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샴
우마이야 왕조의 10대 칼리파.
재위 기간 724 - 7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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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아리하 (예리코)에 남아있는 히샴의 궁전 모자이크
1. 개요
히샴은, 두 차례의 콘스탄티노플 포위의 실패 이후 흔들리던 제국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였으나, 멸망을 늦추는 데에 그쳤으며, 투르-푸아티에 전투와 아크로이논 전투 등 우마이야 왕조의 유명한 패전들이 그의 치세에 일어났다.
우마이야 왕조에서 창건자 무아위야 1세와 간발의 차이로 두 번째로 긴 치세를 누린 칼리파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초반을 무아위야 1세가 대표하고, 전성기인 중반을 아브드 알 말리크와 왈리드 1세가 대표한다면, 후반기는 히샴이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2. 치세
2.1. 내치
히샴은 724년에 형제였던 야지드 2세에게 많은 문제를 가진 우마이야 왕조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히샴은 재위 초반 우마이야 왕조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상당 부분 해결했고, 오랜 기간 재위에 있으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을 늦추었다. 히샴은 제국의 예술을 장려하였으며 페르시아나 동로마의 수많은 문학, 과학 작품의 번역을 감독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교육 수준을 끌어올렸다.
2.2. 동방 전선
히샴은 재위 초반 하자르와의 코카서스 지방에서의 전투에서 여러 패전을 경험했다. 히샴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반란으로 사실상 무너졌던 인도 서부에서의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재확립하였고, 718년 이후로 중단되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침략을 재개했다. 당시 히샴의 이복동생이였던 마슬라마와 히샴의 아들인 무야위야 이븐 히샴은 우마이야군의 장군으로 맹활약했는데, 마슬라마와 무야위야 이븐 히샴은 730년대에 거의 매년마다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략하였고,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의 성공은 740년,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우마이야군이 동로마 제국의 레온 3세가 이끄는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의미가 퇴색되나, 741년에 레온 3세가 사망하고 동로마 제국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다시 아나톨리아에 대한 습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
2.3. 서방 전선
서부 지역에서는 우마이야 왕조의 패배가 계속되었다.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군이 대패하고 아브드 알 라만 이븐 아브드 압달라 알 가비키가 사망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우마이야군의 공세는 크게 약화되었으며, 740년에는 마그레브 지역에서 베르베르 대항거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우마이야 왕조의 마그레브에 대한 지배가 붕괴되었으며, 봉기는 안달루스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다행히도 한달라의 활약으로 743년까지 안달루스와 튀니지, 알제리에서의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는 재확립되었으나, 모로코는 끝내 재점령하지 못해 모로코는 동부 이슬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된다.
2.4. 죽음과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
743년 히샴은 사망했고, 그의 치세가 끝났을때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은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히샴의 치세 말기부터 각지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였고, 히샴이 사망하자 반란은 수면위로 부상해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결국 히샴이 죽고 고작 7년만에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하게된다.
3. 자손
그의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우마이야 조 멸망 이후 아불 사파흐 주도로 벌어진 야파의 비극(우마이야 왕족 학살)에서 빠져나온 후, 마그레브를 거쳐 이베리아에서 후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 가계를 이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