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구려 | 高句麗
고려 |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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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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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64년(476년)경 고구려 강역과 삼경[2]
기원전 37년?[3] ~ 서기 668년 9월 21일 (70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고조선
현도군[4]
고구려현
안동도호부
발해
부여
원삼국시대
소고구려[5]
고구려부흥운동
신라
국호
졸본부여[6]
→ 고구려[7]
→ 고려[8]
위치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일대[9]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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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건국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1년 서안평 점령[115]
313년 낙랑군 축출
314년 대방군 축출[116]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성 천도
475년 위례성 점령
494년 부여 병합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고구려 멸망

수도
졸본성[10]국내성[11]평양성[12]
삼경
국내성 · 평양성 · 한성[13]
종족
예맥[14], 한(韓), 말갈[15]
언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구결
종교
불교, 토속 종교[16]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태왕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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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고(高)[17]
현재 국가
북한, 대한민국, 중국(만주), 러시아
1. 개요
2. 국호
2.1. 표기
2.2. 발음
6. 정치 제도
7. 군사
7.1. 편제
7.2. 병종
7.3. 주력대
7.4. 병기
7.5. 수군(水軍)
8. 국력
9. 영역과 행정구역
10. 멸망 이후
11. 일본의 고구려 유민
1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2.1. 기원
12.2. 계승
12.2.1. 현대
12.2.2. 현대 이전
12.2.2.1. 한국
12.2.2.1.1. 통일신라
12.2.2.1.2. 발해
12.2.2.1.3. 후고구려와 고려
12.2.2.1.4. 조선
12.2.2.1.5. 대한제국
12.2.2.2. 중국
12.2.2.2.1. 당나라
12.2.2.2.2. 송나라
12.2.2.2.3. 요나라
12.2.2.2.4. 원나라
12.2.2.2.5. 명나라
12.2.2.3. 일본
12.2.2.4. 몽골
12.2.2.4.1. 몽골 제국
13. 관련 사료 목록
13.1. 한국
13.2. 일본
13.3. 중국
14. 고구려/문화재
14.1. 유적
18.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21. 기타
22. 같이 보기
2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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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삼국시대 세 나라 중 북쪽에 위치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도 발해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국가였다. 신라(991년) 다음으로 긴 기간(704년) 존속한 장수 왕조이기도 하며,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전한, 후한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가 등장하였다.

2. 국호



2.1. 표기


언어
명칭 및 해설
한국어
고구려(高句麗) / 고려(高麗)

장수왕 이후와 고구려 멸망 이후, 대개 고려라는 말이 쓰였지만 현대의 한국어로는 왕건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라고만 불린다.
중국어
가오리(Gāolí, 高麗), 가오거우리(Gāogōulí, 高句麗)[18] 현대 관화 기준이다.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麗'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19]

고구려의 경우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Cə.[k]ˤaw[k]ˤ(r)o[r]ˤe-s,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kawkuwlejH로 발음했다. 한글로 비슷하게 표기하자면 각각 "헤카우크로ㄹ헤스" 및 "캬우큐레이유" 정도. 고려의 경우 상고한어로는 Cə.[k]ˤaw[r]ˤe-s (대략 "헤카우ㄹ헤스"), 중고한어로는 kawlejH (대략 "캬우레이유")로 발음했다.
일본어
고쿠리((こう((), 고라이(高麗(こうらい)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등으로 써 놓고 '고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고대 티베트어
케우리(Ke'u-li)[20]
페르시아어
(11세기)
모크란(Mokraan)[21]
고대 돌궐
뵈클리(𐰋𐰇𐰚𐰠𐰃, Bökli)[22]
그리스어
무크리(Moúkri)[23]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24],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25]
베트남어
까오까우리(Cao Câu Ly)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麗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이 지역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을 부르던 이름으로 추정된다. 현도군은 본래 압록강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신빈 일대)에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시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고유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高句麗(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26]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냥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700여 년 내내 전부 고구려라고 부르는 관습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때 국호를 바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27]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句麗)보다는 고려(高麗)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한자어 그대로 '높다', '숭고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 한자 문화권에서 정식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듯이 또는 그것이 '고'와 발음이 비슷한 당시의 고유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주변의 말갈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만주어로 '나라'를 뜻하는 '구룬'과 연관이 있다는 설도 있다. 비슷한 예로는 신라의 왕호인 간과 유목민들의 왕호인 칸의 유사성이 있다.[28]
장수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 부른다"는 기록에 미루어 고려라는 국호가 성을 뜻하는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명확한 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또 일각에서는 '뵈클리', '모크란' 등의 표현으로 미루어,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뵈클리'가 다시 '뵉(맥)'과 '리(예)'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관련 칼럼. 고구려=높은 성城으로 해석하고 있다. 맥구려는 맥의 성.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궁예가 세운 나라를 통째로 후고구려[29],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건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태봉, 고려 문서 참고.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오대십국시대송나라를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상세히 조사하는 것도 아닌데 이름이 똑같은 고려니깐.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식으로 쓰지만.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일본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로 자처했다. 발해라는 국호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발해의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설이 있다.[30]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이고.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o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31]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o로 표기했다.
왕건 고려 땐 句高麗(구고려)[32], 駒驪(구려)[33]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後高麗(후고려)[34]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동국이상국집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我高麗(아고려), 즉 우리 고려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35]

2.2. 발음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초의 한글 문헌을 보면 고려 시대 후기, 조선 시대에도 高麗를 고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36] 한국 한자음은 중국 중고음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 한자음은 , 무렵에 불렀던 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발해학회에서 발표했던 서길수 교수의 高句麗 소리값 연구. 이 연구에 따르면 高句의 소리값은 '고구'가 맞지만 麗의 소리값은 '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려'를 '리' 라고 발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까지 '리' 라고 발음하진 않는다. 한국에서는 '려' 라고 발음한다. '麗'는 대체로 중고음에서는 '려'에 가까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다. 삼국시대에 무어라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37] 16세기 조선의 훈몽자회에서는 고구려로 쓰여 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麗의 중고한어 발음은 일반적으로 /ljɛ/ 혹은 /lje/, 혹은 그 중간인 /lje̞/로 추정된다.[38]
희한하게도 동아시아 쪽 언어들은 발음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서역 쪽 언어들은 '말갈'과 비슷하다.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의 원음을 '맥구려'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로 보는 게 통설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범어잡명(梵語雜名)》에 의하면, 고구려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Mukuri라 하고, 한자로는 무구리(畝俱理)라 명시해놨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는 고구려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초기의 공신인 마리를 인명이 아니라 부족명으로 보아 이러한 호칭과 통한다는 의견도 보인다. 한편 막리지의 막리도 이러한 호칭과 같은 계통이고, 광개토대왕릉비여라는 지명도 같은 계통이라고 한다.
티베트는 서역에 위치했지만 '고구려'와 발음이 비슷한 케우리라고 부른다. 중국어 발음이 티베트에 전해저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麗(려) 자가 나라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리'라고 읽힌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고구리, 고려를 고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최초로 음차 표기된[39] 단어인 高離(고리)의 離(리)는 음차표기 되었던 전한시대 당시에는 rje(례)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한서》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烏弋山離(오익산리)라고 적혀있다. ria를 離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리(離)자는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등 마한의 국가명에서도 음차로 쓰이는데 비리(卑離)는 백제의 부리(夫里)와 같은 글자로 본다. 려든 리든 혼용해서 발음하고 썼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의 국호와 발음은 천 수백 년 뒤 국가인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수왕 때 고정한 고려라는 이름을 왕건이 세운 후고려가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 이름이 국제적으로 퍼져 옛 아라비아 상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는 명칭인 코리아로 불리고 있다. 어원을 생각하면 고구려라는 이름이 아직도 살짝 변형되어 살아남아 있는 셈.

3. 역사




4. 사회




5. 문화




6. 정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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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금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다섯 부족인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의 오부가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는 각각 비류나부(沸流那部)·연나부(椽那部)·환나부(桓那部)·관나부(貫那部)로도 불렸다. 연노부와 절노부의 또 다른 표기로 소노부(消奴部)와 제나부(提那部)도 있는데 소노부의 경우 연노부의 별칭이 비류수(沸流水) 근처에 있다는 뜻인 비류나부인 걸로 볼 때 연노부의 오기인 걸로 추정된다.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으며, 일종의 부족연명체적인 성격이 강해 이 오부의 부족장 중에서 선출된 연맹장이 곧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자 왕위는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바뀌었다. 백제의 정사암회의나 신라의 화백회의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는 귀족들의 회의인 제가회의가 귀족들의 합의기구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연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부터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40] 연노부는 계루부의 부상 이전에는 가장 강대했기 때문에 이후로도 종묘와 영성사직을 따로 모셨다.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후를 배출하여 왕비족으로 여겨졌다. 절노부는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부의 대가(大加)들 중 연노부와 절노부의 대가와 계루부의 왕족인 대가는 고추가(古雛加)라 불렸다.
고국천왕 대에 부족적 오부가 행정적 오부(동·서·남·북·중)로 개편되어 순노부는 동부(東部), 좌부(左部) 또는 청부(靑部)로, 연노부는 서부(西部), 우부(右部) 또는 백부(白部)로, 관노부는 남부(南部), 전부(前部) 또는 적부(赤部)로, 절노부는 북부(北部), 후부(後部) 또는 흑부(黑部)로, 계루부는 중부(中部), 내부(內部) 또는 황부(黃部)로 불리게 된다. 이를 따라 수도와 지방 또한 오부로 나뉘게 된다.
초기[41]
중기[42]
후기[43]
1등
상가(相加)
폐지
2등
대로(對盧)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3등
패자(沛者)
4등
고추(대)가(古鄒(大)加)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태대형(太大兄)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3등
대형(大兄)
7등
대형(大兄)
힐지(纈支)
4등
소형(小兄)
10등
소형(小兄)
실지(失支)
5등
주부(主簿)
5등
의후사(意候奢)
3등
울절(鬱折)
6등
우태(優/于台)
6등
오졸(烏拙)
7등
(승)사자((丞)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4등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알사(謁奢)
8등
대사자(大使者)
6등
대사(大奢)
9등
소사자(小使者)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
유사(儒奢)
10등
욕사(褥奢)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
계달사자(契達使者)
을사(乙奢)
8등
조의(皂衣)
11등
예속(翳屬)
5등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
11등
제형(諸兄)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
12등
과절(過節)
13등
불(과)절(不(過)節)
9등
선인(先人)
12등
선인(仙人)
14등
선인(先人)
실원(失元)
서인(庶人)

지방
욕살(褥薩)

고구려의 중앙관제에 대한 기록에는 관부 및 관직이 없다. 관직이 없는 건 관등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추측되며 관부의 경우 백제나 신라에는 그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누락된 것이 아니라면 행정적 오부가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중앙관제는 8~10등의 관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관등 조직은 형(兄)과 사자/사(使者/奢)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다. 형 계열은 연장자 혹은 가부장적 뜻을 가진 것으로 종래 족장 세력이 관리로 편제된 것이고, 사자 계열은 조세 및 공납을 거두어 들이는 뜻을 가진 것으로 행정적 사역인이 그들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된 것을 나타낸다. 수상급인 상가(相加)는 원래 좌보-우보 체제로 있었다가 나중에 신대왕 대에 국상(國相)으로 합쳐진다.
초기의 지방행정은 부(部)-성(城)-곡(谷)-촌(村)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성의 책임자는 태수(太守), 곡의 책임자는 재(宰)라 하였다. 미천왕 때 압록곡의 관리를 압록재라고 불렀던 것과 고노자의 관직 승진 사례를 통해 이러한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중기의 중앙관제는 소수림왕 대부터 율령제가 도입돼 부족연맹체제에서 고대 국가적 관료제로 변화되는 것이 확인된다. 13~14등의 관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고추가(古雛加)와 대사(大奢) 관등이 세분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측 기록인 당나라 때 저술된 북주의 역사를 다룬 《주서》와 수나라의 역사를 다룬 《수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관등은 중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송 때 저술된 《책부원귀》 또한 이 시기의 것을 따른다. 각 오부에 속한 관리들도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등으로 편제되었는데 중리대형(中裏大兄)의 경우 중리부에 속한 대형(大兄)을 의미하는 형태이다. 즉 각 오부의 가신체제(家臣體制)가 중앙관제에 흡수되어 일원적으로 정리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관제 정비 이후에는 국상 대신 대대로가 수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대대로는 귀족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초기에 비해 강력해진 왕권 아래에서도 귀족들의 합좌 정치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당시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국가 기밀사무에는 조의두대형 이상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귀족 내에서도 신분의 구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후기의 중앙관제는 《신당서》를 따르며 이 14관등은 고구려 후기 중앙관제의 완성된 모습일 것이다. 청나라 때 저술된 《통전》은 초기와 후기가 섞인 것(?)으로 보인다. 후기에는 무관직의 별도 설치도 일부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이 임명된 대모달(大模達)과 대형(大兄) 이상이 임명된 말객(末客)이 그것이다.
후기의 지방행정은 6세기 때 개편되면서 나타나는데 부(部)/대성(大城)-제성(諸城)-소성(小城)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부(部)의 책임자는 5등 이상의 욕살(褥薩)로 대성에 머물렀고, 제성의 책임자는 7등 이상의 처려근지(處閭近支), 소성의 책임자는 가라달(可邏達) 또는 누초(婁肖)라 하였다. 처려근지는 도사(道使)라고도 하였다. 가라달의 경우 독립된 지방관이 아니라 욕살, 처려근지의 직할지를 관장하던 막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욕살 중 네임드로는 당태종에게 거하게 깨졌던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있다.
이외에도 정착민과는 다른 유목민을 통제하기 위한 영(營)이나 부락(部落) 등의 지방행정 단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아전의 별칭이 공형(公兄)이었는데 고구려 대 형 계통 관명의 흔적일 수도 있다.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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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행렬도 일부

7.1. 편제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 고구려의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 조직도 일원적인 편제 구조로 국내성·평양성·한성(漢城 : 황해도 재령군)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었으며,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실시했다. 대모달의 관직은 5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었던 자리이며 말객의 경우 1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7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고대국가들처럼 5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의 계루부는 중앙군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을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이런 묘사가 덜하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국원왕 항목에서도 있지만 고구려군만 적기군으로 두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던 것이 나중에 소수림왕 때 국가적 율령 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대왕 때 관군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 통제하의 지휘 체계와 병력 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시 상비군의 체제가 중앙의 군대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연히 고대의 중앙과 지역의 권력의 균형을 볼 때나 그 이후에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보아 각 귀족마다 사병 집단은 존속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예시로 보자면 미군처럼 연방군과 주방위군의 형태와 같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미군과 다른 점은 평시에는 중앙의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주방위군 형태의 각 5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의 사병 집단이라는 점이다.

7.2. 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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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종은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잘 알려진 중장기병과 중장기병보다 무장이 덜한 중기병(重機兵) 그리고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과 기마궁수의 기병 병과가 존속했다. 크게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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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으로는 부월수(斧鉞手)/환도수(環刀手) /창수(槍手)/궁수(弓手)가 존재해 있다. 환도수(環刀手)/창수(槍手)는 중장보병에 속했으며 부월수(斧鉞手)는 경보병에 속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궁수(弓手)가 별도로 존속했다. 이외에 별도로 쇠뇌를 운영하는 병사나 공병과 같은 존재 그리고 취사 집단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부분적 기록에서만 유추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44]
고구려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개인의 신분과 경제 수준에 따라서 갑옷과 무장을 각자 갖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색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밀었다는 무사 집단의 경우에는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용어나 조의(皁衣)라는 표현이 나오나 둘다 모두 관등의 문제이고 실존 기록에는 적시돼 있지 않다. 위에 서술되었듯,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경당(扃堂)은 오늘날의 훈련소와 같은 군사학교의 역할을 하여 성인남성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고구려군에 즉각 편입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당(扃堂) 이전에는 좌식자(坐食者)라는 약탈 경제와 전투 목적의 지배 전사집단이 귀족층 내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학설이 여러가지이므로 그 존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계속 존속하여 군사력의 한 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7.3. 주력대



개마무사(鎧馬武士)라 불리우는 중장기병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경기병과 중기병들이 고구려의 주력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 방어기지인 산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산성 기병은 침공군에게는 매우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온 침공군의 배후와 보급로를 이들이 끊임없이 차단하여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방어전략에서 청야전술과 함께 산성과 산성의 주변에 있는 보루와 같은 군소기지들의 협력방어를 매우 중시했다. 덕분에 침공군은 장기 주둔도 어려웠지만 점령한 고구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일도 상당히 어렵게 되는 환경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고국원왕 시절에도 잘 나가던 전연이 국내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난 이유 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고구려의 이 방어 전략 체계의 우수함은 이후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에서 압도적인 적의 침공군에 맞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력으로 재차 증명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시 집단예민(集團隷民)에 속하는 말갈-거란등과 같은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간접 지배지역의 타 종족들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처럼 이들이 보조병 역할을 했을지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도 이들을 동원하면서 로마와 유사한 인센티브를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고구려가 거란-실위-말갈 등을 동원했던 기록들과 거란-실위-말갈족 등이 고구려의 멸망시기까지 함께 했던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7.4. 병기


고구려의 병장기들은 중국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될 만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군대가 입는 갑옷만 하더라도 높은 철 생산력과 가공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비록 손질에 손은 많이 가지만 방어력을 확실히 보장하는 찰갑이 고구려 초기부터 보편화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맥궁(貊弓)/고시(楛矢)가 유명했고, 건국신화에서도 주몽이 활의 명수였던 점, 말을 수출하고 대량으로 운영하여 경당(扃堂)에서도 활쏘기과 말타기를 배우게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궁병기병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의 병장기 수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특히 평원왕 때는 고구려의 쇠뇌를 개량하기 위해 수나라의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웃해서 빼돌릴 정도였다. 《수서》에서는 이 대목을 아주 치를 떨며 기록해 놓았다.
다만 수레는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 지역의 전장 환경과 더불어 산성을 기반으로 한 전투를 주 전략으로 펼친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차(戰車)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장기병의 존재가 전차의 충격력과 파괴력을 대신했기에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7.5. 수군(水軍)


고구려는 육군뿐 아니라 수군을 운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당대 삼국 가운데 최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가 언제부터 수군을 운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삼국 시대인 233년[45] 오나라에서는 조위의 후방을 견제하고자 요동의 호족 공손씨 정권에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들은 조위에 들켜 억류되었고 가까스로 이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고구려에서는 이때[46] 사신들을 오나라로 송환하면서 담비가죽 1000장과 꿩가죽, 각궁 등을 오나라에 선물로 보냈으며, 235년에도 오나라에 말 수백 필을 선물로 주었는데, 오나라의 사신선이 작아 80필만 싣고 가야 했다고 한다.
고구려 수군이 대대적으로 활약한 것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고 벌인 백제와의 전쟁이었는데, 삼국사기 광개토왕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년) 백제의 북방 해양거점이었던 관미성(關彌城)[47]을 함락해 한강 하구와 경기만의 백제 함대를 무력화시켰으며, 396년까지 인천, 한강 수로 그리고 남양 반도에 이르는 오늘날의 경기도충청도 일대에 걸치는 58개 성을 점령해 한반도 서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차지했는데 이때 수군이 동원되었다. 이어 광개토왕 20년(410년)에는 지금의 길림성 방면인 동부여에 대한 공략을 개시해 훈춘, 포시에트, 블라디보스토크 등이 있는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백제인으로 왜에 들어가서 "신라가 고구려와 짜고 대왕의 나라를 치려고 한다"며 참소하는 자가 있어서 왜왕이 병사를 풀어 신라와 왜의 인근 해안을 순찰하게 하였는데, 그때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왜의 순찰 돌던 병사(수군)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이보다 앞선 영락 14년(404년) 백제가 왜병을 앞세워 대방계[48]에 침공했을 때에 광개토대왕이 연선(連船) 즉 배를 거느리고 교전했다는 언급이 있어서, 고구려 수군의 활약이나 왜 수군과의 교전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고구려 수군의 리즈시절은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아주 남쪽으로 밀어내버렸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장수왕이 보낸 장군 제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시해된 뒤, 뒤를 이은 문주왕이 한성을 떠나 웅진으로 천도하고 이듬해인 476년에 중국 유송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고구려 수군에게 막히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동성왕 6년(484년)에도 마찬가지로 남제로의 사신 파견을 시도했지만 고구려 수군에 가로막혀서 못 가고 돌아올 정도였다. 고구려 수군 때문에 사신이 통하지 않아 곤욕을 치른 것은 왜국도 마찬가지여서, 왜왕 무(武)[49]가 유송에 보낸 표문에서 "조종(朝宗)을 어기지 않으려 하나 길이 백제를 지나게 되며 또 고구려가 무도해서 우리를 병탄(倂呑)하고자 합니다"라고 징징거리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수군은 백제-신라 연합군의 반격으로 다시 한강 유역을 내어주고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건재해서, 648년 당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신라의 김춘추가 하필 서해에서 고구려 수군에게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이 말갈병(또는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고수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의 《수서》는 고구려가 요서에서 수의 해양 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50] 수문제(文帝)는 곧 30만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 전선을 넘지 못했고, 수 양제 때인 612년에 제2차 고수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내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 수군이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기록은 "폭풍우를 만나는 바람에 배들이 표몰되어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하는데, 기상조건들을 분석해도 태풍이 올 계절은 아니라서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은 이듬해 평양성 공략에 나서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다. 신당서 고려전이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소정방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51]에서 깨뜨리고 마읍산을 빼앗은 후 평양성으로 나아갔다"고 해서, 소정방의 당군이 패강 즉 대동강에서 고구려군과 수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때 고구려 공격에 참전한 당의 장수 오흠의 묘지명에는 "용삭(龍朔) 원년(661년) (당 고종이) 패강도(浿江道)[52]에서 하늘의 도리를 받들고 위엄을 이어 죄를 물을 때, 군(君)은 배에 무기를 감추고 성루(城樓)에서 홀로 (적을) 굽어보고 분주히 달렸다. 배를 타고(浮龍) 수로를 따라 공격하니(水劍), 월협(月峽)[53]에서 앞서기를 다투며 명성을 날렸다."고 적어서, 오흠이 배를 타고 대동강 수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고구려 수군과 '수검(水劍)' 즉 해상전을 벌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묘지명에서는 고구려 수군이 당군에게 패했다고 하기는 했지만, 당군의 주 접근로인 대동강 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방어전을 펼쳤던 사실이 확인되는 셈이다.
​667년 당의 총사령관 이적이 이끄는 당의 육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곽대봉의 수군이 바다를 가로질러 평양을 직접 공격하고자 했다. 이 때 이적은 별장(別將) 풍사본을 시켜 곽대봉이 이끄는 당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케 했는데, 양곡과 무기를 실은 풍사본의 선박들이 파손되어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풍랑으로 인한 좌초이거나 혹은 적군의 공격으로 인한 침몰일 수밖에 없는데 기록에는 배가 파손된 원인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고구려 수군의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2년 뒤인 670년 궁모성(窮牟城)에서 거병한 검모잠은 유민들을 수습하여 대동강 남쪽에 도착하여 당의 관인들을 살해한 후, 다시 신라로 향해 한반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54]에 도착해, 앞서 고구려에서 신라로 망명했던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이곳에서 만나 한성(漢城)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았다고 한다. 검모잠과 안승이 만났던 사야도의 위치 비정은 논란이 있지만, 섬이었던 사실은 분명하며, 검모잠 세력과 안승 세력은 모두 일정 규모 이상의 수군 내지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수군의 전통은 훗날 발해에까지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

8.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영명 7년[55]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56]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57]

에 세종[58]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59]

는 섭라[60]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61]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62]

《수당가화》

고구려의 시작은 압록강 근처의 작은 소국이었고 4세기까지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유력한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존재감이 뚜렷할 정도로 그 위상이 매우 높아진다. 5세기광개토대왕, 장수왕문자명왕 대를 기점으로 한강 유역과 만주를 복속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7세기 즈음해서는 당대 세계사 국가들을 기준으로도 ,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 우마이야 왕조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상대라고 부를 만한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60년 이상 막아내면서 국력이 고갈되었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하여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지도층 분열이 겹치면서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 생산력
건국 직후의 고구려는 한사군 중에서도 현도군의 변방이었던 압록강 상류의 산지에서 낮은 농업 생산력으로 인구를 부양하며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판국이었다.[63] 특히 왕권은 미약했으며 왕위 찬탈도 일어났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송화강과 요하일대에 있는 동북평원과 간도, 평안도, 황해도, 한강 이북의 비옥한 땅을 구하여 높은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황해도 지역은 주도적으로 고구려 부흥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다만 가장 생산성이 높은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영유하지는 못하였다.
  • 군사력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백제를 굴복시켰다 자부하고, 중국으로부터 탐라와 백제, 말갈 등을 포함하는 패권을 인정받는가 하면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 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여[64] 일부는 멸망 때까지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하고 발해의 초석이 되기까지 한다. 후대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통제한 고구려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방증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을 경우 조금 과장해서 아시아의 역사가 굉장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 생산력의 한계로 인해 고구려는 끝내 백제나 신라를 완전 병탄하여 한반도 통일을 이룩할수는 없었다.
  • 인구수
멸망 당시에도 70만호 가량의 집계 인구를 보유했을 정도니 고구려가 얼마나 건실하게 국력을 길러왔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2~3만 병력에 나라가 휘청였지만 이정도는 말기에는 외지에 여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이며 상기된 것처럼 십수만 단위의 대군을 야전에 동원할 정도에 이른다.[65]
  • 외교력
초창기 고구려 관련 외교는 인접한 중국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정도 선에서 최고 책임자로서 해결을 보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에는 천자를 위시한 중앙 최고위 요인들이 다발로 뭉쳐서 대륙 반대편까지 인력과 물력을 박박 긁어와야 할 정도로 중원 대륙이 온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대가 되었다.[66]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고구려는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하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 말갈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인국으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구려를 상대하다 나라가 휘청였으며 가까스로 멸망시킨 후에도 이를 건사하지 못하고 국방력의 고갈이 현저해진다.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인상은 그 뒤로도 깊게 남아있어서 여몽전쟁 당시 몽골 제국쿠빌라이고려가 항복하자 당태종도 어찌하지 못한 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며 기뻐했고[67], 조선조준을지문덕살수대첩으로 시를 써놓자 명나라 사신이 굴욕을 느낀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니 고구려의 후예들이 20여 일 만에 수도를 뺏기고 의주까지 도망쳤을 리가 없다며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9. 영역과 행정구역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누었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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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과 초기 고구려의 세력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기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이천 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이십 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왕이 친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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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대 판도 (직접 지배지역)
고구려의 주요 도성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천여 리였다. 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천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위 지도에 첨언하자면 직접 지배한 지역 뿐만 아니라 거란, 말갈, 지두우 등 내몽골, 연해주, 북만주 일대에 산재한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등 요서 조양시~난하 서쪽을 제외한 북방 영토 거의 전부를 석권하는 것을 넘어 서북쪽의 내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며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비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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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세계지도,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위 지도는 대단원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용도로, 제작자가 너무 개략해서 그린 나머지 고대 일본이 일본 열도 전체를 지배한 것은 물론 사할린까지 뻗어 있는 것으로 오기하였으며, 이외에도 흉노족과 훈족이 같은 시기에 존재하는 등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난잡하게 표기하여 여러가지 세부적인 오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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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 내 말갈의 영역 일부가 고구려에 포함된 지도.
위 지도 역시 고구려 말기의 영역을 그렸는데 고구려의 말갈 지배를 좀 더 직접적이고 공고한 것으로 간주한 견해를 반영하였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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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경우에는 말갈, 거란, 실위 등 북방민족의 복속을 고구려의 강역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그러한 관점이 북한의 교과서에도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동부, 북-흑룡강남쪽류역, 동북-우쑤리강류역을 넘어 흑룡강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10. 멸망 이후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은 , 돌궐, 말갈, , 발해, 신라로 뿔뿔히 흩어졌다.
첫째로는 신라에 흡수된 일파이다. 이는 지금의 황해도 지역처럼 신라가 영역화해서 그대로 편입된 인구도 있고, 멸망 직전 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 그리고 검모잠안승을 따라 남하한 집단,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670년대 고구려부흥운동이 호로하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실패한 이후 부흥운동을 후원하던 신라로 피신한 집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신라에서 출신지별로 구성한 군부대인 9서당만 해도 고구려인(황금서당), 보덕국인(벽금서당, 적금서당), 말갈인(흑금서당)으로, 넓은 의미의 고구려계를 여러 분류로 구분했는데 신라에 언제 어떻게 유입됐는지에 따라 집단이 구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은 이후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다가 몇백년 뒤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에 기여하였고 이는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이어진다.
둘째로는 발해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다만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 뒤에 건국되었고 발해 건국의 중심 집단은 한때 당나라 내지에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당은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영주에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퉁구스계의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동쪽으로 이동해 발해를 건국한다. 이후 발해가 초기 영역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확장하면서 길림, 요동에 머물러 있던 인구를 흡수하였다. 발해는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발해인들은 보통 세갈래로 갈라져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의하거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갔으며,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냥 그 땅에 그대로 남아서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되었다.
셋째는 일본으로 이주해 간 집단으로, 신찬성씨록에서 52개의 고구려계 씨족이 확인된다.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됐지만 코마 후미야스처럼 일부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넷째로는 당나라 내부로 옮겨진 인구 중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집단으로, 연개소문의 아들들 및 연비 등 그 후손들, 그리고 당나라 군인으로 활동한 고선지이정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으로 갈라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아 725년 당현종의 태산 봉선의식 때까지도 고구려와 백제의 구 왕족을 '고려조선왕'과 '백제대방왕'으로 형식상 존치시켜 당나라 경사(장안)에 거주시키며 내신지번으로 삼아 이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를 이어 살면서 8~9세기를 거치며 당나라 사회에 동화되었다.[69] 다섯째로는 요동평양, 평안도 지역에 계속 남은 집단인데 여기는 본래 황해도와 함께 고구려의 3경을 이루는 핵심 지역 중 하나였지만 수-당나라와 고구려, 부흥군, 신라가 얽히고 설킨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 나당전쟁까지 끝난 시점에는 신당서에 의하면 요동에는 늙고 빈곤한 자만 남겨두고(弱窶者留安東) 나머지는 당나라 내지로 가능한 이주시킨 것으로 되어있어 이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사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특히 수도였던 평양성은 황폐화되었다. 거주인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훗날 고려가 복원하기 전까지는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여섯째로 몽골 고원 방면 북방 유목민 사회로 유입된 집단으로 고문간, 고공의 등이 이끌던 집단이 이에 해당한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로서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요는 고려와의 분쟁에서 고려가 아닌 자신들이 고구려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고,[70] , 후금, 청나라로 이어지는 여진족, 만주족,일본 제국#에게도 모델이었다.


11. 일본의 고구려 유민


일본에는 고구려 유민들의 영향이 엿보이는 곳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구려 유민 마을이 그것인데,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의 왕족(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인임은 확실해보임)이라는 약광(若光)[71]과 고구려 유민 수천이 정착하여 고마(高麗)군을 이루었다고 한다.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고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는데, 당시의 고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고마군민이 그 덕을 기려 고마 신사(高麗(こま神社(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고마 명신(高麗(こま明神(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메이지 유신 때 현재의 히다카(日高, 히와다 산+고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 상 없으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여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코리아타운 같은 형태로 사이타마 인근에 거주했는데 11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인끼리 통혼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한 지 500여 년 동안 고구려 혈통을 이어나간 셈이다. 하지만 500여 년이 한계였는지(...) 이후 일본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500년 동안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배타성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고마 신사와 그 일대를 가보면 산과 구릉 언덕이 꽤 많다. 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누볐던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와 유사한 지형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일본 여행기에서도 고마 신사를 방문한 챕터가 나온다.
고마 신사 주위에는 코마(高麗)역코마가와(高麗川)역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 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 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고마 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 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 무라카미 등 고구려 계통의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간토지방의 무사시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 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지방에 대거 이주한 게 원인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관련기사.
사이타마현 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의 마을 이름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토에서의 흔적.

1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2.1. 기원


고구려는 맥족이 기원이 된 것으로 보이며 신화를 볼 때 예족부여와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삼국유사 고구려 조 중

북부여에서 어려움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중

고구려 초기 수도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 부근의 망강루 고분군 6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는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유수현의 노하심(老河深) 고분군 출토품과 동일하여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긴다.

12.2. 계승



12.2.1. 현대



12.2.1.1. 남북한

조선시대에는 삼국중 하나로 여겼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루워졌던 북벌도 고구려 계승의식에서 비롯된것이었다. 그러나 요동반도를 명나라가 점유하고, 북벌도 4군 6진 이후로 지지부진해졌지만 그래도 고수전쟁에서 수양제를 패퇴시킨일이나 고당전쟁에서의 선전으로 군사대국이라는 이미지는 있었으며 특히 조선중기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군사력의 재방비를 논하면서 고구려가 모범으로 여겨졌고, 특히 정묘호란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으로 굴욕을 당하면서 북벌론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성화되었고, 민간에서 만주지역을 점유했던 고구려에 대한 인식도가 크게 높아졌다. 민간반란세력에서도 고토회복과 멸청을 내걸고 종종 북벌론을 내걸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외세의 침탈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고구려에 대한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관에 따라 고구려에 대한 연구과 가치관 정립이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제국의 식민사관인 타율성론에 대한 반발으로 중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던 고구려에 주목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온돌, 김치, 맥적이 이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12.2.1.1.1. 대한민국

현대 대한민국은 고구려를 한국사로 보고 있으며 널찍한 영토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고수전쟁, 고당전쟁에서의 선전까지 겹쳐 인해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중국에 자주적이었던 고구려나 고려를 좋아하고 신라, 백제, 조선을 비교적 경시하는 경향도 있다.그러나 중심지가 지역적으로 북한과 중국에 있는 상황이어서 경상도는 신라의 계승의식이 있고 충청남도[72]와 전라도는 백제의 계승의식이 있는 반면 딱히 고구려의 계승의식이 있는 지역은 없다.[73] 즉 민족사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주요영토가 북한 및 중국에 있는 탓에 향토사적으로는 파볼만한 여지가 그리 크지 못했다. 남한에 자리잡아 많은 유물, 유적을 남긴 신라나 백제와 달리 변변찮은 문화유산 하나 없어서 고작 고구려 보루 하나때문에 서울시 광진구와 구리시가 고구려의 도시라 놓고 싸우는 실정이다.
현대 한국에서는 중국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반발도 있고 근현대사의 굴욕과 만주상실에 대한 아쉬움으로[74] 대륙에 대한 로망이 강해지면서 신라, 조선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75] 중간에 끼인 고조선, 부여, 백제, 가야, 발해, 고려는 묻혀가는 데 반해[76], 고구려의 경우는 만주 근역을 아우른 영토와 중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역사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77] 다만 일부에서는 이 시각을 극대화하여 논란이 생길 정도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존재하다보니 일본제국 같은 제국주의 국가는 까면서 정복전쟁 벌이던 자국왕조는 좋아하냐며 이중잣대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 고구려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환빠는 아니지만, 반대로 환빠들은 고구려와 대륙영토를 좋아하는 경우가 100%라고 봐도 무방해 이미지가 겹치기 때문에, 순수한 고구려 애호자가 극단적 민족주의자나 환빠로 종종 오해받기도 한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지상파 대하드라마 등 창작물들도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빠적 요소가 전혀 안 들어간 걸 찾기가 더 힘든 시기도 있었고[78] 이로 인해 작품 전체가 저평가당하기도 하는 등 고구려도 후대의 이런 인식에 의한 피해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족으로 만주 영토에 대한 한반도 국가의 정통성은 늦어도 조선초기에 사라진다고 봐야하든데 고구려의 주요 민족인 예맥족이 만주에서 기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백제, 신라와 패권을 다툰 곳은 한민족 역사의 주 무대인 한반도였고, 고구려가 멸망하고 통일신라가 세워진 후부터는 만주에 대한 한반도 세력이 옅어지며, 고려시기엔 만주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게 되면서 만주는 한반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발해 멸망 이후로도 조선 초기무렵까지도 예맥인들이 오랜기간 동안 만주에 주거하기는 했고, 조선초의 기록을 보면, 이들은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여겼다는 기록도 있지만 고려말-조선초의 요동정벌이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명나라에 복속된 이후로는 오랜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가 한족이나 만주족으로 동화되어버렸다.

12.2.1.1.2. 북한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북한은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왕조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79] 특히 이들 중에서도 수도가 평양이고[80] 가장 당대 위상이 높은 고구려에 대한 관심과 계승의식이 무척이나 높고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바라보며 당시 초강대국 중국에 맞서던 고구려를 현재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는 자신들 처지와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다. 한편 남한은 미국의 동맹이고 위치도 위치인지라 중국과 동맹을 맺은 신라 취급한다.[81] 그래서 동명왕릉과 그 능침사찰인 정릉사를 개건하고 평양의 고구려 유적을 정비하는 등 계승의식을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 통구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단독 등재하려는 시도를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북한 내의 고구려 고분군을 신청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같이 등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악 3호분이나 동명왕릉에 대해서 무리한 해석을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12.2.1.2. 중국


중국은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비교적 근래들어 사관을 바꿔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은 주변 국가와의 접경지역에서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부 차원에서 이론 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을 하는데, 이를 역사공정이라고 한다.[82] 한국과 맞닿아 있는 동북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구려와 고조선과 발해의 역사도 이 공정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를 중국의 동북공정이라고 하여 한국, 북한은 물론 동북아 지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글로벌 역사학계에서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한 역사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국 학자들의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관련 연구와 답사 역시 자유롭지 못한 편인 상황.[83]
이에 대한 일환으로 동북공정을 실시 하였고 통구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쪽은 남북한의 합작으로 사실상 동북공정을 부정하는 방향[84]으로 등재된, 중국 입장에선 실패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12.2.1.3. 일본

전근대 일본에서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보 업데이트 및 파악이 늦은 편이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에 고려로 국호를 바꾸어서 현재의 삼국시대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의 구분은 후대의 편의적인 것으로 高麗라고 자칭하는 한반도 세력이 워낙 많다보니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던 점도 있다.(삼국시대 고려도 발해도 왕건의 고려도 다 高麗를 자칭했으니)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조선 대신 高麗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한반도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일본도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었으나[85]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북부의 예맥계 종족과 남부의 한계 종족을 언어,민족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의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고(사실 이런 시도는 당시의 대륙진출의 사전 포석으로서 역사적으로 중국 한족이 장악하지 못했던 만주지역을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대항한 중국측 학자들의 연구(만주사가 중국의 일부인 근거를 찾으려는) 중국측 동북공정의 역사적 기원이 된다. 현재는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만주족(숙신-말갈-여진-만주로 이어지는 퉁구스어족)) 정권으로 왜곡하여 주장하는 일이 많아졌다.[86] 물론 퉁구스계 만주족과 예맥계 고구려인은 고대부터 언어부터 다르고 서로 이질적 존재였음은 중국측, 한국측 사서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를 어거지로 축소하고 비하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로 보이며 고구려뿐 아니라 왕건이나 이성계 등 역대 통일 왕조의 시조도 만주족으로 각색(...)하는 등 인터넷상으로 일본판 유사역사학에 기반하여 가관인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는 한국으로 치면 '환빠'와 비슷한 부류의 일본 아마추어 역사논자들 사이에서나 통할 뿐, 일본의 강단 학계에서는 당연히 고구려를 한국사로 여기며 가르치고 있다.
일본은 한국사의 적통을 진국 - 삼한 -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삼한 계통 중심으로 보고 부여나 고구려, 발해와 같은 북방의 예맥족 계통은 한국사 바깥의 이민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이는 열등한 한국인이 자기보다 먼저 만주에 진출했다는 점에 열등감을 가진 일본 우익 사관의 왜곡으로 보인다.[87]

12.2.2. 현대 이전




12.2.2.1. 한국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장수왕시기에 바뀐 고구려의 국명인데,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영문 국호 "Korea"의 어원이 되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특히 고려조선에 들어와 고구려를 개창한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와 왕실에서 올리는 제사 대상 가운데 포함될 정도였으며, 특히 수당전쟁에서의 위업과 고당전쟁에서의 선전이 위낙에 눈이 부신지라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일례로 고구려가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과 휘하 군대를 패퇴시킨 사실로 인해 쿠빌라이 칸이 자신에게 입조해 온 태자를 보며 '예전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 스스로 항복을 청해왔다'며 좋아했고 조선의 여러 문인들 역시 이 공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등 고려와 조선은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 삼전도의 굴욕으로 소중화 의식이 강해졌을때 고구려의 강대한 군사력을 부러워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해야한다는 의견이 대신들이나 선비들 사이에서 나왔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광개토대왕비문한글 전 한국어 표기 중 하나인 이두[88]가 사용된 글으로서 한문의 어순과 다른 일종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이 쓰여져 있어 한국어의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지(之)'나 '상(上)' 같은 이두식 표현이 그것이다.
고구려는 수도가 졸본성오녀산성, 국내성환도산성, 평양성대성산성 같은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수도 체제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국계 국가의 수도 체제이다.
한국 고유의 문화인 온돌은 고구려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후계 한국계 국가들에 자리잡았다.
중국의 성들은 벽돌을 이용하며 평지에 지형과 상관없이 인공적으로 네모 반듯한 형태로 쌓지만 한국의 성들은 분지지형에 주변 산맥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으며 벽돌이 아닌 돌과 흙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구려 성은 중국식 성벽과는 차이가 큰 한국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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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에서 복원한 안시성 이미지
고구려의 초기 고분 형태는 돌무지무덤으로 중국식인 굴식 돌방무덤하고 차이가 있다. 이는 북방 시베리아 계통이나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와 친연성이 강한 양식이다.[89]

12.2.2.1.1. 통일신라

통일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고구려 역시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영토 역시 평양, 원산 아랫부분을 점하여 고구려의 강역 일부를 획득하였다. 현재의 서울은 고구려가 '남평양성'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요지였으며 패서는 고구려의 3경[90] 중 하나였던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s-1.2이 있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패강진은 평양까지 포괄했다는 주장도 꽤나 지지를 얻고 있다. 이에 따르면 9세기 후반 후삼국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에는 신라는 짧게나마 평양까지 관할했던 것이 된다.[91]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 중 많은 수는 신라로 합류하였다. 전쟁포로로는 문무왕제3차 고당전쟁에 참전하였을때 평양성 전투에 합류하러 북상하다가 평양성이 당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구려 포로 7,000명을 이끌고 서라벌로 돌아간 기사가 있다. 항복한 지역으로는 연정토가 신라 접경 남부 국경 방어선의 책임자이면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신라에 바치면서 항복 했다는 기사가 있다.[92] 또한 대곡(大谷)[93]과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s-1.2(漢城)[94]을 포함한 2군 12성이 추가로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그래서 패서 지역은 신라와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바로 항복한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제3차 고당전쟁에서 신라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것은 평양성 인근에서 일어난 사천 전투 였다. 또한 반당적이었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대부분 신라군으로 합류하였다. 또한 신라에 대한 내투 집단에도 차이가 있는데, 고구려 멸망 직후 내투한 부류와 대조영 집단과 함께 영주 지역에서 탈주하다가 요동 방면에서 남쪽으로 빠져 같은 고구려계들이 널리 분포했던 패서 일대로 복귀한 부류가 그것이다.
친신라 반당적 성격의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며 함께 싸웠다. 그리고 신라는 패서고구려부흥운동 유민집단을 남방에 위치한 금마저[95]에 안치하여 신라의 괴뢰국인 보덕국을 설치 하였고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96]을 그 군주로 삼아 '고구려왕'이라는 봉작명을 주어 신라왕의 신하인 제후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는 보덕국을 684년에 해체시켜버리고 신라에 완전히 흡수하였다. 이때 안승에게 문무왕의 조카를 베필로 삼게하는 국혼을 하는 한편 김씨사성하여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는 정통성의 측면에서 볼때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을 이루었다는 증거가 된다.
중대 신라 왕실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했다는 삼한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 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당태종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이라며 태조 격의 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드는 임금)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 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신라 하대의 금속문을 통해서도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했다는 의식을 확인 할 수 있다.

지난날 우리 태종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97]

中.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98]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99]

中.



12.2.2.1.2. 발해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스스로를 '고려국왕'으로 칭하였고 부여의 풍습을 이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석실은 독특한 천장형태로 유명하다. 궁륭형이라 불리는 아치형 천장에서 시작하여서 모서리가 있는 절천정형 천장, 집모양을 딴 맞배지붕형 천장, 고임천장, 고임천장 가운데서도 삼각고임, 평행고임이 있으며 고임천정의 형태는 이중, 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의 고구려 석실들은 대부분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발해의 고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재제 또한 고구려 멸망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초창기의 발해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말갈이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고분문화도 고구려의 고분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12.2.2.1.3. 후고구려와 고려

고구려의 3경[100] 중 하나였던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s-1.2이 있던 패서 지역은 평양성에 비해 강제 이주가 그렇게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데다가 영주 방면에 있다가 탈주한 유민 집단의 합류로 더욱 고구려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훗날 신라의 영향권 안에는 들어갔으나 경주에서 워낙 거리가 먼데다 신라가 세력을 뻗치기 전까지의 시간도 길었고 신라 정부 자체도 그렇게까지 중앙 행정력을 강하게 투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라 치하 옛 백제 지역보다는 자율성을 더 누리게 되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후일 고려의 건국세력이 태동하게 된다. 고려의 창업자인 왕건의 선조인 강충이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패서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세력을 키웠다. 그래서 신라가 혼란기에 빠져들자 고려를 건국하고, 궁예의 힘을 빌려 옛 통일신라 영토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고 이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서 신라위주의 삼한일통에서 고려 위주의 삼한일통을 이루게 된다.
통일신라가 쇠퇴하자 궁예는 나라를 건국하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며 국명을 고려라 하였다.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폐위시킨후 궁예가 바꾼 국호를 고려로 되돌리고 고구려의 수도 였던 평양을 수도로 삼고 서경#s-1.1.1이라 명명하며 분사제도(分司制度)를 시행하여 평양에 조정을 설치하는 등 고구려 계승의지를 나타냈다.
고려의 건국세력 중에는 예전 고구려 남부영토의 패서 호족이 있었는데 왕건부터가 개경의 호족으로서 패서 호족 중 하나였고 황주[101]의 호족인 황보제공의 집안은 고려 초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등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정종서경#s-1.1.1으로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이유로 댔다.
성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사후 성종이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묘호는 대종(戴宗), 시호는 고려사절요 기준으로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인데 고려사 종실 열전에는 끝에 '대왕(大王)'이 '태왕#s-1(太王)'으로 되어 있다. '태왕#s-1(太王)'은 고구려에서 군주를 호칭할때 자주 사용한 호칭이다.[102]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여요전쟁 시기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면서 북한산 이북이 고구려의 옛땅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등에서 주장하는 식으로 고려가 단지 신라의 계승인 나라가 아닌 패서 지역 세력이 주축이 된 나라로서 고구려의 옛땅에서 그 유민들이 일어난 나라임을 고려인들 스스로도 인식 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서희는 외교적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밝혔다.
서희는 고려가 강동6주를 얻은 후에도 소손녕이 약속한 땅은 압록강 양안이라면서 이제 압록강 이남을 회복했고 강북은 아직이니 압록강 이북을 점유한 후에 거란과 국교를 맺자고 했는데 반려되었다. 이때 서희는 '옛땅을 수복한다.'라고 하여 고구려 계승의식을 드러내었다.
숙종은 죽기 얼마전인 1105년 8월, 고려의 또 하나의 수도였던 서경#s-1.1.1장락궁에 머무르면서 태자였던 예종에게 동명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열전, 윤관 中

여진은 고구려의 속해있는 한 부락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103]

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고려사, 열전, 윤관, 윤관이 임언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하다. 中

윤관이 여진을 공략한 뒤 성벽에 적은 글귀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이 드러난다.
중국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전근대 왕조들은 이전 왕조의 사서를 국가의 관찬사서로 집필함으로서 계승의 정통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고려왕조는 구삼국사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을 고려의 이전왕조로 표방하였다.[104]

논하여 말합니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中.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당나라에 고구려를 바친 연남생 부자에 대해 중국 입장에서야 공신일수 있겠지만 우리 고려의 입장에서는 중국에 나라를 팔은 매국노라 생각함을 알 수 있는 글로 고려의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엿볼수 있고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를 지방정권으로서 하나의 동류로 보지 않고 외국으로 인식한다는것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 시기 최광수서경#s-1.1.1에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공민왕 시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본래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
공민왕릉은 석실 벽화묘인데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있다. 그 별자리는 남두육성인데 고구려왕릉의 벽화에도 많이 그려져 있는 별자리로 특히 그 형태가 쌍령총의 남두육성의 형태와 완전히 같다. 무덤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그 종족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유적으로 이는 고려가 고구려와 이어지는 국가라는 것을 나타낸다.[105]
고구려 왕릉은 석실과 그 앞에 위치해있는 널길로 구성되어있는데 고려왕릉도 이런구조다. 또한 벽화분이라는 점도 같다.

12.2.2.1.4. 조선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

제3차 요동정벌 당시에 조선 관료들이 동명왕의 옛 강토 등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요동 정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6]
예종은 고구려의 고구려-당 전쟁을 언급하며 조선이 옛 삼국을 합친 나라인데 어째서 강역이 평안도에 불과했던 고구려 보다 조선의 군사수가 적은지 신하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조선은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와 백제는 초기 수도의 위치(졸본, 국내성, 위례성)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며 본류는 신라로 여기기는 하지만[107] 그래도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 모두의 계승의식이 있기는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3월 13일

실제로 조선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시조들에게 모두 똑같이 제사를 지냈었다.
이외에도 조선인들은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를 패퇴시킨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108] 또한 요동을 비롯한 만주 영토를 현재는 중국 땅이지만 과거에는 조상들의 고토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조선은 고구려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고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계승하였지만 현대의 대중적인 역사관에서 고구려와 조선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109]

12.2.2.1.5. 대한제국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099&cid=51384&categoryId=51385
독립신문에서 우리도 빨리 근대화를 성공시켜 요동과 만주를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고구려 계승의식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명이다.

12.2.2.2. 중국

현대 이전의 중국 국가들도 고려와 조선을 고구려의 후손들로 보았으며, 그들을 강군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인식했다.

12.2.2.2.1. 당나라

제3차 여요전쟁의 주공이었고 평양성 전투를 통해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멸망시켰으며 통치기관인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영토의 상당부분을 일시적으로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군주였던 보장왕에게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의 벼슬을 내리고 후에는 지방관인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제후왕인 조선왕(朝鮮王)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은 배반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어 쓰촨으로 유배보냈고 안동도호부나당전쟁의 패전으로 폐지하였으며 점령지는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의 발흥으로 거의 빼앗겼다.

12.2.2.2.2.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의 역사가가 고구려에서 계속 이어진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고려의 역사를 고구려와 뒤섞어 설명하고 있다.

貊賊入貢 無絲髮利而有五害 今請諸書與收買金箔 皆宜勿許.

"맥적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북송의 소동파가 한 말로 고려를 맥적이라 표현하였는데 은 고구려를 뜻한다. 이는 고려의 사신이 별 쓸데도 없는 물품들을 조공하면서 답례품은 귀하고 가치있는 걸로 받아가자 이를 도적이라며 욕한 것이다.

12.2.2.2.3. 요나라

여요전쟁 당시 1차 침입 때 정벌군의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영역에서 일어난 국가라고 하였다. 회담 상대편인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잇는 국가라고 주장하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요나라가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110]라고 불렀다.
요나라가 국서에서 숙종을 언급할때 삼한(三韓), 오부(五部)[111]의 주인으로 불렸다

12.2.2.2.4. 원나라

카다안의 침입시에 고려가 쩔쩔매자 원세조는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 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라 하였다.[112]

12.2.2.2.5. 명나라

최부(崔溥)의 표해록에는 중국의 관인(官人)들이 조선에서 온 최부에게 여수전쟁여당전쟁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중국 국가들에게 그렇게 강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일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원병을 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예전엔 당의 침입을 막아냈을 정도로 강했던 고구려의 후계국이 고작 왜구 따위를 막지 못하냐며 의문을 표하고 실은 요동을 수복하려고 일본과 합세해서 수작 부리는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하여 고구려를 중국사가 아닌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2.2.3. 일본


12.2.2.4. 몽골


12.2.2.4.1. 몽골 제국

몽골 부족들은 과거 북만주+내몽골 북단의 실위 부족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부족들 중 가장 강하다는 황두실위의 경우 고구려가 아예 도독까지 두며 직접적으로 통제했다고 하며, 몽골의 직계로 추정되는 몽올실위에게 철을 지원해 줬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몽올실위가 초원계에 진출하며[113] 카마그 몽골을 걸쳐 몽골제국에까지 이르게 된다.
쿠빌라이 칸고려 원종이 자신에게 항복하자 "당태종도 굴복 시키지 못한 고구려의 후손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며 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13. 관련 사료 목록



13.1. 한국



13.2. 일본



13.3. 중국



13.4. 금석문



14. 고구려/문화재



14.1. 유적



15. 연표




16. 왕사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좀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 한국에는 고주몽을 시조,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그것이다.

17. 인물




18.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19. 고구려부흥운동




20. 고구려/창작물




21. 기타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가 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114]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으로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22. 같이 보기



23. 둘러보기


















[1]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 뿐이니, 만약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붉은 깃발이 군기로 사용된 것은 명확해 보이나, 이 밖에 왕실에서도 사용하던 왕실기인지, 나라 전체에서 사용되던 국기인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도 붉은 색이 첨부된 깃발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이 또한 추정에 불과하다.
[image]
안악 3호분 벽화 중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이 붉은 깃발인 것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에는 '철기군(鐵騎軍)'이라는 정예기병 개마무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적기(赤旗)가 고구려의 국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그 시절의 '국기' 개념을 근대적인 국기의 성질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존재한다.
[2] 평양성, 국내성, 한성#s-1.2. 자세한 내용은 영역과 행정구역 문단을 참조. 지도상 표기된 한성(漢城)은 장수왕 대에 함락시킨 백제의 한성이다.[3]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항목 참조.[4]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하였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 졸본, 조나, 구다 등의 소국들이 군장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5]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6] 동명성왕 ~ 동명성왕.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7] 동명성왕 ~ 장수왕.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8] 장수왕 ~ 보장왕. 이 국호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700년 동안 발해 고왕, 태봉 궁예, 고려 태조가 이어가며 그 이후에도 한자문화권 밖의 전세계에서 한국의 대외적인 명칭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만일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가 최근의 연구 결과대로 광개토대왕 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고려' 국호는 광개토대왕 대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9] 고고학자 손보기는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다. # 장수왕 대에 유연#s-3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되지 않았다. 이외에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흑룡강성, 연해주 남부의 야인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10]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으로 기록됨.[11] →환도성→국내성[12] →장안성.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책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왕 대에 국내성(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국내성을 수리하고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의 침입을 받아 평양 동쪽 황성(혹은 평양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간다. 이후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다.[13]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기록은 환도(丸都)의 환(丸)을 중(中)으로 잘못 표기한 기록으로 보인다.[14] 고구려족, 옥저, 부여 등.[15] 백산말갈, 속말말갈 등.[16] 보통 연개소문의 도교 수입을 현재의 정설로 인정하지만 이전에 자체적인 도교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일신(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기자신, 부여신 「유화」, 고등신 「주몽」 등을 섬기며 요동성 추모왕의 사당에 쇄자갑을 비치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17] 소노부 → 계루부. 건국 초기에는 소노부의 권력이 막강해 계루부와 서열 다툼이 있었으나, 6대 태조왕 또는 그 이후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소노부 또는 태조왕 이전 국왕들이 해(解)씨 였다는 주장은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조.[18] '高驪', '高句驪'로 쓰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麗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19]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다.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시절의 장안음이 큰 변화 없이 고착된 것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를 참조.[20]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21] 샤나메[22] 돌궐 궐특근 비문[23] <Historiam>[24] 범어잡명[25]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이라는 의미이고(닭의 울음소리에 대한 의성어라는 설이 있다.)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26] 흔히 중원고구려비라 불리는 비석.[27] 이러한 추측으로 명칭의 변화를 통해 고구려 유물의 추정 연대를 파악하기도 한다. 한가지 예시를 들자면 중국 요녕성 의현에서 발굴된 불상에는 대고구려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은 아직 시기나 국적 등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없어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이나 망한 후에 대고구려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도 않았을 테니 고구려 시기에 쓰인 불상임은 확실해 보이고, 굳이 '대'고구려라고 주변국에서 높여줬을 리도 없으니 고구려에서 만든 불상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좀 더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아마 장수왕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꾼 게 사실이라면 국호 변경 이전 시기의 불상일 것이다.[28] 이병도 교수는 고(高)의 한국어 고유 어휘인 '수리'와, 고을을 뜻하는 '골'을 연결시켜 고구려의 고유어 명칭을 '수릿골'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29]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30] <발해 국호 연구>[31] 구글 검색결과도 서로 비슷한 편이다.[32] 고려사 윤관 열전.[33] 고려사 묘청 열전. 대화궁 팔성당에 모신 신의 명칭에 붙어있다.[34] 태자사낭공대사비. 대각국사문집.[35]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36] 다만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국어 표현의 고릿적, 고린내 등의 어원이 高麗라는 설도 있기 때문.[37] 고대 국어 시기 /ㅓ/는 [e\]에 가깝게 발음되었다고 본다.[38] 정장상팡(郑张尚芳)은 /lje̞/, 베른하르드 칼그렌(Bernhard Karlgren) 등은 /lje/, 판우윈(潘悟云)과 사오룽펀(邵榮芬)은 /ljɛ/로 추정했다.[39] 전한시대의 서적인 '논형'.[40]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대왕 대부터 계루부 고씨로 왕족이 바뀌었다는 이설도 있다.[41]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통전(通典)[42] 주서(周書), 수서(隋書), 책부원귀(冊府元龜)[43] 신당서(新唐書), 한원(翰苑), 통전(通典)[44] 전문 취사집단의 경우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 때 '거대한 솥을 발견하여 밥을 지을 수 있었다'는 대목을 해석한 것이다.[45] 제갈량이 사망하기 딱 1년 전이다.[46] 고구려 동천왕 7년이다.[47]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 북부 교동도 또는 파주 오두산성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든 백제의 서해 방면 수군 기지였다.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의 지형을 두고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는" 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48] 지금의 황해도 연안.[49]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이른바 왜5왕의 마지막 왕으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유랴쿠 천황으로 비정되고 있다.[50] 훗날 수 양제가 612년에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내린 조서에서 고구려를 두고 "거란의 무리를 아울러다 (수의)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족이나 하는 짓을 배워서 요서를 침범하였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51] 대동강[52] 대동강 물길로 평양으로 가는 길.[53] 중국 강남의 양쯔강에서 물살이 빠른 곳인 명월협(明月峽)을 의미한다.[54] 이병도는 지금의 덕적도 근처에 있는 소야도라고 비정했다.[55]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56] 풀어쓰자면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라고 면박을 주는 상황이다. 실제로도 따지고보자면 남조의 국력이 고구려 북위 어느쪽에 가깝냐면 전자에 훨씬 가깝기도 하고[57]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58]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 선무제 [59] 마노 혹은 옥[60]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61]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은유이기도 하다. 관념적으로는 천하에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62] 645년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에서 이에 맞서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모습이다.[63] 그리고 강대국이 된 후기에도 이러한 시절의 전통에 따라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의 이중적인 수도 체계를 유지하였고 강력한 수성 능력과 방어 체제를 운영하였다.[64] 지배 성격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들이 강성해지지 못하고 상국으로 대접받으며 어떨 때는 고구려의 전쟁에 동원될 정도로의 역량이다.[65] 당시 당서를 비롯한 중국 정사 외국 열전에서 방귀 좀 뀐다 싶은 수준을 묘사할 때 붙이는 숫자가 겨우 10만호다. 실제적인 체급일 리는 없겠지만 10만호라는 숫자가 어느정도 대세력을 수식하기에 충분한 수치로 인식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66] 북위는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대륙 서쪽의 농우 지역의 기병을 동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당나라의 경우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다가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67]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기에 주변국들에게 사실상 고구려 시즌2로 여겨졌다.[68] 말갈의 비정에 심각한 오류가 하나 있다. 흑수말갈이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위치한다는 사료들의 기록들과는 상반되게 중국과 한국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안거골부를 흑수말갈의 서남쪽에 비정한다.[69] 연남생의 묘지명만 봐도 아무리 배신했다지만 본인은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의 증손자인 연비의 묘지명에는 스스로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 썼을 정도로 세대가 지나면서 차차 동화되는 정황이 나타난다.[70] 단, 이때 요의 태도가 상당히 애매하여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고려가 자신이 적통이라고 하자 별 다른 항의없이 순순히 인정해준다.[71] 일본명은 고마노코키시 잣코(高麗王(こまのこきし若光(じゃっこう).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72] 다만 충청북도는 약간 미묘하다. 백제령이었던 기간도 꽤 길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도 받아본 경험이 있고 실제로 충주에는 고구려비와 신라 중앙탑이 위치하고 단양에도 신라 적성비가 존재한다. 그외에도 성왕 이후 충북 지역은 신라의 입김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충남과 충북의 백제에 대한 정서적 차이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73] 통일 이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가 계승의식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74] 이게 근대적 사관으로 설명되지만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에도 엄연히 존재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던 역사가 있었고 그에 따라 만주 일대를 제패했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발해고동사강목같은 책도 이런 의미에서 나온것이다.[75] 물론 이것도 주관적인 시선이 강하다고 봐야 된다. 당장 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취급받는 세종과 최고의 장수로 평가받는 이순신 모두 조선시대의 인물들이다. 또한 한국 대중들 사이에서도 고구려보다 신라나 백제, 조선 등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기에 이런식의 일반화 역시 어느정도 지양할 필요성은 있다.[76] 다만 고려는 현종 이후 100여년의 전성기를 지나 고려시대 중후기 무신정권권문세족 등 당시 막장 지배층들의 폭정과 전횡으로 인한 왕조 멸망, 국가 막장 테크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런 식이면 고조선이나 백제나 가야는 진짜 묻혀서 가는, 특히 가야는 진짜 기록도 드물어서 평할 거리도 부족하다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부여와 발해는 가야보다 더 기록이 없는데다, 남북한 모두 부여 영토와 겹치지 않아서 고고학 자료조차 중국에 의존해야한다.[77] 고조선과 발해 또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기야 했지만 고구려보다 기록이 부족할 뿐더러 살수대첩, 안시성 전투 등의 임팩트가 없어 이미지가 희미하다. 중국 세력과 수십년간 전쟁하면서 버틴 고구려와 달리 고조선은 1년, 발해는 고작 보름만에 무너졌기도 하고...[78] 특히 2천년대만 해도 치우 드립은 그야말로 단골 소재였다. 자세한 것은 치우 문서를 참조.[79] 때에 따라서는 발해도 넣는다. 다만 발해는 역사도 짧고 중심지도 북한이 아니라 고조선, 고구려, 고려만큼 언급되지는 않는다.[80] 고조선 역시 수도는 평양이지만 워낙 역사 기록이 없는지라... 다만 고조선의 영역에 들어선 만큼 고조선의 유적을 어느정도 발굴하기는 했는데 단군릉같은 경우에는 논란이 많다.[81] 실제로 북한의 조선력사 등의 역사 서적을 보면 고구려를 치켜세우며 남한 세력인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 중심의 민족 통일을 반대한다는 논리로 폄하하는 경향이 짙다. 그나마 백제는 나당연합에 같이 멸망한지라 말기에는 동병상련 취급은 해주지만 신라는 그런 것도 없고 아예 민족을 팔아먹은 봉건통치배라며 노골적인 비난적 서술을 서슴지 않는다.[82] 단순히 패권뿐만이 아니라 내부 소수민족의 독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며, 티베트나 회족, 조선족 등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소수민족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한 채 중화로의 완전 편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중국은 소수민족과 한족간의 갈등 문제를 계속해서 겪게 된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서 생각해낸 것이 현재 중국 영토에 해당하는 땅의 역사를 모조리 중국의 역사라고 왜곡을 한 후 '그러니까 지금 중국인들은 모두 같은 중화민족' 이라고 무마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티베트, 내몽골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중화민족이란 거창한 말도 결국 한족이나 소수민족 그 이상을 바라보고 민족 통합의 일환으로 나온 개념인 것.[83] 현지 답사를 갔다가 출입을 금지당하거나 방해를 받았다는 경험담이 많다.[84]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닌 과거 중국 동북구에 존재했던 지방세력으로 등재되었다.[85] 여몽 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무쿠리 고쿠리 괴담만 봐도 몽골, 고구려를 뜻하는 말이었다.[86] 만주족은 자신들의 원류에 부여,백제,발해,신라(...)를 끼워놓으면서 연구하긴 했지만 고구려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87] 많은 연구가 진행된 현대에 와서는 이런 열등감 자체가 무의미해졌는데, 현대로 올수록 한민족은 삼한 계열과 예(한반도 중,북부 계열), 맥(요동,만주 계열)의 혼합 세력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 한민족이 먼저 만주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본거지의 일부가 만주였다가 축출당해 밀려난 것이다.[88] 이두는 한문을 우리말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글자체계를 뜻한다.[89] 단 후기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백제와 신라도 후대에는 중국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90] 평양성, 국내성, 한성#s-1.2[91]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의 국적은 논란이 많은 편이나 학계의 중론은 남북국 사이의 점이지대, 혹은 권력 공백지대 정도로 보는 편이다. 다만 굳이 어느 쪽에 더 가까웠는지를 보자면 신라에서 떨어져 나온 태봉에 평양성주 금용이 항복한 일, 당대의 기록인 고려실록을 토대로 작성된 고려사 지리지에서 신라의 평양 점유를 인정한 기사 등으로 미루어 볼때 신라의 영향권이었다는 추정이 우세하다. 반면 발해고에서는 발해의 평양 점유를 인정하기에 앞의 주장도 확정적인건 아니지만 발해고가 쓰인 시점은 발해 멸망 후 800여년이 지난 후이기도 하고 발해고 자체가 아무래도 친발해적인 성향을 띨 수 밖에 없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92] 다만 연정토는 이후 당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았다. 이후의 기록은 없다.[93] 황해도 평산군[94] 황해도 재령군[95] 오늘날의 전북 익산[96] 연정토의 아들이거나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기록도 있다.[97] 890년 세워짐[98] 고구려가 통일신라보다 더 컸지만 작았다고 하는 최치원의 신라인다운 아전인수식 해석.[99] 924년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세워짐[100] 평양성, 국내성, 한성#s-1.2[101] 현 황해북도 황주군으로 평양 바로 밑이다.[102] 물론 그냥 단순히 태상왕의 의미로 붙였을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고려는 신성제왕 같은 호칭은 많이 사용한것 같으나 태왕#s-1은 이 경우 말고는 없는데 추존왕에 붙였으니 상왕의 의미가 클것이다.[103] 예종을 뜻한다.[104] 다만 고구려 계승만을 강조한 고려 초와 달리 이 무렵으로 넘어오면 삼국을 균등하게 계승하는 삼한일통 의식이 더욱 강성해졌다고 할 수 있다. 통일한지 20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옹졸하게 고구려만 강조하고 신라와 백제 계승은 뭉개버린다면 또 남부 지역에서 이들 국가 계승을 기치를 내걸고 고려 조정에 저항할 수도 있고 이는 고려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다.[105] 반면 인물석을 주변에 설치하고 능을 병풍으로 두른 것은 신라적 요소이다. 즉 고려는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조화롭게 계승하고 발전된 문화를 향유했다고 할 수 있다.[106] 요동에 대한 주권의식은 고려 때도 존재했다.[107] 그래도 위례성이야 조선 영토 안쪽이라 현재의 남한산성 일대로 어림잡아 짐작하기는 하였다. 문제는 졸본, 국내성의 경우 조선 영토 바깥이라 조선시대 학자들로서도 연구가 불가능하였다는 점. 실제로 국내성은 압록강 바로 위켠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광개토대왕릉비는 19세기까지 여진족 비석으로 인식하는 상태에 이르렀다.[108] 이중에는 소중화 사상을 깊게 가진 유학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종휘의 서적인 동사에서는 고구려야말로 중화문명의 기치인 유교 사상이 발달했으며 신라는 도리어 유교보다 불교의 영향이 깊었다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고구려를 고평가했다.[109] 사실 고구려와 조선은 처한 환경이 상당히 달랐다.[110] 역시 주몽의 후손을 뜻함[111] 오부는 옛 고구려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를 의미한다.[112] 당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지만 만주지역을 되찾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인구가 급감하는 등의 이유로 전성기 시절의 고구려보다 훨씬 약했다.[113] 고구려의 멸망과 몽올실위의 진출이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이다.[114]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