지만,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는 이내 이름뿐인 사파비 왕조를 멸하고 1736년에 제위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건국한다.
그 후로 대정복을 개시하여 인도양에서 잘나가던 오만 제국을 갈아버려 수도를 탄자니아 인근의 잔지바르로 옮기게 만들었고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하였으며 곧바로 1739년, 무굴 제국의 대군을 카르날 전투에서 대파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코이누르 등 무굴 황실의 보물을 약탈하고 개선한다. 1740년에는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까지도 평정한다. 이러한 업적으로 이란에서는 페르시아의 나폴레옹에 비견하며 최고의 전쟁 영웅이자 명장으로 기리고 있다. 그러나 내치에는 실패하여 폭정을 일삼았기에 반란이 잦았다. 1747년,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진중의 반란으로 암살당해 파란마장한 생을 마감한다.
2. 생애
2.1. 시대 배경
17세기 말 ~ 18세기 초의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 이후 흔들리며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북쪽의 러시아 제국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고 동쪽의 수니파 아프간 족은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강요 정책과 무자비한 수탈에 시달리며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1]
2.1.1. 아프간 호타키 왕조의 이란 점령
18세기 초, 사파비령 아프간 총독 압둘라 칸에 대한 폭동이 아프간 길자이족의 '미르 바이스'가 주도하는 반란으로 번졌고 9대 사파비 샤였던 '후세인' 술탄은 군대 2만명을 파견하여 겨우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스파한으로 압송된 미르 바이스는 샤의 환심을 사고, 메카를 가서 율법학자에게 '이단인 시아파 정권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답을 듣고 온다.그 후 1709년, 샤의 허락으로 칸다하르에 돌아온 그는 자신을 생포했던 장군 기오르기 한과 부하들을 연회에 초대하고 살해한 후, 아프간 민족에게 메카에서 들은 말을 전하고 재차 봉기한다.
이에 샤는 정예 튀르크 기병(키질바시)와 그루지야, 압달리 아프간 족으로 구성된 3만의 대군을 파견하지만, 사파비 군대는 대패하여 700명만 도주에 성공한다. '미르 바이스'는 페르시아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고 사실상 아프간의 독립을 이루어 낸 채로 1715년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압달리 아프간족도 마음을 바꿔 1717년에 반 사파비 봉기에 동참한다.
바이스의 아들인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는 같은 편인 압달리 족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샤에게 사파비에 대한 적개심을 위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게 힘을 기른 후 1721년, 마흐무드의 2만에 달하는 길자이 아프간 기병은 사파비 국경을 넘어 케르만을 함락시키고 시아파의 탄압에 몸서리 치던 이란 남부의 수니파, 조로아스터 교도들의 협조를 얻어낸다.
1722년, 샤는 뒤늦게 4만 2천명과 24문의 대포로 구성된 군대를 편성한다. 하지만, 같은 해인 1722년 7월에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한 러시아 제국의 군대(당시 원정은 유명한 표트르 대제가 직접 이끌었다...)와 싸우느라 병력이 대부분 서부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아프간족은 그해 3월 8일에 벌어진 '''굴른바드 전투'''에서 빠른 기동력으로 사피비 군대의 포병대를 압도하여 5백명의 손실로 5천명을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두었고, 패잔병들을 이스파한으로 밀어붙이기에 이른다.
이후 6개월 간의 포위 끝에 10만여명이 아사하여 수비 인원이 고갈되자 1722년 9월, 아프간 길자이 군대는 사파비 왕조의 수도이자 아바스 대제 당시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던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호타키 왕조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샤가 항복하자 사파비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화합을 가장한 연회에 초청한 후 도륙하였고 그 자녀들도 무참히 살해했다. 이때에 늙은 샤도 마흐무드가 보는 앞에서 자녀들을 끌어안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정신이상으로 지나친 폭력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칼을 들고 자기의 살점을 직접 잘라내는 등 가학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1725년 마흐무드는 측근들에게 살해되고, 사촌 아시라프가 제위를 계승한다.
한편, 이란에서 사파비 세력이 소멸한 후 거칠 것이 없어진 호타키 군대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넣고 러시아 제국을 격퇴한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도 싸워 승리한다.
그 후, 당시 칼리프 지위를 지니고 있던 오스만 황제에게 이란의 정통 지배자임을 인정받는 대가로 이란 서부를 떼어주는 '하마단 조약'을 맺는다.(1727년) 전쟁을 틈타 잠시동안 사파비의 잔당이 이스파한을 회복하기는 하지만 곧 진압되고, 이란 지역은 아프간 길자이족의 호타키 왕조에 의해 안정을 찾는 듯 하였다.
하지만 시아파 페르시아인들은 수니파 파슈툰인들을 '벼락출세한 이단 야만족'의 정복으로 여겨 경멸하였으며, 아시라프 역시 선대 마흐무드의 측근들이랑 충돌하는 등, 호타키 왕조도 분쟁에 휩싸였다.
2.2. 사파비 조의 구원자
수도 이스파한이 함락되자 사파비의 왕위 계승자 타흐마습은 6백명만 데리고 북쪽의 카즈빈을 임시수도로 삼았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지자 1725년에 동쪽의 호라산 지방으로 피신한다.
그는 1722년 12월부터 1723년 3월 28일까지 이어진 라슈트 포위전에서 러시아 제국군에 대항하느라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 제국군과 교섭을 시작했고, 복위를 돕는 대가로 러시아 제국에게 캅카스와 이란 북부 (카스피해 남해안)를 양도한다는 굴욕적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비준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군대는 소규모의 군대만 파견하였고, 그마저도 호타키 군대에 패하였다.
호라산에서 아프샤르족과 쿠르드족 5천여 명의 도적떼를 이끌던 '나디르'를 만나게 되었고, 나디르는 타흐마습의 맘루크, '''나디르 칸'''으로써[2] 몸을 일으켜 1726년부터 그를 도와 길자이 아프간족과의 항쟁과 그의 복수를 돕는다. 도적떼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쌓은 실력으로 여러 차례 호타키 군대를 격파한 나디르는 헤라트를 점령하고, 호라산을 평정한 공으로 사파비 군대의 사령관 자리에까지 올라 마침내 1729년, 수도 이스파한을 회복하고 아시라프를 축출, 추살하여 왕자를 타흐마습 2세로 즉위시킨다.
이로써 나디르는 '''나디르 콜리 벡'''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벡은 이름이 아니고 칸이나 샤처럼 칭호를 의미한다. 벡의 칭호를 가진 다른 예로는 19세기 신장에서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야쿱 벡이 있다.
2.3.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
나디르는 여세를 몰아 호타키 왕조와의 하마단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서부를 회복한 후 이란 내부의 호타키 잔당마저 일소한 1730년, 호라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나디르의 높아지는 인기에 위기감을 느낀 타흐마습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다. (1732년)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1732년에 아라스 강을 국경으로 하는 현상유지의 아메드 파샤 조약을 맺고 물러선다.
타흐마습 2세의 나약한 모습에 분노한 나디르는 그를 폐위시키고 왕자를 아바스 3세로 즉위시킨다. 그리고 아직 걸음마인 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국정을 손에 쥔 채로 섭정이 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2.4. 오스만 제국과의 재 전쟁
오스만과의 전쟁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였는데, 전쟁에 우유부단하다는 이유로 타흐마습 2세를 폐위시켰으니, 승리만이 선왕의 폐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에 이란 서부에서 오스만 군에 대패하자(...) 그는 보복으로 이란의 튀르크인을 추방했다. 이후 반격을 하여 타브리즈를 회복한 후 오스만 제국의 본거지인 터키로 진격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승리에 대한 압박감에 나디르가 병사 시절 때부터 그를 따르던 정예부대는 악귀처럼 싸워댔고 튤립 시대의 사치와 번영으로 느슨해져 있던 오스만 군대[3] 를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 격파하고 캅카스[4] 등을 빼앗아 오스만 정부의 협상 요청을 이끌어 내었다.
1734년 나디르는 옛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랑 아바스 1세가 영유했던 고토 바그다드까지 탈환하고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에게 메소포타미아 땅 대부분을 빼앗겼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휴전을 원하지 않았으나 1735년, 러시아 제국에게 재차 크림 반도를 침공당하는 악재가 겹쳐, 양면 전선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전 협상에 응하였다.
그에따라 1736년에 체결된 코스탄티니예 조약에 따라 나디르는 이란 서부의 양도뿐만 아니라 오스만 령 캅카스까지 이란령으로 만드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5]
2.5. 아프샤르 왕조의 창건
연이은 엄청난 승리에 민중과 군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나디르는 1736년, 아라스강 하류 모간 평야의 대회의에서 자신이 4년 전에 옹립한 아바스 3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에서 물러나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으니 현자를 찾아 제위에 세울 것을 권하고 이 심오한 뜻을 깨달은 군민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자 스스로 '나디르 샤'를 선포하고, 왕중왕이 되어 이란의 이슬람화 이후 가장 강력하고 넓은 국가가 될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한다.
2.6. 인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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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 - 1743)
1737년부터 동쪽으로 진격하여 호타키 왕조에 대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맨 먼저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를 점령하였으며 1738년에 카불을 함락하고 아프간 전역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하고 복수를 마무리한다. 나디르 샤의 아들인 레자 콜리는 발흐를 점령하고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우즈베크족이 세운 부하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하여 우즈베크를 북쪽으로 추방시켰다.[6]
한편, 16 - 17세기 동안 아프간의 대부분은 사파비, 남부와 카불 지방은 무굴 제국이 나누어 지배했는데, 1738년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에 사신을 보내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절대 무굴에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지만 무굴 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는 말로만 그렇게 했을 뿐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받아들였고 화가 난 나디르 샤는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사신은 델리의 궁전에 감금되었고 세번째 사신은 목이 잘린 채로 돌아왔다.
이에 격노하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이란과 대비되었던 인도의 부가 탐났던 나디르 샤는 5만 5천의 군대로 친정하여 카이베르 고개에서 한차례 승리를 거둔 뒤, 술라이만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을 건너 무굴 제국으로 진격하여 펀자브 지역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시크 왕국이 타격을 입은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자 무굴 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는 아프간족과 오스만, 오만 등을 격파한 명성을 익히 들어 기병, 보병, 포병에 전투 코끼리까지 혼합된 30만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나디르 샤를 맞이하러 원정길에 올랐다[7] . 허나 이때 무굴 제국은 쇠퇴기에다가 시크 왕국과 마라타 동맹에게 패한 직후라서 군대의 규모도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약화되어 있었다.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 군대는 피로를 풀 여유도 없이 1739년 델리 인근에 있는 카르날 평원에서 무하마드 샤가 직접 지휘하는 무굴 제국의 대군과 맞부딪혔다('''카르날 전투'''). 그러나 무굴 제국군의 성급함 및 페르시아군의 활과 대포가 사정거리에서 무굴 제국의 활과 대포보다 월등하고 병사들의 백병전 기술도 페르시아군이 강했으며, 더 나아가 무굴 제국군 수뇌부의 정치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주력군이 멀쩡한데도 분열되어 무굴 제국군은 사실상 자멸하고 말았다.[8]
이제 북인도에서 나디르 샤를 막을 자는 없었고 결국 포위당한 무하마드 샤는 항복하였으며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 샤를 사면하였다. 나디르 샤는 델리로 입성하였으나 몇 명의 인도인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그의 보좌관 한명을 죽이자 화가 치민 나디르 샤는 군사들에게 하루종일 인도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문에 무굴 제국 내에서 200여년간 번영을 누리던 델리는 수십일간 약탈을 당하고 3만명의 인도인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델리에서 나디르 샤가 저지른 살육은 이후 인도어에 대량학살을 뜻하는 '나디르샤시(Nadirshahi)'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 나디르 샤의 대침공으로 정예군이 개발살난 무굴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2.7. 황금기: 인더스 강부터 자그로스 산맥까지
이 때에 나디르 샤는 인더스 강 서쪽을 할양받았으며 또 눈독을 들여 가져온 무굴 황실 보물 중에는 공작 옥좌[9] 와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인 '빛의 산' 코이누르[10] 다이아몬드가 있었다.[11] 북인도의 약탈품만으로도 몇년치 국가예산은 충족시켰기에 나디르 샤는 3년여간 제국의 세금을 철폐해도 될 지경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행하였다. '''이 시기가 나디르 샤의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의 영토는 과거 사산 제국에 버금갔다.
2.7.1. 해군 육성 프로젝트
1741년에는 나디르 샤가 해군 육성에 직접 개입하였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인더스 강 서부지역의 물자를 바닷길로 수송하기 위해 재해권 장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 지역이 아무래도 해군과는 반쯤 담 쌓고 있었다보니(...) 관련 조선 기술자나 조선소가 없었기에 인도 서부에 있던 조지 2세 하의 영국 동인도 회사에 선박 1척을 주문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건조한 최신식 전함은 매우 우수하였으나, 정작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나디르 샤는 이란 서남부 페르시아 만에 있는 항구도시 부셰르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직접 선박을 건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선 기술자가 부족하였으며, 더불어 페르시아 만 해안지역에는 목재가 없었기 때문에 카스피 해 남부 연안에 있는 마잔다란 숲에서 목재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이란 고원지대의 특성상 수송이 너무 힘들어서 노동자들이 목재를 수송하다가 과로로 죽어나갔다고 한다.
결국, 나디르 샤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추가적으로 선박 14척을 주문하여 총 15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해군을 건설하였다. 비록 급조되긴 했지만 제 값은 했는지 페르시아 해군이 바레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쇠퇴 이후 동아프리카 연안을 지배하며 번영하던 야리바조의 오만 제국을 본거지에서 격파하여, 오만 제국은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긴 후 페르시아 만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란의 오만 원정은 얼마 못가고 1745년 '사이드 가'에게 아프샤르군이 패배하여 오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로써 오만에는 현 왕조인 '사이드 왕조'가 건국되었다.
2.7.2. 중앙아시아 원정
1740년, 나디르 샤의 불패 군대는 트란스옥시아나의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을 공격한다. 티무르 제국의 본거지였던 그곳은 이미 200여년 간 우즈베크족이 세운 두 칸국들의 소유였다. 나디르 샤 본인의 롤모델이기도 한 칭기즈 칸, 아미르 티무르에게 함락된 과거가 있는 두 도시는 나디르 샤에게도 함락되었다. 이로써 나디르 샤는 중앙아시아도 평정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이래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강)까지 아프샤르 왕조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12]
나디르 샤는 카불 지역을 아프샤르 왕조 동부지역의 핵심이자 주요 행정망으로 삼았으며, 옥수스 강 남부지역과 인더스 강 서부지역 모두 카불 지역의 컨트롤 타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2.8. 부자갈등,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 원정 이후부터 교만해지고 탐욕스러워졌다. 1741년, 터키 원정을 준비하며 정복에 열을 올리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마자다란'에서의 암살 기도였다.
나디르 샤가 말을 타고 숲속을 거닐다 한 아프간인이 나디르 샤를 화승총으로 저격하였으나 총알은 그의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냈으며[13] , 그가 탄 말의 앞머리를 맞추었다. 암살시도는 실패하였지만 그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파멸의 시작인 다게스탄 원정이 진행되던 중, 저격수를 쫓으라고 보낸 추격병들이 저격수를 잡아 나디르 샤의 캠프로 끌고 왔다.[14] '닉 카담'이라 불리는 저격수는 자신이 나디르 샤를 저격한 저격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나디르 샤는 사실대로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말에 저격수 닉 카담은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나디르 샤를 저격하라고 제안한 사람은 다름아닌 나디르 샤의 맏아들 '레자 콜리'였으며, 닉 카담의 친구 한 명이 레자 콜리의 하인이라 둘이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에 크게 분노한 나디르 샤는 닉 카담의 눈알을 뽑아버렸다.
1741년 11월에 나디르 샤가 불렀던 자식들이 도착하였다. 그 중에 레자 콜리도 있었는데, 나디르 샤는 다른 자식들을 반갑게 맞이했나, 유독 레자 콜리를 냉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나디르 샤는 수상한 낌새를 느꼈으며, 레자 콜리는 칼을 뽑아들었다. 나디르 샤가 크게 고함을 치자 레자 콜리는 칼을 바닥에 내리꽂았다고 한다.
레자 콜리는 암살 시도에 대해 전혀 죄책감이 없으며, 나디르 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디르 샤는 그나마 있는 이성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레자 콜리는 완강했다. 이에 나디르 샤는 암살 시도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레자 콜리가 한 말이 가관인데
결국 나디르 샤는 폭발하였고,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왕위 계승자인 그를 코렁탕을 먹이고 장님으로 만들고 만다. 이 때 눈이 뽑힌 레자 쿨리는 "아바마마가 내던진 것은 나의 눈알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눈알입니다." 라며 절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말년의 그의 사리분별력과 분노조절 능력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눈알을)뽑으시오, 뽑아서 당신 아내의 보X에다 쑤셔넣으시오!'''
2.9. 오스만 제국과의 재대결
1743년, 보스포루스부터 인더스 까지의 옛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로 나디르 샤는 다시금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다.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갈아버리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무려 375,000명을 동원하였는데, 덕분에 극심하고 가혹한 징발과[15] 재산 매각 압박이 벌어졌고, 아프샤르 왕조의 시민들은 급격히 빈곤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프샤르 왕조 각지에서 일어나던 반란의 규모와 횟수가 크게 증가하는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스만과의 전쟁은 양측 모두 누구의 승자도 없는 전투가 되어 이 전쟁이 그의 마지막 대규모 원정이자 그가 이기지 못한 유일한 전쟁이었다.[16]
협정을 체결하면서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의 24대 술탄 마흐무트 1세에게 휴전의 의미로 25,000개의 진주로 장식한 황금 도금된 옥좌를 선물하였다. 오스만의 마흐무트 1세도 답례로 나디르 샤에게 에메랄드가 3개 박힌 단검을 선물했다고 한다.[17]
2.10. 실패한 내치와 연이은 반란
10여년 간 이어진 나디르 샤의 내치는 그의 전쟁 수행 능력과는 현저히 달랐다. 아니 '''완전 막장이었다.''' 튀르크계이며 철저한 수니파 신도였던 그는 시아파를 싫어하여 200여년간 지속된 사파비 지배의 부산물인 이란의 시아파 민중들에게 12이맘파(자파리파)를 수니파의 제 5학파(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에 포함시켜 수니파를 강요하였다.
거기다가 시아파 율법학자들을 탄압했으며 시아파 종교재단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하였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연이은 승전보와 강력한 군대와 장악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영광과 동시에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무리하면서까지[18] 시도한 원정들이 승리했고 약탈품도 많았지만 승전보와 함께 무거운 세금 고지서도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삶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암살 기도 후 공포정치의 정도가 심해져서 불만을 품은 백성들과 제국 내의 소수 민족들이랑 여러 지역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심지어 수도 '마슈하드'에서조차 반란이 일어나자, 나디르 샤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마슈하드의 봉기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각지에서 그의 탐욕스러움과 압제에 항거하는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페르시아는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역사는 훗날 이란에서 시아파 근본주의 및 그로 인한 반수니파 감정이 강하게 뿌리내리는 데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1745년,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에서 일어난 봉기는 특히 격렬하였고, 나디르 샤는 7년 전에 함락했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재함락시키고 가혹하게 응징하였다.
한편, 계속된 반란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고 기회를 잡은 오스만의 반격으로 정복했던 영토를 다시 빼앗기고 말아 결국 나디르 샤는 1746년, 국경을 1639년의 카스리 시린 조약 때로 되돌린다는 '케르덴 조약'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끝냈다.
1747년에는 나디르의 고향 호라산에서마저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2.11. 죽음
나디르 샤는 다문화 다민족 국가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유능하였으나, 정복지를 통치하는 데에는 영 부적격이었다.
1747년, 나디르 샤는 마슈하드에 출병하여 서부 이란의 쿠르드족 반란군을 진압하던 도중, 쿠칭에서 근위대의 반란을 의심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모든 병사와 장교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잔인한 명령은 군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나디르 샤의 병력 중 절대 다수를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나디르 샤는 진 내에서 잠을 자던 중,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때 암살 주모자인 장교 중 한 사람은 "그가 우리를 저녁 식사로 먹기 전에 먼저 그를 아침 식사로 먹자"라는 말을 남겼다고...
2.12. 죽음 이후
나디르 샤 사후 아프샤르 왕조는 어린 손자, '샤 루흐 미르자'가 재위하였으나 급속히 쇠퇴하여 호라산 일부로 축소되고, 트란스옥시아나 등의 지역들은 독립한다.
소국으로 전락한 아프샤르 왕조는 잔드 왕조를 대체하여 이란을 통일하게 되는 카자르 왕조에게 1796년에 멸망당한다.
티무르 제국과 종종 비교당한다. 하지만 영토는 일부 잃었지만 티무르 사후 40여년간 패권을 유지했던 티무르 제국과는 달리 아프샤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처럼, 기반이 부실했기에 바로 무너져 내렸다. 실질적 2대 통치자가 '샤 루흐'인 점은 닮긴 하다.[19] 실제로 나디르 샤의 모델이 티무르이긴 했다.
3. 전쟁광
나디르 샤는 전쟁을 매우 좋아하는 엄청난 전쟁광이었다. 이슬람 율법학자와의 대화에서 나디르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율법학자가 천국은 72명의 미녀들이 시중을 들며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모든 쾌락을 누리는 곳이라고 설명하자 나디르 샤는 '''"그럼 전쟁이 없고 환락만 있다는거 아니오? 그곳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소?"''' 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20]
4. 관련 문서
전쟁
공성전
야전
[1] 지금도 아프간은 수니파 국가로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의 감정이 좋지 않다.[2] 그래서 별칭이 타흐마습 쿨리(타흐마습의 노예)이다. [3] 하지만 그 '나약한' 오스만 군대는 1735-39년의 6차 합스부르크 전쟁에서 베오그라드 등 파사로비츠 조약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 위엄을 보인다.[4]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5] 하지만 불행히도 오스트리아가 바로 선전포고하여 오스만 제국은 다시금 양면 전선 크리를 맞게 돤다.[6] 다만, 승전보가 전해진 당시에는 나디르 샤가 칭찬해주었으나, 사실 이는 레자 콜리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으며, 향후 나디르 샤의 의심병에 불을 지펴주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7] 다만, 정황상 전투병은 8~10만 정도로 여겨진다.[8] 참고로 카르날 전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직접 덤볐다가 짓밟힌 무굴 제국군의 숫자는 15000명 정도이며, 15000명을 빼도 최소 60000명 이상의 전투병이 남아 있었다. 다만, 나디르 샤의 발언으로 보건대 무굴 제국군 자체는 꽤나 열심히 분투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9] 무굴 제국의 보물로써 침대만한 크기의 옥좌로 온갖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찬란하게 박혀있고 12개의 기둥이 용상위를 덮고 있는데다가 그위에는 보석으로 수놓은 공작새 모형이 날개를 펴고 있다. 이전 문서에는 이 옥좌가 레자 팔라비 샤 때까지 이란의 옥좌로 쓰였다고 적혀있었으나, 이는 '독특한 옥좌'라는 뜻의 Naderi를 오역한 것으로, 나디르 샤와 레자 팔레비의 옥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더욱이 팔레비 왕조의 옥좌는 카자르 왕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아예 제작 시기 자체가 다르다.[10] 우르두어로는 코이누르, 페르시아어는 고어누.[11] 벼락출세자로써 무굴 제국과 혈연 관계를 맺어 아프샤르 왕조를 천한 혈통으로부터 격상시키려 했던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 샤의 첫째 부인에게서 보석이 무굴 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의 터번에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얻어 무하마드 샤에게 관습대로 화친의 표시로 서로의 터번을 바꿔 쓸 것을 제안해 보석을 차지했다.[12] 이후 부하라 칸국은 명목상으로 존재하다가 1785년 망기드조에게 멸망당한다.[13]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다고 한다.[14] 캠프는 다게스탄 지역 근처이자, 카스피해 서쪽에 있던 이란 카라브 지역에 있었다.[15] 당시 페르시아의 인구는 500만이었는데 이 정도면 전체 인구의 7.5%를 동원했다.[16] 다게스탄 원정의 경우 피로스의 승리긴 해도 다게스탄 대부분을 장악하긴 했었다.[17] 나중에 나디르 샤가 암살당했을 때 마흐무트 1세는 그 선물한 단검을 훔쳐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황금 옥좌와 단검은 모두 톱카프 궁전에 전시되어있다. 흔히 '''톱카프의 단검'''이라 불리며, 보물관 최고의 전시물로 여겨지는 그 단검이다. 그리고 나디르 샤가 준 옥좌도 같은 보물관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여담으로 나디르 샤가 준 황금옥좌는 그간 백양왕조의 샤 이스마일의 옥좌로 알려져 있었는데, 20세기 초 연구결과 옥좌 제작방식에 무굴 제국특유의 기법이 적용되었음이 밝혀져 사실 이 옥좌는 무굴 제국에서 만들었는데 나디르 샤가 델리를 갈아버릴 적에 털어왔다가 오스만 제국에 선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장물이다(...)[18] 당시 페르시아의 인구는 천만도 되지 않았고 부유한 국가도 아니었기에 나디르가 시도한 원정들이 무리하면서 한 것이 맞다.[19] 다만 명군이었던 티무르 제국의 샤 루흐 랑은 달리 아프샤르조의 샤 루흐는 유약한 군주로 폐위당하여 장님이 되다가 나중에는 살해되었다.[20] 이와 비슷한 일화로 중세 유럽의 어느 기사가 가톨릭 신부로부터 "가난한 거지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지만, 부유한 귀족들은 죽어서 지옥에 갑니다."라는 설교를 듣자, "그러면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가고 싶소. 천국에 가봐야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만 있을텐데, 그런 곳에 뭐하러 갈 필요가 있단 말이오?"라고 비아냥거린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