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발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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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渤海 | ᡦᡠᡥᠠᡳ
'''
[image]
'''698년 12월 ~ 926년 1월 14일 (227년 1개월)'''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고구려'''
'''고려'''
'''발해부흥운동'''[1]
여진
동란국
요나라
'''공식 국호'''
진국 ・ 진단[2] → '''발해'''
'''위치'''
한반도 북부,[3]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성랴오닝성,[4] 러시아 연해주[5]
'''행정구역'''
5경(京) - 15부(府) - 62주(州) - 현(縣)
독주주(獨奏州)[6]
'''수도'''
동모산 (698년 ~ 742년)
중경현덕부 (742년 ~ 756년)
상경용천부 (756년 ~ 785년)
동경용원부 (785년 ~ 793년)
상경용천부 (793년 ~ 926년)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가독부/대왕
'''주요 군주'''
고왕 대조영
무왕 대무예
문왕 대흠무
선왕 대인수
'''국성'''
대#s-1.1(大)
'''언어'''
불명[7]
'''민족'''
발해인[8]
'''종교'''
불교, 샤머니즘, 도교, 경교, 기타 토착신앙 등
1. 개요
3. 정치, 행정과 군사
3.1. 정치 제도
3.2. 행정구역
3.3. 군사 제도
6. 외교
6.1. 신라와의 관계
6.2. 당나라와의 관계
6.3. 일본과의 관계
6.4. 거란과의 관계
11. 발해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서
11.1. 한국
11.2. 중국
11.3. 일본
11.4. 기타
12. 발해/문화재
12.1. 유적
12.1.1. 북한 소재
12.1.2. 중국 소재
12.1.3. 러시아 소재
12.2. 유물
13. 발해 관련 창작물
1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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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渤海)는 고대-중세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 연해주 일대에 위치한 군주제 국가이다. 한국사에서는 8~9세기 남방의 신라와 함께 200여 년간 남북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다. 영토와 면적은 확실하지 않지만 추정할수 있는 영토로 보면 한국사의 역대 국가들 중 면적이 제일 넓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698년에 말갈인과 옛고구려 유민들이 지금의 중국 만주 일대에 세운 국가. 한반도 북부와 현 중국 만주 및 현 러시아 연해주하바롭스크 남부 지역에 228년간 존속했는데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발해는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굉장히 적어서 아직도 베일에 싸인 면이 많은 나라이며 오늘날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국가다. 해외에서도 고구려는 한국사로 인정하는 여론이 대부분이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하는 편이다.[9]
국호 '발해'는 이 국가의 랴오닝성요하 지역이 접한 바다를 이르는 말인 보하이 해(渤海)에서 유래했다. 발해라는 국호를 정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들을 '고려(高麗)' 또는 '진국(震國)'으로 칭했다. 또한 을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했는데, 이는 발해 고유어의 음차라고 한다. 그런데 정혜공주묘비에 '황상'이라는 표현과 '황후'를 사용한 묘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외왕내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0]
오늘날 중국에서는 발해를 고구려와 함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여, 당나라의 지방정권 혹은 말갈족의 나라로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진행 중에 있으며, 고구려와 발해 성곽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판단하여 복원 계획에 포함시키거나,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다 더 컸다는 상경성 제2궁전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로 보수 작업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 대한 사진도 공개되지 않아 더 연구해야 될 부분이 많다. 지금은 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 정도를 통해 일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11] 남한뿐 아니라 북한 고고학계에도 철저히 비공개한다고 한다.[12]

2. 역사




3. 정치, 행정과 군사



3.1. 정치 제도


발해의 정치제도는 제3대 문왕 대흠무 때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중앙에 3성 6부제와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했다. 문왕 서거 후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제10대 선왕 대인수 때 왕권의 안정을 되찾으며, 5경 15부 62주 지방제도를 완성시켰다.[출처]
발해는 관제를 편성(3성 6부 1대 7시 1원 1감 1국) 할 때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본땄으나, 그 명칭을 발해에 맞게 바꾸어 그들만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각 관부의 기능은 실제로 당나라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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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3성(省)으로는 정당성(政堂省),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이 있다. '''정당성'''은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는 곳으로 발해의 모든 정령(政令)을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 서무 기구였다. 3성이 형식상 분립되어 있지만, 정당성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3성은 기능상 평등하게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상서령에 해당하는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을 중심으로 '''선조성''' 수장인 '''좌상'''(左相)과 '''중대성''' 수장인 '''우상'''(右相)이 대내상 밑에 있었다. 그리고 좌우상 밑에 좌우평장사가 있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좌우평장사 밑에 있었다. 기록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사정(司政)도 존재했음이 입증되는데 신당서에서 중정대가 사정의 밑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고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발해 유민 중 사정 직위에 있던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
좌사정과 우사정이 거느리던 6부(部)에는 충부, 인부, 의부/지부, 예부, 신부가 있다. 그러나 대이진 시절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는 정당성 산하에 춘부경(春部卿) 상중랑장(上中郞將) 직책이 확인되므로 이 시기에는 주나라 시대의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 체제를 도입했을 가능성도 있고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발해 멸망 당시 예부경(禮部卿)과 '''공부경(工部卿)'''이 발견되므로 전통적인 이-호-예-병-형-공 체제로 회귀한 것으로 보인다.
'''충부'''는 인사관서이자 6부 최고위치였고(다른 나라의 이부), '''인부'''는 재무 행정의 최고기구였으며(호부), '''의부'''는 의례, 제사, 과서, 학교, 대외관계 주관부서였다(예부).
'''지부'''는 군사행정의 최고기구였으며(병부), '''예부'''는 최고 법률기구였고(형부), '''신부'''는 행정부서였다(공부).
발해 6부의 명칭은 충, 인, 의, 지, 예, 신 등 5행의 덕목명이었다.
1대는 '''중정대'''(中正臺)로 발해의 감찰 기구였다. 수장은 대중정(大中正) 1인이다. 그 다음은 소정(少正) 1인이다.
7시(寺)는 발해의 중앙부서이다.
'''전중시'''에서는 황제의 생활(음식, 옷, 주거, 수레)을 보살폈고(전중성), '''종속시'''에서는 황제의 친인척에 관한 직무를 맡았으며(종정시), '''태상시'''에서는 조정의 예의와 제사를 맡았고(태상시), '''사빈시'''는 외국 사신의 접대와 관리를 맡았다(홍려시). '''대농시'''는 전국의 창고와 곡식을 관리하였고(사농시), '''사장시'''와 '''사선시'''에서는 외국 무역품, 재화, 궁중 잔치, 의례 음식을 관할하였다(소부시, 광록시).
1감(監)은 '''주자감'''으로 귀족 자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다.
1국(局)은 '''항백국'''으로 왕실 후궁의 명령 전달 및 호위, 일상 생활의 시중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항백국의 수장은 상시(常侍)로서 환관만을 임명하였다.[출처]

3.2.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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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행정구역은 5경(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 서경) 15부(상경용천부 / 중경현덕부 / 동경용원부 / 서경압록부 / 남경남해부 / 부여부 / 동평부 / 막힐부 / 철리부 / 정리부 / 회원부 / 안변부 / 안원부 / 솔빈부 / 장령부 /) 62주와 3개의 독주주로 구성되었다. 주 아래에는 100여개의 현[13]이 있어 부 - 주 - 현의 3단계 행정 관리 체제를 갖추었다. 부에는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縣丞)을 두었다.

3.3. 군사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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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군사 제도는 명칭과 구조는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구체적인 중앙 군사 조직의 역할과 그 운영 원리에 대해서도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발해의 군사 조직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 해석의 차이에 따라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로 이루어졌다는 10위설과 남좌우위, 북좌우위를 각각 하나로 보고 8위제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뉘어졌다. 맹분위, 웅위, 비위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남북의 좌우위가 각각 남위 금병, 북위 금병의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각 위에는 대장군 1인, 장군 1인씩을 지휘관으로 두었다. 각 위의 장군 아래에는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지방 군사 제도에 대해선, 촌장인 수령을 지휘관으로 촌락민을 병사들로 삼는 군사 조직이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4. 지리




初, 黑水西北又有思慕部, 益北行十日得郡利部, 東北行十日得窟說部, 亦號屈設, 稍東南行十日得莫曳皆部, 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 其地南距渤海, 北·東際於海, 西抵室韋…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 不復與王會矣.

당초 흑수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고, 북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일로 가면 굴설부(窟設部)가 있다. (굴설은) 굴설(屈設)이라고도 한다. 조금 동남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열(拂涅)·우루(虞婁)·월희(越喜)·철리(鐵利)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후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하여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발해의 여러가지 지도. 자연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대륙 중앙에 위치한 발해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있었지만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현대 발해사 연구와 얽혀있는 한(남북)중일러 각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만 봐도 발해 연구사 초기에는 연해주 - 아무르강 하류 북만주와 겹치는 발해의 동북방 영역을 넓게 인식했으나 근래에 들어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에 러시아 국민으로 편입된 연해주 - 시베리아 지역 원주민들의 역사를 발해보다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꼭 러시아만 그런게 아니라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는 중국, 자신들의 만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연구했던 일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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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는 중국, 러시아의 일부에서 지지. 의외로 중국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넓게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의 동북이 러시아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지도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가 발해를 당의 도독부 정도로 보아서(…)이다. 중국은 어차피 발해를 말갈과 동류로 인식하며 말갈이 러시아 방면까지 넓게 퍼젔으니 발해도 도긴개긴이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저런 지도가 일본의 주류는 아니고, 일본에서는 주로 아래 지도에서 요동과 서북한을 제외한 지도가 주류이다. 일본의 교과서나 역사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대체적으로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14] 일제 시절에는 만선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로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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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 현재 한국 교과서에 실려있는 지도.[15] 일부는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정약용아방강역고에서는 발해가 평양 점유에 실패했다고 적은 반면 유득공발해고는 평양 일대를 발해가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옛 기록에서부터 발해의 평양 정복 관련 의견이 갈렸고 그 이전의 1차 사료들도 하나같이 시원하게 발해 서쪽 영토가 어디까지인지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한국 측은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를 위시하여 대체로 발해의 요동과 서북한 지역 지배를 인정하는 추세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단정지어 버리면 왜 당군과 신라군의 진격이 막혔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기도 하다.[16] 특히 요동 지역은 주요 거점이기 때문에 당나라, 발해, 후의 거란이 치열하게 군사적 대립을 벌인 지역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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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발해 북방 영토 범위에 큰 혼란이 따르기도 했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위치가 기존 발해 영역으로 간주되던 기준선에서 한참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 너머의 서아무르 평원의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있기 때문.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발해인들이 서아무르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으므로 아무르 강 너머까지 지배 범위가 확대될 수도 있다

5. 문화




6. 외교



6.1. 신라와의 관계


남쪽의 신라와는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삼국시대 때처럼 열심히 싸우거나 아주 불구대천까지는 아니었고, 대신 데면데면한 관계만 200여년간 유지했다.
다만 두 나라가 싸울 뻔한 적이 있긴 있었다. 733년, 외교 관계에 있던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러 가다가 눈이 많이 와서 못 가겠다는 핑계로 그냥 포기하고 돌아간 것과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때 일본이 발해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인데, 이는 오히려 발해가 거절했다. 요사 지리지에서 발해 선왕이 신라에 승리한 기록이 있지만 요사란 책 자체가 신뢰도 면에서 문제점을 지적받는 데다 같은 시기 신라는 오히려 대동강 유역으로 약간 북진했기 때문에 타 기록이나 고고학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본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가 발해에 승리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건 맥락상 과거 삼국시대에 신라가 고구려에게 승리했던 어떤 전투를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국으로 오해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해는 신라도라고 불린 통로를 통해 신라와 교류했다. 당나라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따르면 신라 천정군(지금의 원산시 일대)부터 발해의 책성부(동경 용원부로 추정)에 이르는 길목에 39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 이를 인용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평양부터 국내성까지 17개 역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국내성을 거치는 서쪽 육로도 얼마나 많이 이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존재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국간에 군사적 충돌은 인접국 치고는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양측 다 가지고 있었는지 당나라에서 신라 유학생들과 발해 유학생들의 신경전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18] 또한 897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온 대봉예가 "우리가 신라보다 국력이 앞서니 자리를 바꿔주시죠."[19]라고 했다가 당나라는 의전서열은 국력의 강약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신라는 발해의 요구에 발끈하며 발해의 주장을 물리친 당나라에 감사하다는 글을 보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찌보면 라이벌 관계.

6.2. 당나라와의 관계


당나라와는 초기에는 꽤 치열히 대립했었다. 서로 간에 많은 전쟁을 치뤘으며, 당나라는 발해 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고 낮추어 부르기까지 했다. 군왕은 국왕(國王)보다 격이 낮은 명칭인데, 발해의 건국 자체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패퇴시킨 뒤에 비로소 성립한 것이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왕 때에는 당나라 본토 산동성만리장성에 근접한 마도산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왕 때부터 평화적으로 문물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서기 762년에 당나라가 발해를 나라로 인정해 문왕을 발해 국왕이라고 불렀다. 이후로는 두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큰 충돌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 간의 문화 교류 역시 활발하게 이뤄졌다.

6.3. 일본과의 관계


건국 후 발해는 일본과 통교하려고 시도했다.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이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다만 상술한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같은 건 거절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넘는 게 가장 가깝고 안전한 루트지만[20] 그 쪽은 제3국인 신라의 영역이기 때문에 발해는 동해 바다 한가운데를 그대로 건너는 루트로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 사신단의 주요 목적지는 일본 호쿠리쿠 지역 노토 반도 등 카가 지방으로, 이 지방에서는 이사카와현 누가미마치 유적이나 고마츠 시 시바야마가타에서 발굴된 온돌이 포함된 집 등 발해인과의 교류 흔적이 나타난다. 다만, 상기했다시피 이 교류는 절대 녹록한 것이 아니었는데, 일본 측의 기록을 보면 발해인들이 에미시 지역에 실수로 표류해 대부분 살해당하고 간신히 몇몇만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고 일본 배편을 통해 발해로 돌아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사람들이 절망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21]
첫 번째 사신단은 서기 727년인 인안 9년 무왕 시기에 일본으로 파견했는데 이들의 목적은 일본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당과 흑수말갈에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일본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사신단은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 고제덕 등 24인의 무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신 파견의 목적이 군사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신들은 표류하여 도착한 곳에서 일부가 살해되었고 12월에야 수도 헤이조쿄에 당도하여 728년 정월 쇼무 천황을 만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쓰여 있다.
발해의 두 번째 대일 사신은 발해의 당나라 공격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발해 사절단은 선물을 교환하고 활쏘기 대사례에 참석하였으며 발해악을 최초로 일본에서 연주하였다. 이 사절단을 맞이한 통역관은 신라학어(新羅學語)라 불리는 자였는데 신라역관이 발해인들의 말을 일본에 통역하였다는 점에서 발해와 신라의 언어가 비슷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발해의 세 번째 대일 사신은 서기 752년 대흥 15년 문왕 시기에 보국대장군 모시몽을 필두로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은 과거에 고구려가 신하로써 예의를 취했다는 것을 근거로 발해가 일본에 신하로 칭하지 않음을 문제 삼지만[22] 일본에 칭신하였던 고구려는 신라에 세워졌던 안승의 소국 고구려였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왕대 보낸 서신에서 발해왕을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발해와 일본간 관계를 외질[23]관계라고 격하시켜 일본 천황이 격노하며 고구려대에도 형제를 칭했지, '외숙과 생질이라 표함은 예를 잃은 것'이라고 예우를 철회하려다가 담당 사신 '만복'이 서식표현을 고쳐주겠다고 하며 만회되었다.[24]
일본은 758년에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던 중 발해를 끌어들이기 위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앞서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던 오노노 다모리를 정사로 삼은 사신단이었다. 발해는 양승경과 양태사 등을 일본에 보내어 답방했다. 하지만 발해는 당나라의 안사의 난 이후 요동 안정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나라 또한 발해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책봉하는 등 발해와 화친하면서 동아시아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발해는 대일본 사신을 문관으로 교체하면서 신라정벌 계획을 포기하는 것을 시사하였고 일본은 신라정토계획을 주도하던 후자와라노 나카마로가 반란에서 패사하면서 신라정토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일본이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는 시기에 일본은 다섯 차례 발해는 네 차례 각기 상대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762년 왕신복의 일본 파견 이후 발해의 대일 사신 파견은 군사적 목적에서 경제, 문화적 목적으로 바뀌게 된다. 발해는 325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는 등 경제적 목적을 이루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대신 후지와라노 오쓰구는 발해의 사신을 ‘상여’ 즉 장사꾼 무리라 칭하면서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비판하였고 발해의 경제외교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발해의 사신단을 6년 내지 12년에 한 번씩 파견할 것으로 제한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제교류의 수혜를 받고 있던 발해의 수령들과 일본의 귀족들의 반발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발해사신이 가지고 온 모피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치품이었으며 일본 황자가 한 여름에(!) 담비 모피를 8장이나 껴입고 나타났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밀납, 인삼, 삼채호, 표범가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의 꼬리표 등 일본과 발해의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증명하는 다양한 증거들이 현재에도 전하고 있다.
문장에 탁월했던 발해 사신들과 일본간의 문화 교류도 활발했는데 일본 고유 문자인 가나로 쓰인 일본 대표 장편문학소설 겐지모노 가타리에서 한시에 뛰어난 발해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발해사신과 일본인들간의 문학교류는 발해사신이 오가던 쓰루가의 마쓰바라칸, 노토객원, 고로칸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시를 주고받는 청화라 불리는 연회가 있었다.
일본8세기 후반 신라와 관계가 나빠져 공식 교류가 중단되고[25] 838년 일본의 견당사도 중지되었기 때문에 발해 후기에 이르러 일본의 발해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더욱 깊어졌다. 발해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는 오악, 대당악과 더불어 일본 궁중음악에 포함되었던 발해악이 울려퍼졌다. 발해 오효신이 전해준 당 선명력을 일본에서는 이후 800여년간 역법으로 썼다.

6.4. 거란과의 관계


발해가 건국하는데 거란족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거란족이 당나라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틈을 타 대조영이 옛 고구려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서 발해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왕 시기에는 발해, 돌궐, 거란의 3세력이 연합해 마도산 전투에서 당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후 발해의 국력이 선왕 시기에 이르러 강대해졌을 때에는 거란도(契丹道)라는 무역길이 트여 발해와 거란 양국의 교역이 활발해 지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호적이던 양국의 사이가 원수가 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10세기가 시작할 무렵 당나라는 멸망하였고 이 틈을 타 야율아보기는 분열되어있던 거란족을 통합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거란은 라고 국호를 고쳐 칭제건원을 하였고 주변국들에게 복속을 요구하였다. 이때에 요동 지역을 두고 발해와 거란의 팽팽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는데 요의 국력이 점점 막강해지자 발해는 중국, 신라, 일본, 해족 등과 연합해 대 거란 전선을 형성해 맞서는 것을 구상한다. 하지만 중국과 한반도, 일본 열도는 모두 분열기를 맞이한 때라 발해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고 해족은 거란에 병합되어 요나라에 맞설 세력은 발해밖에 안남게 되었다. 발해는 그래도 나름 요동을 두고 거란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지속했으나 무역루트인 거란도에 대한 발해의 방어 태세가 제로 상태인 것을 확인한 야율아보기는 20만 대군을 이용해 거란도로 침입해 들어왔고 모든 전력을 요동 전선에 투입해 부여부-상경용천부 루트가 텅 비어있던 발해는 이 대규모 기습을 막아내지 못해 보름만에 멸망하였다.
이후 발해인은 함락당하지 않은 거점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전개했으나, 요의 빠른 진압과 세력 약화로 인해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요는 발해 고토의 지배가 어렵고 나라가 멸망당한 발해인의 원한이 깊어 부흥 세력들이 붕괴했어도 발해인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진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발해인들을 강제 이주하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다만, 요가 이러한 강경책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이긴 했으나, 발해인 귀족과 왕족들을 우대하고 거란인 귀족, 황족과 통혼시켰다. 그리고 요서에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들을 위해서 세금을 아주 낮게 부과하고 전매도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또한 발해인들을 관료와 군인으로 임용하고 동경도 지역의 주요 직책, 지방관직에도 임명했다. 즉, 요의 발해인 정책은 강온양면책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여요전쟁에서도 발해상온 고청명이 지휘하는 발해인 부대가 요나라 소속으로 고려군과 싸웠다.[26]
그러나 점점 발해인에 대한 차별이 강해지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폭정, 잘못된 통치로 발해인들의 반감이 폭발해 대연림이 흥료국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요가 쇠퇴하여 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봉기했다. 아골타는 발해인들을 회유하여 병력을 확보하려 했는데, 요의 착취와 폭정에 진저리가 난 발해인들은 그간 여진인들과의 적대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골타의 제의를 받아들여 아골타가 요를 무너뜨리고 금을 세우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이 금나라에 의해 요는 멸망당하였다.
참고로 옛 발해 지역인 현재의 만주 일대에서는 홍라녀 녹라녀 전설이라는 발해의 토속 전설이 전해지는데 배경이 발해 최전성기인 선왕 대이다. 그런데 이 전설에서는 주인공이 거란의 공격으로부터 위기에 빠진 발해를 구해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를 토대로 볼 때 해동성국 시기였던 이 때조차 발해인들의 거란에 대한 공포심 및 적대감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발해-거란의 적대관계는 당나라 멸망 한참 전부터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

7. 왕사




8. 인물




9.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0. 발해부흥운동




11. 발해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서



11.1. 한국



11.2. 중국



11.3. 일본



11.4. 기타



12. 발해/문화재



12.1. 유적



12.1.1. 북한 소재


  • 궁심고분군[27]
  • 부거리 발해 유적[28]
  • 오매리 절골 유적[29]
  • 청해토성[30]
  • 개심사[31]: 대웅전 보수 과정에서 선왕 9년 병오 3월 15일 창건됐다는 종이가 든 나무함이 발견되어 발해 시대에 창건된 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해의 사찰 유적이기 때문에[32] 역사적 중요성 또한 매우 높다.

12.1.2. 중국 소재



12.1.3. 러시아 소재


  • 보리소프카 절터 유적
  •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 콕샤로프카 유적
  • 크라스키노성[33]
  • 트로이츠코예 유적

12.2. 유물



13. 발해 관련 창작물


  • 발해를 꿈꾸며 - 서태지와 아이들3집 타이틀곡으로 발해를 꿈꾼다는 것은 다시금 해동성국으로 떠올라 발해 땅을 밟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것, 즉 북한과의 통일을 염원하며 만든 노래다.
  • 태조 왕건 - 145회에서 발해의 장수 신덕이 거란의 침공을 피해 고려로 귀순한 사건을 담았다.
  • 무영검 - 발해 부흥운동을 소재로 한 무협 액션 영화.
  • 대조영 - 2006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주인공이지만 발해 이야기는 정작 드라마 끝나기 거의 마지막에만 잠깐 나온다. 드라마의 인기와는 별개로 역사 왜곡이 상당히 심한 드라마이다.
  • 대발해 - 소설 인간시장으로 유명한 김홍신 작가의 역사 소설.
  • - 하위 카테고리인 태백일사에 '대진국본기'라는 발해 전담파트가 있다. 왕들의 연호며 시호며 잔뜩 적어놨지만 그 환단고기인 만큼 역사서로써의 가치는 없다.

14. 같이보기


[1]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 등등이다. 사실 발해의 직계후신은 200여년간 이어진 이들 부흥운동 세력이라고 봐야한다.[2] 震國, 振國, 震旦.[3] 청천강 이남를 제외한 지역.[4] 동부[5] 위치가 중국, 러시아 사이에 있어서 각자 자신의 역사라고 '''경쟁한다.'''[6] 영주(郢州) · 동주( 銅州) · 속주(涑州)로서 중앙에 속한다.[7] 고구려어, 말갈어, '발해어'라는 용어까지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된다. 다만 발해라는 나라 자체가 영토가 넓고, 여러 종족들이 함께 산 다민족 국가였기에 여러 계통의 언어가 같이 쓰인것으로 보인다. 신라어와 같은 계통의 예맥계 언어인 발해어와, 퉁구스어족 계통의 여러 언어, 북시베리아어 계통의 여러언어 , 몽골어족 계통의 여러언어, 중고한어, 소그드어 등.[8] 고구려인, 말갈, 여진, 실위, 소그드인 등으로 추정. 혹은 단순히 발해에 사는 주민으로서의 발해인이 아니라 구 고구려, 구 말갈과 구별되는 발해인 혹은 발해족이라는 독자적인 종족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단, 발해인들끼리 얼마나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발해인'의 정체성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단언할 수는 없다. 단지 서남부의 고구려인(한국어족)과 동북부의 말갈인(퉁구스어족)이 연합한 다종족 국가라는 주장도 있다.[9] 영어 위키백과에도 한국식 발음으로 문서제목이 올려져있고 문서 내내 한국어 발음과 중국어 발음, 러시아어 발음이 병기된다.[10] 다만 "대왕"이라는 표현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황상(皇上)만 갖고 발해 군주의 칭호가 황제였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발해 왕에게 ''이 들어간 표현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제후보다는 황제와 비슷한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1] 한중사 편입 논쟁은 후술된 한·중 역사 논란 항목으로.[12] 북한에 초대받아 북한 유적을 널리 답사한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고고학자는 애초에 중국 입국비자를 안 내줘서, 만주지역 답사는 오히려 북한 학자보다 남한 학자가 더 자유롭다고 한다. 물론 남한 학자의 고구려발해 유적지 답사도 막거나 방해한다고는 하지만 유적지 근처에서 접근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지 일단 중국 입국은 쉽게 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유적지 답사가 가능하지만 애초에 북한 사학자는 중국 국경선 자체를 못 넘는다.. 우호국가라는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북중 학자끼리 고대사 교류도 서로 거의 없다고 한다. 북한도 북한지역에 있는 북청군 청해토성, 청진시 청암구역 유적 등 발해유적을 나름대로 발굴조사하고 있다는데 애초에 북한지역이 발해의 중심지가 아닌 남쪽 변방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중요 유적이 적어서 한계가 있다. 아마 중국의 동북공정이 북방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지리적 이유로 남한보다 북한이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출처] A B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3] 발해고 지리고에는 113현으로 나옴. [14]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의 발해 항목에는 한국어도 병기되어 있다.[15] 왠지 대부분의 경우 발해의 북쪽 국경을 랴오허강, 쑹화강으로 삼는다.[16] 일단 당 현종시기 나당연합군의 발해공격에 대한 논란은 제외하고서도 곧 이어서 당나라가 안사의 난이라는 내란, 그리고 각 지방 번진들의 난립으로 영역이 줄어들었기에 서북한지역과 요동지역에서의 발해의 영역 여부는 정말 정복했거나 최소 영향권 안으로 가져온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일단 가장 북동지역 번진이였던 '''평로'''가 안사의 난 중에 산동으로 이동하였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의 확실하게 생각된다.[17] 거기다가 나라이름부터 발해이기도 하고.[18] 당나라 빈공과의 신경전이 기록되어 있다. 빈공과의 최초 합격자는 물론 합격자의 대다수를(자그마치 80%!) 신라가 차지했는데, 점차 발해 출신의 합격자가 많이 나오자 신라인들이 언짢게 생각했다. 급기야 발해에서 수석을 배출하자, 신라에선 "발해가 과거에 당나라랑 싸운 거 잊은 거 아니겠죠?"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가령 신라 유학생의 거두인 최치원은 발해를 매우 무시하고 발해에 뭐든지 질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발해 유학생 오소도와 신라 유학생 이동의 경쟁, 그리고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과 신라의 최언위의 경쟁 등의 사례도 있다.[19] 실제로 당나라에서 사신의 자리는 상당히 중요해서 자리를 둔 이런저런 잡음이 일기도 했다. 좋은 자리에 앉을수록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 즉 발해는 당나라에 우리가 더 세니까 신라보다 더 좋은 대접을 해주라고 말한거다. 실제 두나라의 국력비교는 다음 항목을 보고 위키러들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남북국시대 항목 참조.[20] 조선 시대의 조선통신사도 대한해협을 통해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날씨가 안 좋고 바닷길이 험해서 고생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21] 심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배에 외지인(발해인)이 타서 신이 노한 것이라며 물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었다.[22] 정확히는 대신라견제책을 모색하고자 고구려쪽에서 형제국임을 칭하였다.[23] 숙부와 조카[24] 『續日本記』卷32, 寶龜 3年 2月(己卯)[25] 장보고 집단으로 대표되는 사무역은 계속되었다.[26] 그런데 고려군에도 대도수 등 고려에 투항한 발해 유민들이 포함돼 있었다. 즉 동족상잔이었던 셈이다.[27] 회령군 위치[28] 청진시 위치[29] 신포시 위치[30] 북한에서 남경남해부로 비정하는 북청군에 위치[31] 함경북도칠보산에 위치[32] 북한에도 통일신라의 사찰은 꽤나 존재하지만 발해 사찰은 이 함경북도의 개심사만이 유일하다.[33] 발해 시대 명칭은 염주성.[34] 동모산이 위치해 있는 발해가 최초로 시작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