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모중

 



王毛仲
? ~ 731년

1. 개요


고구려의 유민. 노비 출신에서 당나라의 국공의 직위까지 올라간 인물. 다만 당 현종으로 즉위하는 이융기의 측근이어서 가능했던 점도 있다.
구당서 왕모중 열전과 당나라 정처해의 문집 명황잡록에 행적이 남아있다.

2. 행적


본래는 고구려 장수였으나 멸망하고 노비가 돼 버린 왕구루(王求婁)의 아들이었다. 훗날 당 현종이 되는 임치왕 이융기의 수행노비가 되어 710년 3품인 대장군 직에 올랐다. 713년 당 예종의 누이 태평공주[1]가 당 현종의 제거를 노리자[2] 역으로 현종은 왕모중과 군사 300명을 보내 태평공주를 처단했다. 이 공으로 보국대장군, 좌우위대장군으로 승진했는데, 검교내위한구 겸 지감목사 직위를 받고 장안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병마(兵馬)를 다스리는 것이 뛰어나 새로운 관리방법을 도입해 24만마리의 병마를 43만마리로, 소 3만 5000두를 5만 두, 양 12,000마리를 28만 6000마리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왕모중의 권세가 점차 커져서 환관 고력사를 비롯한 환관들의 견제를 받았다. 730년 황제에게 병부상서의 직위를 요청했지만 왕모중이 역모를 꾸민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이를 거절했고, 이듬해인 731년 양주자사로 추방당하고 현 호남성 영주에서 교살당했다.
아들 넷이 있었지만 왕모중의 사망과 함께 먼 지방의 참군 직으로 쫓겨났다. 딸은 용무군 대장 갈복순[3]의 아들과 결혼했다.

[1] 측천무후의 딸로 당 현종에게는 고모가 된다. 측천무후를 가장 닮은 딸이었다고 측천무후 본인이 인증했을 정도.[2] 이러한 태평공주의 모반이 실은 현종측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3] 이 사람은 왕모중과 연좌되어 마찬가지로 좌천되었다가 732년 발해장문휴가 당의 등주(산동 반도 끝)를 공격했을 때 복직돼서 대발해 방어에 투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