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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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는 북제, 남부는 진, 서부는 북주.
557년 ~ 581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서위

별칭
북주(北周)
위치
중국 화북 서부
수도
장안(長安)
국성
우문(宇文)
국가원수
천왕황제
주요 황제
무제 우문옹
언어
선비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종족
선비족, 한족
통화
포천(布泉) 등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2.1. 시조 우문태
2.2. 북주의 건국과 권신 우문호
2.3. 무제의 치세
2.4. 멸망
5. 북주(北周)의 황제
6.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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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주(北周)는 옛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의 왕조다. 존속 기간은 557년 ~ 581년. 당대에는 그냥 주라고 불렸으나 다른 주나라랑 구분키 위하여 북주, 호주(胡周), 우문주(宇文周)라고도 일컫는다.

2. 역사



2.1. 시조 우문태


육진의 난에 참가하였다가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낸 우문태는 하발악의 사후, 하발악이 가지고 있던 기반으로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534년 북위의 대승상 고환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효무제는 관중의 장안으로 도망쳐 관서 대도독이었던 우문태의 보호를 받았다. 고환은 따로 효정제를 세우고 이로써 북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잡은 서위와 고환이 실권을 잡은 동위로 분열되었다. 서위의 승상이 된 우문태는 효무제와의 불화로 그를 먼저 제거해 버리고 그의 사촌 문제 원보거를 옹립했다. 553년에는 후경의 난을 틈타 남조의 나라를 공격해 원제 소역을 죽이고 촉 땅을 빼앗고 강릉 일대에 후량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소찰꼭두각시 황제로 삼았다. 554년 문제의 아들 폐제 원흠이 권력 농단을 하던 우문태를 제거할려고 하자 우문태는 선수를 쳐 폐제를 죽이고 그의 동생 공제 원곽을 세웠다.

2.2. 북주의 건국과 권신 우문호


556년 우문태가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들이 어려 자신의 조카 진공 우문호(宇文護)에게 실권을 넘긴다. 557년 실권자 우문호는 공제에게 협박을 하여 그의 사촌 동생이자 우문태의 뒤를 이은 우문각(宇文覺)에게 선양하도록 했다. 이에 주나라가 건국되었는데 과거의 주와 구분하기위하여 북주(北周)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권은 사촌형인 우문호가 가지고 있었고 마음대로 권력을 남용했다. 이에 나이는 어렸지만 강한 성격이었던 우문각은 불만을 품고 일부 세력과 함께 우문호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557년 실권자 우문호는 효민제 우문각을 폐하고 죽였으며 우문각의 동생 우문육(宇文毓)을 세웠다. 우문육은 겉으로는 너그럽고 만만해 보였지만 능력이 있어서 원로 대신들이 점점 몰려들고 백성들에게 위망을 샀다. 이에 우문육을 시험하고자 병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우문육에게 넘기니 모든 권력을 접수하고 점점 황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겁이 난 우문호는 560년 우문육을 독살하고 그 동생 우문옹(宇文邕)을 세웠다. 우문호는 황제가 될 힘이 있었으나, 민심을 위해서인지 황제가 되진 않았다.
이 우문옹은 매우 무능해서 우문호가 충신을 죽이고 간신을 등용하고 황제보다 군대와 재산이 많아도, 우문호의 아들들이 온갖 막장 패악짓을 해도 모르는 척 했다. 그후에는 우문호의 덕이 높다면서 그를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책으로 불렀다. 그러자 우문호는 우문옹에게 마음을 점점 놓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문옹의 계략으로, 우문옹은 실제로는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 앞서 두 형이 유능함을 보여주다가 제거된 것을 보고 무능한 척하면서 힘을 길렀다. 마침내 13년 후인 572년 실권자 우문호를 죽이고 황권을 회복하였다. 바로 그가 북주의 명군인 무제다. 앞서 우문호는 유계재에게서 곧 변고가 있을 것이니 실권을 반납하고 병을 이유로 사퇴해 집에 있으면 주공단과 소공석이 될 수 있으며 자손들도 번성할 것이라고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우문호는 이를 거절했으며 우문호에게 벼슬을 뺴앗긴 우문직을 포섭한 무제는 왕궤, 우문신거, 우문효백도 추가적으로 포섭했다. 우문호가 입궐하자 무제가 태후가 술을 좋아하니 태후를 알현하여 술 좀 그만 드시라고 주청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우문호는 태후를 알현하여 글을 읽는데 무제가 뒤에서 으로 된 홀로 우문호의 뒤통수를 때렸다. 직후 쓰러진 우문호의 머리를 우문직이 베어버렸다. 그 후 무제의 명령으로 우문호의 아들들과 부하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찾았다.

2.3. 무제의 치세


무제는 전쟁 노비를 해방하여 일반 농민으로 개편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균전제를 확대 실시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였다. 또한, 황무지 개간 및 수리 시설의 확대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부병제를 균전제와 결합시켜 병농 일치화하고, 부병을 황제에 직속시켜 황제의 군사 통제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폐불을 단행하여 승려를 환속시키고, 사원전을 몰수하여 균전농에게 분배해 부역과 세금을 납부케 하여 세수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커진 국력으로 577년 북제를 멸하고 화북 지역을 통일했고 고구려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쪽의 남진을 토벌하기 위해 준비하던 무제가 36세의 이른 나이에 병사하면서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2.4. 멸망


578년 무제의 장남인 선제(宣帝) 우문윤(宇文贇)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선제는 황태자 시절 술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해서 무제에게 엄격한 교육과 체벌을 받았다. 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선제를 폐태자할려고 했지만 그의 동생들이 나이가 어리고 그나마 선제가 유능한 편이라 관두었다. 선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엄청나서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회초리 자국을 어루만지며 왜 늦게 죽었냐고(...) 고인드립패드립을 쳤다. 음란사치하여 황후를 5명이나 두었는데 갑자기 1년 후 7살인 정제(靜帝) 우문천(宇文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천원황제(天元皇帝)로 자칭하며 주색잡기에 열중하였다. 580년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북주의 멸망이 가시화된다. 선제의 황후 양황후의 부친이었던 양견(楊堅)이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580년 양견은 수왕(隋王)에 책봉되었고 581년 그에게 대항하는 난을 진압하면서 확실하게 반대 세력을 제거했으며 9세인 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隋)를 건국하면서 북주는 24년만에 멸망하였다. 양견은 수나라 건국 직후 정제를 포함한 우문씨 일족을 모두 죽여없앴다.[1][2] 이것은 589년 진나라 멸망 후 진 황실을 북서쪽에 땅을 주고 살게 해준 것과는 다른 조치였다. 그래도 후손 중 일부가 살아남았는지 당고조가 북주의 후예를 개국공에 봉했다는 얘기가 있기는 하다.

3. 무천진 관롱집단


북주는 서위 이래 무천진 출신의 관롱귀족으로 이뤄진 통치층이 왕조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이들 관롱귀족은 북주뿐만 아니라 수나라, 당나라의 중추세력으로 이어진다. 북주의 우문옹은 북위의 효문제가 한 한화 정책과는 반대로 호화 정책을 추진했다. 효문제가 뒤집어 엎은 성씨를 다시 선비족 성씨로 바꾸고[3] 호족 출신들을 우대했다. 또, 한족 또한 선비화시켜 날랜 군사들을 만들었다.[4]

4. 부병제


북주는 군제를 정비했는데 이는 부병제(府兵制)의 바탕이 되었다. 북주의 강성한 군사력의 원동력은 부병제(府兵制)였다. 부병제는 서위 시절 우문태(宇文泰)가 처음 조직하였다. 부병제 조직은 총 24군으로 구성되었고, 개부(開府)가 각각 1군을 통솔한다. 그 위에 대장군(大將軍)이 2군을 통솔하고, 그 위에 주국(柱國)이 4군을 통솔한다. 서위에는 총 6군이 있었고, 서위군은 부병제에 의하여 6주국, 12대장군, 24개부로 계열화되었다. 이 전체 통솔자인 총사령관 우문태와 서위 황족 광릉왕 원흔(元欣)이 조직한 2주국을 포함시켜 8주국(八柱國) 12대장군제를 조직하였다.
부병제는 국민 개병의 원칙하에 호한의 차별 없이 모든 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일반 민호들을 부병으로 선발하여 절충부에서 훈련하게 하는 제도이다. 병농 일치로 농민은 교대로 번상하여 군사 훈련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면 향병이 되어 예비군을 조직한다. 이는 국가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국민 모두 병력화를 가능케 하였다. 부병이 되면 장비와 식료를 스스로 부담하고 군마의 사육을 할당받는 대신 군사 훈련을 받을 동안에는 일반 민호와 구별이 되어 조용조와 역역을 면제받았다.

5. 북주(北周)의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능호
-
-
덕황제(德皇帝)[5]
우문굉(宇文肱)
-
-
-
-
북주 태조(北周太祖))[6]
문황제(文皇帝)
우문태(宇文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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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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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황제(孝閔皇帝)
우문각(宇文覺)
-
557년
정릉(靜陵)
-
-
천왕(天王)
우문육(宇文毓)
-
557년 ~ 559년
소릉(昭陵)
2대
북주 세종(北周世宗)
명황제(明皇帝)
무성(武成) 559년 ~ 560년
559년 ~ 560년
3대
북주 고조(北周高祖)
무황제(武皇帝)
우문옹(宇文邕)
보정(保定) 561년 ~ 565년
천화(天和) 566년 ~ 572년
건덕(建德) 572년 ~ 577년
선정(宣政) 578년
560년 ~ 578년
효릉(孝陵)
4대
북주 고종(北周高宗)
선황제(宣皇帝)
우문윤(宇文贇)
대성(大成) 579년
578년 ~ 579년
정릉(定陵)
5대
-
정황제(靜皇帝)
우문천(宇文闡)
대상(大象) 579년 ~ 580년
대정(大定) 581년
579년 ~ 581년
공릉(恭陵)

6. 계보


<colcolor=#000> 북주의 계보
추존 황제 문제
2. 명제
1. 효민제
3. 무제
4. 선제
5. 정제
[1] 다만 정제는 양황후의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양견의 외손자는 아니었다. 정제는 주황후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양황후는 계모였다. 양황후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은 훗날 외숙부인 수양제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2] 이 전통은 유송 시절부터 있던 전통이다. 유송의 초대황제인 유유는 사마씨 일족을 멸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중국에서는 선양으로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전 왕조의 황족들이 한번씩 갈려나가는 것이 일상이였다. 이는 먼 훗날 조광윤이 후주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여 중원을 재통일하고 후주의 시씨 황족에게 단서철권을 하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3] 수나라의 성씨인 양씨는 보륙고(普六茹)씨, 당나라의 성씨인 이씨는 대야(大野)씨로 갈아치웠다.[4] 다만 북주의 호화정책은 얼마 안있어 흐지부지된듯 싶으며 다시 한화되었다.[5] 북주 명제에 의해 추존됨.[6] 북주 명제에 의해 추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