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웅
1575년~1646년 이전
1. 소개
원균의 아들.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재임할 당시 원균 밑에서 종사관을 했다. 그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늘 아버지 원균과 같이 전장을 누볐으나 현실은 시궁창. 사고뭉치인 아버지가 저지른 사고를 '''뒤치다꺼리'''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딱히 눈에 띄는 전공은 없으나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막장 행동을 보인 흔적도 없다.
원균옹호론자들이 권율을 깎아내리려고 원사웅도 괜히 아버지랑 같이 곤장을 맞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사료는 없다.
2. 사망설?
원사웅은 이런 사고뭉치 원균이 그래도 아버지라고 처절하게 보호하다가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균은 아들을 희생시켜가면서 도망쳤으나 단 몇시간을 벌었을 뿐 결국 원균도 전사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원균만 이때 전사하고[1] 살아있었다.
먼저 공신회맹록 기록을 보자.
여기서 보면 분명히 살아있는 원사웅에 대한 공신책봉기록이 나온다.
거기다 1720년에 발간된 원씨 족보를 보면 여기에서도 원사웅이 전사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20세) 子 士雄(承嫡), 字大器, 乙亥生, 當壬辰倭亂從原陵君軍, 多有捷獲之功, 而浮謗太甚, 以伸卞事, 持狀啓, 詣行在, 特蒙引對, 賜饋面諭, 卽除訓正, 賊平後策功二等, 後登武科, 官至同知, 襲封原城君, 娶萬戶綾州具三樂女, 生一子, 繼娶昌寧成汝學女, 生一子, 墓在振威馬山酉坐原.
1921년에 발간된 족보를 보면 이제서야 원사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아들 사웅(적통을 승계하다), 자(字)는 대기(大器), 을해년(乙亥年, 1575)에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에 원릉군(原陵君)을 따라 종군하여 첩획(捷獲)의 공이 많이 있었는데, 뜬 비방이 매우 심하여 이를 신변(伸卞)할 일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특별히 불러보시고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는 은전을 입었으며, 곧바로 훈련원 정을 제수(除授)받았다. 왜적을 평정한 후에 (선무원종) 2등공신으로 책훈되었다. 그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다. 만호(萬戶) 능주 구삼락(具三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이어 창녕 성여학(成汝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묘는 진위현(振威縣) 마산(馬山)의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
(20世) 子 士雄, 字大器, 宣祖乙亥生, 登武科, 官同中樞, 襲封原城君, 宣祖三十年丁酉七月日殉節, 壬辰之亂, 從統制公軍, 統制公多捷獲之功, 而浮謗甚囂, 以伸卞事, 持狀啓詣行在, 特蒙引對賜饋面諭, 除訓鍊正, 賊平策勳二等. 配 綾城具氏 父萬戶三樂, 配 昌寧成氏 父汝學, 墓 振威馬山酉坐.
족보 내용을 비교해보면 임진왜란때 전사했다는 기록을 넣고 그 이후의 기록은 전부 삭제해버렸다. 왜 이렇게 왜곡해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1646년에 들어서야 그의 죽음이 언급되므로 그 이전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아들 사웅(士雄), 자(字)는 대기(大器), 선조 을해년(乙亥年, 1575)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이르렀으며,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선조 30년 정유년 7월 일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통제사공(統制使公)을 따라 종군(從軍)하였는데, 통제공이 많은 첩획(捷獲)의 공을 세웠으나 뜬 비방이 심히 많았기에 신변(伸卞)할 일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니 (선조께서) 특별히 불러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시는 은전을 입었으며, 훈련원 정을 제수(除授)받았다. 왜적이 평정되고 나서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배(配)는 능성 구씨로 부친은 만호(萬戶) 삼락(三樂)이다. 배(配)는 창녕 성씨로 부친은 여학(汝學)이다. 묘(墓)는 진위현(振威縣)의 마산(馬山)의 유좌(酉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