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강
1. 후한 말의 인물
苑康
(? ~ ?)
자는 중진(仲真). 발해 중합 사람.
태학에서 곽태와 친했고 효렴, 영음령, 태산태수를 지냈으며, 군 내에서 세력이 있는 자들을 단속해 군 내에서 세력을 가진 자들이 얻었던 전답을 주인에게 되돌려줬다. 영음령 시절에 영천의 순가팔룡이라 불린 8명이 살던 마을의 옛 이름이 서호였는데, 원강은 옛날 고양씨에게 재주가 뛰어났던 아들 8명이 있던 것을 생각해 그 마을 이름을 고쳐 고양리라고 했다.
장검이 중상시 후람의 가속이나 빈객들이 백성들에게 잔혹하게 대하자 그들을 단속했는데, 원강은 그들 중에 산양에서 태산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이로 인해 후람이 원강을 원망해서 원강이 기주자사 제오종, 도위 호가 등과 함께 도적들의 인원을 허위로 속여 보고했다고 무고했다. 원강은 정위에게 체포되었고 일남으로 옮겨졌으며, 양척이 원강을 변호했고 원강은 본래 군으로 돌아갔다가 집에서 죽었다.
천하의 사대부들은 이응 등의 법도를 숭상하면서 조정을 더럽다고 해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오직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서 서로를 표방하면서 그들을 위해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들이 표방한 여러 개 칭호 중에서 원강은 장검, 적초, 잠질, 유표, 진상, 공욱 등과 함께 사람을 지도해 으뜸가는 사람을 좇아가게 하는 사람을 말하는 팔급이라 불렀다.
삼국지연의 6회에서 유표가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해 명사 7명과 사귀었다면서 강하팔준 멤버 명단이 나열될 때, 원강이 범강(范康)으로 오기되어 범강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2. 후한 초기의 인물
袁康
(? ~ ?)
회계 사람으로 월절서의 저자.
월절서에 쓴 편서외전기를 통해 파자로 이름, 미어로 출신을 밝히고 있으며, 상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구천 이래로 경시(更始)에 이르도록 5백여 년이 흘렀다는 말이 나온 것을 통해 그가 있던 시기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름은 거(去)라는 글자를 성으로 삼아 의(衣)자를 더하고, 그의 이름에 미(米)자가 있으며 경(庚)자를 덮어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나왔다. 그의 출신지는 우는 동쪽으로 정벌하다가 오자서가 태어난 나라에 묻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편서외전기를 통해 오평이 도를 품은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거나 친구였던 그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면서 그의 저술을 훑어보고 그 문장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오평보다는 늦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