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세이지
1. 개요
吉田 清治. 본명 요시다 유토(吉田 雄兎), 1913년 10월 15일 – 2000년 7월 30일.
일본의 저술가, 활동가. 일본군 위안부 납치 관련 증언을 한 인물로 나름 유명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이 허구성을 의심받으며, 일각에선 위안부 문제에 있어 첫단추를 잘못 끼운 인물이라는 평도 받는다.
2. 상세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는데,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83년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 책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하여 위안부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1982년 9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이후 아사히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수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시다 세이지는 1943년부터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전남, 경남, 제주 등에서 끌고간 한국인 징용자의 숫자는 종군위안부 1,000명을 포함하여 6,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의 저술에서는 "종군위안부 징용은 한 마디로 노예사냥이었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여자들을 후려갈겨 트럭에 강제로 태우고, 울며 매달리는 젖먹이를 억지로 떼어냈던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되어 있다. 1992년 방한하여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죄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의 한 양심적 지식인 정도로 보일 수도 있으나, 문제는 '''위 증언이 거짓일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우선 1989년 8월 17일, 제주도의 향토 사학자는 요시다가 진술한 지역에 가서, 해당 지역 현지 주민들에게 증언을 들었으나 이와 관련한 입증은 할 수 없었다며 이를 제주일보에 발표했다.[1] 당시 제주일보 기사의 요지는 요시다가 상술로 엉터리 체험 수기를 출판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
1992년, 일본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가 제주일보 기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제주도를 직접 취재하여 이 사실을 산케이신문을 통해 일본에 알리게 되었다.
1993년 6월, 요시다 저서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조사한 한국정신대연구소 전 연구원 강정숙은, 요시다 증언과 합치하는 증언을 현지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후 아사히신문은 2014년 4~5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70대 후반에서 90대까지 약 40여명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건어물 제조 공장에서 수십명의 여성이 사라졌다"고 기록한 제주도 북서부의 마을에서는, 생선을 다루는 공장이 1개 밖에 없었고 경영자의 아들은 "통조림 밖에 만들지 않았다. 여자 종업원이 사라진 일은 없다."고 증언했으며, 요시다 세이지가 '초가지붕'이라고 썼던 공장의 지붕은 한국에서 당시 수산산업을 연구했던 리츠메이칸대학 역사지리학 전공 가와하라 노리후마 교수에 따르면 함석판과 기와로 되어 있었다.
요시다 세이지는 1943년 5월에 서부군의 동원명령으로 제주도에 갔으며, 그 명령서의 내용이 아내의 일기에 남아 있다고 저술했다. 하지만 요시다의 장남은 어머니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시 중 조선반도 동원을 연구한 토노무라 마사루 도쿄대 부교수는, 요시다가 소속되었다고 주장한 노무보국회는 후생성과 내무성의 지시로 만들어진 명령으로서, 지휘계통을 생각해보면 군이 동원명령을 내리는 것도, 그 직원이 직접 조선에 가는 것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요시다는 1943년 5월 당시 제주도에 '육군부대본부'가 '군정을 펼치고 있었다'고 설명했으나, 일본근현대사를 전공한 나가이 카즈 교토대 교수는 제주도로 육군 대부대가 집결한 것은 1945년 4월 이후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기술이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2014년 8월 아사히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와 관련된 기사를 모두 철회하게 되었다.
3. 평가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요시다 증언에서 묘사하는 바와 같이 군의 '인간사냥' 형식의 강제연행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사안의 본질은 아니다. 요시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일본군의 브로커들이 한국의 여성 중 일부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위안부를 동원했고, 일본군은 이를 잘 알면서 조장 혹은 묵인했다는 증거와 정황은 차고 넘치기 때문. 또 해당 위안부들은 고향에 돌어가고 싶을 때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일본군이 해외 전선에서 퇴각할 때 방치하여 상당 수는 현지에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한국 뿐만 아니라 여러 해외 위안부들의 강제연행 사례가 이미 보고되었고 심지어 요시다 세이지 외에도 강제연행을 자백한 진술은 많다.#
그리고 일본 우익들의 주장과 달리,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을 참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91년 1월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를 아사히신문이 공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을 하면서, 한국 뿐만 아니라 동남아 등지에서도 인종 가리지 않고 강압을 받은 피해자 증언이 잇따르게 되었다. 양심적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또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은 허위로 판명됐지만,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진 않으며 잘못에 대해선 사과하면 된다"고 밝혔다.
다만 이런 요시다 세이지의 부정확한 발언이 당시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건 사실이며[2] , 이를 이용해 여전히 위안부 문제 자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일본 우익들에게 빌미를 줬다는 점에선, 그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오히려 중대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 2014년 일본 정부는 요시다 증언이 허위로 드러났다며 (상기했듯 요시다 증언은 참조하지 않았음에도) 고노 담화의 근거가 사라졌다는 둥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국제사회에서 욕 한바가지 먹고 한발 물러나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