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북주)

 


'''북주 제3대 황제
高祖 武皇帝 | 고조 무황제'''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보정(保定, 561년 ~ 565년)
천화(天和, 566년 ~ 572년)
건덕(建德, 572년 ~ 577년)
선정(宣政, 578년)
''''''
우문(宇文)
''''''
옹(邕)
''''''
예라돌(禰羅突)
'''생몰 기간'''
543년 ~ 578년 (35세)
'''재위 기간'''
560년 ~ 578년 (18년)
'''능묘'''
효릉(孝陵)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재위 초기
2.3. 우문호 제거
2.4. 그의 정책
2.4.2. 호화 정책
2.4.3. 부병제
2.5. 북제를 멸하다
2.6. 죽음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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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제3대 황제. 북주 왕조의 최고의 명군이며, 수문제의 천하 통일의 기틀을 닦은 군주.
우문옹(宇文邕)은 형 우문각과 우문육을 차례대로 살해한 우문호(宇文護)에 의해 황제로 등극하지만, 12년간의 기다림 끝에 결국 우문호를 제거하고 황권을 회복하였으며, 국력을 크게 발전시켜 북주보다 우위에 있던 북제까지 멸했으나, 진나라를 칠 준비를 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543년,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와 첩 질노씨(叱奴氏)와의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효심이 깊고 겸손했다고 한다. 특히 이복형이었던 우문육과 사이가 좋았다.
544년, 부성공에 봉해졌고, 557년 우문육이 즉위한 뒤에는 주국(柱國), 노공(魯公)으로 책봉되었다. 우문육은 그에게 자주 나랏일 전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우문옹은 말을 삼갔으며, 그래서 우문육은 우문옹에게 '''''그는 말수가 적지만, 하는 말은 다 옳다''''' 라는 평가를 내렸다.
560년, 그러다가 우문호가 우문육의 유능함을 경계해 음식에 독을 타자, 그것을 먹고 병이 든 우문육은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어렸기 때문에 우문옹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결국 우문호는 우문옹을 황제로 옹립함으로써 북주의 제3대 황제로 즉위했다.

2.2. 재위 초기


우문옹이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여전히 우문호가 장악하고 있었다. 우문옹은 두 형이 유능함을 보여주다 제거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위 초반기에는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560년, 양나라 장군 왕림과 그가 황제로 세운 소장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소장은 북제로 도망쳤으며, 소장의 영토는 북주와 진나라가 각각 나누어 가졌다. 이로 인해 양국간 긴장이 높아지자, 겨울에는 북주의 장수 하약돈(賀若敦)과 독고성(獨孤盛)은 진나라 장수 후전(侯瑱)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초반에는 북주가 우세했지만, 날이 갈수록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61년, 결국은 북주군이 고립 상태에 빠지자 진나라는 평화 협상을 제의했고, 562년 북주는 후난성(호남성, 湖南省) 일대 영토를 진나라에게 돌려주는 대신, 포로로 잡혀 있던 진나라 황족 진욱과 그의 아들 진숙보[1]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우문호는 이를 듣고 분노하여 제멋대로 하약돈을 파직시키고 만다.
564년, 적대국 북제와 적대 관계였던 북주는 돌궐과 동맹을 맺어 북제를 침공한다. 북주군은 북제 제2의 수도인 진양(晉陽)으로 쳐들어갔지만, 북제의 명장이었던 단소(段韶)와 곡률광에게 막혀 실패하였다. 그러는 동안 우문호는 북제에 평화 사절을 보내 북제에 억류되어 있던 우문호의 어머니 원씨와 그의 고모(아버지 우문호, 삼촌 우문태의 여동생)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북제 황제 고담이 이를 승낙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자, 우문호는 매우 기뻐했고, 전국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돌궐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565년, 무제가 우문순(宇文純)을 사신으로 돌궐로 보냈을 때 돌궐의 목간가한(木杆可汗)은 이들을 포박해 사로잡았다.
567년, 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상주(湘州) 자사 화교(華皎)가 북주와 후량[2]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제는 동생 우문직(宇文直)을 파견하였지만, 진나라의 명장 오명철은 이를 격파하고, 북주와 후량의 일부 영토도 점령했다. 진은 한때 후량의 수도 강릉을 점령할 뻔했지만,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우문호는 굉장히 화를 내며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문직을 파직하였다. 이때부터 우문호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우문옹은 신중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568년, 무제는 돌궐과 진나라, 양쪽에 적이 있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보고 다시 돌궐과 화친해 목간가한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3] 돌궐도 이에 응답해 포로로 잡혀 있던 우문순을 돌려보냈다.
이처럼 우문옹은 재위 초반기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국가를 안정시켰지만 어디까지나 우문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였고 겉보기에는 어리석게 행동했기 때문에 우문호는 여전히 그를 만만히 여겼다. '''우문호가 국정을 마음대로 전횡하며 불만이 계속 쌓이고 있어서 반대파들이 늘어나는 것을 조심스럽게 때를 지켜보면서 말이다.'''

2.3. 우문호 제거


572년, 우문옹이 황제로 즉위한 지 13년째 되는 해이고 우문호가 권력을 잡은 지는 16년째 되는 해였다. 하루는 우문호가 신하 유계재(庾季才)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문호: 천도(天道)가 과연 어찌될 것 같소? '''

''' 유계재: 곧 변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권력을 천자에게 되돌려 주십시오. 그리고 청컨대 칭병하여 집에 머무르십시오. 그리하면 옛날 주공(周公) 단과 소공(召公) 석의 명성에 견줄 수 있고 자손들은 번성할 것입니다. '''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문호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우문옹의 동생 우문직을 파직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우문직이 우문호에게 불만이 쌓이자, 우문옹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문직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였다. 우문직이 우문호를 제거해야 한다고 강하게 간언을 올리자, 우문옹도 우문직에게 12년간 숨기고 살았던 생각, '우문호 제거' 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둘은 곧 자신의 편으로 우문신거(宇文神舉), 우문효백(宇文孝伯), 왕궤(王軌) 등을 포섭한 뒤, 작전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572년 3월, 마침내 우문옹은 우문호가 입궐하자 황태후 질노씨(叱奴氏)가 너무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하면서, 우문호에게 황태후를 간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술을 경계하는 내용의 주고(酒誥)라는 책을 주면서 읽어 드리라고 했다. 우문호가 태후를 알현하러 들어가 주고를 읽는데 갑자기 우문옹이 '''뒤에서 옥으로 된 홀(笏)로 우문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우문호가 쓰러지자 우문직이 와서 그의 목을 베었다. 우문호는 이렇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우문호는 평소에 궁궐의 어림군보다 더 많은 사병을 거느렸고, 부하들은 그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전횡을 부렸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권신 그 자체였던 것. 그를 제거하는 데는 우문옹의 처세술이 굉장히 중요했다. 초대 황제 우문각과 제2대 황제 우문육이 모두 그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우문옹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우문호를 재상과 도독중외제군사라는 높은 벼슬에 임명하며 환심을 샀다. 우문호는 이를 믿고 조정의 중신이었던 조귀와 독고신을 제거하고, 여러 전투에 나섰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우문옹은 우문호에게 계속 권력을 맡겼는데, 이를 통해 우문호의 반대 세력이 늘어나 결과적으로는 그를 제거할 정당성이 더 커진 셈이다. 실제로 우문호가 제거되었을 때 그것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크게 적었다.[4]
우문호를 처참히 죽인 후 무제는 이 사실을 밖에 알린 뒤에 우문호의 아들들과 부하들을 체포해 모두 죽였다. 그리고 우문호 제거에 큰 공을 세우거나 능력이 있었으나 우문호 시대에 중용되지 못한 우문헌, 이목, 울지형, 두치, 우문직, 육통, 우문효백, 우문초 등으로 새로운 조정을 구성했다. '''드디어 자신의 뜻대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2.4. 그의 정책



2.4.1. 삼무일종폐불


570년, 무제는 불교도교의 사제들을 모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게 했다. 우문옹은 도교 쪽에 조금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관련 관직인 통도관(通道觀)을 설치하고, 도교에 관한 백과사전인 무상비요(無上秘要)를 편찬하게 하였다.
사실 이 사소했던 일이 폐불 정책으로 확대된 계기는 북주가 갖고 있던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북주의 인구는 1천만이 조금 되지 않았다. 그러나 1백만 명가량이 승려였으며 1만여 곳에 사찰이 있었다. 불교는 북위의 국교가 된 이래 세력이 매우 방대해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불경이나 불상 건설을 위해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였다. 결국 우문옹은 이를 부국 강병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574년, 유학자들과 도교, 불교가 갖고 있는 철학에 대해 두 번째 논쟁을 벌였다. 이때에 무제는 유교를 첫 번째, 다음은 도교, 그 다음을 불교로 지정하였다. 이때부터 도교와 불교 탄압이 시작되어[5] 불경과 불상들을 불태우고, 승려들은 강제로 서인으로 만들어서 사회에 환속시켰다.
이를 북주파불(北周破佛) 또는 북위 태무제에 이은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 부른다. 과정은 좋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중앙 집권화와 지배 체제의 정비가 빠르게 진행되어 결국에는 국력이 성장하였다.
여담으로, 이 일에 대해서 "이런 짓을 하면 불지옥간다."라는 승려들의 비난에 "백성들이 편할 수만 있다면 내 몸 불지옥에 가도 상관 없다."라는 위엄찬 태도로 받아버렸다. 과연 후대 불교 설화들에서는 우문옹을 불지옥으로 보내서 지옥에서 "불교를 박해하지 말걸."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디스성 이야기들이 덧붙여진다.

2.4.2. 호화 정책


북주의 영토인 관중 지방은 북제의 영토인 관동 지방에 비해 굉장히 낙후된 지역이었다.[6] 그래서 그 당시 백성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어야만 했다. 이로써 시작된 정책이 호화(胡化) 정책인데, 원래 우문태가 시작한 정책이다.
우선, 북위의 효문제가 탁발(拓跋)씨를 원(元)씨로 개칭한 것처럼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한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고, 그들을 크게 우대했다.[7] 또 이러한 방식으로 한족을 선비족화를 시켜서 강한 군사력을 만들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민족 모순을 격화시킬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관중의 한족 사족 집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치 집단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선비족과 한족이 만나 형성된 북주의 새로운 정치 세력을 '''관롱집단(關籠集團)'''이라 부르고, 수문제 양견, 당고조 이연 역시 이 관롱 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일로 인해 북주만의 새로운, 위진 시대를 넘어선 문화가 형성되었다.

2.4.3. 부병제


호화 정책과 함께 시행된 부병제(府兵制)는 북주의 강성한 군사력의 원동력이었다. 원래 서위 시절 우문태가 처음 조직했는데, 부병제 조직은 총 24군으로 구성되었고, 개부(開府)가 각각 1군을 통솔한다. 그 위에 대장군(大將軍)이 2군을 통솔하고, 그 위에 주국(柱國)이 4군을 통솔한다. 서위에는 총 6군이 있었고, 서위군은 부병제에 의하여 6주국, 12대장군, 24개부로 계열화되었다.
부병제는 국민 개병의 원칙하에 호한의 차별 없이 모든 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일반 민호들을 부병으로 선발하여 절충부에서 훈련하게 하는 제도이다. 병농 일치로 농민은 교대로 번상하여 군사 훈련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면 향병이 되어 예비군을 조직한다. 이는 국가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국민 모두 병력화를 가능케 하였다. 부병이 되면 장비와 식료를 스스로 부담하고 군마의 사육을 할당받는 대신 군사 훈련을 받을 동안에는 일반 민호와 구별이 되어 조용조와 역역을 면제받았다.
이 제도는 북주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단순히 군사 제도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부병제를 실시한 목적은, 동위-북제 선비족 군벌 집단과도 다르고, 양나라의 한족 사족 집단과도 다른, 문무를 겸비한 단결된 통치 집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원래 북위의 전통적인 병역 제도는 부락 병제였다. 이 제도는 병농 분리제로써 선비족 정권에 편입된 여러 소수 민족이 병역의 의무를 지고, 한족 백성들은 일반적인 병역 의무를 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병제는 민족 출신이 아닌, 호등(​집의 자산에 따라 나눈 등급)에 따라 결정되어서 6등 이상의 중상호에 해당하면 징병 대상자가 되었다. 이렇게 중상호 가구이면서 아들이 셋 이상인 사람 중에서 건장한 자를 뽑아 부병으로 삼았고, 관롱 호족(한족)이 중심이 되었다.
8명의 대장군이 군사를 지휘하는 주국 대장군 제도는 흉노족과 선비족 초기의 팔부 대인, 팔국 대인 제도를 모방하였고, 부락병 제도의 전통에 따라 모든 병사들은 장군의 성씨를 따랐다. 이로 인해 한족 병사들은 선비족 부락민으로 편입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한족이 선비족화되어 호화 정책이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또, 우문옹은 여기에 다른 것을 결합하여 전쟁 노비를 해방하여 일반 농민으로 개편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균전제를 확대 실시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였다. 또한, 황무지 개간 및 수리 시설의 확대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부병제를 균전제와 결합시켜 병농 일치화하고, 부병을 황제에 직속시켜 황제의 군사 통제권을 강화시켰다.

2.5. 북제를 멸하다


이렇게 북주의 국력이 성장하는 사이, 당시 경쟁국이었던 북제 황제 고위사치향락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화사개(和士開), 고아나굉(高阿那肱), 목제파(穆提婆), 한장란(韓長鸞) 등의 간신들을 신임한 탓에 북제의 국력은 약화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문옹은 바로 지금이 북제를 정벌할 기회라 여기고 준비하였다. 게다가 북제를 지탱하던 명장인 곡률광(斛律光)과 난릉왕 고장공(高長恭)이 이들의 손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8]
575년, 마침내 무제는 대대적으로 원정을 준비했으나 이런 사실은 비밀에 붙이고 우문헌, 왕의(王誼), 우익(于翼) 등과만 의논했다. 우선 낙양을 급습하였으나 북제와의 공성전은 꽤나 힘들었고 하필 북제 우승상 고아나굉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면서 전세는 장기전으로 변해갔다. 북주 군이 다시 역공 준비를 하던 도중 우문옹이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북주 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577년, 우문옹은 1차 북제 정벌 때 미흡했던 점을 보완해서 다시 준비를 하였고, 병이 나은 뒤에 다시 북제를 공격하였다. 우선 평양(平陽)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는데 당시 고위는 기연지(祁連池)에서 황후 풍씨[9], 고아나굉 등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보고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구원병도 보내주지 않았다. 평양이 함락당하자, 고아나굉이 고위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고위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우문옹은 고위의 군대는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하고 후퇴하고 평양에는 양사언(梁士彥)을 남겨 지키게 했다. 북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평양을 공격했고 얼마 후 성벽에 구멍을 냈다. 다시 북제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이때 갑자기 고위는 공격을 멈췄다. '''왜냐하면은 풍씨를 불러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막장 플레이에 평양은 북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 상황에서 고위는 풍소련과 간신 목제파가 패닉 상태가 되어 도망가자고 하자 고위는 진양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북제의 군대는 와해되었으며 훌륭한 국가 멸망 테크를 타고 있었다.
진양으로 돌아온 고위는 사촌인 고연종(高延宗)과 고효형(高孝珩)에게 진양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삭주(朔州)로 도망가려 했지만 고연종은 이를 말렸다. 그러자 그는 먼저 태황태후 호씨와 아들 고항(高恆)을 먼저 삭주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북주군이 진양에 다다르자 그는 진양을 고연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삭주나 돌궐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매승랑(梅勝郎)의 제안으로 업성으로 갔는데 고아나굉도 함께 갔다. 이 상황에 이르자 당옹(唐邕)을 비롯한 북제의 신하들은 도망가기 바쁜 고위보다 고연종이 황제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고연종은 사양하다가 황제에 올랐다.[10] 다음 날 북주군의 진양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문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고연종의 군대는 북주군을 막아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 했다. 하지만 고연종의 부대는 이 승리에 도취해 부대를 재편성하지 못했고 다음 날 북주의 공격으로 진양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북제 제2의 수도 진양의 함락은 북제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됐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우문옹은 드디어 북제의 수도인 업성으로 진격했다. 고위는 업성에 도착해 사람들에게 군대에 입대하면 보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풀어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또 그가 군대의 사기를 위해 연설을 했을 때 불손한 태도 때문에 장군들의 분노를 샀다. 더구나 이미 북주가 진양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장군들과 관료들도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고매(高勱)는 태황태후 호씨와 고항을 삭주에서 데리고 와서 업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자고 했지만 고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술가가 나라의 운이 다했으니 황제를 바꿔야 한다고 알렸고 봄 고위는 7살난 아들 고항에게 황위를 넘기고 자신은 스스로 태상황제가 되었다.
고항이 황제가 되었지만 고위는 그대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모다루경현(莫多婁敬顯)이 위상원(尉相願)과 같이 고아나굉을 죽이고 고효형(高孝珩)을 황제로 선언하려 했다. 하지만 매복조가 고아나굉을 죽이지 못하면서 이 음모는 탄로나고 말았다. 고효형은 군대를 주면 자기가 북주를 물리치겠다고 청원했지만 고아나굉과 한장란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여 그를 창주(滄州) 자사로 내보냈다. 이때 북주군은 이미 업성에 당도했고 고위는 남쪽으로 달아나 저항군을 조직하고 여의치 않으면 진나라로 도망가려 했다. 그는 모용삼장(慕容三藏)에게 업성을 맡기고 자신은 제주(濟州)로 도망갔는데 이미 태황태후 호씨, 황태후 목씨, 아들 고항은 이미 보냈놓은 상태였다. 고위가 떠나고 모용삼장은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업성도 곧 함락당했다.
그 뒤 고위는 동쪽의 제주(濟州)에 도착해 고항의 이름으로 교서를 발표했는데 그는 황위를 고위의 삼촌인 고개(高湝)에게 넘긴다고 했다. 그리고는 곡률효경(斛律孝卿)에게 옥새를 고개가 있는 영주(瀛州)로 보내게 했다. 하지만 곡률효경은 옥새를 들고 북주에 가 버렸다. 고위는 더 동쪽인 청주(青州)로 도망갔고 거기서 진나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고아나굉은 북주군과 접촉하고 있었고 고위를 북주에게 넘겨주려 일부러 천천히 내려갔다. 북주군이 제주에 도착하자 고아나굉은 항복했고 북주군은 빠르게 청주로 갔다. 고위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북주의 장수 울지근(尉遲勤)에게 사로잡혀 황태후와 함께 업성으로 끌려갔다. 고위와 고항이 포로가 됨으로써 북제는 사실상 멸망했다.
우문옹은 업성에 들어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웅안생(熊安生) 등의 훌륭한 유학자들을 등용하였다. 모용삼장(慕容三藏)도 북주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우문옹이 그를 예로 대우하자 결국 그도 항복했다. 반면 막다루경문을 비롯한 간신들은 모두 끌어내 목을 베었다. 우문옹은 곡률광의 집을 본 뒤,

'''곡률광이 있었다면 짐이 어찌 업에 도착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며, 곡률광의 자손들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땅을 주어 살아가게 해주었다. 그 뒤 북주의 수도인 장안으로 끌려온 고위와 고항을 비롯한 고씨 일족은 그해 10월, 우문옹에게 모조리 멸족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우문옹은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이래 다시 화북을 통일하였다.'''

2.6. 죽음


북제를 멸한 후에도 우문옹은 자만이나 방심하지 않고 남아 있는 북제의 저항 세력을 제압하였다. 북제의 낙주 자사였던 독고영원을 비롯하여, 고장공의 옛 부하였던 울상원, 중단성을 끝까지 사수하던 부복처럼 북제의 충신들도 결국 우문옹에게 항복하였다.
특히 부복이 항복할 때는 우문옹이 이렇게 물었다.

'''왜 이제서야 온 것이오?'''

부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3대에 거쳐 제나라의 녹을 먹었습니다. 스스로 죽지 못하였으니 하늘과 땅을 보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문옹은 이를 듣고, '''신하라면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 라고 칭찬하며 북주의 벼슬을 주었다. 마치 문빙조조에게 투항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게다가, 그는 장안으로 돌아온 후 조서를 내려 과거 우문호가 화려하게 꾸민 전각들을 모두 허물도록 하고 값비싼 물건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였다.
578년, 그러나 북제의 일부 황족들이 돌궐로 달아나자 우문옹은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병이 악화되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원정을 중지하고 장안으로 돌아온 우문옹은 우문효백(宇文孝伯)에게 황태자 우문윤을 잘 보필해줄 것을 명하고 죽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6세.'''
제위는 황태자 우문윤이 계승하였으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매우 포악하고 무능하였다. 결국 우문윤은 나랏일을 전부 장인이었던 양견에게 맡기고 사치향락에 몰두하였는데 그가 죽자 양견이 어린 황제 우문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결국 북주는 우문옹이 죽은 지 겨우 3년 만에 멸망하고 우문씨도 멸족당하는 안습한 결과를 가져왔다.

3. 평가


재위 초반기에는, 월왕 구천에 버금가는 인내심을 보여준 끝에 우문호를 제거하였고, 그 뒤에는 조정을 새롭게 개혁하고 인재를 우대하여 북제까지 멸망시키는 군사적 능력, 행정적 능력, 도덕적 능력을 모두 갖춘 팔방미인이자 엄친아였다. 또한 자치통감을 따르면 매우 검소하여, 항상 무명 옷을 입고 무명 이불을 덮고 잤으며 후궁도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할 정도로 충성스럽게 만들었고, 과감히 결단하며 법을 엄격히 사용했다.
결국 총평을 내리자면, 막장 황제들이 즐비했던 남북조 시대에 큰 획을 남긴 명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주 시대의 관롱 집단은 수, 당나라를 세운 주요 세력이었기도 했고 말이다. 36세로 죽었으니 진나라 황제 진숙보를 보건대 10년만 오래 살았더라도 천하를 통일했을 수 있다. 결국 요절해 버린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군주일 뿐...
중국의 분열기를 거의 다 수습한 명군이지만 천하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아깝게 요절했다는 점과,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조가 교체되어 버렸다는 점에서는 후대 오대십국시대 후주세종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둘 다 불교를 억제한 삼무일종법난을 일으킨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다.[11]

4. 대중매체에서


2013년 방영된 난릉왕에서는 홍콩 배우 진효동이 연기를 맡았다. 배역은 북제 난릉왕 고장공과 여자 주인공인 양설무와 삼각관계를 이룬다(...) 또 난릉왕에 버금가는 미남으로 등장하는데 이 문서 상단의 초상화를 보면 그저 안습(...)
2016년 방영된 난릉왕비에서 중국 배우 팽관영이 우문옹의 역할을 맡았다.
2019년 방영된 독고황후에서는 배우 척적이 우문옹의 역할을 맡았다.

5. 둘러보기





[1] 훗날 당시 진나라 황제 진천의 아들 폐제 진백종을 몰아내고 각각 제4, 5대 황제가 된다.[2] 양나라 황족 소찰우문태의 도움을 받아서 세운 강릉 일대의 괴뢰 정권.[3] 다만 정략결혼이라 우문옹은 그녀를 쌀쌀맞게 대했다.[4] 이는 손휴손침을, 강희제오배를 제거한 것과 비슷하다.[5] 다만 도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었다고 한다.[6] 북제 인구 약 2800만, 북주 인구 약 1100만 정도였음.[7] 예를 들어, 우수한 관료였던 유경은 우문씨, 구순은 약구인씨, 소숙은 을불씨로 성을 바꾸었다.[8] 북주의 장수 위효관은 곡률광을 싸움터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간첩을 파견해 고씨가 몰락하고 곡률씨가 흥한다는 내용의 시를 퍼뜨려 곡률광에게 누명을 덮어 쓰게 한다. 그 덕분에 고위가 곡률광을 죽여주자, 우문옹은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9] 이름은 풍소련(馮小憐)으로 고위가 아끼던 애첩이였다.[10]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비정통 황제로 남아 있다.[11] 삼무일종법난은 시호에 '무'자가 들어가는 3명의 황제와 '종'자가 들어가는 1명의 황제가(삼무일종) 불교 억압 정책을 펼쳤다는 것(법난)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