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임진왜란 · 정유재란
壬辰倭亂 · 丁酉再亂'''
'''기간'''
'''임진왜란'''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정유재란'''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장소'''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
일본군사 통행권 요구(정명가도)에 대한 조선의 거절
'''결과'''
일본의 철군, · 연합군의 승리
'''영향'''
조선의 정치적 혼란 가속 · 사회경제적 기반 초토화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성장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 수립
'''교전국'''[1]
<^|1> [image]
조선
[image]
명나라
<^|1> [image]
도요토미 정권
'''지휘관'''[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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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반'''
[image] 조선 국왕 선조
[image] 조선 왕세자 광해군[202]
[image] 명 황제 만력제

'''조선 지휘부'''
영의정 이산해[203]
좌의정 윤두수[204]
우의정 유홍[205]
도체찰사 류성룡[206]
도체찰부사 병조판서 김응남

'''조선 중앙군'''
도순변사 신립
종사관[207] 김여물 †
순변사 김성일[208]
도원수 김명원[209]

'''조선 지방군'''
부산진 첨사 정발
경상좌방어사 성응일
경상우방어사 조경
경상도순찰사 김수
전라도순찰사 권율[210]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211]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212]
김해부사 서예원[213]
동래부사 송상현
밀양부사 박진[214]
안동부사 정희적
다대포 첨사 윤흥신[215]
경주부윤 윤인함[216]
경주 판관 박의장
진주목사 김시민[217]
양산군수 조영규#s-2
황간현감 박몽열 †
울산군수 이언성
훈련원봉사 정기룡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

'''조선 수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218]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219]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220]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221]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222]
충청도 수군절도사 최호[223]
녹도만호 정운
만호 손문욱
조방장 홍윤관 †
조방장 유극량
조방장 배흥립
조방장 박종남

'''의병'''
곽재우
권응수
고경명
김덕령
유정
영규
원연[224]
정문부
정인홍
조헌
휴정

'''명나라 지원군'''
병부상서 석성
경략 조선군무사 병부상서 양호
병부상서 계료 총독 비왜 총독 군문 형개
경략 군문 병부시랑 송응창
제독 군무방해어왜총병관 도독 동지 이여송
제독 한토관병어왜총병관 도독 동지 유정
도독 정왜대장 마귀
전군 도독부 도독 진린
유격장군 심유경
우군 유격장군 오유충
좌협군 사령관 양원
우로군 사령관 장세작
중협군 사령관 이여매
우군 부총병(요동군) 조승훈
중로군 사령관 동일원, 이여백
부총병 등자룡
수위사 천만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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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반'''
[image] 태합·태정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
[image] 관백 도요토미 히데츠구

'''지휘부'''
[image] 대로 마에다 토시이에
[image]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225]
[image]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
[image] 봉행 아사노 나가마사
[image] 봉행 마에다 겐이
봉행 마시타 나가모리
봉행 나쓰카 마사이에

'''총대장'''
[image] 일본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226]
'''• 제1군'''
[image]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image] 소 요시토시
[image] 마쓰라 시게노부
[image] 아리마 하루노부
[image]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
'''• 제2군'''
[image]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image] 나베시마 나오시게
[image] 사가라 나가쓰네
'''• 제3군'''
[image]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image] 오토모 요시무네
'''• 제4군'''
[image]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
[image] 시마즈 요시히로
[image] 다카하시 모토타네
[image] 아키즈키 다네나가
[image] 이토 스케타카
[image] 시마즈 토요히사
'''• 제5군'''
[image]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다 가즈타카 +
[image] 조소카베 모토치카
[image] 하치스카 이에마사
[image] 이코마 지카마사
[image] 도쿠이 미치유키
[image] 구루시마 미치후사
'''• 제6군'''
[image]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image] 모리 히데카네
[image] 다치바나 시게토라(무네시게)
[image] 다카하시 무네마스
[image] 쓰쿠시 히로카도
'''• 제7군'''
[image] '''7군 사령관''' 모리 데루모토
'''• 제8군'''
[image] 우키타 히데이에
나카가와 히데마사
'''• 제9군'''
[image] 9군 사령관 도요토미 히데카츠 +
[image] 나가오카 다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즈 +
'''• 수군'''
하야카와 나가마사
[image] 모리 다카마사
[image] 모리 요시야스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
[image] 가토 요시아키
[image] 도도 다카토라
[image] 핫토리 가즈타다 ‡
구키 요시타카
[image] 와키자카 야스하루
모리 무라하루
구와나 치카카츠
후쿠다 간스케[227]

'''병력'''[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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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병력'''
조선 18만 8천여 명
명 22만여 명

'''임진왜란 참전 병력'''
조선 6만여 명
명 7만 4천여 명

'''정유재란 참전 병력'''
조선 3만 7,600여 명
명 11만 7천여 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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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병력'''
47만여 명

'''임진왜란 침공 병력'''
19만 7700여 명

'''정유재란 침공 병력'''
14만 1400여 명

'''피해 규모'''[4]
<^|1> '''사망자'''
'''조선''' 약 100만여 명[5]
'''명나라''' 불명
'''포로'''
조선인 약 10만 명
<^|1> '''사망자'''
20만여 명
1. 개요
2. 명칭
2.1. 교과서에서
3. 전쟁의 배경
3.1. 일본의 상황
3.2. 조선의 대응
3.3. 조선의 병역 체계
3.3.1. 정군(正軍)
3.3.3. 오위(五衛)
3.3.4. 조선의 방어 체제
3.4. 조선군의 병력 구성
3.5. 일본의 내부 사정
3.6. 일본군 병력 구성
4. 전쟁의 경과
4.1. 전쟁의 시작
4.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4.3. 반격의 시작
4.4. 명나라의 참전
4.4.1. 명군의 참전 이유
4.4.2. 명군의 참전과 역할
4.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4.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
4.5.1. 기존에 잘못 알려진 설
4.5.2. 왜 잘못 알려졌는가?
4.5.3. 21세기 연구에 따른 실제 사실
4.6. 정유재란 발발과 전쟁의 종결
4.6.1. 일본군의 퇴각 이유
4.7. 조선의 보복 논의
5. 각종 논쟁들
5.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정부?
5.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5.3.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수?
5.4. 육전은 의병과 승병의 독무대?
5.5. 조총 때문에 초반에 무너졌다?
6. 평가
6.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6.2. 일본에서의 평가
6.3.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가
7. 전후
7.1. 조선의 전후
7.2. 명나라와 일본
7.3. 조선인 포로들의 운명
8. 기타
8.1. 후일담
10.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0.1. 조선 측 주요 인물
10.1.1. 조정
10.1.2. 정규군 지휘관
10.1.3. 의병장
10.1.4. 기타 조선 측 인물
10.1.5. 조선에 투항한 항왜
10.2. 명나라 측 주요 인물
10.3. 일본 측 주요 인물
10.4. 전투 전개 과정
10.5. 기타 전투
10.6. 기타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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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5월 23일[6]부터 1598년 12월 16일[7]까지 약 7년간 조선명나라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당시 전쟁의 주 무대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나 패전 이후 내전에 들어간 전국시대(왜)에도 '''큰 영향을 끼쳐''' 16~1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국제전이라 할만하다.[8]

2. 명칭


일반적으로 임진년에 일어난 의 난리란 뜻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칭한다. 그 밖에 조선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임진전쟁'''(壬辰戰爭),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후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 하여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의 난'''(文禄の役)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중국어는 萬曆朝鮮之役), 혹은 조선을 도와 왜와 싸웠다 하여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도 하며, 북한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을 받아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7년간의 전쟁이라 하여 '''7년 전쟁'''(七年戰爭)으로도 부른다.
1597년 8월에 일어난 '''정유재란'''은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덴노의 연호를 따서 '''경장의 난'''(慶長の役)이라고 한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 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학술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어느 한 나라식 표기가 아닌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지만 그냥 Imjin War라고 부르기도 한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게다가 임진왜란은 서력으로 1592년에 시작해서 1598년에 끝났으니 7년이라는 소리가 더욱 어색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영·미권에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은 Stephen Turnbull이 쓴 《The Samurai Invasion of Korea 1592-98》과 Samuel Hawley가 쓴 《The Imjin War》인데, Turnbull은 일본 쪽 자료를 주로 인용해서 제목에 '사무라이'가 들어가고, Hawley는 한국 쪽 사료를 주로 인용해서 제목에 壬辰의 한국식 독음인 Imjin이 들어간다. 다만 96페이지에 불과한 《Samurai Invasion》보다 600페이지가 넘는 《Imjin War》 쪽이 더 내용이 충실한 건 당연한지라 자연스럽게 Imjin War라 부르는 서양인이 늘었다. 영어로 구글링을 하면 '''Imjin War'''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언어 위키피디아에서도 '임진 전쟁'을 표제어로 삼은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면 프랑스 어(Guerre d''''Imjin''')나 독일어('''Imjin'''-Krieg), 포르투갈 어(Guerra '''Imjin'''), 터키 어('''Imjin''' Savaşı) 위키 등등.
1592년에 발발한 것을 쉽게 외우려면 "일오구이(1592)쓸(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즈언하~" 라고 외워보자...

2.1. 교과서에서


2011년 입학생부터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 적용되는 '동아시아사' 과목이 신설되었는데, 이 교과서에 '임진왜란' 표기를 '임진전쟁'으로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한일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 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특히 "'왜란'을 '전쟁'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주장이 있어 넷상에서 까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 교과목이 기존의 국사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논쟁은 과한 측면이 있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교과목이 나온 것이지 국사를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로 대체한 것도 아닌데다가, 동아시아사는 통사로서 전 시대를 다루기보다는 조선 시대 위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다만 손 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라고 언급해 논쟁의 여지는 있다.
당시 넷상에서 임진전쟁에 반대하는 네티즌들 중 일부는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핀트를 엇나가기도 했는데, 임진전쟁으로 변경하자는 쪽을 '친일파' 나아가 '뉴라이트'로 매도하며 '이명박 정부의 하수인'이라 인신공격한 것이 한 예. 허나 '임진전쟁'을 주장한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1987년 5월의 시국 선언에 참여했고#, 대운하 반대 교수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9년 사학자 시국 선언에도 참여하였을 정도#로 우파 성향과는 거리가 있고, 오히려 좌파 성향의 학자이다.[9]
학자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다.
  1. '왜란'이라는 용어는 '일본'을 '왜'로 비하하고 있어서, 가치 중립적이지 못한 역사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 조선의 대마도 침공은 '대마도 정벌'이라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 '왜란'이란 용어는 왜구나 조선 주재 일본인들이 일으킨 일개 '사건'을 일컫는다. 다년간에 걸친 거국적 전쟁 규모의 사건을 다루기에는 부적절하다.
  3. '왜란'이라는 단어는 동북아의 균형 관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자 국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10]
2017년 기준 고등학교 3학년 동아시아사 과목 교과서에선 실제로 '임진왜란'이 아닌 '임진전쟁'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정유재란' 또한 '정유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서술되었듯 동아시아사 과목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사학관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소개하면서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동시에 서술하면서, '비록 역사적 갈등을 빚고 있지만 동아시아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함께 나아가는 협력 관계이다'라는 해당 교과목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다만 동아시아사와는 별개로 세계사 과목에서는 아직도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3. 전쟁의 배경


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을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 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11]

3.1. 일본의 상황


[image]
[image]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사카 성[12]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파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 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 진출'이라는 이름의 침략 야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히데요시가 충분히 영향을 받을 만 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에 일본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13]
이렇게 도요토미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조선에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이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 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한 그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하면서 바닷길이 험하다면 자신들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과 도요토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군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보내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를 확답으로 만들기 위해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하는 노력을 보였고,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14],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15]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16]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동산도[17] 원정으로 출정하여[18]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궁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결국 11월 7일에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는데, 그리고 이 회견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일본 애니메이션 효게모노에서 묘사된 장면
저 오줌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과 징비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19]

쓰루마쓰와 오줌 문제에 비하면 소소한 면이지만 다른 접대 문제도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처럼, 당시 회담장에서의 접대 및 상차림은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식생활 또한 소박함을 지향했다지만, 당시 문헌을 보면 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하더라도 외국의 사신에게 대접하는 상차림과 예법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효게모노에서 도자기란 소재로 각색한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 뒤늦게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합하(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20]

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년 ~ 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이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천정(天正) 18년[21]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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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통신사인 김성일은 답서의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다고 여겨, ‘만일 이 글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이 있을 뿐, 가져갈 수는 없다.’고 따졌더니 현소가 서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글을 짓는 자가 말을 잘못 만든 것이라 핑계를 댔다. 그러나 전하와 예폐 등의 글자만 고쳤을 뿐, 기타 거만하고 협박하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이는 대명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대면서 고치지 않았다.

3.2. 조선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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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어필
경복궁 근정전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유구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선조 실록 1591년 10월 24일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 중이던 조정은 당파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옛날, 즉 최소 제6차 교육 과정 이전 국사 시간에 역사 교사의 개인적 지식 또는 그 당시 학계의 다수설을 들었거나 국사를 수능 등의 이유로 대충 배웠다면 말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김성일과 류성룡의 대화는 훗날 동인의 실책을 덮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이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 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간신으로 욕먹는다. 이 발언이 실상 조선의 전쟁 대비와는 별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전쟁 기간 중 보여준 탁월한 수완과 업적조차 폄하된다.[23]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과 달리 조선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하고서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고 1592년 개전 직전까지 쉴 새 없이 진행시켰다.'''[24]
특히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남부 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경상 감사 김수와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석각은 각기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특히 김수가 두드러졌는데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와 경상 좌우병영성이 모두 증축되거나 새로 쌓았다. 단순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보지도 않았다. 기존 왜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섬이 많은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탈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왜구의 주 공격루트가 아니었던 경상 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2개의 첨사진만 있던 부산 - 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김수는 축성 인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 뿐 아니라 유생들까지 동원했다. 향교 교생을 뽑는 고강을 엄격히 실시하여 낙강 유생들을 모조리 충군시켰고 이로인해 지역 사족층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방군 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이나 식자층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김수는 사족층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쟁 발발 후에 곽재우와 크게 충돌했고 선조는 성을 높일수록 민심이 피폐해졌다며 전쟁 준비로 인한 민심 이반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동년배 친구였던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축성에 반대했다.[25] 전근대 시대의 대규모 토목 공사가 민간에 끼치는 피해를 고려하면 김성일의 주장은 당대의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은 꿋꿋이 전쟁 준비를 진행시켰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이 반격을 감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조선이 찌질하다고 비판하는 사람 중에 조선의 준비랑 초기 전역을 제대로 인지하는 이는 거의 없다.
또한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수들은 남쪽 위주로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종 6품 지방의 현감[26]였던 무명의 장수를 전쟁 발발 1 년전인 1591년 2월 13일, 공을 세우라는 전교와 함께 '''단 하루만에 8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로 초수하기도 했다.[27] 그 외에 이억기, 이천, 양응지, 원균 등 당시 이름 있는 장수들을 대거 남쪽으로 배치했다.
이렇듯 조선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군의 규모를 '''수만 정도로''' 예상했다는 점과 통신사의 귀국(1591년) 이후 1년 남짓한 준비 기간은, 1585년부터 7년 이상 전쟁을 준비한 일본보다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이 일본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가 컸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는 한편 일본이 조선으로 보낸 일본 국왕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일본 내부 정보를 꾸준히 수집했었다. 그러다 1467년 오닌의 난을 기점으로 일본이 전국시대에 돌입해 내부 사정이 혼란해지면서, 파견간 조선 통신사들이 조난당하거나 사망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1479년~1590년동안 조선 통신사 파견이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직접적으로 정보 수집을 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국왕사나 왜관에 들어온 일본인, 대마도를 통해 일본 관련 정보를 수집해야만 했다. 문제는 조선측에서 직접 정보를 수집할 방법이 없다보니 일본측에서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믿기가 어려웠다. 특히 공식적인 외교창구였던 대마도는 조선 일본 양국간의 이중 종속관계를 유지하고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보를 부분적 내지는 가공해서 조선에 제공했다. 대마도가 몇 안 되는 정보 창구인지라 조선으로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1590년 조선은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공 정보를 수집했으나 근 100여 년 동안 정보가 없어 이해하기 어려웠던 데다 이듬해 명나라가 조선이 일본을 인도하여 명을 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을 의심하는 외교적 마찰이 벌어지면서 일이 꼬였다. 즉 정확한 전쟁 정보를 입수했으나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겹치는 혼선이 발생하여 일본이 왜, 어떻게, 얼마나 쳐들어 오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조선으로선 조선 전기에 있었던 삼포왜란 등의 경험을 토대로 그저 규모가 좀 더 커진 (일반적인) 전쟁으로 예상해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근대에 10만 규모의 해외원정이라는 것은 애초에 유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동아시아 역사상 이전까지 10만 이상의 병력으로 해외원정을 단행한 사례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 뿐이었고 그나마도 숫적 주력이었던 강남군은 사실상 전투병력으로 쳐주기도 뭣한 잡졸에 병선 건조를 위해 고려까지 쥐어짜내야 했을 지경이었다. 대국인 중국이 이 정도인데 일본이 강병 10만으로 바다를 건너온다는 것은 설령 정보를 입수한다 해도 수용이 어려운 이야기였다. 차라리 이전까지 많은 사례가 있었던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이면 모를까. 일본의 임진왜란 해외원정 병력동원 기록은 이로부터 250년이 지나 벌어진 크림 전쟁에서야 영프오 연합군 30만이 크림반도에 상륙하면서 깨졌다. 조선으로써는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비를 했고 그 상식을 뛰어넘는 규모의 재앙'''이 밀어닥쳤을 뿐이다.
여기에 전략적, 외교적 측면에서도 무한정 남부지방 방위에 몰빵할수도 없었다. 조선의 재정 및 인구여건 상 남부지방에 군단급 이상의 상비군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북방의 방위력을 일부 희생시켜야 했는데 고려말부터 지속된 북방에서의 군사적 위협을 생각하면 이것도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니탕개의 난이 터진지 10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고, 20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요군 4만명을 일으켜 출정하자 남부지방이 다시 왜구로 들끓어 골머리를 앓던 역사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 역도 성립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초기 조선의 판단은 일단 삼남과 북병을 소집하면 막아볼 수 있다는 것이었고, 어쨌거나 5만이 넘는 남도근왕군이 소집되어 수도권 방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조선도 작정하면 10만 이상의 대군을 뽑을수야 있었지만 그 막대한 생산인구를 징집해서 붙들고 있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명군에게 군량을 대주는 쪽이 싸게 먹힐 지경이었다. 중국발 군비제한도 문제인데, 당장 왜와 손잡고 명을 침공한다는 참소를 받는 마당에 10만 대군을 일으킨다고 하면 왜란을 걱정하기 이전에 명에서 어떻게 나올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실제로 중국 왕조들은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에도 조선의 군비에 지속적으로 제한을 가했으며 군비 확충 명분으로 일본의 재침을 거론해도 씨알도 안먹힐 지경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붕당으로 싸우기만 하고 전쟁 가능성을 부정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남쪽 전장을 중심으로 전쟁에 대한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준비 기간이 너무 부족했고, 그 전의 왜구들의 왜적질보다 좀 더 큰 국지전 정도를 예상한 것과 달리 일본은 전처럼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물러갈 생각 따위는 없었고 2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정복 자체를 목적으로 한 전쟁을 일으켰다. 설령 정확히 예측을 했다 해도 고질적인 재정부족과 전략적, 외교적 고려사항 등등 발목을 잡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즉, 어느 정도 전쟁에 대한 준비는 했으나, 일본이 벌인 전쟁의 규모가 조선 조정의 예측을 아득히 넘어서버린 것이다.

3.3. 조선의 병역 체계


조선의 군대는 크게 일반병인 정병과 수군 그리고 직업군인 오위로 나누어진다. 조선의 군역체계는 매우 복잡해 한국사 시험난이도를 높이는 주범 중 하나로 꼽힐 정도라 이 문서에서는 임진왜란과 연관된 내용 위주로 설명하고 자세한 내용은 해당 링크문서를 참고바람.

3.3.1. 정군(正軍)


원래 조선의 병력 체계는 양인개병제로 모든 양인[28](16세~60세)은 군역의 의무를 지며, 평소에 농사를 지다가 순번이 되면 1~2개월씩 현역복무를 해야 했다. 이 때까지는 양반도 군역을 져야했다. 3정1군의 자연호별로 편제해서 가족원 성인 남성 3명 중 한 명이 복무하면 나머지 두 사람이 면제되는 식이었다. 이것이 봉족제이다.
그런데 아들이 없는 사람은 맨날 군역만 져야하고, 가난한 사람은 군역을 지면 농사를 못해 먹고 살길이 없었다. 세조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유있는 사람이 정병이 되어 현역복무를 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정병에 포를 바쳐 재정을 돕게 만들었다. 이렇게 군역을 지는 사람을 정군 혹은 정병(正兵)이라 하고, 군포를 바치는 사람을 보인(봉족)이라 하며 이것을 보법(保法)이라고 한다. 갑사는 2보(4명), 정군은 1보(2명), 수군은 1보1정(3명)에게서 포를 받는다.
한편 부득이한 사정으로 현역복무(입번(立番)이라 한다)할 수 없는 사람은 1달에 베 3필, 또는 쌀 9말을 징수하게 했는데 이것이 방군수포제였다. 그런데 보법의 시행으로 군역대상자는 늘었는데 보인의 수가 줄어들자 정병에 포를 바칠 사람이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현역으로 복무해야하는 사람도 입대하기 싫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재물을 주는 행위도 빈번했다. 결국 원래 불법이지만 방군수포제가 워낙에 성행하여 결국 중종때 이를 법제화해 군적수포제로 바꾼다. 군적수포제는 지방 수령이 관할 지역의 장정으로부터 연간 군포 2 필을 징수하여 중앙에 올리면, 병조에서 이것을 다시 군사력이 필요한 지방에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게 한 제도였다.[29] 또한, 이때부터 양반은 모든 군역에서 면제되고 군포도 내지 않아도 되며, 양반이 다시 군역을 부담하게 되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도입한 이후였다. 이렇게 조선의 군대는 모병제에 가깝게 변화한다.
즉, 조선의 군사 제도는 만인개병제→선별징병제→준모병제로 바뀌었다. 농사만 짓는 일반 농민은 군사가 되지 않고 면포를 받아 생활하는 정병이 조선의 군역을 책임지게 되었다. 물론, 정병도 완전 상비군이 아니라 평소에는 농사짓다 순번마다 돌아가며 복무하는 반농반병의 신분으로 모병제에 가까운 일본의 아시가루와 상당히 유사하다. 당연히 병력 수는 양인개병제였던 조선 초기보다는 크게 감소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들이 전쟁 기간 내내 조선군의 주력이 된다.
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인구를 약 1000만으로 보고 있는데 근거는 1626년 호패청의 기록에서 발급된 인구가 226만이라는 기록이다. 전쟁으로 감소한 인구가 약 30년간 회복되었을 것을 감안하면 1626년의 인구가 임란이 일어난 1592년과 비슷할 것으로 본다.[30] 호패호패법에 따라 군역과 납세를 위해 성인 남성에게만 지급되니까 여성을 합치면 약 450만, 호패가 지급되지 않는 미성년자와 노령층을 합치면 약 800만, 기타 국가에서 파악하지 못한 인구를 약 200만 정도로 잡는다.
성인 남자 220만여 명 중 약 40%는 노비고, 7~8%는 양반이니 실제 군역을 담당하는 인구는 대략 120만 정도이다. 이 중 직업군인이 약 2만 3천명에 1명당 보인 4명이 붙고, 수군은 약 4만 명에 1명당 보인 3명이 붙으니 대략 30만 명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남은 90만이 정군에 해당하는데 정병 1명당 보인 2명이 필요하니 수치상 동원가능 병력은 30만 정도이겠으나, 장부기록의 불일치는 여러 번 지적되었고,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복무가 힘든 인원, 늘상 따라붙는 행정적 착오 등을 종합하면 실제 동원가능한 정군은 약 20만 명(+보인 40만) 전후일 것이다. 이는 아래 기록된 실제 운용된 병력과 대략 일치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병력들은 상비군은 절대 아니고, 평소에는 상번군 약 4만 명이 돌아가면서 훈련받다가 전시에 전원 동원된다.
병력 수로는 상당하지만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던 조선의 군사훈련이 대충대충이었을 거라는 점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일본의 아시가루들은 오닌의 난부터 100년 넘게 이어진 전국시대로 실전에서 살아남고 단련된 베테랑 병사들이었으니 숫자만으로는 조선군이 도저히 상대가 안되었다. 용인 전투에서 동원된 8만(혹은 5만)의 근왕병 대다수가 바로 이 정군이었는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한 고작 일본군 1600여 명에게 와해된 것으로 그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조선 병사들도 실전경험이 쌓이면서 전쟁 초반의 추태는 차츰 줄어들게 된다.[31]

3.3.2. 조선 수군


조선 수군도 기본적으로는 정병과 같은 제도를 따라 정병 대상자 중 일부를 수군으로 편제하는 식이었다. 수군은 대표적인 3D 직책으로 고되고 열악한 근무조건 탓에 아주 인기가 없던 군역이었다. 때문에 방군수포제로 돈 주고 빼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인원이 모자라서 양천불명자나, 죄인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요역 담당자가 부담해야 하는 면포도 3필로 육군인 정군의 2필보다 많았다.[32] 그래도 기피하는 사람이 많자 성종대에 아예 수군을 강제로 세습되게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고된 직책이라 조선 후기에는 수군이 칠반천역 중 하나로 천시되었다.

3.3.3. 오위(五衛)


한편 농민군인 정군만으로 모든 국방을 감당하기 힘드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중앙군인 오위였다. 수도를 지키는 경군(한양에 주둔하던 군대) 대다수가 오위에 해당한다. 오위에는 시험을 통과한 직업군인인 갑사, 별시위, 파적위 등과 농민군인 정병, 그리고 왕실 종친 및 공신의 자제들로 구성된 충의위, 충찬위, 족친위 등(=군사적으로는 밥벌레)이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즉 오위군 전부가 숙련된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갑사[33]는 태종 1년부터 국가의 녹을 받는 상비군으로 편제되었다. 원래는 양반들이 주로 하던 직책으로 특히 기갑사(기병)는 서양의 에퀴테스처럼 본인이 말을 준비해야 하니 부유한 자제가 아니면 하기 힘들었다. 일반 보병도 무장과 갑옷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맨앳암즈와 비슷해 서양에서는 맨앳암즈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대우도 좋아서 과전과 녹봉을 받았고, 만호(종4품의 무관)나 지방관으로 승진할 수도 있어서[34] 조선 초기에는 경쟁이 심해 시험도 어려웠다. 어차피 이때는 양반도 군역을 져야 했는데, 갑사가 되면 일반 군역에서 빠지는 데다 봉록도 받고 잘하면 벼슬도 할 수 있으니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군적수포제 실시 이후 어차피 양반은 군 면제 대상이 되어 군역을 질 필요가 없어지니 갑사도 기피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갑사가 되는 것은 일반 양인들이었고 대우와 지위도 조선 초기에 비해 나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직업군인인 만큼 일반 농민병인 정병보다는 훨씬 정예병력이었다.
현대의 대통령 경호처에 상당하는 금군(내금위, 겸사복, 우림위)[35]은 병력 약 7백여 명을 거느렸고, 그 밖에 국왕의 친위군이라 할 수 있는 별시위[36]와 한량들을 모아 만든 특별 군사조직인 정로위[37]가 있었다. 이들은 취재를 통해 선발된 직업군인인 만큼 일반 농민병인 정군보다는 상당한 훈련도를 자랑했다.
신립이 경군에서 기병 8천여 명을 경군 중 차출해서 탄금대 전투에 참전하였다는 기록을 보건데, 여타 경군 병력도 최소 8천여 명은 되어 보인다. 물론 8천 명의 자질과 숙련도는 별개지만 말을 탈 수 있었다는 점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직업군인인 기마갑사 및 별시위임을 추측할 수 있다.
후술하는 류성룡의 자료에 의하면 이들은 약 2만 3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3.3.4. 조선의 방어 체제


조선의 기본적인 방어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로 전시에 각 군의 병력을 한데 합친다음 중앙에서 장수를 내려보내서 이를 지휘하게 하는 체제로 전쟁 당시 여러 문제점을 보여 전후 속오군체제로 개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승방략, 진관 체제 문서 참고 바람.

3.4. 조선군의 병력 구성


위 병역 제도를 통하여 조선이 실제로 가용한 병력이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병력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파악하기 힘드나 개전 1년 뒤인 1593년 1월 조선군의 병력이 얼마인지는 사료가 남아있다. 이하는 장부상 병력이 아니라 실제 운용중이던, 혹은 최소한 운용중이라고 조선 조정에 보고된 병력들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경기도> - 19,300명

강화부(江華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

양주(楊州)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천 명

양근군(楊根郡) 의병장 이일(李軼)의 군사 6백 명

여주(驪州)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천 명

안성군(安城郡)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백 명

<충청도> - 10,800명

직산현(稷山縣)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800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합해서 약 3천여 명

각처의 의병 합해서 약 5천여 명

<경상도> - 77,000명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만 명

울산군(蔚山郡) 절도사 박진(朴晉)의 군사 2만 5천 명

창녕현(昌寧縣) 의병장 성안(成安)의 의병 1천 명

영산현(靈山縣)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천 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만 5천 명

창원부(昌原府)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만 5천 명

합천군(陜川郡)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천 명

의령현(宜寧縣)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천 명

거창현(居昌縣)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천 명

<전라도> - 25,000명

순천부(順天府)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5천 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만 명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만 명

<함경도> - 10,200명

함흥부(咸興府)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5천 명

경성부(鏡城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군사 5천 명

안변부(安邊府)·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의 군사 1백 명

조방장 김신원(金信元)의 군사 1백 명

<강원도> - 2000명

인제현(麟蹄縣) 순찰사 강신(姜紳)의 군사 2천 명

<평안도> - 17,903명[38]

순안현(順安縣)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5680명

법흥사(法興寺)에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273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백 명

용강현(龍崗縣)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7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090명

대동강 하류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420명

<황해도> - 8800명

황주(黃州)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800명

재령군(載寧郡)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천 명

연안부(廷安府)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군사 4천 명

'''이상 합계 17만 2400명.'''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1593) 1월 11일 병인 15번째 기사)

다만 이 기록에서도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중복집계 되거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참고.
이중 의병의 병력 2만여 명을 제외하면 조선 정규군은 15만 명 정도라고 사료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1593년 1월은 선조가 의주에 피난가 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가토 키요마사의 2군은 함경도로 진격중인 임진왜란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때문에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등이 멀쩡하던 임진왜란 개전 당시 최대 동원 가능한 병력은 이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또 다른 자료로는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인 '진시무차'(1594년 4월)의 내용이다. 군적상 '''조선군 전체 군인수 145,620명, 그 중 정로위, 갑사, 별시위가 23,620명, 정예군 중 군사 7920명 보인 15,700명.''' 위 자료와는 달리 의병은 기록에서 빠졌다.
그 밖의 다른 자료로 1509년의 조선 병력은 "이 해에 군적(軍籍)을 고쳤는데, 정군(正軍)이 17만 7322명, 잡군(雜軍)이 12만 3958명이었다."(중종실록 10권, 중종 4년 12월 30일 정사 7번째 기사) 전쟁 당시에도 이 병력과 큰 차이가 없다면 총 병력은 30만, 전투병인 정군은 18만 정도를 동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때 개전 당시 조선이 운용한 관군의 전투 병력은 약 18만 내외인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조선 수군의 개전 초기 병력은 약 3~4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39] 위 1593년 1월의 자료에 남아있는 기록상으로는 15,420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개전초기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주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유 군선을 자침시켜 조선 수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했던 경상도 수군이 통째로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많은 조선군이 어디서 뭘했길래 주요 전투에 안보였냐고 묻는다면, 원래 전쟁이란게 최일선 병력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일본군도 임진왜란 초반 핵심전투인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성 전투 등은 모두 고니시 1군의 1만 8천여 명이 주도적으로 치루었고, 가토의 2군 2만 2천여 명이 그 다음으로 많이 싸웠고, 나머지 10만이 넘는 일본군들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등 조선팔도 각지에 흩어졌는데 이들과 대치한게 이 병력들이다.
양적으로 조선의 병력은 상당했지만, 누차 언급되었다시피 이 병력들은 질적으로는 좋지 못했다.[40] 이상은 임란 초반의 병력 상황이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조선의 재정이 그 동안의 전란으로 많이 악화된 데다 선조가 전후 복구를 위해 병력들 상당수를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바람에 병력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그 빈 자리들을 명나라 군이 상당 부분 다시 채워주었다.

3.5. 일본의 내부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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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정벌대평정도'[41]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도 조선 정벌의 성공 가능성에는 의문을 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한 주요 일본군 무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만큼은 늙은 모친에게 "올해 가을은 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히데요시만큼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없었던 만큼, 그의 자신감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이며, 성공만 한다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만약 그대로 이루어지기만 했다면 아예 일본 본토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정복자가 되었을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 진압[42]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공을 계획한 것으로 이는 소속 무장이나 동맹 다이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인데, 노련한 야전 사령관 타입의 히데요시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다. 당시 히데요시 다음가는 대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의 병력은 파병되지 않았다. 사실 히데요시가 요청하기는 했는데, 전쟁에 나가봐야 좋을게 없다는 걸 아는 이에야스가 여러 핑계를 대면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통해 전력에 큰 타격을 입은 히데요시파가 임란 이후 도쿠가와파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전을 강요하지 못했던 것은 애당초 이야스파의 세력이 히데요시파보다 컸기 때문이다. 일단 최선임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지만 병력의 근간이 되는 고쿠다카는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3,40만 석 가량 더 많았다. 한마디로 도요토미가 도쿠가와를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고개를 숙였던 것은 외교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카츠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이에야스군은 킷포시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히데요시 군에게 코마키 나가쿠테에서 대승했었다. 당시 히데요시 측은 이케다 츠네오키가 전사할 정도로 참패당했다. 그런데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지능이 모자르다는 평가까지 받은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 편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히데요시 측에서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자기 어머니를 인질로 바쳐가며 동맹을 맺은 것이나.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히데요시가 이에야스파를 억지로 임란에 참전시키고자 했다면 조선 정벌은 커녕 일본 내전이 다시 일어났을 수도 있다. 즉 애초에 병력요청이 불가능 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임진왜란에 참가하지 않은 덕분에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을 히데요시의 탓으로 돌려 다시 조선과 화친을 맺을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외에도 호쿠리쿠 지역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우에스기 가문 역시 히데요시가 직접 가서 동맹을 권고한 세력이었지, 히데요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패하여 복속된 것이 아니었다. 우에스기 가문은 여전히 히데요시마저 두려워했을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에스기 가문의 임란 참전도 매우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히데요시의 대리 자격으로 3개월간 전선을 감독한 것 정도가 전부다. 카게카츠는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도해했다가 웅천에 왜성을 쌓은 뒤 철수했고, 이후에는 종전시까지 나고야성에만 머물렀다.
동북의 모가미나 북륙의 메아다 가문도 소극적인 지원만 했을 뿐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다. 다테 마사무네가 그나마 다수의 병력을 파견했는데, 이는 다테가 히데요시에게 패배했다고도 볼 수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다.[43] 동북 지역이라도 난부나 츠가루는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세력이라 다수 병력을 동원했다. 즉 결론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모리든, 시마즈든, 우키타든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하여 종속됐던 세력들만 전쟁에 참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 히데요시에게 전쟁으로 패배해서 항복한게 아닌 대등한 다이묘들은 애초에 참전시킬 계획도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s-2(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44]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2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만 ~ 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짙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45] 참고로 조선 측 전쟁 참전 병력수는 6만여 명, 재란 참전 병력수는 3만 7600여 명이었다.[46]
아래 편제를 보면 서 일본 내의 유력 가문의 다이묘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東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서 일본에서 주요 다이묘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타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반면에 동 일본의 유력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 등 대부분 빠졌다. 다만 초기 15만 대군에 포함 안되었을 뿐이지, 잠깐 짬을 내서 참전하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47], 난부 노부나오 등은 이후에 잠깐씩이나마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의 경우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3개월간 전선 감독만하고 돌아온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48]는 병 때문에 빠졌고 전쟁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 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49]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50]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내 석고량 10대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 빼고 다 참전 했다. 다만 대부분의 유력 무장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전한 모리가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두달 조선에 들렸다 돌아간 수준. 즉 서부지역의 중소규모 다이묘들만 참전 하였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의 신분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본인과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 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 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 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51] 그리고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시종 출신 중 1인자 다이묘가 바로 임진왜란 초기에는 수군 지휘관이었다가 정유재란 당시에 일본 수군 사령관으로서 활약한 도도 다카토라이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각 군에서 제일 크고 강력한 무장이기보다는, 각군을 통제하기 위해 히데요시와 그 동생 히데나가의 심복들을 한명씩 배치하여 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고, 임진왜란 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4군 대장 모리 카츠노부는 시고쿠의 모리 가문과는 전혀 관계 없이 우연히 성만 같은 사람으로, 히데요시 가문의 고참이다.
8군 대장이자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긴 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로 갓 20세의 어린 나이로 실제 총 사령관 역활은 커녕 자신의 부대 지휘도 고참 가신들이 대신 해주었다. 9군 대장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도요토미(하시바)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
그나마 6군 대장 고바야카와 타카카케(33만 석), 7군 대장 모리 데루모토(120만 석, 실지휘는 삼촌이자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동생인 깃카와 히로이에) 정도가 거대 가문 출신의 다이묘이다. 이 둘은 숙질 관계이며 이른바 오대로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일본 전체의 중신들이다.[52]
즉, 1~5군 대장들은 히데요시의 젊은 심복(4군대장만 고참 심복)이며 대부분 임진왜란 직전에 다이묘가 됨. 6~7군 대장은 히데요시와 좋은 관계인 모리가문. 8~9군 대장은 히데요시의 양자이다.
반면에 정유재란의 8명의 대장들은 심복들이 줄고, 유명 무장들이 전면 배치 되어 서일본의 올스타들이 전원 출전하였다(1~3, 8군 대장 동일. 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5군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단, 동일본의 무장은 여전히 불참.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 지휘관들을 꽤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일본측 사료에 남은 조선군과 명나라 장수들보다 훨씬 정확하다. 개전한지 반 년도 안되는 시점에 이미 주요 일본측 지휘관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관백 평수길은 대마도에 와 머물러 있고, 기집(岐集) 재상 평수충(平秀忠. 일본어로 읽으면 '다이라 히데타다'가 되는데, '기집 재상'은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별명이므로 오기인 듯)이란 자는 처음 경상도에 있었는데 전사하였으며, 가등(加藤) 주계두(主計頭)란 자는 함경도에 있으며, 흑전(黑田) 갑비수(甲斐守, 갑비의 태수라는 뜻)란 자는 황해도에 있으며, 봉두하(峰頭賀) 하파수(河波守, 하파의 태수)란 자는 충청도에 있으며,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란 자는 개성부에 있으며, 삼(森)·일기(壹岐)[53]

·도진(島津)이란 자는 강원도에 있으며, 모리요원(毛利耀元)이란 자는 전라도에 있으며, 우시(羽柴) 비전(備前) 재상 평수가(平秀家)[54]란 자는 대장(大將)으로 경성에 있는데, 목책을 설치하고 그 안에다 겹으로 담장을 치고 그 가운데는 누(樓)를 지어놓았다. 우리 백성들을 모두 목책 밖으로 내보내고서 자기 무리들만 살고 있다.

또 소서(少西) 섭진수(攝津守, 섭진의 태수) 평행장(平行長)·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55]

·평호(平戶) 도주(島主)[56]란 자는 모두 평안도를 주관하면서 평양에 있는데 거느린 적병의 수가 많고 가장 정예하여 여러 왜적들이 따르지 못하므로 선봉을 꺾거나 진을 함락할 때는 모두 이 진(陣)을 힘입고 있다. 지금 만약 아군이 먼저 평양을 꺾는다면 파죽(破竹)의 형세일 것이다. 왜승 현소(玄蘇)란 자는 평양에서 종군하고 있는데, 별다른 기술은 없고 중국의 문자를 약간 해득하기 때문에 항상 군중에 있게 한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11월 11일 정묘 6번째 기사

또한 원정군 총대장이 우키타 히데이에고 부사령관이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57]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대장이라도 별 실권없는 바지사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우키타를 상대로 교섭을 시도하지는 않고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직접 교섭했다.
참고로 조선 조정은 천황과 쇼군(관백) 및 각 다이묘[58]들과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서 천황쇼군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59] '천황은 국정과 외교 관계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개전 전에 통신사가 받아온 도요토미의 답서에서 히데요시 본인이 관백이라 칭했으니 조선 조정에서도 도요토미의 공식 호칭을 관백으로 불렀는데 관백(関白)은 '맡아 두고(関) 아뢴다(白)'는 뜻으로, 여기서는 물론 국정을 맡아서 천황에게 아뢰는 직책을 의미한다. 전한의 권신 곽광에게서 유래한 명칭이니, 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관백이 신하의 칭호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3.6. 일본군 병력 구성


  • 제1군 - 큐슈 서부 세력, 18,700명(선봉 겸 평안도 침공군)[61]
    • 고니시 유키나가(7천 명)
    • 소 요시토시(5천 명)[60]
    • 마쓰라 시게노부(3천 명)
    • 아리마 하루노부(2천 명)
    • 고토 스미하루(7백 명)
    • 오오무라 요시아키(1천 명)
  • 제2군 - 큐슈 중부 세력, 22,800명(선봉 겸 함경도 침공군)
    • 가토 기요마사(1만 명) [62]
    • 나베시마 나오시게(1만 2천 명)
    • 사가라 요리후사(8백 명)
  • 제3군 - 큐슈 동부 세력, 1만 1천 명(황해도 침공군)
  • 제4군 - 큐슈 남부 세력, 1만 7천 명(강원도 침공군)
    • 모리 요시나리(2천 명)
    • 시마즈 요시히로(1만 명)
    • 아키즈키 다네나가(1천 명)
    • 이토 스케타카(1천 명)
    • 다카하시 누로(1천 명)
    • 다카하시 모토타네
    • 시마즈 다다토요
  • 제5군 - 시코쿠 세력, 24,700명(충청도 침공군)
  • 제6군 - 큐슈 북쪽 세력, 15,700명(전라도 침공군)
  • 제7군 - 주코쿠 서쪽 세력, 30,000명(경상도 침공군)[63]
  • 제8군 - 주코쿠 동쪽 세력, 10,000명[64]
  • 제9군 - 간사이 세력, 11,500명
    • 도요토미 히데카츠[65]
    • 호소카와 타다오키
  • 수군 9450명
이상 합계 17만 850명
  • 부교(奉行) • 군감(軍監)[67]
    • 이시다 미츠나리: 부교로 끝난게 아니라 실제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그게 행주 대첩[66]
    • 오오타니 요시츠구
    • 마시타 나가모리
    • 가토 미츠야스
    • 마에노 나가야스
  • 기타 참전 인원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 아사노 요시나가
  • 미야베 나가후사
  • 난조 모토키요
  • 이나바 사다미치
  • 가메이 고레노리
  • 키노시타 시게카타
  • 사이무라 마사히로
  • 아카시 노리자네
  • 벳쇼 요시하루
  • 가키야 츠네후사
후속 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 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 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 ~ 9군의 지역을 보면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만 참전했다. 동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 ~ 16군 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비대(117,8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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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대 17,550 난쵸 모토키요, 미야베 나가히로, 기노시타 시게카타,가키야 츠네후사,마에노 나가야스,사이무라 히로히데,아카시 노리자네,벳쇼 요시하루,나가오카 다다오키,기노시타 가츠토시,기노시타 도시후사,기노시타 노시토부,나카가와 히데마사
11번대 24,960 아사노 나가요시, 오오타니 요시츠쿠,기무라 시게코레,오오다 카즈노리,야마다 도사부로,하세가와 히데카즈,오야마 타다모토, 아오키 가즈노리, 호리 히데하루 , 호리 치카요시, 미조
12번대 10,000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나가
13번대 6,450 오카모토 시게마사, 히토츠야나기 가유, 하토리 가즈타다, 미즈노 다다시게, 오다 노부카네 ,마키무라 세이겐
14번대 13,750 하시바 히데카츠, 이토 모리카게, 이바나 사다미치 , 모리 다다마사, 카네모리 가시게 , 사토 가타마사
15번대 4,100 히데노 다카아키, 모리 히데, 이시카와 가즈마사 , 센코쿠 히데히사, 가토 미츠야스
16번대 12,050 도쿠가와 이에야스,다테 마사무네,우츠노미야 구니즈나,나스 슈우,사타케 요시노부,사토미요시야스,사다나 마사유키, 우에스기 가게카즈,모가키 요사미쓰,사노 료하쿠,난부 도시나오
특수부대 * 29,000 예비대(6,400명), 오다 노부카츠 (2,200명), 조총수(1,800명),기마무사(12,000명), 후방부대(7,600명)

4. 전쟁의 경과



4.1. 전쟁의 시작


결국 일본은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이 비변사를 세우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대비책이 없진 않았으나, 조선군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많았고 일본군은 생각보다 철저한 준비를 했음이 드러났다. 일본의 5만 선봉에 조선군 전위는 싸그리 쓸려나갔고, 차후 이 규모가 '''20만 대군의 대규모 침공으로 불어나리라''' 예상한 위정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쟁 발발 한 달전에 가까운 3월 23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슈인조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에게 조선출병을 명했으니 너(가토 기요마사)도 전장에 나가라. 이국(조선)의 자(者)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방심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공문을 전국에 보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68]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척 18,700명(경상 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 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갑작스레 적의 대군을 맞은 부산진 첨사 정발은 매뉴얼대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배 3척을 자침시킨(전선, 중선, 방패선 각 1척) 다음 6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개전 직전 서평포(부산 사하구 일대)와 통합된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 아래 14일 ~ 15일 이틀에 걸쳐 싸우다 전멸했다. 남동부 방위 중심지인 동래성에는 개전 하루도 채 되지 않은 4월 14일 경상 좌병사 이각과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다. (경주 판관 박의장과 밀양 부사 박진은 도착하기 전에 동래성이 포위되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외침에 대비한 매뉴얼이 사전에 만들어져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너무 많고, 또 강했다. 동래성도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친 박진의 군사 5백여 명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손쉽게 무너졌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구원에 실패한 후[69] 경상 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킨 후 경주로 퇴각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 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따라 울산과 경상좌도 지역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관군에 의하여 방어되지 못하였다. 결국 회야강 전투에서 관군이 패배하고 경상좌병영에서 일부 백성들과 관군이 모여서 경상좌병영과 일대 지역을 방어해보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제1차 울산병영 전투이다. 하지만 결국 이 전투에서 패배로 울산 방어선은 무너저 내렸다.
분군법에 따라 동래성을 지키러 떠난 양산 군수 대신 양산을 지키던 영산 현감 강효윤은 4월 17일 일본군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북문으로 빠져나와 밀양으로 퇴각했다. 4월 18일 고니시 군의 본대가 양산에 입성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박진은 영남에서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낙동강변 험로 황산과 작원 잔도에 2차 방어선을 쳤다. 진주에서 개전 소식을 접한 경상 감사 김수는 4월 16일 낮 밀양에 도착해 도내 총동원령을 내리고 진주와 함안의 군사들을 동원해 박진을 지원하고자 했다. 당시 박진이 거느린 군사는 너무 적어서 황산과 작원 잔도 전체 구간을 방어하긴 무리여서 작원 잔도 끝부분만 차단하고 있었다. 황산 잔도를 건넌 고니시 군 선봉대는 작원에서 박진 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는데 선두가 차단된 고니시 군 선봉대는 주력 일부를 금병산 능선으로 우회시켜 조선군의 배후를 차단해 포위 섬멸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박진 군은 무너지고 박진은 간신히 빠져나와 밀양성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대피시킨 다음 빠져나왔다. 이로써 영남의 2차 방어선도 무너졌다. 4월 17일 영산으로 물러났던 김수는 18일 박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초계로 물러났다.
경상 우도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란에 휩싸였다,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초계 군수 이유검이 먼저 서문으로 달아나버렸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으려고 성을 나갔다 그대로 진주로 도망쳤지만 사충신의 주도로 의병들과 백성들이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결국 함락되었다. 창원에 있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이 지원하려 했으나 급하게 모은 병력 2백여 명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초계 군수 이유검은 4월 26일 김수에게 참수되었고 병력 운송 중에 사고가 생겨 아예 지원도 못 간 의령 군수 오응창 역시 6월에 처형되었다.
한편 유사시 비상 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선조 수정 실록 4월자에 실린 경상 좌병사 이각의 장계에는 봉수군 오장이 일본선 400척을 목격하고 즉시 보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화 체계가 완전히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70] 그러나 당일 저녁에 한양으로 들어와야 했던 봉화는 들어오지 않았고[71],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봉수군이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것. 한양의 조정은 4월 17실 신시, 저녁 무렵에나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속도는 그냥 마편으로도 도달 가능한 속도인 만큼, 봉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맞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데 중앙에서 경장을 파견하는 건 진관체제도 똑같다. 진관 체제는 소규모 병력이 각지에서 분산되어 방어하게 되어있고 각 진관이 윗선의 허가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일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일개 고을 내지는 도 단위로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공격에 대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1개 ~ 2개 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이들을 지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진관 체제라고 현지 지휘관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북방 지역은 현지 병사가 지휘하게 하고 남방도 지방군과 중앙군의 역할을 나눠 상당 부분 재량권을 부여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제승방략은 상당히 진보된 제도였다. 왜침이 전례없는 대규모에 속도가 빨랐고 지방군의 훈련도가 워낙 저열했기 때문이지 제승방략이 병력 모아놓고 경장만 기다리는 제도라서 무너진게 아니다. 결정적으로 조선 육군이 임란 최대 규모로 투입된 용인 전투가 경장이 아닌 전라감사가 지휘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경장의 파견 문제가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 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 기마 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 기병 전술로 보병 중심인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문제는 전쟁 후 명의 절강 병법을 받아들인 후에 개선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천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천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 등의 9천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4.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 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신립이 이끌었던 경군(京軍) 기병대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 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대부분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 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 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 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72] 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73]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경군 기병 8천여 명과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 명을 합하며 1만 6천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부대가 오합지졸이었다는 설은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프로이스 신부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차례 - 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
전쟁 발발 초기 조선군이 부산진-탄금대에 이르기까지 투입한 병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탄금대 전투의 전력 규모를 보면 일본 1~3군의 절반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정도면 방자의 이점을 살려 적을 완전히 격퇴시키지는 못해도 지연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대패했으며,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수급 3천 개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한양과 일본군 사이를 가로막는 야전군은 사라졌고 방법이 없어진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택한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한양 농성이란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신립이 이끈 경군이 탄금대에서 섬멸되면서 한양을 지킬 만한 병력부터가 사실상 없었고, 그 전에 한양도성 자체가 방어에는 매우 불리했다. 성이 너무 넓고 교통로의 대부분이 평지에 접한 형태라서 대군으로 공성전을 펼치면 쉽게 뚫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이미 빈집이었던 경복궁.[74] 선조를 잡지 못한지라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했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근거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있어서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4.3. 반격의 시작


그러나 개전 후 2달이 지나자 전초 기습의 충격은 약화되고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곽재우, 조헌,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의 재야 인사들, 정부에서 내려보낸 수령들의 주도로[75] 집결한 지방군들이 일본군의 육상 보급로를 압박하며 각지에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1592년 6월 이후 당 해 말까지 벌어진 주요 지상전투가 약 17회였는데, 일본군이 주도해서 공격해온 횟수는 고작 4회뿐이었고, 나머지는 조선군과 의병이 선타를 날렸다. 승률에 있어서도 조선 측이 8번의 승리와 3회의 무승부를 기록한 반면 일본은 6회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적인 판세는 일본 측이 쥐고 조선 팔도 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되고 있던 것이다. 거기다 겨울이 전보다 일찍 찾아오고 조선군 경기병대가 산골을 따라 기습을 감행하여 땔감의 공급을 차단하자 일본군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손실분을 메꿔줄 일본의 보급 선단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고기밥이 되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전략인 수륙병진에 차질이 생기고 전황은 고착되었다.출처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76]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형상을 보인다.[77]
왕이 몽진하자 분노한 민중이 선조의 도주행렬을 가로막는 등 반발했고,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한양에서 도주한 직후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 장예원[78]에서 불을 질러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반론이 많은게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 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편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가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가서 요청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오니깐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 걸로 의심한''' 명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사실상 오지말란 소리다)하고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단념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요동에서도 '''조선의 왕이라는 작자가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온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불행하여 적세가 온 나라에 가득 찬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수상(水上)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현재에는 다만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 바다로 나가는 것, 수상으로 가는 것 이 세 계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장전보(長奠堡)에 머물러 있기만을 허락했을 뿐이니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의당 정주(定州)에 가서 사변의 추이를 살피든지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수상으로 가든지 편의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수상은 위험할 듯하니 해로(海路)가 합당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로 나가려 하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가는 데는 적도 갈 것이다"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강계는 길이 험하니 피란할 만합니다"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이곳은 두 강(江)이 앞에 있으므로 중국군이 구원하면 적은 반드시 바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요동을 침범하려 하는데 어찌 소소한 원병(援兵)을 꺼리겠는가. 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드시 간사한 계책이 있어서일 것이다"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인심이 차츰 안정되는 까닭은 대가(大駕)가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이 도(道)의 인심이 크게 소란한 까닭은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일 장전(長奠)으로 간다면 그 중간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만 난에 임하여 강을 건너게 될 때 그곳의 인심 또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지나치다"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성중은 아뢰기를,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 중국에서 적을 막지 못하여 그들과 화친(和親)한다면 뜻밖의 변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하였다.

군신들이 차례로 나갔다. 신잡이 나가려 하자, 상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의당 전진하여 수습할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형세로 보건대 정주(定州)에는 결코 갈 수가 없다"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당시 선조와 함께 의주까지 몽진했던 대신들도 하나같이 요동으로의 망명을 반대했는데, 강, 바다를 통한 피난의견까지 제시하면서도 중국 망명은 결사반대하고 있다. 심지어 신잡은 국왕, 심지어 그 '''선조''' 앞에서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까지 반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대부들이 국왕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중세 군주국가의 유일한 주권자인 국왕이 국토 내에 있지 않는 한 국왕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의병들이 거병하고 장수들이 싸우는 것은 국왕이 조선 땅에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79]
이 때 여진족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몇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한 것은 1613년이고 대칸의 직위에 오른 것, 즉 완전 평정이 끝난 것은 1616년이지만, 이때의 누르하치는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이미 이성량 등의 지원을 받아 거병한 지 10년이 넘은 다음으로, 1586년에 벌써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고 건주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건주 여진의 칸이 되었고, 건주 여진의 수도까지 새롭게 축성할 정도로 강한 세를 키운 상태였고, 여진족 중 가장 강한 라이벌이었던 예허부와는 사돈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어 사실상 여진족 최강자로서 주변에 대적할 자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지만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뭐로 보나 믿을수가 없는, 임진왜란 이전 최고 주적이었던 여진족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조선 조정이 분별이 없진 않았다. 또한 실제로 여진족에 대한 위협은 자세한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정말 엄청나게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에 원병을 거절한다. 일본에는 마상에서 돌격하는 기병이 없으며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 이북에서 오랑캐들에게 발려서 진군을 그만 둔 기록이 있으니 원병이 왔다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진족이 남의 나라 전쟁에 과연 제대로 싸우기는 했을지가 의문이니 선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누르하치 쪽에서도 조선에 파병을 하지 못한 게 신의 한수가 되었는데, 파병 제안 다음 해에 사돈 관계를 맺었던 하다 부족과 예허부 등이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누르하치의 뒤통수를 쳐서 각 여진 부락을 규합, 무려 9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주 여진을 침공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명나라는 이미 조선에 파병하고 벽제관 전투로 주력이 터진 상황이라 누르하치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1595년에 누르하치를 용호 장군으로 봉하며 지원해준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이 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여진에서 부동의 No.1 세력이 되었고, 명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그제서야 누르하치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황.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하였다.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임해군순화군은 현지에서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조선인의 밀고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의 맛보기(?) 차원에서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까지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하여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 침공'''에 성공했지만[80] 이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4.4. 명나라의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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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
자금성 태화전

4.4.1. 명군의 참전 이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명분은 명나라 정복[唐入り]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 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일본의 경계에 위치하여 양속관계에 있던 대마도의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81], 이 또한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에 들어가니 조선은 그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따라서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 데다가 병력을 20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이 위협받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반면에, 조선 왕조는 개창 전부터 속국으로서 큰 마찰없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당연히 변경의 울타리 역할을 맡은 조선을 살려두는 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만력제 본인에게도 임진왜란 참전은 상당히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만력제는 후계자 문제로 인한 쟁국본과 본인의 태업으로 인해 신하들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만력제는 권위를 확보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터진 임진왜란은 만력제로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번국인 조선을 구원하고 감히 천조의 질서를 어지럽힌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명분은 천자로서의 위엄을 떨치고 권위를 확보할 매우 확실한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 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 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 때문에 조선을 도운 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4.4.2. 명군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82]
제1차 조승훈의 5천 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 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불랑기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과 동장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연합군과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다만 한양 수복을 위해 12만 대군을 박박 긁어모은 조선은 벽제관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셧다운 상태가 되어버린 명군 5만까지 17만의 보급물자를 대느라 하루하루 말라죽었고, 결국 한타 싸움이 아니라 장기전 압박과 협상으로 한양을 탈환하긴 했지만, 이때는 보급물자도 민생도 파탄나버린 후였다. 이렇게 올인 한타를 벌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식량소비량 급증 +식량생산량 급감) 조선은 병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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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기병대를 묘사한 기록화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벽제관 전투, 사천성 전투와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 직산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는 것을 보면 명군이 아예 못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83][84] 당장 고니시가 평양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원인의 근본 원인은 공세 종말점에 도달한 고니시 군의 상태이긴 하나 명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85]
결론적으로 명군은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하긴 했다. 전란 중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싸우긴한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는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크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대규모 파병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86]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군은 약 5만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군은 최대 11만에 달했다.
이 외에도 명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87]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 사실 명나라 역시 자국 군대가 조선에 끼친 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88]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준할 레벨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게 기본 옵션인 일본군'과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로 패악질을 하는 명군'[89]을 같은 레벨로 볼 수는 없다.[90] 게다가 명군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91]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92]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

4.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상기한 이유로 참전한 만큼의 몫을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93]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 명나라가 초기 파병한 병력은 조총홍이포, 불랑기포를 운영하는 '''화기 위주 남병'''이 아니라 기병으로만 구성된 '''북병'''으로 북병은 몽골인, 여진족,[94] 거란족 계통인 다우르족[95]의 혼성부대로 대부분 만주연해주, 시베리아 그리고 내몽골 출신이었으며 한족 기병들도 이들 몽골이나 여진 등 유목민 흉내를 내서 유목민과 한족의 구분이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명나라 사료들에서도 '''북방 한족 기병들이 오랑캐 기병들을 흉내내어 둘이 용모가 비슷해졌다'''고 언급한다. 변발, 호복 등 오랑캐 스타일을 본받아 모습이 얼추 비슷해졌던 것이다.
특히 이 중에 내몽골 차하르부[96] 밑 투메드부[97], 칼간[98] 부 출신 몽골족 기마부대의 약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수천 문의 화포를 동원해 성 안에서 방어만 하고 있어도 적 지휘관이나 부대를 전멸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시대가 발전해서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더 나아진 무기들도 있었지만 과거에는 무장의 질적 구성이 좋았던 반면 이 시기에는 암군들의 영향으로 기강이 개판이라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보병들이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전차자주포의 지원, 보급도 풍부한 반면에 이쯤 오면 보병들이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전차자주포 등의 지원이나 보급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과거 서달의 북벌군만 해도 사막과 혹독한 기후를 넘어 북원의 근거지인 내몽골은 물론 막북의 카라코룸, 울란바토르까지 가서 오이라트를 전멸시키고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보급을 유지할 체계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서의 삽질이 있었다고 해도 손실된 군마나 장비 등을 쉽게 보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은 조총만 있고 화포가 없었기 때문에[99] 화력이 딸린 건 아니었지만, 초기 북병들의 경우 화포를 제한적으로 운영하고[100] 만구다이로 불리는 궁기병 위주에다 보급체계가 허접했다. 남병이 오자 비로소 보급도 나아지고 일본군이 갖지 못했던 화포의 위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조총만 전래되고 화포는 없었으며[101], 화포 대용으로 대구경 조총인 대조총을 사용했다. 이 대조총도 원본은 조총인지라 50보 내의 유효사거리밖에 안 되어 사거리가 더 긴 화포에는 무력화되었다. 이순신의 경우는 절대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안 들어가고 화포를 퍼부어 조총수가 대거 탑승한 적선을 격침시켜 승전이 가능했으며, 부산포 해전에서 녹도 만호 정운은 적을 추격하다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들어오는 바람에 대조총에 맞아 전사한 것이었다.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장수와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102]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103],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나라는 '''멸망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당시의 명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104],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105]가 나타난 것도 명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106]
  •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군의 식량 보급이 명나라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 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이때까지도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고 하나 전쟁을 겪는 나라에
통용될꺼라고 생각한 자체가 명군이 어리석었다는 증거다.''' 명나라는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나라 중앙 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나라가 은본위 경제 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107] 그러나 이러한 명나라 병참 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 경제 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108]
  •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나라는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 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심지어 협조하는 상인들조차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 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 체계 하에서 명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109],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 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110]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 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 없이 현지 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 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런 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명군에게는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 조달이 일상화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111]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나라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 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112]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군은 내몽골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 (거란 잔존 세력) 혼성 부대인 북병과 조총불랑기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족 차하르부 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113] 유목민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명군의 차하르 몽골 기마부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114] 실제로 조선은 명나라에게 북병의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 조총불랑기포 그리고 불화살 등의 화약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궁기병 위주라 화력도 형편없고, 데리고 온 내몽골 용병들은 약탈에만 관심이 있으며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 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명군보다 덜하진 않았다.[115] 히데요시는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조선 재침략 왜군 지휘관으로 임명하면서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조선인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후에 일본 서도의 사람을 이주시키길 10년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고 한다. 조선에 포로로 잡힌 왜장 후쿠다에 의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포로로 잡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이며 후에 중국까지 정복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좌군을 따라 함께 움직인 종군 의승 게이넨[116]도 자신의 일기에서 일본군이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악귀나 저승사자 같다고 적었다. 물론 히데요시의 명령에 싫증이 난 왜군은 돈[117]을 받으면 살려주기도 하고 이순신과 지방 양반들의 저항이 격렬한 전라남도에서는 대대적인 회유책[118]을 쓰기도 했다. 성과도 없지는 않아서 전라남도에서 일본에 붙은 양반들이나 백성들도 꽤 많았다고 하며 대부분 경상도에 설치된 왜성 중 유일하게 전라남도에 축성된 순천 왜성은 순천에 사는 양반인 박사유[119]의 공이 컸다.
물론 이에 대해서 명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명군의 숫적 우세가 그래도 필요하긴 했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120],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보니 조선으로서는 명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명군에게는 일본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고, 이미 최무선에 의해 화포는 물론 삼안총, 화창, 승자총통 등 원시 총기류가 보급되어 있던 조선조차[121] 존재를 몰랐던 포르투갈 대포인 불랑기포를 대거 갖고 있어서 화력전에서 일본군을 확실하게 압도 가능했다[122].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화포가 쏟아져 버리니 일본군이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조선 군인 1만여 명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123]
그리고 가뜩이나 바다에서 제해권을 뺏겨 보급이 영 힘든 일본군 입장에서 명군의 참전은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전선에 있던 일본 장수들의 의견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에도 망상에 사로잡혀 '''명나라 수도 연경에 황궁을 만들고 칭기즈 칸처럼 중국 대륙을 정복할 것이다'''니 '''조선 8도 중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조선 4도를 일본에 편입할 것이다''' 등의 뻘생각이나 하고 있었고 결국 죽을 때까지 현실감각이 없이 망상 속에서 지내다 죽었으며, 조선군이 반격을 거칠게 하자 정유재란 때는 조선인의 씨를 말리고 조선을 빈땅으로 만든 후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겠다며 일명 귀무덤, 코무덤을 만들기까지 했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전쟁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 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4.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강화파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심유경이 전쟁을 끝내려고 국서를 조작해 양쪽을 구슬려삶으려다 승려 사이쇼 조타이에 의해 탄로가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노하고 강화가 파기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124] 히데요시는 회담의 진행에 적당히 개입을 하고 강화 조건을 조절하면서 명나라가 '책봉은 가능하지만 무역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책봉을 받고 나서 돌연 '조선에서 사죄의 표시로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화를 낸 후 조선이 명과 일본을 이간질했다는게 주요 논리인 세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다만 책봉을 받은건 확실한게 당장 히데요시의 책봉 교서와 만력제의 칙유, 관복, 인장이 지금까지도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연대기의 내용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다.#

4.5.1. 기존에 잘못 알려진 설


20세기까지만 해도 상기되어있듯 강화 회담 관련해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125]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고, 일본국왕 책봉 따위는 필요없다며 분노한 히데요시가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고 민간엔 알려져있었다. 그리고 심유경은 문서 조작과 강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 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리고,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 추궁으로 처형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해 이듬해(1597년) 정유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는 설이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4.5.2. 왜 잘못 알려졌는가?


21세기 들어 사료를 검토해 본 한중일 학계의 결론은 이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유학자와 병법가들이 내용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이게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해당 이야기가 실제 사실인냥 알려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는 국학이 등장하면서 자국을 높이고 타국을 깎아내리는 풍조가 성행했다.[126]
책봉의 진상을 알고 히데요시가 화를 내고 강화를 깼다는 왜곡된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가 아닌, 에도시대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호리 교안(堀杏庵)이 1659년 출판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것은 이후 병법가인 야가마 소코(山鹿素行)의 '무사가기', '신편무사가기'(1673년)에서 책봉문을 찢었다는 내용으로 발전하였고, 유학자 하야시 라잔의 '풍신수길보'에 윤색되었다. 이는 국학자모토오리 노리나가가 1796년 펴낸 어계개언(馭戒慨言)에서 임진왜란이 한반도를 재복속하는 것이고 조선통신사는 조공사라는 내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 유명한 학자들이 쓴 것은 맞지만 사실을 기록했다기보다 당시 유행한 국수주의적 국학의 관념을 깔고 있는 것이었고 일본을 미화하는데에 집중한 것들이었다. 이 책들이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히데요시의 강화 파기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일본의 자국 찬양과 한반도의 멸시, 나아가 정한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4.5.3. 21세기 연구에 따른 실제 사실


2010년대 한중일 학계의 연구 결과, 민간에 알려져있던 강화 관련 설화와 실제 사실은 일정 부분 차이가 있어보여,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사실을 다시 파악했다. 아래 내용은 이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을 요약한 것이다.[127]
일본군은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의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내어 진주성 함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선의 전라도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그러다보니 일본군 내부에서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드니 물러서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 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다.[128] 주로 조선군은 진주 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129] 9만 명이 넘는 적[130]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131]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성을 함락한다고 피해가 심각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132]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을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133] 그러나 평화 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군사 17만 5천이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 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블러핑이 섞였다곤 해도 히데요시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송응창이 내세웠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134]

그러나 일본의 요구조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조항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 황녀 문제: 화번공주라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와 공식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분명 많았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최소한 실권자인 히데요시를 명나라 황제가 일본 국왕으로 봉한 다음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이었으니 이는 고려하고 말고가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2, 3. 무역 증서제 부활 및 각서 교환: 그나마 명나라 측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부분. 무역 증서제란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와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 즉 이 두 조항은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 관계 수립 및 교역의 정상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명나라 측에선 그나마 타협이 가능한 부분이다.
4. 조선 4도의 할양: 항목 중에 제일 황당한 조건이다.[135] 명나라가 강화 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을 평화롭게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영토 절반을 빼앗길 판에 명나라가 강요한다고 해서 조선이 들을 리 만무하다. 히데요시가 주장한 4도 할양은 사실상 일본군이 그 시점에서 점령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 남부 지역 4도(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 경기도 또는 강원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황무지로만 가득찬 변방 지역이라고 해도 조선 측에서 수용할 리가 없는데, 이 지역은 인구나 경제력이나 다 수위권에 드는 조선의 금싸라기 땅이다. 이걸 내놓으라는 건 걍 조선을 갖다바치라는 얘기나 진배없다. 게다가 이 중 경상도를 제외한 지역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태도 아니었다.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철군한 뒤 조선에게 전쟁을 맡기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질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의병이 들끓는 땅을 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런 현실성 결여된 혼자만의 욕심에 사로잡힌 요구는 들어줘도 문제다. 그래서 어찌어찌 조선의 4도를 일본이 먹었다 치자. 맨날 일어나는 반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라서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 할거 상황이었고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처럼 바다 건너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임나일본부 실사판이나 찍다가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확률이 반대보다 높아보인다.
5, 6. 왕자의 석방 및 볼모 송환: 임진왜란 이전의 한국사에서 일반 신하도 아니고 왕자를 해외에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이 복호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 때 여몽전쟁 및 이후의 원 간섭기 시절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다. 그나마 전자는 인질을 빌미로 선왕의 아들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고,후자는 고려가 몽골에게 굴복하여 보낸 것이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조선 측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7.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해석해야 하는데, 여기서 권신이란 류성룡같은 조선의 재상이 아닌 국왕인 선조를 지칭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히데요시는 알았건 몰랐건[136] 선조를 왕으로 여기진 않았다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국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조선을 침공한 책임은 엄연히 일본에게 있었는데, 이 책임은 전혀 대가를 치루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게 신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으로 조선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였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강화사로 위장한 송응창 부하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알탄칸)의 예가[137] 있다면서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 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공주와 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라고 허위 보고한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강화의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조안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 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하였다.[138]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요구한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조선과 화해하고 (일본이) 명나라의 번속국이 됐으므로 (같은 번속국인)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이후 명나라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고 고니시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을 살펴보면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이 일본 국왕에 책봉됨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서를 지참하는 것, 무역을 하게 될 경우 금인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139]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나머지 4개 도만 갖겠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나라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군영 2/3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였고 책봉사의 일정이 지체되는 것을 다시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때 정사 이종성이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고 더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책봉사절은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낸다.[140]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구경꾼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이후 책봉식에서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었다.[141] 다이묘들 또한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책봉문, 금인, 관면을 수령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장면을 기록한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이 일본의 승려 겐소(선소)의 선소고, 유럽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조선 사절의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이다. 이들 사료에서는 다이묘들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선소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그리고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에서 황신은 관복을 입었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조덕수는 입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추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명나라 책봉사 양방향과 심유경의 말에 의하면 봉작례 때 히데요시는 신종 황제(만력제)의 칙서에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五拜三叩頭禮)를 행하고 만세까지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측의 기록인 '선소고'에서도 '만세'를 '삼창'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선소고'에 의하면

''''太閤(태합) 秀吉(수길)은 기쁨에 들떠서 金印(금인)을 拜領(배령)하고 冠服(관복)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만세’를 삼창했다''''

고 써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

고 기록되었다.
조선 측 기록은 두 가지이다.
조선 사신단의 정사인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서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고 다이묘 40명도 관대를 착용하고 수직(授職)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조가 자세한 내용을 묻자

''''봉작례가 행해졌으며, 관백이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명이 모두 차등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

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덕수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142]

라고 황신과 다르게 보고한다.
두 가지 다른 보고에 대해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

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43]
허나 책봉을 받은 후에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명나라 사절이 철군 문제를 거론하자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조가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책봉하니 내가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고 전쟁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에 명나라 사절들은 자리를 파했고, 며칠 후 히데요시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한다.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나라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은 표문】

일본 국왕 신(臣) 풍신수길은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해와 달이 비추니 대명(大明)을 만국에서 우러러 보고, 강과 바다처럼 흠뻑 적셔 주니 성화(聖化)를 한없이 유지하실 것입니다. 천자의 운수를 높이 받드니 황제의 은혜가 널리 미치셨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조종(祖宗)의 덕을 밝혀서 인민의 마음을 안정시키시니, 원근(遠近)과 대소(大小)가 은혜를 입은 것이 요순(堯舜)의 성세(聖世)보다 못하지 않으며 위의(威儀)와 진퇴(進退)가 예절(禮節)에 합한 것이 주(周)·하(夏)의 융성한 기풍보다 넘치는데, 어찌 동해(東海)의 소신(小臣)이 직접 중화(中華)의 성전(盛典)을 받을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고명(誥命)·금인(金印)과 예악(禮樂)·의관(衣冠)에 모두 은총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은 일일이 감격스럽고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날을 택해 반드시 방물(方物)을 갖추어 구중 궁궐에 감사함을 표하겠습니다. 삼가 충심에서 우러나는 정성을 다하겠으니, 원하건대 어리석은 정성을 굽어 살펴 주소서. 천사(天使)가 먼저 돌아가는 편에, 우선 삼가 표문(表文)을 올립니다.

>일본 국왕 신(臣) 풍신수길은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해와 달이 비추니 대명(大明)을 만국에서 우러러 보고, 강과 바다처럼 흠뻑 적셔 주니 성화(聖化)를 한없이 유지하실 것입니다. 천자의 운수를 높이 받드니 황제의 은혜가 널리 미치셨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조종(祖宗)의 덕을 밝혀서 인민의 마음을 안정시키시니, 원근(遠近)과 대소(大小)가 은혜를 입은 것이 요순(堯舜)의 성세(聖世)보다 못하지 않으며 위의(威儀)와 진퇴(進退)가 예절(禮節)에 합한 것이 주(周)·하(夏)의 융성한 기풍보다 넘치는데, 어찌 동해(東海)의 소신(小臣)이 직접 중화(中華)의 성전(盛典)을 받을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고명(誥命)·금인(金印)과 예악(禮樂)·의관(衣冠)에 모두 은총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은 일일이 감격스럽고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날을 택해 반드시 방물(方物)을 갖추어 구중 궁궐에 감사함을 표하겠습니다. 삼가 충심에서 우러나는 정성을 다하겠으니, 원하건대 어리석은 정성을 굽어 살펴 주소서. 천사(天使)가 먼저 돌아가는 편에, 우선 삼가 표문(表文)을 올립니다.}}}
한마디로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자기만 일방적으로 철군을 하면 손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심유경은 자신을 천거하기도 했던 병부상서 석성의 도움으로 목숨은 구사했으나, 정유재란 발발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려다 경남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황제와 조정을 기만한 죄로 참형에 처해진다.
이처럼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으나 그 내용을 이해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후의 화내는 모습을 미뤄볼 때 자신의 요구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책봉 시점에서는 확실히 인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4]

4.6. 정유재란 발발과 전쟁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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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중 일부[145]
1597년 8월 27일[146], 일본은 총 14만[147]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한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임진년에는 발도 못 붙였던 전라도 남원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 이상 합계 12만 1100명. (수군 제외)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 전투 전후로 일본군 장수들이 소금에 절여 나무통에 담아 일본으로 바친 코 숫자가 3,500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나중에는 일본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코 베기를 하지 않으며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조선 백성들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조선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 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5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 한성을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4천 명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다. 이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148]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149]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150]
당시 일본군의 종군 승려였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재차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수군은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하는데, 바로 이 때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명량 해전'''. 앞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133척의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서해 진출을 시도했으나, 단 13척의 병력으로 서해로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돌아온 성웅에게 다시 한 번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전라도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151]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간다. 비록 조선 영내로의 진격 가능성이 완전히 좌절되고 의지도 꺾인 상황이긴 했지만, 이 전투 양식은 일본의 장기를 가장 잘 살린 것으로서 전쟁을 장기화시켰다. 일본의 성은 본래 전투 요새의 기능을 극대화한 형태의 성이었고, 개머리판이 없는 일본의 순발식 조총은 이런 성 내에 숨어 총안구를 통해 사격하는 것에 적합했다. 그 결과 공격하는 조명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잘 무너지지도 않는 성에서 총알이 쏟아지니 공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조명연합군이 포병 전력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긴 했지만,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야전에서 적군 진형을 갈아버리는 데 쓰이는 불랑기, 현자총통, 호준포, 변이중 화차같은 중소형 대포 및 오르간 건을 주력으로 굴렸고, 대형 화포는 효율성 문제로 인해 거의 운용하지 않았던데다 공성전에 사용한 경험도 적었다. 그래서 포병이 강해도 성을 공격하는 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공성전에 적합한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가 명나라에 도입되는 것은 임란이 끝난 지 몇 년 지난 후였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152]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 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히 철수하려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일본군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인 '''노량 해전''', 그리고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한 이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왜성 소탕전을 끝으로 '''7년 간의 대전쟁이 종결됐다.'''

4.6.1. 일본군의 퇴각 이유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막부 체계로,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 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했다. 그것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그 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 무력으로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기타 다이묘들은 사병을 가지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도요토미의 뒤통수를 칠 기회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들의 불만도 누를 겸 외부에 목표를 타겟팅한게 조선/명이었고, 그럼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부 다이묘들은 끝까지 이런저런 핑계로 출전을 미루며 가문의 병사들을 최대한 보전시켰다.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정한 다이묘 역시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 이런거보단 조선에서 땅을 넓혀 본인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이 더 강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 선봉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153],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엔 결국 서로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여튼 이런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출병해있던 다이묘와 병사들은 얼마 안가 일본 내에서 영주들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고, 승산 없는 전장인 조선에서 시간 질질 끌고 있어봐야 이미 무의미한 상황이었기에 황급히 철군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자기 살만 과하게 깎아먹은 탓에 이후 정적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4.7. 조선의 보복 논의


1598년 12월 노량해전으로 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군이 철수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상소로 '''대마도에 대한 보복전'''을 건의하였다. 왜란 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황신은 대마도가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명군과의 연합작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1591년 조헌의 지부상소 때와 달리, 다년간의 왜란으로 시달려서 일본에 이를 갈고 있던 선조는 이번엔 이 상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비변사에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한다. 특히 당시 선조가 하루 안에 이 안을 논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공격전에 상당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변사는 왜란으로 인해 조선군이 손실이 커서 병력이 부족하고, 황신의 견해와 달리 대마도 일본 본토에서의 구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우의정 이덕형은 명군과 상의했는데, 명군 역시 점령 후에 지켜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황신이 봤을 때와 달리 전황이 달라져서 대마도에 방어 병력을 두었을거라며 역시 난색을 표하고, 점령 후 수성이 아닌 단순 응징차원의 공격이라면, 선 정탐 후 움직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실록의 기록 상, 조정차원에서 논의한 기사가 없기에 그 사이에 진행되던 명군의 철군이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앙 조정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항왜 소운대를 일본에 첩자로 보낸다거나, 정벌 목적의 정탐 움직임은 있었던 정도였다.
다만 지방 차원에서는 이 작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이후 1599년 4월에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김경립 등 10인을 시켜 일본 내에서 배를 탈취하는 등의 작은 전과를 기록하며, 정탐한 결과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특히 대마도에서 조명연합군의 응징 공격이 두려워 겁을 먹고 성을 쌓고 밤낮을 쉬지 못한다고 했다는 보고 내용으로 보면,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보복 공격에 대한 방어 의도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김응서는 이 치계(보고서)에서 명군에 통보해서 같이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마무리지었으나, 실록에서는 이 치계에 대해서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김응서 부대의 작은 전과는 민간에도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소설 임진록에서는 일본을 응징한다는 가상 이야기에서 김응서가 꽤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5. 각종 논쟁들



5.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정부?


임진왜란 때 정부 측(특히 '''선조''')이 잘 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전쟁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 한국인의 인식은 상당히 나쁘다. 당시의 조정 인사들이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 측에서도 나름대로 가능성을 인지하고 대비를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비한 점이 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별 볼일 없는 탁상공론과는 거리가 멀었다.[154] 찌질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윤두수도, 이순신을 험담한 것 때문에 폄하받으나 전시 조정을 이끄는 기둥으로 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 전쟁 초반에 선조와 조정이 북쪽으로 도망가고 중앙군이 패퇴하는 등 세가 크게 꺾였던 것은 사실이나, 초반의 충격 효과가 사라지고 첫번째 겨울이 올 즈음이 되어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군관들과 각 지방 수령들의 노력으로 조선의 군세가 어느정도 복구된 상황이었다. 의병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일어난 경우도 있지만 이런 병력 동원에 호응하여 결성된 경우도 많다. 이들 의병은 전쟁 초반이라면 모를까, 전열이 정비된 이후부터는 독자행동을 하지 않고 조선 조정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다. 조선군은 이를 기반으로 지원 온 명군과 합세하여, 이미 1593년이면 일본군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그들을 남부 해안 지역으로 도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당시 퇴각하던 일본군이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맞아 입은 피해는 전근대의 전쟁임을 감안해도 매우 컸는데, 총병력 22만 중 절반인 대략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개전 1년 만에 사라졌으며, 나고야에 주둔하던 예비대가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바로 투입되었다.

5.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십만 양병설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주장''''이며, 후대에 '''이이의 제자들(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는 단 한 줄만 적혀있다.''' 기록을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남기는 조선을 고려하면, 실제로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는 굉장히 미심쩍어진다. 때문에 서인들이 이이를 추앙시키기 위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당시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군대 10만 이상을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에 조선이 정규군만 17만 이상을 동원한 걸 보면 10만 양병설의 진의가 더욱 미심쩍어진다. 현재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 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155]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은 이이(조선)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5.3.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수?


동래성 전투같은 전쟁 초기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전투들이나 행주 대첩 등 소수의 조선군이 다수의 적을 격파한 승전들 탓에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소수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군의 절대적인 물량은 그렇게까지 적지 않았다. 임란 초기에 실록에 나오는 병력들을 전부 다 합치면 최소 10만 명이 넘는다.
  • 부산진, 동래성에서 격파된 조선군이 3천 명. 상주 전투에서 손실 1천,[156] 탄금대 전투에서 경군과 충청도 야전군 8천 이상. 이것만 해도 1만 2천 이상.
  • 임진강 방어선에서 붕괴된 평안도,[157] 황해도 조선군이 1만 3천. 여기까지 2만 5천 이상.
  • 용인 전투로 인해 박살난 경상 - 충청 - 전라 3도 근왕군이 5만 ~ 8만.[158] 5만 이상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약 8만 이상.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피난민들까지 전부 다 합쳐진 병력 수라고 한다. 여기서는 피난민들까지 전부 다 포함해서 13만명이라고 기록.)
  • 평양 방어전에서 3천의 조선군 손실. 8만 3천 이상.
  • 이순신이 이끈 3도 수군이 1만 이상. 여기까지 9만 이상.
  • 이후 강원도, 함경도[159]에서 가토에게 박살난 조선군과 진주성을 비롯하여 아직 일본에게 점령되지 않고 남은 남부 지방. 주로,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그리고 선조의 호위 부대가 1만 이상.
대충 추려서 합쳐도 조선군은 10만 이상의 대군이 나온다. 그리고 실록에 나온 집계로는 임진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4만이 넘는다. 단, 누적으로 집계된 병력 수인지라 중복집계된 인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임진년 중반쯤 조선이 임진강 방어선에 1만 3천 명을 투입하고, 후방에서 하삼도 근왕군 5만 ~ 8만 명이 북상하자 일본 측에선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이 당시엔 일본은 1군, 2군, 3군만 한양에 있고 나머지 병력들은 전부 후방에만 있어서 병력의 질과는 별개로 전선에서의 병력의 수는 되려 조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구가 더 적고 행정체계도 부실했던 고려시대에도 일단 전쟁이 터지면 20만씩 긁어모았는데 조선이 일 터진 마당에 10만을 동원 못할 리는 없다.
물론 조선측 기록에서도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즉, 전근대의 한계상 정확한 집계는 매우 힘들었으니 당시 조선군의 총 병력 수는 어느 정도 중복집계 되거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참고.
다만 농업국가에서 이 생산인구를 마냥 군대에 붙잡아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는 대부분의 조선군을 농사를 짓기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육군의 주력은 명군이 된다. 이 시기를 기준 잡으면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소수인 것이 맞다. 당장 울산성 전투만 봐도 명군이 숫적으로 주력이었다.

5.4. 육전은 의병과 승병의 독무대?


과거 조선의 군사·행정체계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미진하던 시기에는 '조선 정규군은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한 것이 없고 육군 중에도 권율같은 일부 명장을 제외하고 무능해서 의병으로 때웠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조선 관군은 비록 임란 초기에 상정한 규모를 넘어서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중반기에 실전 경험이 쌓이면서 좋은 성과를 낸다.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소규모의 유격전, 공성전 등의 승리는 관군이 이루어낸 것이다. 의병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지만 관군과도 자주 힘을 합쳐 활동했다.
제승방략에 의해 조정에서 보낸 장수가 농민병인 정병을 집결시켜 지휘하면 그게 관군이고, 그 장수가 없을 때 (싸워야 할 의무는 없었음에도) 지방 유력자가 정병들을 모집해 지휘하면 그게 의병이다. 물론 의병 중에는 병역 의무가 없는 천민이나 양반들이 지원한 경우도 많았으나 기본적으로는 군사훈련을 조금이라도 받아본 적 있는 정병 출신 의병들이 당연히 더 많았다. 그나마 1593년 기준으로 의병의 수는 2만 2600명으로 관군의 4분의 1 정도였다.

5.5. 조총 때문에 초반에 무너졌다?


일반인들은 당시 조선이 조총이란걸 이때 처음 접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등 조선군 지휘관들과 관리들은 일단 조총이라는 무기의 존재 자체는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육군도 조총'만' 없었을 뿐이지 총통과 같은 화포들은 고려말 우왕 때부터 왜구를 상대로 운용해 왔으며[160], 장전 방식과 운용면에서 조총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 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장수들의 조총에 대한 과소평가와 일선의 조선군들이 조총을 접해본 적이 없다는건 분명 문제였다. 일선 병사들은 조총에 대응하는 훈련 따윈 받지 못했고, 일선지휘관들도 조총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161] 조선군 지휘부조차 한성의 최고수뇌부가 조총으로 시험 사격해본 정도가 전부이지 정규군이 집단적으로 운용하는 위력은 임진왜란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당시 조총의 유효 사거리 자체는 50m를 넘지 않았다. 따라서 유효사거리가 130~150 m 정도인 국궁을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원래 머스킷으로 무장한 군대의 위력은 단발의 명중률이 아니라 집단으로 쏘는 화망에서 구축된다.[162] 이를 조선군 수뇌부가 경험한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일 것이다. 총의 강력한 장점은 살상력이 압도적으로 우수해 갑옷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조총에 의한 피해를 기록한 사료가 무수히 나온다. 또한 냉병기 위주의 군대가 화기 군대와 처음 전투를 치루었을때 폭음과 연기에 놀라서 전열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세계사에서 흔하게 보이는 일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이 충격이 줄어드는 것도 공통점이다. 더욱이 조선은 화기도 상당히 사용했기 때문에 처음에만 놀랐을 뿐 익숙해지고 생각보다 개개 화력이 낮고 대구경 화기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까지 알아차린 뒤에는 금방 회복됐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군의 조총 비중은 생각보다 적었다.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 등의 창작물에서는 아직도 일본군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총병의 비중은 많이 잡아봐야 전체 병력의 20% 수준이었다. 나머지는 전통적인 창과 칼, 그리고 활 등이었다. 다만 20%라도 그리 적은 비율은 아니다. 1525년 유럽 파비아 전투에서 정예 프랑스 중기병과 스위스 용병을 격파한 스페인 테르시오의 총병 비율도 30%정도였다.
더욱이 매치락 화승총은 느린 장전 속도 때문에 이를 보조하는 전술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예를들어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이 무려 4만이나 되는 병력 대부분이 조총병이었음에도 기병이 부족하고 장창병을 제대로 운용하지 않아서 청나라 기병대의 돌격에 패하게 된다. 대기병 전술이 부재하고 대단위 조총병을 처음 운용해 보았기 때문에 나온 실책일 것이다. 반면, 전국시대부터 숱하게 조총병을 운용해본 일본군은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잘 사용했다. 예를 들면 동래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허수아비를 활용해서 조선군 궁수들을 끌어내서 조총수로 사격해 무력화시켰다던가, 부산성 전투에서 성문 밖의 언덕에 조총수를 집중배치해서 성벽을 무력화시켰다던가 하는 식으로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탄금대전투에서도 신립의 기병대가 패배한 주된 이유는 조총뿐만 아니라 기병 저지력이 우수한 장창과의 조합이었다.
다만 조선군도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을 쌓아가면서부터는 전투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예를 들어서 동래성 전투에서는 병력 3천 - 4천으로 일본군 2만 명에게 반나절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지만, 전투경험이 쌓인 이후로는 1:10의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5일간이나 버티면서 수성 성공(제1차 진주성 전투), 고지전에서 10배 이상이나 되는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이치 전투), 성곽도 없는 토성에서 10배나 되는 적을 대파(행주 대첩)하는 등, 조총과 관계 없이 우수한 전과를 거두었다.[163]
결론적으로 조선군은 오랜 내전으로 전투경험이 쌓인 일본군의 조총을 활용한 선진 전쟁기술에 초반에 많은 고전을 했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일본군들의 전술에 익숙해지면서부터 대등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총의 위력과 전술적 활용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또 기계(器械)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면,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는 본디 조총(鳥銃)에 대적하기 어렵거니와''', 야전(野戰)에서 그러할 뿐만이 아니라 적의 보루를 쳐부술 때에도 궁시로는 하기 어려운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에서 이르신 바와 같습니다. 오직 화기(火器)를 많이 갖춘 뒤에야 견고한 보루를 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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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1593) 윤11월 28일 11번째 기사

'''전투에 제일 필요한 것은 조총(鳥銃)이 으뜸이요''', 삼혈총통(三穴銃筒-승자총통의 한 종류)이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조총은 제조함에 있어 매우 공교로움을 요하기 때문에 잘 아는 정공(精工)이 아니면 제조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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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1593) 12월 2일 6번째 기사

그리고 상이 하교하기를,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로는 왜인의 조총(鳥銃)이 가장 절묘하다.''' 백금을 넉넉히 보내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사서 가져오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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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41권, 선조 40년(1607) 1월 1일 3번째 기사[164]

이와 같이 조선이 전쟁을 치루면서 실제로 상대해 본 뒤에는 조총이 전쟁병기로서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들이 수두룩하다. 조선왕조실록 이외의 각종 기록들에서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때문에 임란 이후엔 조선군의 주력 부대로 조총병을 다수 운영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일단 활의 경우 활은 물론이고 화살도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하다. 화살은 조총탄보다 부피도 크고 습기에 예민하다. 아교로 만들어진 활은 덥고 습하면 녹아내려 활시위가 풀리기 일수이며 목재 특성상 틀어질 수도 있다.[165] 더욱이 활은 정확히 쏘기 위해서는 자세와 탄도를 바람에 따라 계산해야하고 사수의 활시위를 당기기 위한 근력 등의 많은 숙련도를 요하는 등 조총보다 이래저래 불리한 점이 많다. 이처럼 실제 전쟁의 당사자들이 조총의 위력을 인정하는데 그 효율성을 제 3자인 현실에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 초반에 순전히 조총 때문에 무너졌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초기 전쟁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일본의 조총 비율이 생각과는 다르던 아니던 조총에 대한 평가는 현대인이 재평가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직접 싸웠던 조상들이 당시 내린 평가다.

6. 평가



6.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고조선부터 이어지는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1,2위를 다툴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도가 높은 역사적 사건이다. 전쟁 기간 자체가 길었고 기록이 자세하게 남은 데다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사명대사등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의 무용담이나 민간전설도 많다. 21세기에서도 이 시대가 미디어에서 활발히 다루어진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해서 전기/후기로 양분하는 관점이 일반적이었으나 21세기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정치적 상황에 좀더 주목해서 관학파/사림파/일당독재의 3단계로 구분하는 구분법을 정설로 따르고 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왜구, 근대의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취급되기도 한다. 400년도 전에 있던 전쟁 때문에 여지껏 반일감정이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가까운 시대인 일제강점기 때 얻은 피해들로 인해 이 전쟁까지 언급되는 것도 있긴 하다.

6.2. 일본에서의 평가


보통은 '말년의 히데요시가 멀쩡히 있던 조선과 명나라를 괜히 건드려서 벌어진 실책' 정도로 취급한다. 명분상으로도 밀리는 침략자 포지션인데다 '조선 정복 및 대륙 진출'이라는 본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패전이니 좋은 소리가 나오기 어렵다.
그렇다고 일본 입장에서 아예 득이 없는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각종 인적 물적 자원을 조선으로부터 약탈해 도자기 제조 기술이나 금속활자의 약탈, 성리학 유입과 같은 문화적인 수혜를 얻었다. 또 7세기 백강 전투의 패배 이후 섬에서 웅크려 살다 거의 천여년만에 정규군이 한반도로 넘어와 동아시아 패권국 중국(명)과도 다시 전쟁을 치르면서 국제적인 존재감을 높였다.
오늘날의 일본에서 실제 역사적 비중에 비해선 임진왜란, 그러니깐 '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문 편이다.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일으킨 전쟁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며 조선과의 전쟁이라기 보다는 '조선을 교두보로 명과 치른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우 역시 상당해, 전국 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조선은 이순신 정도만 짧게 나오고 일본군이 명과 싸운다는 말이 더 많이 나온다.
야마오카 소하치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는 무려 32권짜리 역사 소설임에도 임진왜란 부분은 한 페이지 뿐이다.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꽃놀이 하는 사소한 부분도 몇십페이지씩 서술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작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글을 쓰고 끝내 버린다. 이를 요코야마 미츠테루 7권짜리 만화로 만들었는데 마지막 페이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년에 노망이 들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끝." 달랑 이 문장 뿐이다. 야마오카 소하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역사 소설 작가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 작품도,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까지만 다루고 임진왜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한 무협 소설 작가인 시바타 렌자부로의 "무사"[166]에서 임진왜란 진행 사항이 1페이지 반에 걸쳐 기술되었는데, 고작 무협 소설보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임진왜란을 묘사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다. 임진왜란을 억지로 미화시키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떳떳하지는 않은 역사를 묻어 지나가려 들며, 조선의 비중은 대폭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일본인들의 태도는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한 에도 시대 식자층이 이 전쟁을 좀 더 솔직하게 비판하던 것과 다소 차이가 난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167]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 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168]

의 전역[169]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170]

강항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일본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 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나라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자기가 명나라를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합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반역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것.

6.3.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가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171] 이러한 인식은 Alessandro Valignano가 1592년에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1592) del Sumario de Japon, Adicion 4, IV, 487.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조차도 일본군의 침략에 비판적이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보고서 中 #


7. 전후


임진왜란은 분명히 '''조선과 원군을 보내준 명의 승전'''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엄연히 조선을 교두보로 삼은 명 침략 → '''조선의 영토 획득'''[172]이었고, 조선의 전략 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원했던 전략 목표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조선 반도를 떠나야 했으므로 일본군이 전략적으로 패배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전후 처리나 결과 측면에서도 조선은 분명히 일본에게서 침공 행위에 대한 사죄와 포로 쇄환 등을 받으며 국교를 회복하였다.

7.1. 조선의 전후


조선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173]# 여러 이설에 대해서는 여기 참고, 종묘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다 타버렸다고 기록한다. 일부 사찰들도 일본군의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버렸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혹은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 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그 외의 관련 사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 매우 소략하게 되었으며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174]만 남아 있다.
농업 및 산업 기반도 대거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이후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 등의 천재가 겹쳐 조선이 임란 직전의 경제 규모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영조 때 가서였다.
전후 조선에서는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보통 전쟁이 끝나면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전쟁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장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175] 이순신과 김시민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다. 전쟁의 피해를 져야할 국왕과 양반 세력이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고,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거나 주자학 사상이 무너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겪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런 편견은 최소한 학계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오히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겪고도 그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는 추세. 즉 16세기부터 계속되었던 폐단들이 어떻게 17세기를 거치면서 개혁을 할 수 있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176]
그 결과 나온 정책이 여민휴식. 그나마 조선은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청-일 직접 교역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양국 간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상당한 무역 흑자를 누리게 된다.[177] 이후 농업 측면에서도 전란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농업 생산량이 급증한다.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재정비되고, 이를 통해 17세기부터 조선의 경제력은 상승한다.
주자학 사상 역시 조선이 정체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서양 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까지 동아시아에서 성리학을 뛰어넘는 사상이론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유지·강화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왕조가 교체된 중국에서도 주자학은 지속적으로 주류정치사상의 자리를 차지했고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수입해갔을 정도였다.
승병들이 많이 활약한 전쟁이기도 해서 사대부들이 이들을 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기록도 남겼다.[178] 사명대사는 일본인들이 중과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전후 사실상의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인 광해군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승병들의 전공에 대한 대가로 조정 측에서는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였는데 임진왜란은 숭유억불 기조 하의 조선 불교가 이전보다는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2. 명나라와 일본


명나라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락을 면치 못했다.[179] 조선과 일본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 왕조가 성립되어 명나라에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 것.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까지 겹치며 재정이 파탄나고 이자성, 장헌충 등의 농민 반란#까지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180]
그러나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말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임진왜란(1592)에서 명나라 멸망(1644)까지는 몇십 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암군인 만력제 치하의 명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국가적인 활력을 잃었다. 임진왜란이 이미 침체된 명의 쇠퇴를 가속화 했을 수는 있겠지만, 명나라가 전쟁 이전에는 잘 나가다가 전후에 갑자기 쇠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181]
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당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도요토미 파는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 큰 타격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182]
일본 서쪽의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렸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지고 병력은 더 많이 보냈으며, 그리고 패배하기까지 한 일본이 아무 문제가 없었을 리가 없다.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 등을 맡은 인부들도 조선땅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戦夫라고 불렀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1594년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 측 최고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183]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지라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직접적으로 집계하기가 힘들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외교 관계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주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조선은 일본에 문위행과 조선 통신사를, 일본은 차왜와 국왕사를 파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과 달리 국토가 황폐화 되지 않았기에 여력을 가지고 물러나 손해를 최소화한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권을 빼앗겨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도요토미 개인의 자업자득일 뿐이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국력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존재감을 높였다. 이후 260년간 에도시대에 발전을 거듭하여 겐로쿠 시대 의 경제적 호황을 누렸으니 패전과 별개로 지정학적인 이득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질적인 이득도 존재했는데, 특히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재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렇듯 외부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무역을 통해 실리까지 확보하는 동시에 전성기를 열어 차후 메이지 유신 및 개화까지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얻은 이득은 상당하다. 물론, 정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도요토미 가문은 임진왜란으로 이득을 보기는커녕 그대로 망해버렸고 전쟁의 승패와 득실은 다른 것이니 일본의 이득이 조선의 승전을 폄하시키는 요인이 되지는 못한다.

7.3. 조선인 포로들의 운명


조선은 "쇄환사"를 통해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 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 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 제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한 병합 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들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일본인으로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귀환 포로들을 잘 대해준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신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비참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연려실기술 17권에 보면# 1605년에 승려 유정이 데리고 온 귀환 포로 3천 명은 통제사 이경준이 맡았고 해군 선장들에게 일임했는데 선장들이 출생한 곳을 물어도 어릴 때 포로가 되어서 본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모두 자기의 종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그 남편을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 강훙중이 포로 146명을 데려왔지만 부둣가에 방치되어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이런 추태가 소문으로 퍼지자 이문창이란 조선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봐야 좋을게 없다는 말을 퍼트려 송환을 기피하는 조선인들이 많아져 더욱더 송환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에 끌러왔던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에서 농노로 정착했던 부류가 많은데 고국으로 돌아가면 더 비참한 신세인 노비가 되니 고국말도 잊은지 오래된 상황에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은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가려는 포로들은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다도 문화가 발달하여 훌륭한 도자기를 얻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이삼평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이 있다.# . 다만 도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끌고 간 도공들 중에서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서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했고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일본에서 굶어죽은 조선인 도공들
물론 상술한 도공같은 기술자, 또는 다이묘나 일본 학자들에게 초빙된 일부 유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인 포로의 대우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최대 70% 정도의 악명높은 세율을 기록하던 막번체제 하에서 평범한 조선인 포로가 일본에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이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나갔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백 년째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 딱히 내다팔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184] 상대 번과 전쟁을 벌여 얻은 포로나 천민들, 옆 동네 주민들, 또는 왜구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서양 상인에게 노예로 내다 팔고 그 대가로 화약조총을 사오곤 했다. 이들 일본인 노예들의 몸값은 서아프리카 흑인의 절반 이하였고, 수십만 명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이 노예무역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들인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의 왜구 및 지방 다이묘들이었는데, 이들의 노예무역은 안그래도 전쟁 때문에 손실이 극심한 일본의 인구 유출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지방 번국들의 무장을 강화하고 전쟁을 격화시켰다.
자국민도 잡아다 팔아치우는 상황에 조선인 포로라고 예외는 없어서, 이들은 당시 최고의 해상 유통망으로 전성기를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일본 학자들의 경우 해외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혐오하며 노예 상인들에게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항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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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701년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85][186]
이러한 노예무역 문제는 후에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서양 상인들을 다 쫒아버린 뒤 대대적인 가톨릭 박해를 가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물론 조선인 포로를 겨냥했다기 보다는 일본 사람이 노예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다. 후에 서양 국가 중 막부의 유일한 무역 파트너가 된 네덜란드는, 가톨릭과 자신들이 믿는 개신교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와 차이를 열심히 설명하고 막부의 가톨릭 탄압에 동참하고 나서야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에 표류한 박연이 일본으로 갈 수 없던 이유도, 조선이 일본으로 보내주려 했던 것을 일본이 서양 기리시탄이라며 거부해서였다고. 오랜 포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독교 신자가 거의 없는 이유 중에는 이런 노예 무역과 얽힌 역사적 트라우마도 있다.

8. 기타


  • 조선과 현대의 한국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 언급된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이 전투들을 잘 모른다. 모쿠소 호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좀 유명한 정도. 행주 산성 전투는 조선 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대패한 전투이지만 역시 잘 모른다.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 까지, 일본인들은 행주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 내 주요 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 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서 완전 듣보잡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C급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187] 중요도에 비해 일본 측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 벽제관 전투는 명군이 기세 좋게 지원 왔다가 벽제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평양까지 도망간 전투로 역사책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또한 명나라가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일본 측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한국에서는 완벽한 듣보잡. 역사 매니아 아니면 도저히 모를만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대공세인 사로병진책의 일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조명 연합군이 4방향으로 병진하여 육상 방향 3군데에서 패했는데 일본은 이를 임진왜란 최대의 대첩으로 보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는 남은 한 방향인 바다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 연합 수군의 전투 노량 해전만 중요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서로 이긴 전투만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노량 해전을 이긴 전투로 계산하고 있다.[188]
  • 조선 3대 패전을 쌍령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고 그 중 두개가 임진왜란 때이지만, 웬일인지 일본은 그 두 전투를 빼놓고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 용인 전투야 역덕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다이묘가 기병 수십 명으로 공격하자, 밥먹고 있던 조선군 5만 명이 모랄빵 났던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전투인데, 일본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설정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보고 "아!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왜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었지?"하는 일본 측 반응이 나올 정도. 칠천량 해전은 조선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고 '칠천량의 무너짐'이라고 표현했던 사건인데 조선 수군 134척 ~ 180척을 상대로 일본군 2척이 접근하자, 겁먹은 총지휘관인 원균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고, 이를 본 다른 수군들이 모랄빵 나서 저절로 무너졌던 전투였다.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도도 다카도라의 50척은 이 때야 뒤늦게 참전함. 모랄빵 나서 도망간 덕분에 조선군이 거의 죽지 않은 전투이기도 한데, 남해안 곳곳에 숨어있다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자 데~헷! 하고 판옥선까지 끌고 다 나타난다. 일본 측에서는 3대 대첩 중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 싱거웠던 듯.
  • 조선의 가장 크게 패배였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과,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전투이기 때문이다. 벽제관 전투는 평양성에서 명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다가 한방에 뒤집은 중요한 전투였고,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의 경우 명군이 패배하기는 했지만 일본군도 처절하게 싸운 전투이다.
  • 조선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는 이치 전투,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를 꼽기도 한다.[189]
  • 여태까지 한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철저하게 잊혀진 부분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1593년 8월 이후부터 1597년 8월 27일까지 휴전 상태에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조선은 일본군 못지않게 위협적인 적들과 싸웠는데, 그들은 바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도적들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1594년 12월 1일 기사를 보면 전라도경상도경기도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는데, 광주와 이천 및 지리산으로부터 남원의 회문산과 장성 노령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한다. 도적들을 이끈 두목들의 이름은 각기 김희(金希), 강대수(姜大水), 고파(高波), 현몽(玄夢), 이능(李能)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제각기 활동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도적질을 함께 했으며, 그로 인해 관군이 처음에는 토벌에 실패하였다가, 도적 괴수들을 죽이면 현상금을 준다고 내부 분열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이능은 자기 패거리한테 죽임을 당하고, 가장 사나운 도적이었던 현몽의 패거리는 관군에게 항복하거나 도망쳤고 현몽 본인도 도망쳐 사라졌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양주에는 이능수(李能水 이능?)가 있었고, 이천에는 현몽(玄夢)이 있었으며, 대략 1594년 여름부터 이 도적떼들이 조선 각지를 휩쓸었는데, 그 규모가 적게는 1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도적질을 일삼았는데, 그들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관아에서도 막지 못했다. 이 도적들 중에서 남원의 김희(金希)와 영남의 임걸년(林傑年)이 가장 세력이 강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수인 전라 병사 김응서(金應瑞)와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 등을 동원하였다. 1594년 8월에 정기룡이 이복(李福)이라는 도적의 목을 베자, 그 무리들이 김희에게로 몰려갔다. 김희와는 다르게 남원에서 활동하던 도적인 고파(高波)는 그 무리를 거느리고 몰래 이교점(梨橋店)에 왔는데, 주민의 고발을 받고 출동한 판관 김류(金瑠)가 4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교점을 덮쳤으나, 고파 일당은 전혀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밥을 지어 먹고 활을 힘껏 당기어 갑자기 관군에게 쏘아대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김류도 물러났다. 고파 일당은 김류가 돌아가는 길에 먼저 가서 매복하였다가 김류가 오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갑자기 활을 쏘아서 김류의 말안장을 맞혔고, 김류는 간신히 성중으로 말을 달려 도망쳤다. 결국 해가 바뀐 1595년 봄에 경상도의 관군이 김희와 강대수를 토벌하여 죽였고, 고파는 장성의 주민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마침내 조선의 도적들은 평정되었다.[190]

8.1. 후일담


  • 일본군 사망자 중 군의 수장급 인물은 일본군 9군을 이끌다 거제도에서 병사한 도요토미 히데카츠,[191] 다이묘급은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도쿠이 미치유키,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형제와 수원에서 매사냥하다가 조선군에게 붙잡힌 나카가와 히데마사, 부산에서 전사한 에가미 이에타네로.[192] 총 4명으로 그 외에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했다. 죽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 물론 다이묘들도 죽을 위기에 처한 다이묘들은 많아서. 행주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급인 깃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수군에서는 함대사령관급 인물인 도도 다카토라명량 해전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노량해전에서도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는 다이묘 하나 살리기 위해 거의 90%의 손실을 감수해가며 도주한다. 이렇게 일본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위의 시마즈처럼 부하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조선, 명 등 군인이 국가의 소속이고 상관이 전사해도 자신의 책임이 크게 없으면 평범하게 직무를 유지하는 관료제 국가와 달리, 봉건제 국가 일본에서는 군인은 국가가 아닌 다이묘의 소속이고 다이묘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사무라이들은 보통 로닌이 되어 알거지로 떠돌며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 것으로 실제 노량 해전의 경우처럼 일본군은 병사들은 다 죽더라도 다이묘 한 명은 살리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주도를 공격 점령했다면 고립된 제주도는 일본에게 장기간 점거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나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목사 이경록[193]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 언어 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 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 시기 쯤에 생겨났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 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도 존재한다. 일부 책에서 인선 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 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 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 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 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 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 아이를 주워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 おたあ)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믿고,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타아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타아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타아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타아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흑인 용병들이 조선군에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참전시킨 것. 이들은 해귀(海鬼)라 불리는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으며,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194] 사실 이들이 전투 중에 딱히 남긴 큰 업적은 없었지만, 이들을 만나본 선조 임금이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로 인식하긴 한 모양.
  •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195]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 짠지에 가까웠다.[196]
  • 유튜브에 미국인인 Matthew Carrick은 이 8개월간의 한, 중, 일의 자료 조사를 토대로 9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있다. 영어로 되어 있으나 상당히 자세하고 양질의 자료를 정리해두었다. 1화 전투신은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드라마), 임진왜란 1592 등에서 따왔는데 일부는 제작자가 별도의 편집(효과음 및 배경음악 추가, 컷신 조정 등)을 가했다. 그 외에도 제작자가 보충을 위해 직접 단 댓글을 보면 상당히 디테일하게 자료를 조사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권율이 46세까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거나 행주 대첩 때 일본군이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했으나 격퇴된 상황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에게 원군을 청하자 명나라가 '혹시 조선이 명나라를 속이고 일본과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 드는게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대목에서는 한국사에서 역대 중국 왕조와 벌인 전쟁들의 목록(왕검성 전투,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나당전쟁, 고려-거란 전쟁 등)을 열거하며 '역사상의 경험으로 인해 명나라는 조선이 그토록 빨리 무너진 것을 믿을 수 없었다'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때 배경으로 나오는 삽화는 안시성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이다. 또한 이순신은 거의 주인공처럼 묘사되며 이순신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찬사는 덤. 국명을 '명'(Ming), '조선'(Joseon)이 아닌 '중국'(China), '한국'(Korea)으로 통일하였는데, 유럽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인 명칭이라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 저리 표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영상이 지워지고 없다. 작중에 불멸의 이순신 관련 영상이 많다는 이유로 KBS가 저작권에 클레임을 걸었기 때문. 제작자는 한동안 채널을 중지하겠다는 발표문만 남겨놓고 채널을 잠궈놨다. 무슨 멍청한 짓이냐 KBS 이 영상 덕분에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외국인들이 많다는 점을 보면 자폭이 따로 없다.
  • 호남은 한국전쟁의 낙동강방어선 역할을 하며 조선군이 임진왜란에 승리하는데 일조했다. 비록 정유재란시기 남원성전투에서 지며 잠시 점령된적이 있지만 이치와 웅치전투 그리고 먼치킨장수인 이순신 권율등이 호남의 육군과 수군을 이끈덕에 일본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신나게 공격했지만 먼치킨들의 활약덕에 패하고 우회해 진주성을 공격하며 진출을 시도했지만 진주성은 철벽방어선 역할을 하며 실패했다. 그 예가 바로 경상우수영 좌수영은 일본군에게 불타 소실되었지만 전라좌수영 우수영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아사히 신문이 2019년 3월 28일에 보도했다.#
  • 한양이 함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육군의 보급선이 두절되었을 당시 한양에 첩자를 투입하여 일본군의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조사 결과 일본군의 한끼 식사량이 약 2홉(약 120cc)밖에 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 성인 남성 기준으로 한 끼 식사량이 7홉(420cc) 정도 되었는데, 이 때문에 '왜놈들은 대체 밥을 먹는거냐, 마는거냐?'하는 말이 오갔고, 심지어 '이건 궁지에 빠진 상태에서 왜장이 몸소 부하들이게 본을 보이려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보급선이 끊어졌을 뿐이지 아직 육군의 식량이 거덜난 상황은 아니었다. 즉, 하루에 한 되도 안되는 한 끼 식사량이 일본군 본인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식사량이었던 것.[197]
  • 사실 반나절만에 끝났을 수도 있었던 전쟁이라는 대중적 평이 많다.[198]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가 아니라 경상 우수사에 보직 배치되었다면 '임진년에 왜의 수군이 조선을 침범하였으나 경상 우수사 이순신에게 격퇴되어 철수하였다' 라는 한 줄 기사로 역사에 남았을 수도... 더욱이 출병 당시 일본군은 상륙을 대비해 수송선부터 앞세웠으므로 접현 백병전밖에 타격수단이 없어서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평가까지 많을 정도로 조선 및 중국 대륙 침략에 엄청나게 집착했음을 감안하면, 실제 임진왜란보다 피해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단기전이 되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을 수도 있다. 제주도와 전라도 내지는 강원도 쪽으로 멀리 우회해서 침략하는 방법을 쓸 가능성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 하마터면 더 큰 국제전으로 확대될 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념을 밥말아먹었는지 태국류큐 왕국에게 "너네 나라도 정복할꺼임." 이라는 어그로성의 국서를 보내는 바람에 빡친 태국과 류큐 왕국이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자국 군대의 조선 파병을 제안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좋지 않던 명나라도 태국군과 류큐군을 명나라 군대의 휘하에 편제해 넣어 싸우면 이득일 것이라는 생각에 고민을 해봤지만, 더 큰 전쟁으로 번지기 싫어하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답서를 보내며 두 국가의 군대 파병을 거절했다.[199]
  • 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왕실의 자손, 특히 아들이 매우 귀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즉위한 선조만 해도 적자는 전후 태어난 영창대군 뿐이긴 하지만 대신 서자만 14명을 두면서 다산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출생해서 즉위한 효종부터는 적자인 현종 1명만 태어나고, 이후에는 적통은 고사하고 서자도 제대로 남지 않는 상황이 되면서 왕위 계승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 먼 훗날 일본 제국은 미국에게 진주만 공습을 통해 어그로를 끌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대외적으로는 우린 3천년간 외세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지 않았다는 구라를 쳐 아돌프 히틀러도 이 말을 듣고 낚여 의기양양했다.[200] 물론 임진왜란을 비롯해 신라 성덕왕 시절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침입을 격퇴한 기록, 백제와 왜구 연합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백강 전투 등 이미 일본이 명백히 패전하고 물러난 사례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 원수이던 체스터 니미츠도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한 이순신을 거론하면서 이미 일본은 임진왜란 때 패배했음을 상기시켜준다.

9. 창작물




10.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0.1. 조선 측 주요 인물


†표는 전사, ‡표는 처형 혹은 옥사, +표는 병사

10.1.1. 조정



10.1.2. 정규군 지휘관


  • 김명원 - 전 도원수이자, 좌의정.
  • 권율 - 도원수
  • 권준 - 전 순천 부사이자, 충청 수사
  • 김시민† - 진주 목사
  • 김완 - 전 사도 첨사이자, 조방장
  • 나대용 - 전라좌도 수군 군관
  • 무의공 이순신 - 전 방답 첨사이자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 박진‡ -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 선거이† - 전라도 수군 절도사→전라도 병마 절도사→충청도 병마 절도사→충청도 수군 절도사→황해도 병마 절도사[201]
  • 송상현† - 동래부사
  • 송희립 - 전라좌도 수군 군관
  • 신각‡ - 부원수
  • 신립† - 삼도 순변사
  • 심대 - 경기도 관찰사
  • 원균† - 전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제2대 삼도 수군 통제사,
  • 우치적 - 영등포 만호
  • 윤흥신† - 다대포 첨사
  • 이순신† - 제1대, 3대 삼도수군통제사이자, 전라 좌수사
  • 이억기† - 전라 우수사
  • 이영남† - 전 경상 우수군 권관이자, 가리포 첨사
  • 이운룡 - 경상 좌수사
  • 이일 - 평안도 병마 절도사이자, 삼도 순변사
  • 정기룡 -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 정발† - 부산진 첨사
  • 최경회† -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 황진† - 충청도 병마 절도사
  • 한극함‡ -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10.1.3. 의병장




10.1.4. 기타 조선 측 인물




10.1.5. 조선에 투항한 항왜



10.2. 명나라 측 주요 인물



10.3. 일본 측 주요 인물



10.4. 전투 전개 과정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 해전은 ★ 표시를 한다. 또한 전쟁의 흐름상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전투는 볼드 처리.

10.5. 기타 전투



10.6. 기타



11. 둘러보기




[1] 조선, 명나라, 일본의 요청으로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과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참전이 거론되긴 했으나 아유타야 왕국은 거리 때문에 무산되었고, 류큐 왕국은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적인 압박으로 참전하려고 했었지만 상국이었던 조선과의 조공, 무역 문제 등으로 전면 무산되었다. 또한 당시 국가는 아니었으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도 조선에게 참전의 뜻을 밝혔지만 조선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2] †표는 전사, ‡표는 처형 혹은 옥사, +표는 병사.[3]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4] 임진왜란의 정확한 사상자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치는 자료에 따라 조선 측 사상자는 10만에서 100만, 일본 측 사상자는 2만에서 20만 이상으로 차이가 크다. 일반적으로 한국 측 자료에서는 조선의 인명피해를 크게(과거 국사 교과서에서는 조선의 인명 피해를 100만명이라 서술했다) 일본 측 자료에서는 일본군 사상자를 낮게 잡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이해당사국이 아닌 Stephen Turnbull의 자료를 인용한다.[5] 민간인 포함[6] 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이때 왜군이 왜에서 약 아침 8시에 출정하여 부산에 약 오후 5시에 도착했다고 한다.[7]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8] 한국사만 봐도 임진왜란은 보통 대중들이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중대한 분수령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 사건이다. 왜는 도요토미 세력의 실각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으로 에도 막부 설립까지 이어지게 되고, 중국 - 왕조 교체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준다.[9] 우파에서도 민족주의자와 탈민족주의자가 있듯, 좌파에서도 민족주의자와 탈민족주의자들이 나뉘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현대의 이념이나 사상은 좌파, 우파 2가지로만 나누기엔 스펙트럼이 꽤나 넓다.[10] 명 - 청 교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정권이 멸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조선은 전쟁 최대 피해국이었던만큼 당연히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사건이다. 이후 대동법 개혁 등 사회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11] 면포는 전쟁의 경과에도 큰 영향을 줬는데, 조선 수군이 판옥선 같은 대형선을 주력으로 쓸 수 있었던 것도 에 필요한 양질의 면포가 자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시점까지 목화의 자체 재배에 계속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포의 대량 공급이 어려웠고 좀더 작은 돛으로도 추진 가능한 한 체급 낮은 세키부네가 주력선이 된다.[12] 지금의 오사카 성은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의 진) 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한 것이 여러 이유로 또 다시 소실되었다가, 20세기에 도요토미 시대와 도쿠가와 시기의 모습을 섞어 개건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오사카 성 건물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13]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 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비웃었다거나, 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덕분에 이 이야기들은 전쟁 이전에 조선이 평화에 젖어 있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고 까는 근거로 잘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는 조선 교섭 임무를 실패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14] 이 사람의 고조부가 그 유명한 황희다. 황희의 장남 황치신의 증손이다.[15]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형이다.[16] 황윤길은 당시 당파로 서인이지만, 김성일과 허성은 동인으로 같은 당파였다.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는 것이 비록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비롯되었지만, 송강 정철세자건저문제로 실각하면서 그에 대한 처벌 강도를 두고 나눠진 것이며, 보다 본격적으로 분화되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시에 재상으로 활동한 서애 류성룡에 대한 비난을 남명 조식 학파가 하면서 본격화 된 것이였다. 학봉 김성일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류성룡과는 사제지간이기에 이후 남인으로 분류되며, 허균의 형인 허성은 퇴계의 학파<嶺南(左道)學派>가 아니고, 동인 내에서 두루 교류한 아버지와 북인(특히 대북)에 속하는 동생의 영향으로 북인으로 파악하는 듯하다.[17] 간토 및 도호쿠 지역.[18] 이 때가 바로 오다와라성을 공격하던 시기였다.[19]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20] 합하(閤下)는 전하보다 낮은 경칭으로 재상급 인사에게 붙이는 것이다. 이런 경칭들은 기본적으로 본인보다 격이 낮거나, 아랫사람에게 붙이는 경우는 없으나, 경칭의 격을 낮추면서, 조선 국왕을 은근히 모욕한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21] 1590년. 당시 일본의 연호[22]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23] 김성일이 아니었으면 홍의장군 곽재우는 지리산 은거기인이 되거나 역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또한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숨어 있던 김시민을 격려하여 병사한 이경의 뒤를 잇게 하고 진주성의 방어를 준비한 것은 진주대첩의 토대가 된다. 일본군의 침입 주요루트였던 경상도 전장을 동분서주하며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중앙군과의 대립을 중재하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신경썼던 실무형 인물이 바로 김성일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참조[24] 그러나 조선이 생각한 침공의 규모와 도요토미가 생각한 침공의 규모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였고, 200여년간 전국적인 동원이 필요한 큰 전란이 없었던 조선의 준비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일본의 침공을 막기에는 부족한 정도였다. 당시 시간대를 기준으로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에서 한손가락에 꼽힐 정도기도 했다.[25] 이에 대해 류성룡은 전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입을 막지 못했는데 한 줄기 강물을 가지고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하였다.[26] 정읍 현감이었다.[27] 이런 하루만에 이루어진 미친듯한 진급 속도는 1년 전에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하려 하자 진급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반발했던 사간원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현대 군으로 치자면 대대장 정도가 맡아본 가장 높은 지위인 군인을 하루 아침에 사단장에 앉혀논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군필이라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무리한 인사인지 단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동아시아에서 전근대시기에 官職은 해당 인물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官品과 실제로 담당 업무를 볼 수 있는 職責으로 나눠서 생각해봐야한다. 즉, 品階와 職責이 동일하지 않고, 한쪽이 낮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정3품의 堂上官직은 업무 일수에 따라서 오를 수 있는 堂下官직과 다르게 왕의 임명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품계는 1년전에 종3품직 수행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고, 5품 이상은 왕의 선발로 당상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28] 관리, 공신의 자손, 성균관 학생, 천민, 노비, 장애인 등은 제외[29] 장정 1인의 연간 군포 2 필은 쌀 12 말에 해당하며,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달하는 무거운 것이었다. 당연히 재물이 끼게 되니 부정부패가 없을 수 없고, 이것이 조선 사회에 큰 문제가 되지만 이 문서는 임진왜란에 관한 문서이므로 생략.[30] 한국인구학회가 2006년 발간한 인구대사전에 따르면 1680년에 들어서야 1592년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31] 당시 고고학 유골 조사에 따르면 당시 성인 남성 조선인 평균 신장은 164cm였고 일본인은 155cm로 10cm 차이가 났다.[32] 숙종 때 2필로 감면.[33] 오위 중 의흥위에 소속[34] 실제로 유자광이 갑사 출신으로 병조판서 및 숭정대부의 자리까지 올랐다. 다만 유자광은 세조가 밀어준 덕이지만, 별시 문과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에 이 성적을 바탕으로 출세한 것이다. 일반 갑사들은 경국대전에 의해 종4품까지가 승진한계였고, 금군은 정3품 당하관까지가 승진한계로 당상관 이상 출세하려면 역시 과거 급제자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갑사 중에 무과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이징옥이 갑사 재직중에 무과에 급제하고 종1품 숭정대부까지 승진한 경우였다. 물론, 조선사회에서 종4품이라도 상당히 출세한 것이니, 갑사가 결코 나쁜 대우를 받은건 아니었다.[35] 금군은 편제상 오위와는 별개의 조직이나, 직업군인이라는 점에서 여기에 포함해 서술. 정확히는 오위 병사들 중에서 무예와 용모가 뛰어난 자들을 특별히 선발해 내금위와 겸사복으로 편성했다. 우림위는 오위 병사 중 서얼인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 임명한 직책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서얼에 대한 보상적 취지도 있었다. 품계상 내금위나 겸사복보다는 아래였지만 일반 갑사보다는 위였다.[36] 초기에는 경제적인 여력이 되는 양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규모가 증대해 일반 양인들도 들어오게 된다. 오위 중 좌위인 용양위에 소속되었다. [37] 중종대에 창설되어 광해군 대에 폐지. 한량들이 금군으로 근무하려면 정로위 근무경험이 필수였다.[38] 평안도 병력만 한자리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건 이곳이 바로 선조와 조선 조정이 피난가 있던 의주가 있는 곳이라 병력 현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이다.[39] 1475년(성종 6년) 총군병 14만 8849명 중 수군이 4만 8800명, 만기요람(1808)에 의하면 총 수군 장졸수가 36,804명이었다. 전쟁 때도 3~4만 정도의 수군을 유지했을 것이다.[40] 군사 평론가 신재호의 글 참조.#[41] 가운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쪽으로 조선 침공에 참여한 각 지방 영주들이다.[42] 당시 난부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의 후계 자리를 놓고 양자인 난부 노부나오와 사위인 코노헤 마사자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명 코노헤의 난[43]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다테 마사무네는 이후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반란 혐의를 샀는데도 이 공적 덕분에 생명을 보전했다. 죄질 자체는 사형이나 개역에 쳐해질만한 사안이었지만, 히데요시는 임란 참전 공로를 인정하여 목숨을 면하게 했다. 다만 그 대신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44] 혼슈의 대도시 나고야와는 다른, 사가현의 나고야다. 규슈섬 북단으로 후쿠오카에 가깝다.[45]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 진주 박물관, 장원철 - 오만 역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46]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47] 고바야카와 다가카케가 1597년 사망하고 5대로가 되었다.[48] 가모 히데아키의 아버지다.[49] 도쿠가와 직할령은 말 그대로 직할령 400만 석,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의 300만 석으로 총 700만 석이었으나 그 밑의 다이묘들은 끽해야 초슈, 사쓰마, 마에다, 다테 가문 정도를 제하면 몇 십만 석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50]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4만 석 가량에 더해 광산, 무역 수입을 얻었다. 5대로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능가하는 260만 석을 웃도는 석고를 보유했으며 특히 그 둘의 격차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보다 컸다. 또한 5대로를 포함해 어지간한 메이저 다이묘들은 100만 석 이상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51]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카다케 전투로 처음 영지가 주어질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 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52] 참고로 다른 오대로의 경우 우키타 히데이에(57만석)는 총사령관 겸 8군 대장, 우에스기 카게카츠(120만 석)는 잠깐 참여함, 도쿠가와 이에야스(256만석)와 마에다 토시이에(100만석)는 참전하지 않았다.[53] 마쓰라 노부자네(松浦信實)가 다스리던 곳이다.[54] 조선왕조실록에는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도 쓰이지만 평수가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조선이 '비전 재상'이라는 별명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우시(羽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씨인 하시바(羽柴)를 의미하며, 1587년 우키타 히데이에가 하시바 성씨를 하사받은 것을 의미한다.[55]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56]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 이키에 동생인 마쓰라 노부자네를 보내 다스리게 한 사람이다.[57] '선봉(先鋒) 소서행장(小西行長)·대총병(大摠兵)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부총병(副摠兵) 삼성(三盛)'(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임술 8번째 기사)[58] 조선에선 이를 거추, 즉 대추장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조선이랑 교류했던 대표적 거추는 오우치 씨지만 이 당시엔 이미 몰락했다.[59] 해동제국기의 목차 중 일본국기(日本國紀)에서 천황대서(天皇代序), 국왕대서(國王代序)로 천황과 일본국왕(쇼군)을 분명히 따로 기록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에서 일본에 관해 궁금할때마다 찾아보는 기본 자료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러번 언급된다.[60] 거제도랑 울릉도를 봉토로 받은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 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여기에 쓰시마 도미 중 조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56명, 쓰시마에 살던 조선인 5명을 통역으로 종군 시켰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만~5만을 겨우 웃돈다. 소 대신 무네라고도 읽는다. 그래서 무네 요시토모라고도 한다.[61]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62] 당시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않던(앙숙 수준이였다.) 가토를 2군으로 보냄으로써 서로 경쟁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63] 일종의 후방 예비대, 보급대 성격이 강했다.[64] 명목상의 총사령관.[6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로 원래 하시바 히데카쓰로 불렸으나 1586년부터 하시바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성씨를 쓰면서 이를 따라 도요토미 히데카쓰로 개명. 거제도에서 병사했다.[66] 근데 이 전투 이후, 미츠나리의 군사적 재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행주대첩 참조.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명백히 보여준다.[67] 히데요시에 의해 군 전체를 감독하고 비상시에 의견을 조율, 보고하는 직을 맡음.[68] 조선 조정이 전쟁의 발발을 알게 된 것은 꽤 늦은 4월 17일이었다. 봉수가 작동하지 않아 장계로서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69] 원균이 이순신에게 보낸 공문에선 박홍과 이각은 한차례 동래성 북쪽으로 접근했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안방준의 묵재일기에선 제승방략에서 감사와 병사는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밖에서 호응한다고 언급했다. 박동량의 기재사초에 박진과 이각이 소산역에서 전투 방식을 놓고 의견을 조율한 대목이 나오는걸 보면 적어도 이때까진 이각에게 싸울 의지가 있긴 했던 모양.[70] 이 400척을 일본군의 전력으로 판단해 일본군 규모를 1만 가량으로 추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71]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 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였다.[72] 탄금대 vs 조령 논쟁은 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73] 또한 조총이란 물건은 현대인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것처럼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들고 싸우던 주력 무기가 아니였다. 주력 무기는 어디까지나 창이었고, 당시 조총의 보급률은 20%도 채 못 미쳤으며 결국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백병전이었다. 100년간 전국 시대를 겪어 사무라이부터 하급 잡졸들까지 실전으로 단련된 일본군과는 달리 200여년간 태평성대를 만끽한 조선군의 역량차는 상당했을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조선은 백병전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긴 평화로 인해 실전성보단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환도나 창이 점점 짧아졌기 때문에 전투에서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환도는 전쟁 중 점점 다시 길어지거나 아예 왜검을 노획 / 수입해 사용하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짧아진다.[74] 일본으로서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전국시대의 전쟁에서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그 영지에 대한 권한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편 끝까지 저항하거나 자결한 경우는 그 영주의 친척들이 영지에 대한 권한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든 세력을 모아 영지를 점령한 영주에게 맞서는 것은 정당한 일로 받아들여졌다.[75]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래 '임진왜란의 이해'에 기술.[76] 취미삼아 백성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으로 껍데기는 왕자인데 내용물은 김길태이니 누가 좋아하겠나.[77] 여러 번 양위 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 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78] 누구 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79] 재미있는 것은 6월쯤에 선조가 요동망명을 이야기했을 때의 신하들의 반응은 예의를 갖추어 달래는 느낌이었다면, 가면 갈수록 표현의 수위가 쎄진다. 6월 13일 기사에서는 요동으로 가려고 해도 중국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정도였다면, 8월에는 요동을 건너면 필부가 된다고 다시말해, 너 왕 아님을 시전한 것이다.[80] 이 당시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질린 함경도의 조선인들도 일본 편이 되어서 함께 침공했다고 한다.[81] 소 요시토시 입장에선 조선과 일본의 협력이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일부러 누그러뜨려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그는 전쟁 반대를 주장해 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기도 했다.[82] 더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조선까지의 거리 때문에 식량 운반의 문제도 있고 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강화 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일본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셈.[83] 게다가 명군이 평양성 문을 뚫을 때 사용했다는 병기가 다름아닌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대포였다.[84] 명군의 포격에 대해 실록이나 징비록등의 조선측의 사료에서도 산악이 흔들린다거나 하늘이 무너진다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극찬을 하는 장면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85] 전란 발발 직후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가 버린 시점에서 애초 일본군의 계획은 처음과 달리 어긋나기 시작한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은 물론, 예상치못했던 의병과 수군의 활약으로 후방마저 안전치 못한 상항에서 명군의 참전과 한반도의 무서운 추위까지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86] 사실 그 이전부터 숫적으로 몇 만은 족히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는 굳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전투 의욕을 보인 시점은 정유재란 초기 때다.[87] 소빙기가 시작하여 거의 경신 대기근에 준하는 기근이었다.[88] 전란을 거치며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민심은 선조가 아니라 전쟁 영웅들로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자국 장수가 아닌 명군을 드높이면서 이러한 명군을 불러온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자국 장수들의 업적을 폄하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실제로 실록에는 선조가 자국 장수들이 세운 공은 명군을 따라 다니며 얻은 것으로 작은 공밖에 세우지 못했다며 폄하하는 부분이 있다.[89] 말했듯이 명군의 행패는 어디까지나 병사 개인의 일탈이었지 명나라 군대 지휘부의 의도가 아니었다. 경략 송응창은 조선에서 명나라 병사들의 대민약탈을 항의했을때 사과했고 군대와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군령삼십조(軍令三十條)를 하달하여 군기를 확립시켜 조선의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군령 삼십조'에는 조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명하는 조항이 3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과 장졸들은 조선의 지방을 지나며 개와 닭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도록 하여 조금도 범하지 말 것, 감히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5조), '조선 부녀자를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6조), '조선의 강산은 곧 황상의 강산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황상의 백성이니 함부로 조선의 남녀를 죽이거나, 투항한 자나 부역한 자를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20조)[90] 명군도 멀쩡한 조선인을 일본군 앞잡이로 오해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살해한 사례는 있으나, 행정 구역 단위로 의도적인 학살을 한 적은 없다. 단,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는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긴했다. 하지만 이 남원 전투에서 명군은 부총병관 양원 휘하의 병사 50여 명 만이 탈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을 뿐이고, 3000명 이상의 명나라 군대는 남원성에서 조선 군민들과 함께 남아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전원 전사했다.[91] 일본 수군의 본질적인 한계와 이순신 덕분에 일본군은 본국에서의 보급과 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조선인들을 꽤 많이 징발하는데 성공하여 막강한 방어 능력을 갖춘 요새까지 건설할 정도였다. [92]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무쌍을 찍으면서 이기는 게 확실시 되었다. 물론 마지막에 물러날 때까지도 상당한 승산이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측면(여담으로 일본 위키만 참조해도 제삼자인 여진족들도 일본군이 걍 이기고 말 것으로 나오나 막상 당시 판단은 그 별것도 아닌 오랑캐들 때문에 중국 침공은 무리라는 식이었다.)이 있어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명군하고 조선군의 양측 기록에서도 일본군이 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신뢰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93] 사실 그럴수밖에 없다. 자기 나라 놔두고 천리만리 떨어진 남의 나라에 목숨 바쳐 싸우라면 누가 좋아하겠는가.[94] 여진족의 경우 농경문화 영향을 많이 받은 건주여진이 아닌 완전한 유목민에 가까운 북만주의 해서여진 및 시베리아연해주에 걸쳐 살던 야인여진이었다.[95] 거란의 직접적인 후손 민족으로 금나라 멸망 후 거란족이 일으킨 대요수국 반란이 원나라에 의해 진압당한 후 거란과 여진이 서로 섞이면서 일부는 퉁구스에 동화되어 해서여진이 되고, 일부 거란의 정체성을 지키며 몽골이나 여진의 일부가 되지 않은 자들은 다우르가 되었다. 다우르어는 몽골어와 비슷하지만 꽤 다르다.[96] 칭기즈 칸의 정통 원나라 황통인 보르지기트 씨족들로 청 건국 후 만주족과 일체화, 청의 외척이 된다. '''대칸'''을 칭한 청 황제들의 피의 절반은 보르지기트 씨족으로 원나라 황통을 어쨌든 이은 셈. 물론 방계라서 칭기즈 칸 적자는 아니다. 이들은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다.[97] 남몽골이라는 뜻의 몽골어로 현재 내몽골 남부지역과 산시 성에 걸쳐 살던 몽골 부족이고 지금도 그 쪽에 살고 있다.[98] 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장자커우를 몽골인들은 지금도 칼간이라 부른다.[99] 포르투갈인들은 조총을 주로 소개했고, 불랑기포는 몇 문이 일본에 들어왔으나 일본인들은 대규모 회전이 공성전보다 많은지라 무겁기만 한 공성병기 화포에 매력을 못 느끼고 조총만 주로 보급했으며 화포 역할은 대구경 조총인 대조총에 맡겨 사실상 일본에는 화포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봐도 된다. 그 결과 임란 때 일본군은 조총을 쏠려는 순간 화포가 쏟아져 가루가 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바다의 이순신 함대는 승자총통은 물론 조총을 모방한 정철총통, 그리고 화포를 적극 사용해 사거리가 후달리고 화력이 약한 조총은 화포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었다. 여기에 조선 수군은 천자총통에서 발사하는 로켓 무기인 '''대장군전'''이라는 중세식 '''대함 미사일'''까지 운영해 일본군 선박 대부분은 가루가 되었다. 육지에서도 명나라 북병 일부가 불랑기포 몇 문을 끌고 와 평양성 전투에서 조총병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화포에 매력을 느낀 일본은 조선인 대장장이들을 일본으로 잡아가 화포를 만들어 보급하게 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연간에 잘 써먹는다.[100] 불랑기포 몇 문을 끌고 와서 평양성 전투에서 조총병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벽제관 전투에선 탄약이 떨어졌다(...)며 만구다이로 불리는 몽골 궁기병들만 끌고 가서 역습에 발린다.[101] 전술했듯 포르투갈인들이 상륙 시 불랑기포를 소개했으나 회전 위주인 일본에서는 공성병기인 화포에 별 가치를 못 느껴 보급되지 않았다.[102] 사소한 일로 매질하는 건 기본이고, 유능한 항왜인 여여문은 아무리 가해자가 심신 상실에 가까운 상태였다지만, 명군의 행동에 항의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103] 심지어 진린의 경우에는 자기 비위 거슬리게 했다고 조선 관리를 묶어서 선조 앞에서 개처럼 끌고다니는 행패를 부렸다. 이거 보고 기가 막힌 류성룡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104] 특히 명나라 내부에서도 병사들이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려 명나라 백성들도 자국의 병사들을 적군만큼 무서워했을 정도였다.[105] 조선 땅을 점거하고 깽판을 부리면서 후금을 토벌하는 제 역할을 게을리하고 건방지게 황제까지 칭하는 지방 군벌, 반역자로 전락해 버렸다.[106] 사실 전근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정교한 보급 체계가 없어 어느 정도는 현지 조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107] 출처 : 「쾌락의 혼돈」, 티머시 브룩 저,「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오금성 저[108] 이는 명나라 영향도 상당히 있다. 명나라는 주변국들에게서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스페인(필리핀을 통해 접촉)과 일본처럼 막대한 은을 산출하는 나라가 아니라면 은본위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 후기 화폐 경제 때도 은이 아닌 다른 것을 화폐로 삼은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109] 조선 북방에서 사용한 조운선인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크기는 컸지만, 조선 북부 지역에서 걷은 세곡은 모두 함흥 별궁까지만 갔고 한양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당연히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 해상 운송의 수준이 그만큼 떨어질 수 밖에 없다.[110] 출처 : 「다시 보는 임진전쟁사」, etc.[111] 명군 참장 낙성지 등이 은광 개발을 건의했으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은 금은을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데 국가 부담이 매우 커서 세종 때 완화되기 전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란 이후 명나라 사신들은 무지막지하게 조선의 귀금속을 뇌물로 긁어갔다. 호란 이후 청나라도 귀금속을 좀 요구했지만, 임란 이후 명나라가 긁어간 수준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112] 출처 :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교수 저[113] 당시 몽골이나 여진 등 유목민은 중국에 동화가 되어 있지 않아 언어가 달랐던 탓에 여진인과 한족에 대화에서는 몽골어 통역을 쓸 정도였다.[114] 살던 환경이 환경인지라 몽골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약탈에 포로 학살은 기본이었다. 명군에 소속된 몽골의 차하르부 및 투메드부 기마부대 역시 잔인해서 평양성을 탈환한 후 부상을 입어 저항을 못하는 일본군 포로들도 대거 학살하는가 하면 조선인 민간인들도 학살하고 민가를 불태우고 닥치는데로 약탈했다. 성 자체를 전리품으로 여긴 것이다. 여성들의 강간 피해도 심각했다.[115] 물론 그래도 당대에는 명이 더 많다는 평인지 '''왜놈은 얼레빗, 명나라는 참빗'''이라는 말도 있었다. 승려 게이넨의 기록에는 본토에서 건너온 노예 상인들이 부대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였으며 목을 밧줄로 이어 앞장 서게 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지팡이나 몽둥이로 매질해서 강제로 걷게 했는데 이들이 바로 지옥의 죄인을 처벌하는 악마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 있다.[116] 울산의 왜성 건설 과정을 보고는 이렇게 기록하기도 했다.“새벽 안개를 헤치고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큰 나무를 베고 밤하늘의 별이 총총할 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밤을 새워 돌을 쌓아 성을 축조하는 것은 백성은 어떻게 되든 안중에 없고 오로지 탐욕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괴롭고 싫은 표정의 눈초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죄업이라고 몰아붙여 심하게 질책하고, 목울 쇠사슬로 묶어 두들겨 패고, 달군 쇠로 몸을 지져댔다. 보기에 곤혹스러울 정도다.” [117] 경상도에서 벌어진 학살을 기록한 게이넨에 의하면 일본군도 몇몇은 돈을 받으면 살려주었다고 한다. [118]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이런 사람들에 대한 처벌 기록이 자주 나온다. [119] 자기 딸도 고니시에게 시집을 보냈다. 왜성 축성도 그가 권유한 일이라고. 실제로 그래서 명군과 조선군을 엿먹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나중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아들 박정경과 함께 명나라 장수 오도사에게 뇌물을 바치고 다른 아들인 박여경은 고니시에게 붙어서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며 협상을 했다고 한다. [120] 왜냐하면 의병은 만 명 단위 대부대는 거의 없었다.[121] 애석하게 승자총통이나 화창 등은 경군에게만 보급되었고, 반란을 우려해 지방군은 갖고 있지도 않거나 갖고 있어도 무기고에 쳐박아 두기만 했다. 그나마 해안선을 지키는 수군의 경우는 승자총통 및 화포가 제대로 보급되어 있었으나 사용법은 역시 몰랐다. 승자총통 자체가 조총에 비해 떨어지는 편인데다 제대로 사용법을 모르고 관리도 안된 상태라 고장나서 격발이 안되 그냥 버리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았다.[122] 명군의 화력은 일본은 물론이고 조선조차도 경이적으로 여길 정도여서 선조가 명군의 화기제도를 배울수 없냐고 닥달할 정도였다.[123] 다만 6월 15일은 전란 발발 2개월째이다. 조정은 몽진에 몽진을 거듭하고 일선 장수들의 패퇴후 도망이 다반사인 상황이라 전란 초기에는 제대로 된 싸움은 커녕 전력 유지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물론 수군은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으로 인해 상황이 달랐다.이순신은 일본의 전면침략을 미리 내다보고 수군에 보급된 승자총통, 화창, 화포 등 화기류 숙달을 수병들에게 훈련시켜 왔으며 신무기로 돌격용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원시적인 장갑인 철갑을 둘러 일본군의 조총 공격이 무용지물이 되게 한 뒤 충각전술로 적선을 들이받아 격침시켰고 심지어 전쟁 초기에 '''조총을 복제한 정철총통을 만들어 보급하는데까지 성공했다!!!'''. 더구나 조총을 잘 알고 있던 충무공은 절대 조총 유효사거리에 들어가지 말고 화포로 원거리 공격을 지시, 옥포해전과 한산도 대첩 등의 대승을 연전연승으로 거둔다. 그러나 육군의 경우 제대로 반격이 가능했던 것은 권율의 이치 전투가 있었던 7월경이다.[124] 2020년 제작된 임진왜란 관련 한 유튜브 영상(약 9분부터)에서도 잘못 알려진 설이 그대로 담겨졌다.[125] 대개 전국 시대의 무장들은 문맹이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한 고니시는 사전에 심유경과 짜고 사이쇼 조타이를 시켜 위조된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는 주장. 참고로 이 사람이 게임 임진록2에 일본 영웅으로 등장하는 그 '세이쇼오'다. 이 인간은 진구황후 전설에 푹 빠져 산 인간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을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사이쇼 조타이 문서 참조.[126] 국학자들이 주목하였던 것이 신도와 천황이었고 일본 전통사서들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내용이 임나일본부설의 바탕이 된 일본서기의 신공기이다.[127] 豊臣秀吉의 冊封問題와 壬亂期의 講和交涉, 임진 전쟁기 강화 교섭 연구,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연대기, 大君外交と東アジア, 한일 문화 교류 기금의 동아시아 세계와 文祿・慶長의 役, 文禄・慶長の役(壬辰倭乱), 임진왜란과 강화교섭-쓰시마번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임진왜란기 일ㆍ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사명당(松雲大師)ㆍ加藤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 기사[128] 김시민이 이미 전사한 줄을 모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은 꼭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런데 한 설에 의하면, 당시 진주 목사였던 서예원이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잡혀 죽자 다테 마사무네는 그 목을 베어다가 김시민의 목이라고 소개하며 히데요시에게 갖다줬다고 한다. 다만 다른 설에 의하면 서예원이 명장은 아니어도 최소한 비겁하진 않은 용맹한 장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진주성으로 부임하기 전에 몇차례 전공을 세웠다던가 2차 진주성 싸움에 앞서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해) 온 가족을 진주성으로 불렀단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데 이건 김천일의 후손과 서예원의 후손들이 서로 자기 조상 자랑하고 상대방 조상 욕하는 내용이라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이긴 하다. 좀 더 연구가 되어야 비교적 확실한 결론이 나올 듯하다.[129] 진주성 방어에 나선 병력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고 있다. 입성자와 전사자 관련 기록을 비교 대조해 보면 입성해 방어전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없는 부대가 전사자 수효에 다수 포함되고 막 그렇다.[130] 진주성 공격 시기의 일본 육군은 초기 병력의 40% 가까이를 상실해 약 10만여 명 정도 남긴 했는데 이때 참전 영주들 관련 기록을 보면 영지에 충원 병력 보내라고 막 닦달하고 있어서 총 규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131] 일본의 '회본태합기'에는 비가 올 때 귀갑차를 사용해 성에 접근해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고 있다.[132] 조선 시대 사료나 하멜 표류기들을 보면, 향토 방위는 승병들의 고유 의무였다. 추측건데 징병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남정네들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때 남자들이 믿고 마을을 맡기기에는 승병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마찬가지로 보부상들은 전시에는 척후병으로 징집되도록 되어 있었다.[133] 의병과 수군을 합치면 17만 5천이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력은 정규군이었다. 의병은 보조적 역할을 맡다가 결국 정규군에 편입되었는데, 병농 일치 징병제 국가인 조선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 조선 후기부터는 모병제였다. 조선까들 중엔 17만이 장부상 기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조선보다 인구도 딸리던 고구려도 주필산 전투 때 15만을 모았고 고려도 2차 여요 전쟁 때 30만을 모았는데 조선이 17만을 못 모았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선조 때는 아직 조선이 세도 정치 시기만큼의 막장이 아니었다.[134] 참고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훗날 권력을 잡고 조일국교 회복을 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것도 이에야스가 마냥 평화주의적인 성격이라 사과했다기보단(물론 임진왜란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긴 했다), 일단 현실적으로 내전으로 황폐해진 일본으로선 보복하니 마니하던 당시 조선과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전쟁광 비슷하게 깎아내림으로서 도쿠가와 가문의 위상을 올리려는 포석도 있었다. 사실 이 사과란 것도 이에야스 입장에선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을 왜 나한테..?''라고 할 수 있는 문제라, 결국 두 나라 사이에 낀 쓰시마번(대마도)이 국서를 위조함으로써 두 나라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줬는데 자세한건 기유약조 문서 참고.[135] 애초에 선조부터가 적에게 항복 혹은 휴전을 하자고 간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다만 명나라 사신과 황제가 그래도 협상은 해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은 것 뿐이다.[136] 당시 일본은 허수아비 덴노에 실권자 쇼군이란 막부 체제가 수백년 이어져오고 있었으니, 무식한 도요토미라면 진짜 조선의 정치 체계가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었을 확률도 아예 배제할 순 없다.[137]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북로남왜 중 북로인 몽골족의 추장이었다. 명나라와 화의를 맺는 과정에서 황녀를 시집보내지 않았었다.[138]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다이묘의 서열대로 초기 명단이 작성되지만 일본 측이 정정을 요청하여 수정 후 제출되었다.[139] 다이묘로 삼는다고 했다.[140] 이 일을 기록한 책이 '일본왕환일기'이다.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단의 접견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절들은 명나라 관리들에게 책봉장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141] 명나라에서 순의왕의 예를 따라 순화왕(順化王)으로 왕호를 정하려 했으나 전통적으로 일본의 지배자에게 책봉하던 일본국왕이 최종 결정되었다.[142] 아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던듯 싶다.[143] KBS 팩션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등체강된 조선 왕과 똑같이 친왕의 붉은 곤룡포익선관을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제론 이등체강되어 친왕 대우인 조선 왕과 다르게 삼등체강된 군왕의 대우로 책봉하고 관인이 내려졌다는 논문도 있다.[144] 토론[145] 종전 이후 1599년 2월,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의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을 위해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146] 정유년 음력 7월 15일[147] 앞서 조선 수군에게 해전에서 당한 연패로 인해 특히 수군 쪽 전력이 강화되었다. [148] 양호가 서울을 떠나자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선조가 가서 붙잡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건 피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양호는 서울을 무조건 지키겠다며 확실하게 약속하기도 하는 등 개판이다.[149] 당시 기록인 선조수정실록 등에서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다시 피난을 가려고 했다는 식으로 실려있는데, 후대의 기록인 연려실기술에서는 오히려 직산전투의 소식을 듣고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기뻐서 명나라 장수들한테 감사를 했다는 식으로 정반대의 기술이 적혀져 있다.[15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굳이 한양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한양 공격을 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151] 이 무렵, 시기상 10월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겨울이 머지 않았으므로, 보급 없이 계속 진격하다가는 그대로 고립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152] 엄밀히 말하자면 패한 건 아니다. 울산성 함락 및 전멸의 위기 직전에 일본의 구원군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전하긴 했어도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 구원군이 좀만 늦었으면 가토 기요마사 포함 울산성의 일본군이 모두 전멸했겠지만.[153] 실제 가토는 고니시의 집안이 과거 약장사 일을 했다는 이유로 고니시를 가리켜 걸핏하면 약장수라고 놀려댔고, 분노한 고니시가 칼을 뽑아들고 가토를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의 반목을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154] 실제로도 조선 측에서 적군 4~5만 정도는 끄덕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부분이 있으며, 정말로 개전 후 7개월도 지나기 전에 일본군 4만 명 이상이 증발했다. [155] 당시 니탕개는 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 변방을 침공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활약한 장수가 바로 탄금대의 신립으로 니탕개의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일조해 선조의 사돈이 되기까지 한다. 다만 선조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과는 별개로 실제 신립의 작전 수행능력에는 현재에도 의문점을 가진 이들이 많다.[156] 당시 순변사 이일이 이끌던 병력은 정예병이나 갑사가 아니라 급히 징집된 농민병들이다.[157] 압록강 4군에 주둔하던 정예 북방군[158] 다만 삼도근왕군의 대다수는 정병들 뿐 아니라 개전 이후 징집된 농민병들도 많았다.[159] 6진에 주둔하던 함경도 정예 병력이 해정창 전투에서 섬멸당한다. 하지만 이후 단천 던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생존한 병력은 끊임없이 항전하였다.[160] 다만 그렇다고 중국보다 화포가 더 발달했다고는 보기는 어렵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보는게 맞다. 화차비격진천뢰같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화기도 있었고 해전에서는 천자총통을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명나라군은 조선에는 없던 불랑기포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 물론 조선군도 명군이 불랑기포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전쟁이 끝나고는 대량으로 도입했다.[161] 그나마 동래 일대에서는 일본인들과의 교류로 구경 정도는 해봤을 수 있었다.[162] 그러나 조총 도래 이후 조선측의 교범이나 훈련 기록을 보면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멀게 잡고 있으며 조선군의 조총 운용은 화망 구성보다는 서구의 엽병 마냥 조준사격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163] 화차, 현자총통, 비격진천뢰등 조선의 화약무기로 역관광시키는 양상의 전투도 많이 나왔다.[164] 이 명령의 실행 여부에 대해서는 1607년 통신사행 당시 통신부사였던 경섬이 쓴 '해사록' 에 실려 있는데, 이전에도 몇 차례 구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일본 내부에서 조선이 총을 사는 것을 허락해도 될지 논의가 일자 덕천가강이 흔쾌히 허락했으므로 이번 사행에서도 많이 사들였다는 내용이다.[165] 이때문에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활이 상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요동 정벌을 추진하던 시기가 여름이었다.[166] 임진왜란 때 용병으로 따라간 낭인이 조선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 책은 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배경이다.[167] 일본의 고문체는 조선 / 중국의 문체와 한자의 배열이 다르고 일본식 구결(가나)이 섞이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이해가 굉장히 힘든데, 이익은 이 글을 한 자 한 자 다 따져 보면서 글자를 재배열해서 번역했다고 한다.[168] 일본 고미즈노오(後水尾) 덴노의 연호. 1615년 ~ 1624년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겐나'.[169] 겐나의 역, 즉 1615년의 오사카 공방전을 말한다.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킨 전투이다. 덧붙여 원화라는 연호는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에 변경된 연호인데, 일본에서 완전히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바꾼 연호다. 그래서 전국 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원화언무(元和偃武, 겐나엔부)'라는 말이 있다.[170]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일본지세변급 격조선론[171] 예수회 선교사제들의 일반적 인식은 다음을 근거로 한다.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혜경(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172] 전쟁 초기에는 현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조선을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 취급했지만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직면하면서 전략 목표가 이전보다는 현실적으로 수정되었다.[173] 나머지 두 궁은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 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174] 정확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비변사등록은 광해군 9년(1617)부터.[175] 전쟁 후 선정된 선무일등공신 3명은 모두 당시에 사망한 인물들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 권율은 전란 종료 후 1년이 지나 사망하며, 원균 역시 죽었다고 공표된 인물이다.[176] 세조가 뿌린 모순이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면서 심화된 조선은 16세기 말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도시 국가였던 스파르타의 국가 체제와 유사한 천인들의 수가 많았던 노비 국가였고 이 상황에서 개혁 의지를 내는 인사도 조광조와 이이 정도밖에 없었다. 이런 국가 체제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인구의 감소와 신분을 규정하던 노비 문서 등이 소실되면서 결과적으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된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농노 수가 감소하자 이후 농노에 대한 지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177] 당시의 주요 상인들은 자본의 몇 곱절에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고, 이것은 독점적 민간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조선이 원시적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는 식민 사관의 논지를 반박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178]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을 실록에 실었다.[179] 실제로 명나라는 이후 재조지은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사신들의 개인적인 뇌물 받기, 모문룡의 행패 등이 겹쳐 현대 한국에서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180] 특히 사르후 전투송산 전투에서 청군에 참패하여 청에 대한 예방 전쟁이 불가능해졌다.[181] 만력 3대정이라고 해서, 당시 명나라가 치렀던 3개의 큰 전쟁이 있었고, 명나라가 조선에만 군사를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182]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라고도 볼 수 있겠다.[183] 일본도 중앙 정부가 그나마 강력하던 헤이안시대 이전에는 육국사로 불리는 정사 역사서가 있지만 전국 시대 무렵에는 중앙 정부가 이미 무력해졌다.[184] 당시 막대한 생산량을 자랑하던 은광은 대영주들의 차지였고, 도자기 산업의 경우에는 임란 이후 조선인 도공들이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일천했다.[185] 소설가 오세영이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쓴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186] 다만, 현재는 '흥포(興浦)'라는 명나라 상인이 그림의 실제 모델 혹은 모티브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동양인과 조선인 노예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187] 오히려 전투는 물론이고 장수이름까지도 한국인이 더 잘 알 정도.[188]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 시점에서의 노량 해전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되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피로스의 승리로도 볼 수 있다. 다만 노량 해전 당시 일본군이 일본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의 정도가 피로스의 승리라고 보기에도 너무나도 컸음을 감안하면 그냥 일본의 정신승리에 가깝다.[189] 일본 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숫적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 그 외에도 한국사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히는 원균칠천량 해전도 임진왜란에서 벌어졌다.[190] 출처: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43~145쪽[191]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192] 대력강용하다고 평가받는 녀석이다. 그 류조지 타카노부의 차남으로 하스이케 성의 영주이자, 아버지의 명으로 에가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에가미 가문을 먹어치운 녀석이다. 심지어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후계자인 나베시마 카츠시게를 양자로까지 데리고 있었던 녀석인데.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 있었다[193]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인 녹둔도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고 백의종군 또한 함께 했다.[194] 조선왕조실록 선조 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195] 일본인들은 Tobacco를 담박괴’(淡泊塊)라 음차표기 했는데, 이게 한국에서 담바귀로, 그러다 담배로 정착되었다. 고추는 일본군이 생화학 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담배는 동래 인근에 많이 심었다.[196] 그런데 여기서도 다른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상기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추가 16세기 ~ 17세기부터에나 수입되었고, 그 짧은 기간동안 고추장은 물론이고 지역별로 가지각색인 지역 고유의 김치들이 불과 2세기, 3세기만에 생겨나 정착했다는 말이 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 시대 당시 기록에 고추를 일본(왜)에서 들어왔다고 왜초(성호사설), 왜자개(지봉유설) 등으로 부르는 것이 남아있고, 궁중 요리에서는 고종 재위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고추를 잘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결정적으로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 원산인 작물이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1492년 이전에는 구대륙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197] 당시 조선인의 평균 식사량이 명나라나 일본에 비해 월등히 높은 양이었다고 한다.[198] 물론 문자 그대로 어디까지나 대중적 인식이 그렇다는 거지 당시 통신 기술의 한계로 인한 신속한 요격이라든가 판옥선에 적재되는 화포에 쓰일 화약이나 포탄 적재량 같은 군사학적 접근으로 고려해보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는 있을지라도 속전속결로 전쟁이 종식될 리가 없다는 시각 역시 많다.[199] 다만, 류큐는 국력의 한계로 과연 충분한 군대를 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걸 제쳐두더라도 태국의 경우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웃국가이자 강대국인 버마의 대규모 침략이 여러차례 받아 수도 인근에서 왕이 직접 친정하여 대규모 회전을 벌였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때문의 전근대 시절 운송, 보급의 한계로나 당시 국난이었던 자국 형편에 대해 회의적인 지적이 부흥에 올라왔었다.[200] 영국의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도 이 말에 낚이기는 했지만 도리어 '3천년간 무패였어? 그럼 이번엔 깨질 때가 됐네.'라는 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자신감을 보였다. 진주만 공습 덕분에 참전에 회의적이던 미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201]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에 여럿 참전했으나 대부분 주장(主將)이 아니라서 세간에 덜 알려졌다. 주요전투에 참전할 때의 관직이 모두 다른지라 전부 표기. 1592년 전라도 수군 절도사로 한산도 대첩에 참가, 1593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행주대첩 참가, 1594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장문포 해전에 조력. 1598년 2차 울산성 전투 당시 부원수 겸 황해도 병마 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