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리드 2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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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동부 쿠사이르 아므라에 남아있는 그의 프레스코화
1. 개요
재위 743년 2월 6일 ~ 744년 4월 17일
우마이야 왕조의 11대 칼리파. 그는 젊은 시절 음주와 시에 흠취하여 사치스럽게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그의 별궁인 쿠사이르 암므라에는 비키니 입은 여성 그림 등 비이슬람적인 분위기가 자욱히 남아있다. 야지드 2세의 아들로서, 그는 숙부인 히샴이 사망한 후 즉위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라크 총독 유수프 이븐 우마르와 호라산 총독 나스르 이븐 사이야르 간의 분쟁 등 제국은 내분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짧은 치세에 비록 진압되었지만 자이디 쉬아파의 야흐야 이븐 자이드가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왈리드 2세의 방탕한 치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노예 후궁 나와르에게 예배를 인도하게 한 것이다. 칼리파는 통치자이기 전에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의 종교적 역할이 더 중요했는데, (최소한 9세기 초까지는) 어느날 무엣진 (기도 알리는 사람)이 와서 이맘의 직무 수행을 청하자 만취 상태이던 왈리드가 나와르에게 이를 맡긴 것이다. 칼리파의 복장으로 모스크의 미흐랍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대중들은 경악하였다. 예배는 어찌어찌 마무리되었지만 칼리파의 무책임함은 수도 다마스쿠스를 넘어 제국 전역에 퍼졌고, 우마이야 조를 무너뜨리려는 여러 세력의 명분이 되었다.
744년 초, 왈리드 2세는 동로마 전선에서 공을 세운[1] 사촌 술레이만을 경계하여 그를 투옥시켰다. 기존에 그의 방탕함을 비판하던 여론은 비윤리적 행동까지 추가되자 왈리드 2세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칼리파가 수도 외곽의 요새에 머물던 틈에 그의 사촌인 야지드 이븐 알 왈리드가 군대를 선동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술레이만을 석방한 후 왈리드 2세가 머룰던 있던 알 아그다프 요새를 포위하였다. 왈리드 2세는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이후 사촌 야지드가 칼리파가 되었다. (야지드 3세) 신임 칼리파는 사촌인 왈리드 2세의 수급을 다마스쿠스 시내에서 조리돌림하고 왈리드가 후계자로 지목한 그의 아들들인 우스만과 하캄을 투옥시켰다. 그에 불복한 홈스[2] 주민들이 왈리드 2세의 12촌이자 수피안 가문 (무아위야 1세 계열)의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 이븐 압둘라를 옹립하였지만 술레이만에게 패배하였다. 왈리드의 복수를 외치며 이라크로 진군해 온 아르메니아 총독 마르완도 대의를 위해 야지드 3세에 충성하였다.
[1] 아크로이논 전투에선 패했으나 742년 동로마 내전을 틈타 파플라고니아까지 진출해 많은 포로와 귀환함[2] 왈리드 2세는 카이스 족보다 예메니에 더 우호적이었는데, 이에 예메니에 속한 바누 칼브가 대다수였던 홈스 등 시리아 중부 일대의 주민들은 왈리드 2세에 충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