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
1. 宇文顥
? ~ 524년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인물.
북주의 덕황제로 추존된 우문굉(宇文肱)의 장남이며, 태조로 추존된 우문태(宇文泰)의 큰형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당시 북위는 고조 효문제에 의한 한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육진의 난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문호는 우문굉을 따라 위가괴(衛可瑰)와 전투를 치르다가 말에서 낙마하여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우문굉의 기병에게 구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문호는 도망치던 도중 위가호의 기병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북주가 건국된 이후 태사(太師),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 대총재(大冢宰), 대도독(大都督), 항삭등10주제군사(恆朔等十州諸軍事), 항주 자사로 추증되고, 소국공(邵國公)으로 추봉되었다. 사후 시호는 혜(惠).
우문호에게는 우문십비(宇文什肥), 우문도(宇文導), 우문호(宇文護)로 3명의 아들이 있었다.
2. 宇文護
513년 ~ 572년
위의 소혜공(邵惠公) 우문호의 막내아들로, 북주의 종실. 북주의 태조인 우문태는 우문호의 삼촌에 해당되는 인물. 자는 살보(薩保).
우문태는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어렸기 때문에 집안일을 우문호에게 맡겼으며 우문호에 대해 “우문호의 뜻과 기량은 나와 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원보거를 맞아들이고 그 공적으로 수지현백(水池縣伯)에 봉해졌으며 원보거가 서위의 황제로 즉위한 이후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더해지고 작위가 공으로 올라갔으며 이윽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해지고, 중산공(中山公)이 되었다.
556년 우문태가 죽고 3남인 우문각이 후사가 되었는데, 실권은 우문호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호는 우문각을 시켜 서위의 공제에게 선양을 하도록 하고 557년에 북주를 건국한다. 우문호는 이후 북주를 세운 공로로 대사마로 임명되고 진공(晉公)으로 봉해졌다. 우문각이 천왕이 되었지만 실권은 여전히 우문호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호는 점점 권신으로 성장해간다.
북주의 고위 관료였던 조귀(趙貴)와 독고신(獨孤信)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효민제 우문각 또한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우문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여 결국 우문각은 우문호에게 퇴위되고 유폐되어 이후 우문호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우문육을 맞아들여 그를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북주의 제2대 황제인 세종이다. 세종 우문육은 우문호를 태사로 임명하였다. 우문육은 매우 총명한 인물이어서 우문호를 매우 견제했는데, 우문호는 이를 알고 결국 우문육은 우문호에게 독살되었다.
우문육은 죽기 직전 자신의 아우인 우문옹을 후계자로 세우고 우문옹이 황제로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북주의 제3대 황제인 고조이다. 우문옹은 제위 초기에는 조용히 지내면서도 뒤로는 우문호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재위 13년째가 되는 천화(天和) 7년(572년)[1] 에 우문옹은 자신의 생모를 핑계삼아 우문호를 불러들였다. 이에 우문호는 태후를 알현하러 들어왔는데 뒤에서 우문옹이 기습을 가했고 끝내 쓰러진다. 이후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우문옹의 동생 우문직에 의해 목 베어지며 목숨을 잃었다.
우문호가 죽은 후 고조는 이 사실을 천하에 공표하고, 다음으로 우문호의 자식들과 그의 측근들을 불러들여 모두 처형하였다.
[1] 이 시기는 우문호가 권력을 잡은 지 16년이 되는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