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야 왕조

 


<color=#373a3c><colbgcolor=#f4a460> '''우마이야 칼리파국'''
'''ٱلْخِلافَةُ ٱلأُمَوِيَّة'''‎
''al-Khilāfatu al-ʾUmawiyyah''
[image]
국기[1]
[image]
강역[2]
<colcolor=#373a3c> 존속기간
661년 ~ 750년
수도
다마스쿠스(661 ~ 744)
하란(744 ~ 750)
언어
아랍어(공용어)
콥트어
페르시아어
아람어
아르메니아어
베르베르어
쿠르드어
소그드어
종족구성
아랍인
베르베르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쿠르드인
그리스인
튀르크인
아르메니아인
소그드인
모사라베
정부형태
군주제(칼리파)
주요 칼리파
무아위야 1세
아브드 알 말리크
왈리드 1세
면적
13,150,000km²(어림값)
인구
33,000,000명~36,000,000명(추정치)
국교
이슬람
통화
디나르
이전국가
정통 칼리파조
동로마 제국
서고트 왕국
에프탈
이후국가
아바스 왕조
후우마이야 왕조
바르가와타
1. 개요
2. 건국
3. 이슬람 세습 왕조
3.1. 수피안 왕조
3.2. 마르완 왕조
3.3. 몰락
5. 건축과 예술
6.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목록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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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지어진 모스크
아랍어: الدولة الأموية (al-dawlah al-ʾumawiyyah), الخلافة الأموية (al-khilāfah al-ʾumawiyyah), الأمويون ‎(al-ʾUmawiyyūn)
영어: Umayyad Caliphate
우마이야 가문은 쿠라이시 부족의 상인 가문이었다. 제1차 피트나에서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부 수피안의 아들 무아위야가 제4대 칼리프인 알리를 누르고 스스로 제1대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정복을 이어받아 마그레브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신드 지역 등을 정복하였다. 717년 우마이야군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레온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히샴은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했지만, 히샴이 죽고 나자 카이스와 칼브 간의 분쟁이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했다. 749년 반란군들은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칼리파로 선포했다. 그는 아바스 왕조의 제1대 칼리파가 되었다. 그 후 750년 대 자브 강 전투에서 우마이야군은 패배했고,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두 번째 이슬람 칼리파 시대로써, 첫 번째 세습 칼리파 왕조이다. 과거 한국 교과서에서의 표기는 옴미아드 왕조였으나 21세기 들어 개정되었다. 전성기인 아브드 알 말리크 대에는 예루살렘에 현재도 남아있는 바위의 돔을 건설하였으며,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등 기존 로마 건축을 받아들인 건물을 각지에 남겼다.

2. 건국


정통 칼리파 시대 말기는 이슬람 신앙의 동요와 잇따른 음모로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3대 칼리파 우스만이 암살당하고, 그 배후가 밝혀지기 전 알리가 제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심을 품은 우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우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와 동맹을 맺은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가 이끄는 메카 귀족들과의 첫 전투인 낙타 전투(656년)에서 승리했으며, 그 후 벌어진 십핀 전투(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무아위야군은 협상을 요구했는데,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면서 알리를 은근히 궁지로 몰아넣었다. 알리는 협상을 받아들였지만 이에 반발한 하리지파가 떨어져 나갔다.[3]
그 후 661년 알리가 하리지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힘의 균형은 무아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파 자리에 올랐다. 여기서 이슬람교는 시아파, 수니파로 분열되었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손만을 무함마드의 후계자, 즉 칼리프로 여기는 세력이고, 수니파는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도 칼리프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집단이다.
당연히 시아파는 우마이야조를 포함한 수니파 정권을 부정한다. 이는 시아파 자체가 칼리파 선출제 폐지에 반발한 이들의 후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마이야 왕조 치하의 시아파 신도들이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3. 이슬람 세습 왕조



3.1. 수피안 왕조


[image]
무아위야 1세의 직계 칼리파는 3명에 불과하다. 이후 무아위야의 6촌 친척 마르완의 자손들이 세습한다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파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680년에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파 지위를 물려 준 후 죽었다. 이때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 이븐 알리가 알리 당파의 추대를 받았으나 카르발라에서 살해당했고, 이로써 칼리파 제도는 선출의 관행을 깨고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군사 조직도 옆나라 로마 제국의 양식에 따라 새로이 편제하였는데, 이는 강력한 중앙정권의 수립과 지속적인 영토 확장의 바탕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668년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가 실패하였지만, 이는 아랍-이슬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무슬림의 단결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야위야를 계승한 야지드 1세는 즉위하자마자 카르발라의 참극을 일으켜 후세인 이븐 알리를 무참히 살해하였으며 이에 이븐 주바이르가 반 우마이야 세력을 규합하여 내전을 일으킨다.(2차 피트나) 야지드 1세가 683년 낙마 사고로 죽고 어린 아들 무아위야 2세가 계승하였으나 1년만에 사망하여 수피안 왕조가 단절되고 방계의 큰어른인 마르완 1세가 시리아에서 자신을 칼리파로 선언하여 마르완 왕조가 시작되게 된다.
한편, 마르완이 즉위함과 동시에 쿠파에서는 반우마이야 봉기가 일어나 후세인을 죽인 우바이둘라를 쫓아냈다. (684년 봄) 쿠파 남쪽의 바스라 총독인 압달라 이븐 하리스는 집압을 시도하기는 커녕 이븐 주바이르 편으로 전향해 버렸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마르완을 칼리파로 인정한 것은 우마이야 가문과 바누 칼브 뿐이었고 자지라카이스 부족과 이븐 주바이르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684년 7월, 카이스 부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완의 군대와 대치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마르완은 다마스쿠스의 국고에서 가져온 금으로 카이스 병사들을 매수하여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아직 이븐 주바이르는 이집트, 히자즈, 이라크 남부의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684년 말, 쿠파에서는 시아파 무슬림 4천여명이 후세인을 배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봉기, 북진하였다가 685년 1월에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전멸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685년 초, 마르완과 칼브 군대는 마르즈 라히트 전투에서 주바이르 군을 격파, 이집트를 회복하였고 아들 아지즈를 총독으로 앉혔다. 한편, 주바이르의 세력이 약화되자 시아파인 무흐타르가 쿠파와 바스라를 차지하고 독립하던 시기에 마르완 1세가 사망하여 아브드 알 말리크가 계승하였다. 아브드 알 말리크의 승계 이후에도 이븐 주바이르와의 내전은 지속되어 한때 고전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이븐 부바이르를 전사시키고 내전을 종결시켰다.

3.2. 마르완 왕조


[image]
740년경 우마이야 제국
내전이 종식되고 제5대 칼리파인 아브드 알 말리크와 그의 아들인 왈리드 1세 의 치세는 전성기로 간주된다. 특히 왈리드 1세는 정복 사업을 매우 활발히 펼쳤다. 그의 치세에 우마이야조의 영토는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옥수스 강 건너편, 팔루치스탄과 펀자브 지방, 북아프리카 전역과 스페인 전역에 이르렀다.
한편 내정에 있어서는 완비된 역체제도, 밀정사찰 제도로 전제군주권을 강화하였고, 종래의 잡다한 통화체계를 개선하여 중앙정부가 발행한 순수한 아라비아풍의 디나르 금화와 디르함 은화로 통일하였다. 다수의 비 아랍계 주민들도 지즈야와 갖은 무슬림들의 탄압을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마왈리가 됨으로써 세금 수입이 대폭 감소하였다. 때문에 이라크 총독 하자지는 그들을 농지로 되돌려 보내고, 당초 부담한 지즈야와 인두세를 부과하였으므로 마왈리의 불만이 증대하였다.
특히 우마르 시기 땅에 대한 세금을 낼 의무가 있는 자가 개종할 때는 그 토지를 이슬람 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원래 소유주는 땅을 빌리는 입장에서 경영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실패하여 이후 수정된 하자지의 제도로 복귀하였다.
그밖에도 아랍어가 공식어로 선정되었으며, 제국의 재정을 재조직하여 그리스인들 대신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의 재정을 관리했다. 또 다마스쿠스에서 지방중심지를 잇는 정규적인 우편제도를 도입하여 통신제도를 개선했다.

3.3. 몰락


715년 형 왈리드의 뒤를 이은 술라이만은 선대의 총독들과 장군들을 숙청하였다. 그 후 술라이만은 동로마 정복에 나서 동생 마슬라마를 사령관으로 한 대군을 파견하였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하지만 숙청으로 인한 노련한 장군들의 부재와 그리스의 불을 이용한 동로마의 반격으로 침공군 측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이에 술라이만은 친정에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비록 그의 치세에 결말은 나지 않았지만 포위는 대실패로 귀결되었고 30년에 걸친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술라이만을 계승한 우마르 2세는 아랍인 무슬림과 비아랍인 무슬림 사이의 차별을 없애려고 시도하였으나 단명하여 구체적인 개혁은 성사되지 못했고, 우마르 2세를 승계한 야지드 2세 시절에 이라크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재정 위기가 심화되면서며 멸망의 전조가 드러난다. 히샴이 20년 가까이 재위하며 흔들리던 제국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였으나 멸망을 늦추는 데에 그쳤고, 서유럽 전역에서는 투르-푸아티에 전투, 동로마 전역에서는 아크로이논 전투 등에서 패배하였으며 베르베르족이 봉기하여 마그리브와 이베리아를 휩쓸고 인도와 하자르 전선에서도 패배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슬람 중심 정책을 강화하여 741년에는 비무슬림의 공직 취임을 금하였는데, 갓 개종한 마왈리들에게도 이러한 제약이 따르는 폐단이 발생하는 등 사회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8세기까지만 해도 무슬림 인구는 제국 전체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압바스 가문의 하쉬미야 세력은 각종 쉬아, 마왈리, 비무슬림들을 결집시켜 719년부터 비밀리에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히샴 사후 왈리드 2세가 즉위하였으나 이미 제국의 여러 지역은 내분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며 왕실의 내분까지 심각하였다. 마르완 2세가 겨우 혼란을 정리하는가 했으나 747년 아부 알 아바스를 위시한 반란군들이 우마이야 왕조에 불만을 품던 피지배층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749년에는 마침내 서부 속주들의 지원을 받은 하시미야파가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칼리프로 선포했다.(압바스 왕조) 마르완 2세는 750년 대 자브강 전투에서 패배했고, 마침내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했다.

4. 후우마이야 왕조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아바스 왕조를 세운 아바스는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들을 불러들여 모두 죽였다. 하지만 10대 칼리파 히삼의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운좋게 탈출하여 당시 우마이야조의 영토였던 현재의 스페인의 코르도바로 피신해 그곳의 지배자(에미르)가 되었다. 이를 후우마이야 왕조라고 한다.
제8대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치세에 정식으로 칼리파를 칭하고 왕조는 최전성기에 달했다. 11세기에 이르러 국력이 쇠퇴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알 안달루스 전역이 여러 개의 소국(타이파)으로 분열되었으며 1031년 마침내 멸망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완전히 단절된다.

5. 건축과 예술


[image]
요르단 동부에 위치한 카스르 아므라 궁전의 프레스코 벽화. 동로마(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해 우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 동물 등을 닮은 형체를 제작, 묘사하는 것조차 피하려하는 훗날의 이슬람[4]과 달리, 이 시절의 이슬람이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하기까지는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5].
칼리파들은 화려한 궁전 외에도 오아시스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고, 사치스럽고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이들은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였고, 전제[6]적이고 화려한 생활방식 또한 흡수하였다. 이런 태도들은 독실한 신자들에게 지탄받았고, 왕조의 신망을 추락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6.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목록



대수
이름
재위기간
비고
1대
무아위야 1세
661~680
이슬람 제국이 이프라키야(튀니지, 리비아)로 팽창했다. 2차례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일어났다.
2대
야지드 1세
680~683
카르발라의 참극이 일어났다. 이븐 주바이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3대
무아위야 2세
683~684
이븐 주바이르의 세력이 이집트,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동부에 이르게 되었다.
4대
마르완 1세
684~685
마르완 왕조가 개창 되었다. 이븐 주바이르의 세력이 약화 되었다.
5대
아브드 알 말리크
685~705
마그레브가 정복되어 우마이야 왕조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6대
왈리드 1세
705~715
이베리아 반도가 정복되었다.
7대
술라이만
715~717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8대
우마르 2세
717~720
아랍인과 비아랍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파격적인 개혁이 시도되었다.
9대
야지드 2세
720~724

10대
히샴
724~743
투르 푸아티에 전투, 아크로이논 전투, 목마름의 하루 등 우마이야 왕조의 유명한 패전이 일어났다.
11대
왈리드 2세
743~744
제국에서 여러 번의 반란이 일어나 내전의 조짐을 보였다.
12대
야지드 3세
744

13대
이브라힘
744

14대
마르완 2세
744~750
계속되던 내전을 정리하고 제국을 일시적으로 통합하였으나 아바스 왕조의 초대 칼리파 아부 알 아바스와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였다.
우마미야 왕조와 후우마이야 왕조의 계보도

7. 둘러보기

















[1] 하얀색 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당나라 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구당서에 백의대식(白衣大食)이라고 언급되었다.[2] 붉은색이 초기 이슬람 제국, 주황색이 정통 칼리파 시대에 정복한 영토, 노란색이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영토[3] 하리지파는 수니파와 시아파를 모두 거부하고 굳이 쿠라이쉬 부족 사람(알리와 무야위야는 모두 쿠라이쉬 부족이다)이 아니더라도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두 종파에게 모두 박해받았다.[4] 페르시아 세밀화나 무굴의 회화를 보면 후대에도 인물화를 많이 남기긴 했다.[5] 오늘날 골수 이슬람은 조각상, 그림은 물론이고 아이들 인형조차 우상으로 여겨질까 꺼린다. 터키 같이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세속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슬람 주류 국가들은 이런 경향이 그래도 없는 편이다(터키는 국교가 없다). 참고로 이렇게 우상숭배 극도로 피하려는 이슬람의 성향은, 이슬람문화권의 미(美)적 활동과 예술에 크게 영향을 끼쳐 이슬람 서예아라베스크가 등장, 발달하는 원인이 된다. 아라베스크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6] 專制. 표준국어대사전 기준으로 "국가의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고 그 개인의 의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함"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칼리파 중심의 (독재적인) 왕정을 의미한다. "칼리파가 전제적이다"라는 말은 이슬람 내부 세력에서 칼리파가 군주로 "완전히 군림하게 되었다"정도로 이해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