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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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에 있는 영정
<colbgcolor=#94153e><colcolor=#fff> '''이름'''
원균(元均)
'''본관'''
원주(原州)
'''자'''
평중(平仲)
'''출생'''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조선 충청도 진위군 여방면 내리
(現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내리마을)
'''사망'''
1597년 8월 27일(?)[1] (음력 7월 15일) (57세)
조선 경상도 거제군 거제면 거제도
'''가족'''
부: 원준량[2]
동생: 원연[3], 원전[4]
아들: 원사웅
'''비고'''
사후 선무공신에 녹훈.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원문]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5]

1. 개요
2. 직위
3. 생애
3.1. 출생부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3.2. 임진왜란 발발 이후
3.3. 삼도 수군 통제사
3.3.1. 제 꾀에 제가 넘어가 곤장을 맞다
3.4.1. 생존설
3.5.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일지
4. 인간성
5. 추증 - 선무공신 1등
6.1. 원균 기념관
7. 기록에서
7.1.1. 1592년
7.1.2. 1593년
7.1.3. 1594년
7.1.4. 1595년
7.1.5. 1597년
7.2. 실록
7.3. 난중잡록
7.4. 달천몽유록[6]
8. 창작물에서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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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반 선조 시기 활동했던 무인.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 우수사를 역임했으며 이순신에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직했으나 칠천량 해전을 대패로 장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졸장. 이때 전사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후술되어 있듯 생존했을 수도 있다.
일본에 2번이나 바다를 열어주고 도망쳤고 스스로 박살낸 판옥선만 170~200여 척 정도인[7] 해전사에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 졸장이다. 이 기록들은 교차검증까지 가능하다.

2. 직위


'''증[8]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
'''(贈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
같은 선무공신 1등이라도 권율과 이순신의 경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와 숭록대부의 사이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은 좌찬성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국왕 선조에 의해 어거지로 선무공신 1등이 되었는데도 종1품에 머무른 점을 보면 조정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못했음을 단면적으로 드러낸다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간단하다. 선조는 올려주고 싶은데 이에 호응하는 신하가 1명도 없고 죄다 반대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임금이 하자는 거니까 마지 못해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추증만 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피땀 흘려 부강하게 키워 놓은[9] 조선 최정예 수군군함을 12척 남기고 모조리 침몰시키는 대패를 당하고 공적을 위해 인간 백정 행각[10]까지 저지른 주제에 부총리에 해당하는 좌찬성과 검찰총장기무사령관에 해당하는 판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니 분에 차고 넘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생애



3.1. 출생부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중종 35년(1540) 1월 5일, 충청도 진위군(現 경기도 평택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 집안 출신이자 경상도 병마 절도사를 역임했던 원준량.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를 거쳐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원균은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 덕분에 무과에서 부정으로 급제했다는 의혹이 있다. 명종실록 명종 19년(1564) 6월 21일자 기록에 따르면, 원준량이 자식을 부정입시케 하여 탄핵받았다. 이때 원균의 나이는 24살로 입시에 응할 나이이며, 원균의 바로 아랫 동생인 원연은 21살이나 문과 급제생이었고, 다른 두 동생들(원용, 원전)은 무과에 응시하기엔 지나치게 어렸을 것이므로, 이에 해당되는것은 원균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아버지 원준량도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 윤원형 같은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며 관직 생활을 하였는데, 정작 왜구의 침입 시에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선술했듯이 아들의 무과 응시에 부정도 의심되는 등 무능하고 부패한 무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는 등 썩은 인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원균이 이렇게 개차반이 된 것도 아버지의 못된 것들만 왕창 물려받아서 이렇게 된 셈이다.[11]
김탁환의 소설 불멸이나 불멸을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에 활약했다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록에 원균이 군공을 세운 기록은 없다.'''[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그의 승진 속도는 꽤 빨랐으며, 선조 12년(1579) 과거에 급제한 뒤[14] 12년 만에 경상 우수사에 올랐으므로 군공을 세웠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근거는 없고 그냥 추측이다.'''
원균 옹호론자들이 조산 만호 때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 부사로 특진했다고 말하는데, 승진기록만 보면 조산 만호에서 부령 부사로 특진했음은 기록에 있고[15], 시전부락 전투에 당시 종성 도호 부사(약칭 종성 부사·종3품)였던 원균이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하기는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순신과 달리 자세한 전공 기록은 역시 없다.''' 원균의 역량을 감안하면 여진족 토벌 전쟁에 참전만 했지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약이라고 해봐야 이순신 등 여진족 토벌 당시 다른 조선군 장수들의 활약에 묻어가는 식이었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권율과 함께 다름아닌 류성룡에게 천거를 받아서 경상우수사로 특진했다. 이순신이나 권율과는 달리 원균은 그 거대한 덩치를 보고 아마도 주먹싸움만큼은 잘하겠지 히는 기대심리로 천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똑같이 덩치가 좋아서 싸움실력이 좋으리라 싶어 발탁되었어도 조아킴 뮈라아일라우 전투에서 무쌍을 찍어서 다 죽어가던 나폴레옹을 구해낸 반면, 원균은 '''그냥 덩치만 커다란 병신'''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정치적 논리에 매몰된 티가 많아 이균에게도 한 소리듣던 유성롱이 그걸로 하는 것은 말 크기도 모르는 머저리라는 말이 된다.
이 전투에는 이순신 또한 원균과 같은 계급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16]

선조실록 선조 24년(1591) 2월 4일자 첫 번째 기사 #

선조 24년(1591)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런 자리에 앉기엔 성과가 형편없다'''고 대간이 탄핵하여 파직되었다.[17] 그러나 1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선조 25년(1592), 조선 최대의 수군 기지인 경상 우수영을 담당하는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니, 본인에게는 오히려 좋아진 셈이지만,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본인과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다.
전라좌수사 시절에 일 못한다고 탄핵받은 인사가 경상우수사로 임명된 걸 두고 논란이 있는데, 당시 무관들의 평균적인 수준을 이해해야 한다. 문관들에 비해 학문이 떨어지는 무관들이 평시에 불량한 행실, 행정 능력 미숙 등으로 탄핵받음은 무척 흔했다.[18] '''별시를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식년무과만 노려 급제한[19] 엘리트 무관이면서 행정능력도 정상급에 꼬박꼬박 독서하며 독후감 쓰고 시도 짓던 문관 수준의 식견과 교양을 갖춘 이순신은 당시 무관들 중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이순신이 본인대에 이르러 무업에 뛰어든 서생 집안이었기에 가능했다. 조정도 무관들에게 그런 쪽으로 별로 기대하지 않고 전시에 싸움 잘하고 용맹하길 요구했다.[20]
임진왜란 이전 조선 최고의 명장 취급을 받는 신립도 성격이 포악해서 부하들이 꺼린 정황이 보인다. 그나마 신립처럼 성격이 개판이라도 군공은 잘 쌓는 장군이라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군공도 못 세우는 주제에 인성까지 쓰레기인 이들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제법 많았는데, 그 중 대표 격 인물이 바로 조선의 이 '''원균'''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런 쓰레기 장수가 원균과 이 있었는데 다른 장수들이 어떻게든 싸우려고 한 흔적이 있음에도 저 두 사람만 독보적으로 병신이라서 전투만 발생했다 하면 도망치기 바빴다. 이일 역시 성격이 엄청나게 포악해서[21] 원균 이상으로 부하들에게 험악하게 굴었는데 녹둔도의 일로 인해서 이순신이경록을 죽이려고 발광을 했다가 선조에게 저지당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인사 행정이 왜란을 거친 당대에도 그들 스스로가 엉망진창이란 것을 인정했다. 명재상이란 작자가 자기도 관여해서 입다문 정황 느낄 수 있는 막장적 임명 과정을 없다고 오리발 내미니 말이다.

3.2. 임진왜란 발발 이후


임진왜란 초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연려실기술에는 그의 초기 행보에 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경상우수영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 후퇴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선을 보고 적인 줄 알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원균이 경상 우수영 병력을 모아서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적을 보고 후퇴한 경우 수송선인지 전투선인지 판단하기 힘들었을 테니, 이 부분까지는 까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700여 척이나 되는 일본 함선이 상륙한 부산포 앞바다에 한가롭게 고기잡고 있을 어부가 존재할 리는 만무하니, 원균이 적을 보고 후퇴했다는 쪽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짜 문제인건 이 다음부터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5월 10일 선전관 민종식이 전선 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원균이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6월 28일, 경상 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경상도 전선의 상황 보고에 따르면, 원균이 '''군영을 모두 불태우고 보유 판옥선을 전부 자침시킨 후''' 배 한 척 달랑 몰고 도망쳤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올린다. 이 때 자침시킨 수는 최소 70여 척.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수군 최강의 전력을 상실한다. 그것도 자침으로.''' 참고로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최대 전력은 칠천량 직전 130 ~ 180여 척이다. 최대 180여 척이라고 가정해도 25%에 가까운데, 군사학에서는 부대의 20%만 무너져도 부대 전멸로 평가하니, 과장 좀 보태면 조선 수군은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자살한 셈. 한산도 대첩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끌었던 전선이 56척임을 감안하면, 이때 자침시킨 전선의 숫자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욱 문제는 또 반복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사실 떼어먹고 '서류상 전선'으로 만들어놓은 바람에, 막상 실제로 동원을 할 수 없으니, 자침이라고 거짓말하지 않았느냔 의혹을 제기한다. 원균이 경상 우수사에 취임한 이후 전선 및 군수 물자의 상당수를 횡령했다는 이야기. 자침이건 횡령이건 양쪽 모두 괘씸하긴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경상도 관찰사인 김수가 경상 우수영에 대해 일제 점검을 행했는데 이 때는 문제가 없었으므로, 횡령설은 설득력이 없다. 김수가 날림으로 조사하고 가버린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는데, 김수는 임란 직전 도내 11곳의 성곽을 보수[22]하고 대구성 축성에는 유생까지 동원하는 등 지역 내에서 원성이 자자할 정도로 전쟁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백보 양보해도 경상 우수영보다 규모가 작은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이 24척을 보유했으니 최소한 30척은 동원 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동원할 배가 있었든 없었든, 자신이 횡령을 했든 안 했든, '''휘하 군대는 와해되게 방치하고 혼자 달아난 건 엄청난 병크다.'''
물론 도망친 것도 옹호해줄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약간은 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우리 수군은 약하고 육군은 강했다'라고 오판을 내리고 있었는데, 당시 조정이 "까라면 까" 수준이었으니, 원균 입장에서는 공연히 나가서 용감히 싸우다 깨져서 목 잘리는 것보다는 그냥 육지로 도망치는게 그나마 나았을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도망치며 군수 물자를 날려먹는 것 또한 적에게 넘겨주지 않을 목적으로 흔하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문제는 '''육지에 올라와서도 싸울 생각이 있었는지가 의문'''인 데다 '''조정엔 거짓 장계를 올렸다는 거'''다. 작전이라기보단 본인 보신에 가까운 행동이다.
개전 이틀만에 본영인 진포가 함락된 데다, 경상 좌수사 박홍이 적이 군세가 많음을 이유로 도주한 바람에, 경상좌수영은 와해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원균은 경상 좌수영을 구원하러 왔다가 적의 함선을 보고 후퇴하여 판옥선을 자침하고 군영을 불태운다. 그리고 육지로 달아나려 했으나, 부하인 이운룡의 만류[23]로 그만두고, 전라 좌수사인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후 전라 좌수사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일본군과 싸운다.[24]
옥포 해전 이후 조정에 공적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는 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게 된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자,[25][26] 조정은 1595년에 원균을 충청 병사로 발령을 냈다. 경상 우수사(정3품)에서 충청 병사(종2품)으로 발령이 났으니, 여하간에 승진이었다. 충청 병사 재임시에 상당산성을 다시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완공된 후에 가 내리는 바람에 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외에도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옹호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 병사로 다시 전출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요시라가 반간계로 조정과 이순신을 흔들고 있을 때 원균은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등청정이 수전에 약한지라 그냥 물러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선조비변사는 원균의 이 상소에 대해서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순신이 파직되는데 한 몫을 거들게 된다. 하지만 경상도의 주요 항구 및 포구 및 거점들이 일본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있는 데다가 일본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한 원균의 상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다. 물론 이순신이 전쟁 첫해 부산포로 한번 쳐들어가서 이긴 적은 있지만, 그 때는 왜군이 성을 쌓아 육상에서 해로를 감제하기 전이므로 같은 방식이 또 통할 수가 없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상륙하였음을 알고도 부산포로 출전했었다. 실록 1597년 2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2월 10일(이미 조정에서는 2월 6일에 체직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그 소식을 전달할 선전관이 도달하기 전이었음)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머물렀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 후 포로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돌아갔다.'''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졸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고, 육군 장수 김응서와 합동했다.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를 점령해야 부산포로 출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원균 본인마저 수륙병진으로 부산포 출정을 주장했으니, 위의 수군 단독으로의 부산포 출정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자주 비난하는 발언을 했는데, 정작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는 주제에[27]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 결국 여차저차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게 된다.

3.3.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았다. 이때 원균은 인척으로 전라도 보성군에 살던 안중홍을 찾아와,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징비록에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자마자 '''기수열외'''를 자초하는 장면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징비록(2007년, 이재호, 역사의아침, 291p)

이순신이 계급을 막론하고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이 작자는 기생 끼고 술판이나 벌이는 놀이터로 만들면서 아예 언로를 막아버렸다는 뜻이다. 참고로 징비록에서는 '''이 묘사 바로 직후에 칠천량 해전의 기록적인 패배에 대한 기사가 나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를 보면,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은 처가 원균과 친척이 되는 원주 원씨여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전라도 보성의 안중홍의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 때의 만남을 기록한 것이 있다.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28]

의 처[29]가 원씨의 친족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과 정[30]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정을 쓰게까지 해서야 될 말인가?"[31]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기사(記事) 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

여기서 안중홍은 원균을 만난 뒤 원균을 조괄이나 기겁에 비유하였다. 조괄은 지상담병[32]이나 조괄병법이라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고사성어까지 있을 정도로 입 전략에만 능하고 실전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저 책상에서 공부한 대로만 병법을 적용하다 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겁 또한 교만과 방심으로 전임인 악의가 다 이겨놓은 전투를 말아먹은 인물로 언급된다.
  • 은봉전서에 기록된 또다른 원균에 대한 평은 이렇다.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며 비웃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원균의 친척이고, 원균의 당파인 서인에 속해서''' 그나마 좋게 써 줬을 텐데도 이 모양이다. 더구나 안방준장인을묘왜변에서 활약한 정승복이다. 그런 사람에게 인척이란 작자가 이런 망언을 하니 더더욱 갑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아래는 칠천량 해전을 전후로 한 원균의 작전 결과이다.
  • 원균이 통제사가 된 직후 거제도에서 벌목하던 왜병 30여명을 잡은 공이 있었다. 숫적으로도 열세인 데다, 그 유명한 조선 수군이라 별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로 인해 선조는 통제사가 되자마자 공을 세웠다며 추켜 세워줬고,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원균이 그들을 달래서 돌려보낸 척 뒤에서 기습한 전투였다. 기습당한 왜병들은 죽기살기로 싸워 고성 현령 조응도의 판옥선을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평산 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 군수 안홍국이 죽었다. 나포된 고성 현령의 판옥선은 조선수군이 포위해 격파했는데 이게 밝혀진 후 조정의 반응은 그저 망연자실이다.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말하자면, 이는 옥포해전 이후 일본군 공격 때문에 판옥선이 점령당한 최초의 사건이다. 정조 때 편찬한 <충무공전서>에 안홍국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러자 후손들은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라면서 잘못된 기록으로 공이 묻혔으니 정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니까 이 때는 그나마 싸우다가 죽은 거라도 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죽었다는 건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라 후손 입장에서는 조상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의미다. 조선 후기 칠천량 해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단면이다.
  • 부산포 앞바다에서 시위하던 중에 일본 본토에서 오는 수송 선단과 마주쳤는데 이때 선전관 김식은 그들이 조선 수군을 유인하며 뿔뿔히 흩어졌다고 한다. 원균은 이를 추격했고, 이 과정에서 무려 배 12척이 해류에 떠내려 가버린다. 격군들이 해류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하게 추격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물마루를 넘었다고 하는데, 이건 조선 수군 전체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미친 듯이 추격했다는 말이 된다. 그나마 유인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쫓아가는 것은 바보짓인 데다가, 나중에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그냥 조선 수군을 보자 겁이 나 피해서 도망간 것이라고 한다. 즉, 그냥 도망가는 적들을 공을 세운답시고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지금의 항공모함과 같이 운용비나 생산비도 비싼 판옥선[33] 12척을 날려버렸다는 얘기이다.[34]
  • 이후 원균은 가덕도에서 경야하는데, 이번에도 물을 확보하러 간 병사들이 기습을 당한다. 이때 원균의 병력은 최소 130척이지만, 400명이나 되는 아군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 버려진 400명은 왜군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었다. 이순신이 겨우 62척으로 공성전을 벌인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사건이다.
물론 당시 일본군은 크게 증원된 상태였고, 조선 수군을 어떻게든 격멸해야 했기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맞서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보면 원균의 엉터리 지휘에 크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35]

3.3.1. 제 꾀에 제가 넘어가 곤장을 맞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난중잡록》'''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固城)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날 깊은 밤 왜선이 습격해오니 군이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랐다.

'''《징비록》'''

이러한 원균의 작태에 분노한 도원수 권율은, 직접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때려 버린다. 다만 여기에서 기록이 서로 엇갈리는데,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7월 11일'''에 권율이 원균을 곤양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치자, 그날 밤으로 원균이 부산으로 출진했다고 한다. 반면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가덕도에서 돌아온 원균을 고성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쳤고, 그날 밤으로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균이 곤장을 맞은 것은 칠천량 해전 직전인 '''7월 15일'''이 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징비록의 신뢰도는 난중잡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징비록은 칠천량 해전의 날짜부터 8월 7일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류성룡이 쓴 칠천량 해전의 정황이 피상적임을 보여준다.[36]
② 징비록을 일정부분 참고한 선조수정실록에도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은 출진하기 전으로 수정되어 있다.
③ 조선 함대는 15일에 칠천도로 이동해서 그날 밤 붕괴되었는데, 이 한나절 사이에 고성까지 가서 매를 맞고 왔다고 보기는 시간이 빠듯하다.
④ 권율이 11일 어간에 곤양에 있었다는 것은 난중일기를 통해 방증되지만,[37] 15일에 고성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이는, 지금에 비유하자면 해군참모총장이 장병들 보는 앞에서 합참의장에게 얼차려를 받은 격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원균에게는 참담한 일이었다. 여기에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KBS의 프로그램 <역사에의 초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그 프로그램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
이와 관련해 권율이 원균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억지로 밀어넣었고, 따라서 권율에게도 일정하게 칠천량 해전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이미 당대부터 제기되던 지적이다.

지난날 주사(수군)의 싸움은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수가 된 자로서는 힘을 헤아리고 시기를 보아서 대항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 상황을 치계하여 후회가 없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데 이러한 계획은 하지 않고 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마침내 6년 동안 경영하여 어렵게 마련한 주사를 단번에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많은 산책을 한 곳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적이 호남으로 들어가 군민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11월 4일

한산 싸움(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장을 보면, 안골포가 그 앞에 있어 금방 들어갈 형세가 못되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적을 몰아내게 한 다음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선조실록』 34년(1601) 1월 17일]

그러나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그 설득력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의외로 당시 조정의 작전개념은 함대를 나누어서 해상의 적 보급선을 교란하라는 뜻이었지, 죄다 이끌고 부산으로 몰려가 한큐에 건곤일척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곤장을 친 당사자인 권율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 선조조차도 당시 원균에게 그만큼의 기대는 걸고 있지 않았다.

도원수가 비밀 장계 한 통을 올렸다. (그 내용은 대강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가 고단한 것은 원균이 말한 바와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선조실록』 30년(1597) 5월 8일

가령 크게 싸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배를 3등분해서 절영도 앞바다를 번갈아 오가며 뒤따라온 배가 이어가고 앞에 있던 배가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주사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부산과 서생포에 상륙해 있는 왜적들은 모두 군량미 수송로가 끊길까 걱정할 것이고, 뒤를 이어 나오는 적선들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함부로 건너오지 못해서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의 형세는 선두와 후미가 단절되어 우리가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선조실록』 30년(1597) 5월 12일

신구(新舊)의 전선을 모두 합쳐 절반은 한산도 등에 머물러 있고 반은 운도 등처의 해양에 출몰하게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정박할 곳이 없기는 하지만 번갈아 교체하면서 끊임없이 왕래하면 형세상 반드시 피차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골포 등처에 왜적이 있지만 본진의 선박으로 배후를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이 있더라도 해양의 선박으로 즉시 처치케 할 수 있으므로……『선조실록』 30년(1597) 6월 1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6일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8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선조실록』 30년(1597) 7월 10일]

그러니까 곤장을 맞고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원균은 부하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홧김에''' 전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괜히 뻘짓만 하다가 영등포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로써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게 된 원균은, 칠천도에 도착한 날 저녁 술을 진탕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 격멸을 위해 전멸을 각오한 야습을 펼치게 된다.
한편 원균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반대로 '권율이 곤장만 치지 말고 명령을 어긴 죄로 원균을 죽여야 했다'라고 권율을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권율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원균의 전후 행적을 보면 죽어도 싼 건 사실이나, 적어도 당시 시점에선 권율은 원균을 죽일 수 없었다. 원균은 일개 병졸이 아니라 임금인 선조가 임명한 삼도수군통제사이다. 권율이 상급자인 도원수라고 해도 통제사인 원균을 죽이려면 그 죄목과 근거를 조정에게 보고해서 처형 허가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그렇지 않고 죽였다간 어명을 거역하고 부하를 죽인 죄를 물어서 권율 역시 후대의 원숭환 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보면 권율이 보고를 했다고 해도 선조가 원균의 처형을 허락했을 리가 만무하다. 즉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 것도 권율 입장에선 정말 많이 참은 것이다.

3.4. 칠천량 해전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시작되었다.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선봉에 섰던 김완은 이 상황을 저서 《해소실기》에 자세히 남겼다. 당시 사관의 표현대로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는''' 임진왜란 최초이자 최대의 해상전 참패가 시작된 것이다.
칠천도 앞바다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에게 일본군은 야습을[38] 시작했고, 김완은 이에 맞서 싸운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휘하 병력의 절반 가량이 무작정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습한 적은 '''단 두 척'''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조선 수군 주력이 있는 곳으로 후퇴했다고 하는데, 이때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金大福)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라서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 정도 여유가 있었던 것. '''당연히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해,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훗날 일본군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김완이 《용사일록(龍蛇日錄)》[39]에서 이 상황을 회고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40]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해소실기』 《용사일록》 출처

흔히 통념상으로는 이 야습 때 일본 수군의 주력 함대가 모조리 뛰쳐나오고, 이 기습으로 인해 조선 수군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그대로 궤멸하고, 배설이 이끄는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했다는게 칠천량 해전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당시 야습한 일본 수군은 토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수군이 도주했다고 확실해진 이후에야 우리가 잘 아는 '바다를 뒤덮은 적선 천 척'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고, 배설의 12척을 제외하고 그대로 소멸했으며, 원균도 함께 사라지며 행방불명된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다.[41]

《해소실기》 1권

어느 정도냐 하면, 조선 수군 160여 척 중 배설이 진작에 끌고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 전부 '증발'했다. 이는 칠천량 해전 최고의 의문으로, 지휘권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든 아니든 조선 수군은 견내량으로 후퇴해서 한산도로 이동함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우리가 잘 알듯이 고성 춘원포[42]로 후퇴해서, 거기서 배를 버리고 모두 도주해 버린다. 배설만이 홀로 후퇴하여 경상 우수군만 살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춘원포로 간 이유는 지휘관의 명령이었다는 말이 된다.'''
즉, 임진왜란 초기처럼 조선 수군은 원균의 명령으로 자살한 셈이 된다. 이 외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명량 해전 직후 수군의 재건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는 점을 들어, 침몰한 게 아니라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채 뿔뿔이 도망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 직후만 해도 조정에서는 전멸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는 서술에서 '단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는 서술까지 나오면서, 이 해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전사가 확인된 장수는 (뒤에 밝혀진) 이억기최호 둘이었고, (사실 처음엔 유일하게 죽었다고 알려진) 포로가 된 김완 이외에는[43] 전사가 확인된 장수가 없으며, 명량 대첩 이후에 하나둘씩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뒤에도 나오지만, 전사를 확인할 수 없는 목록에는 '''원균도 있다.'''
명량 대첩에서 배가 없는 장수들은 통제사 좌선에서 일개 사수로 참전했다는 것을 보아, 자신의 배를 타고 도망친 장수는 그대로 배에 타고 참전했다는 걸 알 수 있고, 여기에 전라 수영 휘하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배들이 견내량으로 후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와, 명량 대첩 이후 임치 첨사 홍견 등 판옥선을 끌고 합류한 장수, 조선 수군의 부활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제법 많은 배가 춘원포로 가지 않고 견내량으로 탈출했다고 볼 수 있다.[44]
'''다만 이쪽 설을 택해도 원균이 완벽하게 지휘에 실패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원균이 술에 취해 기생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기습 당해서 지휘권이 무너졌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정말 원균을 좋게 봐준 거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본 것이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가 춘원포에서 전사한 것은 원균의 명령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고, 설사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원균 단독으로라도 한산도로 돌아갔어야 했다. '''원균은 그야말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차라리 원균이 술에 취해서 지휘권이 무너졌거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너희들이 알아서 도망가라'라고 손을 놓아버렸다면 더 많은 배들이 한산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45], 그렇지 않더라도 춘원포에서 대다수가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 내내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가 점령된 것은 해전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균이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면 오히려 정상 참작이 된다. 이게 아니라면 원균은 '''제정신으로 자기 혼자서 도망치기 위해서,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끌고 가놓고 탈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나마, '''그나마''' 그를 옹호해줄 유일한 방법이 견내량 바로 서쪽에 막힌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견내량으로 착각해서 갔다가 육지에 막히자 패닉에 빠져 도주했다는 것.[46]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지휘가 무능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칠천량 해전이 사실상 정유재란이 시작된 원인이라는 걸 생각하면[47], 이 전투에서 그를 옹호해줄 방법은 없다. 디테일하게 보고 싶다면 김경진의 임진왜란 1권 ~ 3권 참조.
능력이 없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도 전시에 공을 탐하면 나라가 멸망해도 이상할 게 없다. '''무능한 병사는 혼자 죽지만 무능한 지휘관은 패배, 나아가 국가를 절단내는 법이다.''' 원균이 정말 괘씸한 이유는 또 따로 있다. 바로 '''배를 버린 것'''이다. 싸우다 패했으면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되는데, 원균은 적이 몰려왔다고 배를 내팽개치고 육지로 도주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조정과 권율이 출전을 거부한 원균에게 출전을 강압했기에 원균만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 자신이 부산포 진격 떡밥을 흘리며 이순신의 경질과 자신의 부임에 큰 역할을 했으니 이는 자업자득이다. 장비와 훈련도는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며 아군인 무적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적인 왜군의 사기는 장졸을 막론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할 정도에 조선 수군은 그동안 배 한 척 부서지지 않고 일본군을 쥐잡듯 했으니 나름 충무공과 비슷한 급의 수군 장수로서 '함께' 왜군을 격멸한 원균이 패배하리라고, 그것도 적군은 아무 타격이 없고 아군은 수습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를 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무리 낙천적인 일본군이든, 아무리 염세적인 조선군이든 일본군의 승리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하다못해 백전 노장의 옛 이순신 휘하 장수들 의견만 현명하게 수렴했었다면 이런 참담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원균이 그토록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이순신처럼 잘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재주와 모함에도 뛰어났으며 휘하 장수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48]
2018년 6월 3일에 방송한 역사저널 그날 시즌2에서는 당시 판옥선이 파도가 높은 곳에서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갑작스런 기습을 당해 운항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원균도 정작 통제사 임명전과 달리 판옥선을 가지고는 전라도와 달리 외해로서 파도가 높은 부산 방면에서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고 출전을 주저하다 (선조를 통한) 권율의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출전 후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했다는 사실도 소개되었다.[49]
이처럼 방송에서는 마치 원균이 마치 부당한 명령에 억울하게 희생된 군인처럼 묘사하였으나, '''애당초 먼 바다까지 출정해 전투해야 한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 사람이 원균'''이다. 원균은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따라 출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괜히 트집을 잡아 그를 모함하고 헐뜯어서 마침내 통제사의 자리를 빼앗았으나, 정작 자신도 해당 작전을 따르려 하지 않다가 곤장을 쳐맞고 난 후에야 질질 짜며 억지로 출정했다가 조선 수군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 문제는 원균을 옹호하는데 들기에는 적절한 예시가 절대로 아니며, '''오히려 원균이 철저하게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도 없는 심히 부적격한 인물이었음을 재확인시켜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비합리적인 작전을 주장하며 군지휘권을 얻고, 결국 그 작전을 시행하다 참패한 전략적 무능은 물론 지형을 읽는 능력도, 정찰을 게을리 않는 꼼꼼함도,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까지 죄다 낙제 수준이었던 전술적 무능, 뛰어난 동료를 모함하고 뇌물과 아첨과 인맥으로 출세를 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격적 결함을 남김없이 보여준 사람은 바로 원균 본인이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이 부분을 통째로 건너뛰어 원균을 마치 희생양처럼 묘사한 것은 역사 왜곡이나 다름없다.[50]

3.4.1. 생존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징비록》

원균은 장렬하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미지수다. 일단 조선의 공식 입장은 원균은 칠천량 패전 이후 가덕도로 도주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출처: 선조수정실록 1597년 7월 1일 기사). 문제는 패전 직후부터 원균이 살아있다는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추측만 무성한 이순신 생존설, 자살설과는 달리 당시 책임자이던 권율이 목격자까지 확보해서 증언을 바탕으로 한 신빙성이 있는 증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원균의 행적에 대한 첫 보고는 칠천량에서 살아서 돌아온 선전관 김식이 올린 것이다. 1597년 선조는 선전관 김식이 올린 칠천량 패전 보고서를 받는다. 여기서 김식은 자신과 원균의 도주를 알리면서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라고 보고서를 올린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김식도 도망치는 상황에서 도주를 무마하기 위해 거짓 보고를 올렸을 가능성도 있고, 거기에 김식조차도 원균에게 왜군이 달려들었다니 죽지 않았겠느냐는 다시 말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죽었다'''고는 보고하지 않았다. 그외에도 이순신이 칠천량 패전 직후 곤양에서 경상우후 이의득과 경상 우수사 배설과의 대화에서도 원균이 도망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도망 후 전사했는지는 자신들도 모르는 상황이었다(출처: 난중일기 1597년 음력 7월 21일, 22일 일기)
선조는 이 보고 직후 벌인 회의부터 바로 원균이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다. 문제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도원수 권율의 보고서가 올라오는데 이순신의 복귀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여기에 원균의 패전 이후 행적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도)(蛇梁 - 통영 부근의 지명)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선조실록 1597년 7월 26일 기사

물론 오보의 가능성도 있고, 특히 임진왜란은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라, 전사했던 정발, 송상현을 두고 한양에서는 일본군에 항복해 일본 장수가 됐다는 오보가 올라올 만큼 오보가 잦았지만 원균 생존 보고는 다른 오보와 다른 것이, 최영길이라는 명백한 증인과 최영길 본인이 원균을 목격한 수준이 아니라 원균과 대면한 후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을 증언한 것이다. 권율의 보고 직후 조정에서는 당연히 원균이 살아있으니 찾아내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고, 처음에는 선조도 여기에 응해서 사실상 즉결 처분을 명령했다.(선조실록 1597년 8월 5일)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명량 해전으로 목숨 연장을 시켜주자, 다시 입 씻고 원균의 처벌 요구에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 대지 말라."는 개드립을 쳐가며 원균의 처벌을 반대했다.[51]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원균은 공식적 전사자로 대우받는다. 선조의 방기 결과인 듯하다.
선조는 위와 같은 원균 책임론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럴 만도 한 게 칠천량 패전의 1차적 책임자는 분명 원균이지만 '''이순신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대신에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해 그 판을 깔아준 건 선조다.''' 더욱이 실제로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에는 생각을 바꾸어 그냥 한산도에 주둔하려 한 원균을 끝끝내 떠밀어 공격에 나서게 한 이도 선조. 이래저래 최종 책임은 선조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그냥 원균이 전사했다고 취급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피해를 최소화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할 이를 논할 때에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음에도 신하들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할 것을 은연 중에 요구하자 결국엔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를 승인해야만 했을 정도로 선조의 정치적 입지는 많이 좁아진 상황이었다. 하물며 살아 있는 원균을 불러들여 진상을 파악했더라면 선조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선조의 방기로 인해 원균이 확실히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그저 공식적으로만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52] 김경진 등이 집필한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이러한 생존설에 따라 순천 부사 우치적이 평생 숨어 살도록 원균을 숨긴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53]
한편 일본 측이 기록한 사살 적장 목록이 원균 생존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데 일본군도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위해 죽인 적장의 기록은 빠짐 없이 했는데 그 어디서도 그 명단에 '''원균은 없다'''. 즉, 적어도 원균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해 수급이 입수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원균 정도면 갑옷으로 인해 구별하기 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 비록 원균의 이름은 몰랐어도[54], 갑옷 등 화려한 장비들로 봐서 충분히 고위급 지휘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것이고 원균의 신원을 확인해 줄 고위직 포로도 있었는데 말이다.[55] 물론 김완이 입 꾹 다물고 있었다면 몰라도 동료들 다 물속으로 처넣은 지휘관이 보기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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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사했든 안 했든, 원균은 시체조차 못 찾고 행적이 묘연해졌다. 원균 본인도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설령 살아서 도망쳤다 하더라도, 죽은 것처럼 위장해서 숨어 살았을 것이 뻔하다. 조선 수군을 거의 와해시켜 버린 것과 가까운 행동을 했으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알려지면 당연히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원균은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원균은 시신이 없어,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 가묘를 만들어 봉했다.(경기도 기념물 57호) 이후 평택시에서는 이런 무덤을 정비한답시고 4억 5천만원을 쏟아붓는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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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안정 국가 산업 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 주변 야산 20여m 지점에 완만하게 오른 자갈 흙더미가 하나 있는데, 지금은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변 마을 주민들 사이에 '엉규이(원균의 지역적 발음으로 추정) 무덤'[57] 또는 '목 없는 장군묘'로 불려 온 이 봉분은, 각종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원균의 묘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통영군사편찬위원회가 1985년 펴낸 '통영군사'와 통영문화원의 '통영향토사 연구 논문집' 그리고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에 선전관 김식이 기록한 원균의 마지막 행적을 고려할 때 봉분이 원균의 묘로 확실시된다는 게 향토 사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무덤이 공인되면 싸우다 죽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도망쳤음이 확실해지므로, 원균을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후손들이 애써 외면했기 때문에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그러다 봉분 주변을 지나는 국도 77호선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처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굴조사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

3.5.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일지


  • 1597년 (선조 30년) 원균이 세는나이로 58세인 해.
    • 2월 :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됨.
    • 3월 9일 : 거제도에서 일본군의 수급 47개를 취함. 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래 최초로 판옥선을 탈취당함.[58]
    • 6월 18일 : 100여 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동.
    • 6월 19일 : 안골포에서 일본 군함 2척을 포획, 가덕도에서도 군선 여러 척을 포획함. 전투 이후 회항하던 도중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역습을 받음. 평산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군수 안홍국은 머리에 탄환을 맞고 전사함. 또 판옥선 1척 탈취당함.
    • 7월 4일 ~ 7월 5일 : 출전한 것으로 추정.[59]
    • 7월 8일 : 소규모 전투에서 일본 수군 10여 척을 격파. 이후 일본 수송 함대와 조우했고, 도주하는 적 수송 함대를 추격함. 그러나 무리한 추격으로 격군[60]이 지쳐 해류에 12척이 떠내려가 5척은 두모포에,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함.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61]
    • 7월 9일 : 서생포에서 왜군과 교전한 끝에 판옥선 20여 척이 손실됨.
    • 7월 14일 : 조선 수군 함대 전체가 출동 부산 앞바다 물마루[62]을 지나가 가덕도에 정박. 이때 물을 구하러간 조선 수군 4백 명이 다카하시 나오쓰구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에 의해 전사함.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또다시 기습 당해 육지에서 돌아감.
    • 7월 15일 : 비바람이 몰아쳐 기상을 살펴보다 오후에 풍랑을 무릅쓰고 영등포에서 칠천량[63]으로 이동함. 밤 10시에 일본 수군에게 습격받아 전선 4척이 불에 탔음.
    • 7월 16일 : 새벽 4시,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포위를 완료하고 공격을 시작함. 조선 수군 거북선 3척 모두 침몰, 판옥선 중 50척 ~ 100척이 침몰당하거나 실종됨. 수군 수천여 명 전사.

4. 인간성


원균은 무능한 것 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의 민간인을 왜군으로 몰아 학살도 저질렀다'''는 잔혹 행위 의혹까지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 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정만록에 따르면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다만 이따위 거짓말을 했다면 조정에서 원균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리 군공을 조작하기 위해 거짓 전공을 보고하는 일이 난무했던 때라지만, 자국민 학살은 자칫하면 백성들이 "아오씨 우리 군사들도 우리 죽이네? 이딴 나라 필요없음" 하며 외면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 반면에 조정이 원균을 지극히 편애하여 정신나간 승진을 증명하듯 눈 감아준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측도 있는듯 하다. 허나 한국전쟁의 최덕신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학살극이나 나름 잘 나간 형 두어서 인간 말종짓 함에도 두둔된 백인엽을 생각하면, 전자는 후자의 견해보다 설득력이 하나도 없다.
더욱이 난중일기에는 그가 남해안의 섬에 배 두척을 보내어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찾는 것을 이순신이 저지하고 돌려보냈다는 기록[64]과 거짓으로 왜군 노릇한 자를 목을 베어 바친 것을 바로 잡은 장계를 올렸다는 기록[65]이 있다. 여기서 일부러 민간인을 왜적으로 둔갑시킨 것이 진실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나, 수급을 구걸했다는 은봉전서의 기록까지 볼 때, 여러 기록에서 그가 수급에 목매다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최소 무리하게 민간인 시신에서 목을 거두거나 섣부른 처형을 했다는 진술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서 많은 이들이 그가 잔혹한 성정을 가졌음을 의심하는데에는 충분하다.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난중잡록>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말#s-6 (10공기), 생선 5마리, 3마리, 4마리"를 먹는 대단한 '''대식가'''로, 전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몸이 뚱뚱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원균의 이런 못난 모습을 조롱했으며, 한 유생은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듣고 '원균이 나라를 버린 게 아니라, 원균의 배때기가 원균을 버렸다.'는 시를 지어 고인 드립을 치기도 했다.[66]
'최소한 배신하거나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부 원균 옹호론자들의 논거 중 하나이고, 원균을 마구 조롱하고 비난하는 당시의 여론을 공정하게 기록한 <난중잡록>에서도 주석에서는 '당시에 겁에 질려 임무를 저버리고 도망쳐버린 놈들이 하고 많은데, 무능했어도 최소한 싸우다 죽은 원균을 마구 비난하는 건 과도한 것이 아니냐' '원균을 선무 원훈에 책정한 것은 왕법의 공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시의 정권의 검열 하에서 선조의 관점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균은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 부하들에게 엉터리 작전으로 해전을 완전히 말아먹고는 자기 혼자, 그러니깐 자신의 가족들까지 전부 죽게 만들고 도망쳤다. 즉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은 완벽한 거짓이다. 즉, 민중을 맘대로 학살하고, 엉망인 작전으로 병력을 말아먹은 주제에 혼자서 탈영을 한 것이다.
다시 돌아와, 도망친 것은 제외하더라도, 원균은 무능하더라도 임무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기보다는, 자기가 판 무덤을 자기가 들어가게 되자, 궁지에 몰려서 자포자기하고 자살적인 행동을 한 것에 가깝다. 그것도 '''조선 수군의 전력을 저승길 동무 삼아서.''' 따라서 죽음으로 항전했다기보다 죽음으로 이적 행위를 하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린 것에 가까운 행동에 근거를 둔 원균에 대한 그런 옹호론은, 결코 올바른 주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끌고 갔더라도 중간에 질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그냥 니들은 알아서 살아남아라"라는 무책임해보이지만 '''그나마 그가 내놓을 수 있을만한 조치 중엔 가장 나을 조치'''라도 내렸다면, 수군이 그리 허망하게 궤멸되진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그토록 키운 수군의 반수는 침몰하고, 반수는 도망쳤다. 차라리 저 명령을 내렸다면, 각자 적어도 이탈해도 죄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원균'''만''' 무능했지 그 아래는 죄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해온 베테랑들이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균은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출격할 수 있는 상황인데 출격 명령을 거부했다'는 둥 이순신을 모함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찬동했으나, 막상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고 나니, 부산으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손바닥 뒤집듯 주장을 바꾸어[67] 이순신처럼 출격이 힘들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에 격노한 권율은,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며 두들겨 패고 전장으로 내몰았다.[68] 단, 원균이 한 짓은 매질은커녕, 죽어 마땅한 이적 행위이지만[69], 이런 처벌은 원균이 자포자기해서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닥돌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권율에게도 칠천량 패전에 대한 간접적 책임이 일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헛소리가 있다.
하지만 본인이 이순신을 그런 식으로 모함해놓고 자리를 꿰차니 갑자기 말을 쓱 바꿔버리는데, 수군 전략을 따지기 전에 권율이, 더 나아가 선조도 칠 만한 상황이다. 즉, 인과응보다.
설상가상으로, 이 인간은 칠전량 당시에 종사관으로 종군했던 '''친동생''' 원전(元㙉)[70]을 버려두고 도망갔다. 반대로 원전은 이억기, 최호 등과 남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5. 추증 - 선무공신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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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71]
의외로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선무공신이다. 원균이 선무공신에 제수되었음이 공을 증명한다는 시각도 있으나, 사실은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의 발로. 개그 같지만 개그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왕권 강화에 집착했던 선조는, 이순신의 위명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매우 꺼려, 이를 견제하고자 원균을 일등 공신으로 만든 것.[72]
더군다나 이몽학의 난을 당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버린 선조로서는,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계속 견제하고자 했다. 게다가 신립이 탄금대에서 드러눕고 한양까지 털려버리자 선조는 요동으로 도망가려고 한 반면, 광해군은 분조를 꾸려 조선을 누비고 다니며 전쟁을 독려하고 노력했다. 이미 백성들의 지지도 역시 '''선조 <<< 넘사벽 <<< 광해군'''인 상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선 '''이순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한 목소리로''' 원균에게 어찌 그런 영예를 주냐고 반대했지만, '''선조가 다 씹고 무리하게 공신으로 만들었다'''. 이는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잘 드러나는 내용이다.
그랬기에 원균은 전후 논공행상에서 2등에 제수되었으나, 원균에게 출정하라고 독촉하던 선조는 태도를 싹 바꿔, 칠천량의 패배를 도원수와 비변사의 독촉 때문인 것으로 몰며, '''자기의 생떼만으로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제수'''시켰다. 또한 이는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 자체를 공으로 만들어[73]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다.
종전 후 공신 책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선조는 명나라 덕분에 이겼지, 조선 장수들은 한 게 없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왕이 공로가 있다고 한 세 장수 중 하나가 원균인데, 공신 명단 자체에서 빼면 왕 체면이 뭐가 됐을까? 2등 공신에 올린 것조차도 선조 체면 세워주기용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원균이 공을 세운 게 된다. 바로 '''선조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킨''' 어처구니 없는 공로가 말이다. 그런 즉 '''전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선조 개인 영달을 위한 공로'''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원균의 선무공신은 의전상의 공로이지 실질적인 공로가 아닌 셈이다. 결국 선조는 자기 명예 떨어지는 걸 막으려고 원균을 공신으로 삼아준 것일 뿐이다. 절대 원균이 잘나서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으로 따지면 똑같이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어도, 이순신과 권율은 진짜 원수가 맞는데, 원균은 의장대 병력 하나 뽑아서 원수 정복을 입힌 것일 뿐이다. 선조가 노골적으로 도망쳐버렸는데 그걸 덮기 위해 똑같이 도망친 원균을 옹호하여, 원균에게는 임금님이랑 같은 행동을 한 것만 강조하고, 선조에게는 그런 원균과 같은 행동을 했으니 영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디밀어, 원균을 선무공신으로 삼아준 것이다. 선조의 논리가 워낙 횡설수설이라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튼 원균은 선조 본인과 같은 행동을 해서 킹왕짱이고, 선조 본인은 원균과 같은 행동을 해서 킹왕짱이라는, 계속적인 논리의 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 원균이 왜 훌륭해? - 선조 임금과 같은 행동을 해서.
  • 선조 임금이 왜 훌륭해? - 원균과 같은 행동을 해서.
  • 그럼 원균은 왜 훌륭해? - ......
이렇게 보면 원균은 엄청난 행운아인 셈이다. 자신이 망하려면 일단 선조가 반정을 먹어야만 하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님과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 덕분'''에 원균은 영웅 아닌 영웅이 되었고 그 어느 누구도 원균을 건드리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조선 왕조에서 원균 수준의 행운아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선무공신 제수는 선조 37년(1604년) 10월에 하사된 선무공신 교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로도 매우 정치적인 녹훈으로, 선무공신 1등공신인 이순신, 권율, 원균은 1604년 제수 당시 시점으로도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원균 1597년 전사, 이순신 1598년 전사, 권율 1599년 병사). 말 그대로 '''죽은 영웅은 있어도 살아있는 영웅은 없다'''. 다만 선조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해도 이순신이 세운 공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선무 1등 공신 3명 중 이순신은 원훈, 으뜸에 위치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편찬자들이 상당한 원균까였음을 알 수 있다.[74] 사실 '''선조 외에는 원균을 까는 사람밖에 없었다''' 쪽이 답이다. 그 후 실록을 보면,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다. 그 지역에 탐관오리가 넘쳐나 마치 원균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구, 왕이 잘못하면 원균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저쩌구 등등.

敎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孝忠仗義迪順協力宣武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元均書

자헌대부(정2품)·지중추부사(정2품) 원균을 효충장의적순협력선무공신·숭록대부(종1품)·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종1품) 원릉군으로 추증한다.[75]

내용은 "장군은 '''전사'''하였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공업(功業)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나, 훈상(勳賞)은 죽어도 가상하므로 선무공신 1등에 책훈(策勳)하고 3품계를 올려주며, 부모와 처자에게도 3품계를 올리고 노비 13구(口), 전지 150결(結), 은자(銀子) 10냥, 옷감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원균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그동안 세간에 많이 퍼져있고 위키백과 한국어판에까지 실렸던 '칠천량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설에 따르면, 핏덩이 손주를 당시 55세의 부인 윤씨가 길러 대를 간신히 이었다고 한다. 윤씨는 무려 96세까지 살아 홍주 땅에 묻혔으나, 가세가 몰락해 시신을 거둘 이가 없었다. 집의 노비가 말년의 인조에게 알려 간신히 매장하였다. 그러나 이 간신히 대를 이은 증손자가 송시열의 제자(박세채 등)들에게 새 행장을 부탁하자, 영문도 모르던 이들이 "중과부적"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행장을 지었다...라는 '''거짓 주장'''이 있다. 사실은 아들 원사웅은 칠천량에서 전사하지 않고 그 후에 계속 벼슬을 했으며 인조 때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살아남은 공신들의 종묘 사직 기도 연명문인 <17공신 회맹문>에 보면 '''선무공신 원균의 큰 아들이자 절충장군 전 지중추부사인 원사웅'''으로 기록에도 집안이 몰락하기는 커녕 분명히 고위직을 지낸 것으로 나와있다. 원사웅이 실제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게 확인된 이상 동정심을 얻기 위해 지어낸 가짜 뉴스일 것이다. 심지어 원주 원씨 족보에 기록된 걸 보면 원사웅은 자식까지 있다.
참고로 원균의 3살 아래 동생인 원연은 '''개차반인 형과 달리 선비로 살다가 전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파하고, 이후 현감이 되어 치적을 쌓았으며, 정유재란 때 다시 군사를 모아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올바른 사람'''이다. 원연의 아들 원사립도 서천군수로 있다가 왜군을 막아냈다. 내용. 이들 부자야말로 평택의 진정한 위인이라 할 만하지만, 평택에선 무슨 이유에선지 조선시대 역대급 개막장이자 자기네 지역의 수치나 마찬가지인 이딴 개같은 인간을 역사왜곡까지 일삼으면서 지역의 위인이라고 밀고 있으니...
사실 보면 원균이 사고를 안 치고 싸웠다면 그래도 선무 2등 정도는 받을 자격이 되었을 것이다.[76] 아무리 무능해도 이순신의 명령을 받고 출전해 전방에 나아가 적군을 쳐부수며 싸웠다면, 적어도 그 공은 원균 자신의 공이 되었을 테고, 후대에 '원균은 다른 건 무능했어도 싸울 때는 잘 싸웠다.'는 말이 나와도 헛소리로 치부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균의 집안도 대대로 대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77]
무릇 장수란 다른 걸 다 잘하고도 단 하나의 잘못으로 인해 그동안 쌓은 치적 모두가 무효화되고 역적으로 몰리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우금장료, 악진 등과 함께 위나라의 명장이라 할 만한 장수들이였지만, 관우와 싸워 패하고 잡혔을 때 관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중에 관우가 손권에게 토벌당한 이후 손권에게 명을 받아 위나라로 귀국했지만, 조비로부터 '관우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비웃음을 받다가 생을 마감했다.[78] 원균은 다른 걸 다 제껴두고서라도 칠천량 해전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금이 관우에게 패한 것조차 명함을 내밀지 못할 대패이며, 더군다나 살수대첩에서 수나라가 당한 패배 이상의 파급효과를 낸 게 칠천량 해전인데, '''원균의 잘못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부산진에서 왜 수군을 막으라고 배치해놨더니 함선을 말 그대로 '''배를 버리고''' 육지를 통해 주력으로 이순신에게 도망쳐왔다. 그 직후 벌어진 게 그 이름도 유명한 한산도 대첩이다. 시종일관 이런 형국이었으니, 전쟁이 나도 군공은 이순신이 다 세우는 반면, 원균은 손가락만 빨고 있는 신세이니... 자기도 군공을 좀 세웠다고 내세우기 위해서 그렇게나 수급에 욕심을 낸 것이다. 그게 도가 지나쳐 양민을 죽이고 상투를 일본식 촌마게로 바꿔트는 지경까지 간 거다.

6. 원균옹호론




6.1. 원균 기념관


[image]
원균의 가묘가 위치한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해 있다. 이름은 원릉군(原陵君)기념관. 평택시 공식 블로그
건물명에 붙은 원릉군은 원균이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받은 작호[79]에서 따온 것으로, 평택시와 원주원씨 종친회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건설 되었다. 건설비는 시비와 도비가 각각 2억 5천만원씩, 원주원씨 종친회에서 1억 7천만원을 지원해 총 6억 7천만원이 투입되었다. 운영비는 원주원씨 종친회에서 부담하며, 평택시에서 문화유적 관광 해설사 배치 비용을 지원한다고 한다.
건립 목적은 2018년 4월 16일, 개막식때 축사를 한 원유철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발언으로 알 수가 있다.

이날 기념식에서 원유철 원주원씨대종회장은 “'''원릉군 원균 장군의 많은 업적은 감춰지고 마지막 패전만 부각된 지금까지의 인물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며, “'''오늘 개관한 원릉군기념관은 원균 장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키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교육과 체험 공간으로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임진왜란의 영웅 원균, 기념관에서 되살아나


원주원씨대종회 원유철 회장은“'''우리선조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매우 기쁜 날이다.'''”라고 개관사를 하였으며, 사회와 기념관 해설을 맡은 박동린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는 “'''원릉군기념관의 개관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료와 영상을 통해 원균장군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고 해설 소감을 밝혔다.

원균에 대한 인식 확 바뀐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기념관 내부의 소개글들도 대부분 기존 통설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설명되어 있다.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 칠천량 해전의 책임을 원균에게 출전을 강요한 조선 조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출전을 강요당하다. 칠천량 해전
>
>▣왜의 수군군세
>왜는 강화 회담을 하는 3년여의 기간 동안 수군의 전력을 철저히 증강 시켰다.
>수많은 대선이 건조되었고, 패전의 경험을 살려 우리 수군에 대한 전략도 준비된 상태였다. 또한 순천에서 부산포까지 중요한 포구는 모조리 왜의 육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전략
>조정의 목표는 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적을 미리 격파하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을 받은 권율 도원수와 체찰사 이원익은 부산 앞바다의 왜의 수군 본진을 치도록 명령한다.
>▣원균의 전략
>그러나 원균의 전략은 달랐다.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 안죽도, 가덕도 등 육지에 숨어있는 적을 그대로 두고 부산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퇴로가 차단되어 만약에 대비할 수 없어 병가의 승산이 아니니 먼저 육지의 왜병을 쫒아내 주어야 한다."는 수륙병진을 주장했다.
>조정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중간첩 요시라가 조선 수군이 기습하면 승리 할 것이라고 귀뜸하므로 줄곳 출전을 강요하였다.
>급기야 도원수 권율은 머뭇거려 실기했다며 통제사 원균을 곤장으로 윽박지르므로 일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부산 앞바다에 나아갔다.
  •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적이 없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
>
>▶ 조정이 이순신에게 물은 죄목은
>1. 일본의 이중 간첩 요시라가 경상병사에게 제공한 가토가 조선에 올때 공격하라는 정보를 조정이 이순신에게 명령하였으나 이를 묵살한 일,
>2. 당시 오랜기간 전투를 하지 않고 대치만 하고 있는 이순신을 독려하기 위해 통영으로 내려간 세자(광해군)의 수차례 걸친 호출에도 임하지 않은 일,
>3. 왜영방화 사건으로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현이 한 일을 스스로가 한 것처럼 장계하여 조정을 속인 일,[80]
>4. 원균과 함께 치른 옥포 해전에서 공적에 대한 단동 장계로 남의 공을 빼앗은 일 등이다.
>
>이 네가지의 잘못은 모두 조정과 통제사(이순신) 간에 명령 또는 장계로 확인된 명확하고 공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모함 운운함은 결코 타당한 논리라 할 수 없다.
>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은 있었으나 모함한 일은 없었다.
  • 임진왜란 발발 당시 원균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원균의 임란 초기 대응
>
>원균이 경상우수영에 도임한지 두 달 후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정은 왜가 명나라와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에 대한 조선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며, 1만 명 규모의 왜침은 충분히 방어할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왜병의 수는 15만의 대군이었다.
>약 100여 년간 전국시대를 거친 왜군은 생각보다 강했고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100여년간 태평성대였던 조선은 숭문천무[81]의 전통으로 문약의 극치였고, 방위체제도 병농일치제, 진관체제등 취약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군의 침공을 받은 경상 좌수영 관할은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경상좌수사는 도망쳤으며 관내 모든 관포는 텅빈 상태였다.
>
>□ 부임한지 불과 2개월의 경상 우수사 원균은
>▶ 우선 적침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알려 전투준비를 하게 하는 한편
>▶ 관내 각관포의 지휘관을 수영으로 집결시켜 본진을 지키도록 하고
>▶ 비장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 함께 적을 막자고 원병을 청하였다.
>▶ 또한 자신은 급히 흩어진 수군을 모아 함대를 편성하고 적과 싸워 곤양 가덕도 등지에서 적선 10여 척을 불살랐다.
>▶ 그 후 연합수군이 편성되어 옥포해전을 치루기 전 24일간 고군분투하며 왜의 서진을 막았다.
>이순신은 수차례의 출전 요청에도 맡은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원균의 수하 이운룡이 간절히 청하고 이순신의 수하인 정운, 이순신등이 강력히 출정을 요구하고,
>조정이 출정을 명하므로 출전요청 20일 후인 5월 6일 옥포 앞 바다에 도착하였다.
근데 정작 진짜로 이 원씨 집안들이 기려야할 사람은 원균이 아니고, 원균의 동생인 원연과 원균의 조카인 원사립이다(...)

7. 기록에서



7.1. 난중일기


'''이순신은 원균에게 악감정이 있으니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실제로 이순신이 일기에 대놓고 욕을 쓴 건 아니고, 기껏해야 '''원흉'''(( + 흉측함)이라 칭한 게 최대의 표현이다. 사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원균의 행패 정도에 따라 원균을 칭하는 호칭이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다. 처음은 원수사, 경상수사, 또는 원균의 호를 이용하여 원평중이라고 점잖게 적기도 했지만, 1597년부터는 그냥 원으로 적다가 5월엔 대놓고 원흉이나 그냥 흉측한 자(...)라고 가감없이 적어놨다.[82]
다만 개인의 주관적 시선이 크게 들어 가는 일기 형식의 난중일기로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원균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에 한계점이 있지만, 난중일기에서도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주관적인 불평이나 악평 부분을 제외하고 역사적 사실 부분만을 미루어서 기존 사료와 비교하면 일기 형식의 글도 실록 못지 않은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기에, '''아래 실록과 비교해서 일치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원균을 평가하자. 오히려 난중일기가 실록보다 원균을 더 점잖게 표현한다는 걸 염두하고 보자.[83] 실록은 원균이 올린 말 그대로 원흉들과 방관적 공범자들의 책임 회피가 난무하는 형국이다.
또 이하의 번역본은 원문에 해석이 덧붙여져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고 참고하길 바란다.

7.1.1. '''1592년'''


  • 5월 3일. 방답[84]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 5월 29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7.1.2. '''1593년'''


  • 2월 8일.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85][86] 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월 22일.[87] (중략) 곧이어 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 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 수사 때문이다.
  • 2월 23일. 원 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88]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 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 수사에게 보냈던 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89]
  •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90]
  • 5월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만호 이어념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하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 원균의 망령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하다.
  •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 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15일.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 5월 27일. 영남 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91]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92]
  • 6월 10일. (전략) 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93]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94]
  • 7월 21일. 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을까?
  • 7월 28일. 사도 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95]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 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족장(발바닥을 때림) 10대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 8월 7일.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척,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이 부분은 원균은 아마 이순신을 깔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항목이다. 자신의 배 25척은 어디 숨겨놓고 7척, 8척만 이끌고 와서 출동을 제안한 것으로 보아하면,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후에 장계에 올릴 때 이 일을 들먹이면서 "저는 항상 용감하게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이순신 저놈은 쫄아서 절대 안 나왔습니다"라고 모함까지 했다. 전라도 병마 절도사 원균의 서장. 선조실록 30년 1월 22일 3번째 기사.

7.1.3. '''1594년'''


  •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7.1.4. '''1595년'''


여기서부터는 직함 대신 본명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 2월 27일. 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7.1.5. '''1597년'''


'''5월 2일부터는 경어는 커녕, 아예 이름조차 없이 그냥 '원 혹은 흉측한 자'로만 적어놨다.''' 사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칭할 때 아무런 직함이나 칭호, 본명조차 없이 그냥 성만 딸랑 써놓는 건 흉악 범죄자한테나 하는 일이다. 씨(호칭) 참고.[96]
  • 4월 27일. 일찍 떠나 송치[97] 밑에 이르니 (중략) 저녁에 부사[98]가 와서 보았다. 정사준(鄭思俊)도 와서 원공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 4월 30일. (전략)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공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 5월 2일.[99]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의 일을 이야기하였다.[100]
  •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5월 6일. (전략) 정원명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측한 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부찰사가 여수로 나와서 병으로 조리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 5월 7일. (전략) 송대기, 유몽길이 와서 보았다. 서산 군수 안괄(安适)도 한산에 와서 흉측한 자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후략)
  • 5월 8일. (전략)[101]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凶)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102] (중략) 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5월 11일. 맑다. 전 광양 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살대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의 일이다. (후략)
  • 5월 13일. (전략)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令公)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고 하였다. (후략)
  •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103]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 6월 19일. 새벽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 종사관이 나와 앉아 있었다.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안골포와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질질 끌면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는 것이었다. (후략)[104]
  • 6월 17일. (중략) 휘하의 여러 장수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주장[105]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106]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107]

7.2. 실록


이제 실록의 기록을 보자.
  •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윤근수가 상소를 올린 회의에서 선조가 "원균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류성룡은 "원균은 용감히 싸우는 것은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위로하는 법을 모릅니다.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원균을 제하고 그를) 써야 합니다"라고 했고 정탁은 "수전이 그의 장기이니 이제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원균이 힘껏 싸운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나 영남의 수군 중에는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으니 원균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이원익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틀어질 것입니다"라고 전하자 선조는 "원군을 청해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이의 공이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원익이 "원균은 당초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았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서 일어납니다."라고 했다.
이 외에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원균으로 검색 후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을 클릭하면, 무수히 많은 선조의 사랑과 대신들의 디스를 볼 수 있다.

7.3. 난중잡록


  •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마리 ~ 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7.4. 달천몽유록[109]


  • 원균은 배가 볼록하고 입은 비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다.

8. 창작물에서


[image]
>무슨 돼먹지 않은 수작이야! 숨김없이 말하시오. 또 무슨 공을 앞세워서 그런 엄청난 자리에 앉게 되었는가?
>
>—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직후의 이순신에게 내뱉은 대사
  • MBC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신충식[110]이 연기했다. 뭐든지 신중하고 철저한 사전준비와 검토를 거치는 이순신과는 달리, 성격이 엄청 급한 인물로 묘사된다. 원균옹호론이 반영되어 원균이 단독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거나 당파전술을 사용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나오며 이순신보다 지략은 떨어지지만 용맹한 장수라는, 소위 원균맹장론에 가까운 묘사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을 보이더니 결국 칠천량에서 무모한 전투로 다 말아먹게 된다.
[image]
배우는 최재성. 어린 시절은 김학준.[111] 이는 김탁환의 원작 소설 불멸의 영향으로, 여기서의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호형호제급 관계로 왜곡되어 있다. 심지어는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끈 묘책이 꿈 속에서 본 원균이 일러준 것이라고 설정했다. 불멸의 이순신이 초대박난 시청률과는 별개로 대차게 까인 이유가 바로 고증과 역사를 무시하고 원균을 지나치게 띄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균과 이순신이 어린 시절에 서로 만났다는[112] 기록도 없고 근거도 없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이순신의 행보에 별의별 트집을 잡아 헐뜯기 시작하더니 이순신이 삭탈관직당하고 자기가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를 꿰찬 다음부턴 고증대로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칠천량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이 남긴 전술지도와 작전계획을 통해 자신이 틀렸음을 뒤늦게 실감하고 열폭하는 장면은 일품이다. 92화에서는 배설이 탈주한 뒤 김완과 이억기 등의 충언을 늦게나마 받아들여 견내량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만, 머지않아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부하와 함대 및 병력을 잃고 도망치다가 왜병에게 죽는다.
>우 부사, 아직도 내가 그대의 상관인가? 아직도 내가 그대의 상관인가를 묻고 있다!
>(우치적: 제 대답은.. 이미 장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면.. 내 상관으로서.. 그대에게 마지막 명을 내리겠다. 상관의 명은 곧 군율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이순신에게 나의 패배를 전하거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헌데 이러한 왜곡과는 별개로 배우의 연기가 워낙 호연이었기 때문에, 굉장한 버프를 받아 이상하리만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가끔 보여준다. 덕분에 부흥 카페임진록2 - 조선의 반격 길드 네이버 카페에서 출발해, 불멸 안티 카페를 거쳐 역사 카페로 거듭났다. 그래도 한민족 사상 최고의 영웅을 다루는 드라마라서 고증을 잘 하려고 역사학자를 초빙했는데, 그 인물이 하필 원균 옹호론자여서... 그나마 그 뒤에 제대로 된 사학자들이 "당신들 지금 무슨 짓거리 하는지 알기나 합니까?"하고 지적해서 열심히 수정은 해 나갔다고 한다. 결국 각본을 쓴 작가가 역사에도 없었던 진수식 날 뜬금없이 침몰한 거북선[113] 및 이순신이 신립에게 싸닥션을 맞는 것까지 그려 욕을 먹었다.[114]
>여기가... 죽을 자리인가...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내가 틀리고 이순신이 옳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가 옳았다는 것을 사흘.. 아니 이틀 전에만 깨달았어도.. 함대를 모두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그와 함께 조선의 바다를 지켜내고 싶었다. 허나.. 하늘이 내 죄를.. 너무 엄히 묻는구만...
소설 '임진왜란'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윤민혁은 타입문넷 등에 글을 올려 변호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100화가 넘는 대하 사극이다보니 작가가 여러 명이 있었고, 그 중 역사 고증을 맡았던 작가가 원균 옹호론자라서 고증이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원작 소설인 불멸부터가 원균을 미화하는 내용이라서 원작의 영향도 있었다고 봐야겠지만... 그러다 중반 이후 제대로 된 자문 위원을 들이고 나서 잘못된 걸 알게 되었고, 어떻게든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초기의 캐릭터 설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부디.. 그대들은 살아돌아가... 이순신의 충직한 부하가 되어다오... 그리하여 이 나라 조선과.. 이 나라 조선 백성들의 안위를 지켜내라...!! 후일 역사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자는... 나 하나로 족하다...
>
>불멸의 이순신 92화 원균의 최후 中
  • 왜란종결자에서는 마찬가지로 막장 행각인데,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도망치던 중에 왜병의 손에 죽는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마수한테 씌였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내가 널 홀렸다고? 천만에. 너 자신이 나한테 혼을 팔았던 거야."라고 비웃는 마수의 모습은 나름대로 명장면이다. 그제서야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유언은 "이공... 미안하오! 죽어서도 그대를 뵐 낯이...".
  •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이 "다 이순신 때문이다!" 하는데, 작가가 "사관은 논한다"에서 "다 니 때문이다!"라며 대차게 까버린다.
  • 오세영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주인공 유승업이 왜군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후, 분의 복수군으로 칠천량 해전에 참전한 후,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런데 여기서 대놓고 '이순신은 지장이요 덕장이면 원균은 용장이요 맹장이다'라고 적어 영구까임권을 자초했다.
SBS시트콤똑바로 살아라에서는 노주현극중극인 사극 '난중일기'에서 원균 역을 맡는데, 악역을 재해석하면 인기 오른다[115]는 말에 혹해서 맡았더니, 분장도 사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악의적으로 희화화 시킨데다가, 임진왜란 초반에 겁에 질려 경상 우수군을 몽땅 날려버리고, 이후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해 모함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등, 실제 원균의 모습 그대로 나왔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어찌저찌 귀양을 가는데, 귀양지에서 기생 끼고 술판을 벌였다.
결국 이런 행보에 격분한 노주현이 "세상에 귀양 가서 기생 끼고 술판을 벌이는 작자가 어디 있냐?"며[116] 작가랑 대판 싸웠고 그만 "이럴거면 원균에게 사약을 내려라!"라고 윽박지르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왜 이게 실수였냐면, 원균 배역을 맡은 덕택에 CF 제의도 들어오고 한참 잘 나갈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대판 싸운 이후, 노주현이 사약을 내리라고 한 대로 시나리오 방향을 잡았으며, 각종 매스컴에서는 '원균에게 사약을'이라고 도배된다. 노주현은 뒤늦게 작가랑 화해를 하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촬영장에서 사약을 엎어버린다. 뒤에 여차저차해서 해결하고 다시 출연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역은 김형일[117], 선조 역은 황일청이 맡았다. 노주현은 이런 원균 연기를 토대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원균 역할을 부탁했다고 한다.
징비록에서는 6화에서 이일에 의해 이름만 언급되는데, 디스당한다. 그리고 21화에서 오랜만에 등장했지만, 팀킬과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하급자들에게 언급되면서, 결국에는 빼고 출정하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시당한다. 이순신 역시 참고 있다가 언젠가는 엄중히 경고하겠다고 말할 뿐. 참고로, 배우이일재.[118]
  • 1980년대에 나온 삼성당 출판사의 위인전 만화 이순신에서는 무능한 찌질이로 등장한다. 작중에서도 공을 세우는데만 미쳐서 도움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대차게 깠다. 최후에도 칠전량 해전에서 기생 데리고 술이나 마셔서 부장들이 원균을 한심한 놈 보듯이 보고, 수군 병사들마저 "이순신 장군이 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한심하다, 한심해."라며 깐다. 결국 해전에서 패하자 육지로 달아났으나, 왜장의 칼에 베여 죽는다.
  •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구국의 태양, 성웅 이순신(1981년)>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해 죽은 왜군의 시체를 끌어올리고는 자기가 해치웠다고 조정에 올리라고 하는 찌질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칠전량 해전에서 패해 뭍으로 올라가다가 총에 맞아 죽으며, 조선 수군을 망친 천하의 무능한 장수라고 나레이션으로 대차게 깠다.
  • 바로 위에서 언급된 작품과 비슷하게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한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인 1997년작 난중일기에서도 능력과 인성 모두 치트급명장으로 묘사되는 이순신과 능력&인성 모두 정말 비교되는 무능하고 찌질한 장수로 나온다.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이 승리하고 이순신덕분에 목숨을 건진다음 이만한 병력과 무기와 병선만 있었어도 왜놈들을 그냥 두지 않았을거라며 징징거리고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해 죽은 왜군들의 시체를 건져 차지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며 승리를 모두 자기공으로 돌리려 한다. 이순신을 질투하여 모함하여 쫓아내고 벌 받게 만들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뒤에는 적이 파도가 매우 거센날 기습할줄 모를테니 그걸 이용해 승리할것을 장담하면서 내가 이순신만 못할거같냐고 큰소리를 치며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에 찌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풍랑이 몰아치는날 무리하게 칠천량으로 진격했다가 이순신이 6년간 키워놓은 모든 함대를 전멸시킨다. 최후에도 병선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자기도 이순신처럼 이길수 있었다며 끝까지 남의탓과 핑계만 늘어대고 육지로 도망치다가 앞에는 다테 마사무네와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결국 그들 손에 비참하게 죽는다. 성우문관일이다.
  •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서는 안장혁이 맡았는데 역사 그대로의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연히 내내 까인다. 해설자인 배한성이 사료에 나와있는 원균의 막장 짓거리들을 지적하며 그를 비난하자, "당대 기록은 정확하지 않아서 믿을 게 못된다."며 그것들은 전부 자신을 음해하려는 이순신 빠들의 모함이라고 주장한다. 헌데 그 직후 원균이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언급되자. "그건 믿어도 됨. 기록은 정확하거든!"하며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순신만 옹호해 주는 건 이순신이 일기를 썼기 때문이라며 자기도 일기를 쓸 걸 그랬다고 한탄한다. 또한 칠천량 해전 직전 권율이 보내온 메시지를 삭제했다가 이를 눈치챈 권율에게 지적당하자 아예 무시해버렸고, 결국 열받은 권율에게 곤장을 얻어맞는다. 맞기 전에도 이경규 씨가 어디 숨어있으시나?라고 관찰하는 등 자신을 속인다고 흥분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도 찌질함은 여전한데, 왜군이 쳐들어오자마자 싸워보지도 않고 가덕진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다. 이후 이순신의 등 뒤에 숨어있다가,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파직당하자 그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세월만 죽이고 있자, 분노한 권율에게 아들 원사웅과 같이 곤장을 맞고 출전하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작전 지휘는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 왜구가 불화살로 원균의 함대를 공격하자 부장이 "장군, 배 한 척에 불이 났사옵니다"라고 말하며 원균을 깨웠다. 이에 원균은 갈팡질팡 하다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그런데 거기서 추격하는 왜병을 2명까지 죽이고, 3번째 왜병의 손에 사살당하다는 대우를 받는다.
  • 웹소설인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여진족을 토벌할 때 포로들을 멋대로 참수해서 수급을 베었다고 거짓 보고한게 들켜서 백의종군 당하고, 이후 일본에 하성군과 임해군을 볼모로 보낼 때 호위무관 명목으로 내보낸다. 여기서 오다 노부나가의 꼬임에 넘어가서 일본군 장수가 된다. 후에 히데요시에 의해 일기도주가 되었는데, 해안방비를 소홀히하면서 주민 중 탈주자가 속출하고있다. 조선에 온 귀순일본인의 80%가 일기도주민이라고 한다. 악역은 맞지만 개그 캐릭터인데다 묘하게 인간적인 부분을 자주 드러내서 독자들은 농담삼아 '원균 미화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선이 보복원정을 벌이자, 일기도에서 교묘히 도주했고 이후에 원균으로 보이는 시신이 확인되어, 조선 측은 그를 사망한 것으로 공식 결론내린다. 물론 실제론 살아있었고(동생 원연에게 발각되나 원연이 눈감아주었다), 보복원정에 참여한 여진족에게 잡혔다가 노비로 대남도에 가게 된다. 대남도에서 코끼리 대변을 처리하는 신세로 살다가 68세의 나이로 쓸쓸히 죽었다. 아들 원사웅이 바른 처신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의 북미 식민지 덕진성(시애틀) 성주가 된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
일본 웹게임 시로 크로니클 조커에도 등장한다. 어째서인지 수노궁을 사용하는 미청년이다.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맹장이며, 전후 이순신을 모함해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혔다고 설명되어 있다. 흡사 한국에서 무다구치 렌야나 도미나가 교지를 독립투사라고 해주는 격과 비슷하다. 물론 무다구치와 도미나가는 원균처럼 똥별이었지만 적어도 민간인 학살만은 하지 않아서 저 둘을 원균과 엮는 건 억울할지도.
  • 웹소설 근육조선에서는 작가가 역사상 여러 간신이나 문제아들을 개과천선 하면서 역사가 바뀌게 했지만, 원균만큼은 꼴보기 싫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죽게한다. 사인이 바로 다음아닌 석쇠공 저글링 실수로 비롯된 뇌진탕.[119]

9. 기타


  • 평택시에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원유철이 원균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원균의 직계후손이 아니라 원균의 백부의 후손이다. 관련 링크. 그래서 원유철의 지역구이자 원균의 출신지인 평택시에서는 원균을 밀어주 는 중이다. 평택시에서 원균을 자랑하는 글을 읽어보면 실소를 금하기 어려운 내용이 한 둘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자면, 기원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충각전술[120]을 마치 원균이 창시한 전술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 포장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이순신과의 불화 이유를 공로 다툼이라고 설명해서 충무공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121]처럼 양비론을 주장하는 데다가, 칠천량 해전의 패전 책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이없게도 권율에게 완전히 떠넘겼다. #
'평택시가 기릴 만한 역사인물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원균을 띄워준다'는 말도 있는데, 암행어사 박문수, 독립운동가 안재홍은 평택 사람이 아닌가? 무능하고 부패하고 인간성도 개차반에 왜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원균을 기린다는 것은, '강직과 공명정대'의 상징 박문수와 '일본에 맞서 굴하지 않는 독립운동'을 한 안재홍에게 큰 실례이자 무례다. 하다 못해 원유철이 조상을 띄워주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도, 원균이 아니라 그 동생인 원연[122]부터 확실히 띄워줘도 될 상황에서 굳이 원균을 띄우는 것은, 결국 평택시의 문화 및 역사인물 홍보행정에 원유철과 원주 원씨 문중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원연이 장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서자 취급을 하여 외면한 점도 원균을 더더욱 띄우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원유철은 이거 외에도 과거에도 이런저런 논란거리로 말이 많았는데, 결국은 2018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면서 더 욕을 먹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평택시의 원균 밀어주기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2018년 4월에는 '원릉군기념관'을 개관했다. 당연히 지역구 의원이자 원주 원씨대종회 회장인 원유철도 참여했다. 2010년 1월, 평택시에서 그 곳 출신의 위인들을 배경으로 하는 달력을 선보였는데, 다른 건 뭐 특별히 문제 없으나 원균이 1월에 있다. 거기다 평택시 소개 페이지에다가는 아예 평택의 역사 인물로 박문수, 조광조와 같이 원균을 박아놓았다. 근데 웃긴 게 본래 있던 페이지를 개편하면서 뭘 잘못 건드렸는지, 현재 원균 칸에 있는 게 박문수 설명이고, 원균에 대한 설명은 조광조 페이지에 박혀있는 괴상한 상태다. 하도 태클이 먹혔는지 지금은 아예 상기한 페이지를 모조리 날려버리고 원효, 의상, 혜초 등을 비롯한 새로운 인물들을 집어넣고 간략한 설명만을 넣었는데, 그 와중에도 꿋꿋이 원균을 집어넣으면서 일심으로 순국한 영웅 원릉군 원균이라는 제목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고 칠천량 해전에서 분사했다고 적어놨다.
따지고 보면 이런 행위는 성남시에서 이완용을 옹호하는 것과 거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원균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한양을 버리고 몽진간 걸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광해군이 분조를 꾸려 일본에 맞섰던 일로 인해 광해군의 인기가 아버지의 인기를 웃도는 상황이었는데, 마찬가지로 한산도 대첩을 앞두고 가덕도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원균을 옹호해야 자신의 몽진이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선조는 어이없게도 원균은 이순신에게 구조를 요청했으므로 공신이라 하며 본인명나라에 구조를 요청했으므로 공신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임금의 자리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원균은 시대를 잘 타고난 덕에 국왕으로부터 엄청난 옹호를 받게 된 것이며, 이는 원균옹호론의 뿌리가 된다. 추가로 이 덕분에 원균을 칠천량 해전의 책임을 물어 처벌하려면 선조 임금부터 퇴위시켜야만 했다. 그야말로 국왕과 운명공동체가 되는 기막힌 행운아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원균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 2011년 7월에는 옥포 해전이 원균이 총대장이고, 이순신은 그저 원군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정신나간 사람도 나타났다. 그것도 옥포 대첩 기념 사업회 추진 위원회 회장이라는 작자가 한 말. 이럴 땐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위에서 언급되었듯 파면 팔수록 개막장이라는 증거만 나오는데도 아직도 원균을 못 띄워서 안달인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신기할 따름. 이렇게 보면 원균처럼 한국 역사상 후한 대접(?)을 받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 듯.
  • 고도비만이라서 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문제 때문에 육군이 아니라 수군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고... 오늘날 사극에서는 비교적 구하기 쉽고 간지도 나는 서양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의 말은 체구가 작은 편이라[123]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은 태우지 못했는데, 원균이 그 정도로 심한 돼지였다는 소리.
  • 원균을 선무 1등 공신에 봉하는 공신 교서는 현재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124] 참고로 이순신 공신 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십 년간 뒷세계를 떠돌다 2007년에 발견되었고, 2008년 6월 27일 보물 제1564호로 지정되었다.
  • 이이화는 자신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 11권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편에서 원균의 죽음을 묘사할 때 도망하다 죽었다고 분명히 옆에 명시해놓고 그 다음줄에 '최후만은 참으로 장군다웠다.'고 서술했다. 당시에는 육지로 도망가긴 했어도 싸우다가 죽었단 이론이 대세이긴 했다.
  • 묘는 도일동(송탄동)에 있는데[125] 사실 이 근처에 저수지가 하나 있어 가끔 가다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 조선판 무다구치 렌야라는 평가가 있지만, 무다구치 렌야는 졸장이었을지언정 민간인 학살을 지시하는 등의 일은 없었으니, 어찌보면 그 무다구치에게조차도 원균과의 비교는 모욕이다. 그래도 하는 짓이 비슷했던 탓에 원균이 죽은 뒤,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애국하기 위해 일본에서 무다구치 렌야로 환생해, 일본이 망하도록 유도하며 독립을 대한민국에 가져다 준 거라는 개드립이 나올 정도.
이와 별개로 일본군 중에서도 조선 수군에 이만한 피해를 입힌 자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일본의 명장 하지메 사토루(元均)란 이름으로 제목 낚시를 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전술에 대한 식견이 지나치게 부족해서, 왜 수군이 쳐들어오면 배를 자침시키고 도망치기가 일쑤였다. 이 항목에서 잘 찾아보면 원균이 학익진 훈련에서 자주 열외되었다고 하는데, 학익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 선술했듯이 뚱뚱하였다. 이 때문에 체구가 큰 배우들이 원균 배역을 맡아야 적절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선굵은 외모의 신충식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젊은 시절 당대 미남 배우로 꼽히던 최재성이 원균을 연기했다.[126] 유명 인사 중에서는 씨름 선수 박광덕이 원균과 가장 외모가 흡사하다. 더 닮은 건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방계 후손 원유철이라고 알려졌으나 사실 충무공 이순신도 공식 영정이 없어 후대에서 상상해 그린 것이기 때문에 원균 영정을 그릴 때에 역으로 원균 띄우기를 주도한 원유철 의원을 참고해서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 엄청난 대식가로, 그의 한끼 식단이라는 게 두말, 생선 20마리, 4마리였다. 일반인이 닭 1마리만 먹어도 한 끼를 배불리 먹는다는 것을 감안하다면 식사량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사치 중의 사치였다.
  • 둘째 동생인 원연조카인 원사립은 임진왜란에서 당당히 공적을 세운 장수들이었고, 넷째 동생인 원전은 원균이 도망친 칠천량 해전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장수였으며, 아들 원사웅도 평범한 수준은 되는 무난한 장수였지만 원균의 희대의 뻘짓만 숨기고 왜곡하려 급급하다보니 반대 급부로 묻혀 버린 케이스. 기록을 찾아보면 무언가 공을 세웠다는 업적은 원균을 제외하고 이 쪽들에 있는데...
  • 삼국지로 비교하자면 하후무와 상당히 일치한다. 당대에 원주 원씨가 마치 삼국지에서 위나라의 하후씨처럼 엄청난 명문가였는데, 원균 역시 하후무처럼 이러한 훌륭한 가문에 묻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원균이나 하후무나 둘 다 가문값들을 못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비교해보면 원연은 또 하후연에 비견된다.
  • 수군으로 출전할 때마다 배를 버리는 일이 잦았고, 첫 출전부터 배를 버렸는데, 한산도 대첩 역시 경상 우수사인 원균이 경상 우수영에 자기 배를 버리고 이순신의 등 뒤에 숨은 것에 불과하며, 특히 칠천량 해전에서는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 수군 전부를 내다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원래 육군 지휘관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데, 원균은 너무 뚱보여서 말을 못 타니까 수군으로 배치되었지, 원균이 수군으로서 능력이 뛰어나서 그 자리로 간 게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있다. 원균 맹장설이 지지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애초 맹장이라도 되었으면 임란발발초 삼도수군 최강전력에 전라좌,우수영 합한것 보다 더 많은 판옥선을 보유한 경상우수영군으로 고니시의 1군을 해상에서 충분히 저지하거나 최소한 동래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던 제승방략체제 하에 병력을 결집하여 항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의 지연작전은 충분히 했을 것이다.)
  • 일본 측에서는 자국 측 다이묘를 띄어주기 위해 맹장으로 띄우는 경향이 강하다. 주로 시마즈 요시히로 미화에 사용하는 듯하다.
  • 이순신의 업적이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함에 따라, 원균도 “세계 최악의 졸장” 이미지로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해지고 있는 중이다. 특히 외국의 한 유투버가 제작한 임진왜란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칠천량 해전을 다룬 편의 베스트 댓글 중 "Won' Gyun should have changed his name to 'Lost' Gyun'(원균의 이름을 '진'균으로 바꿔야 해)"라는 댓글이 압권이다. 제작자마저도 이 의견에 크게 동의했는지, 아예 이 댓글을 고정시켜 놓았다. 그 전편에서 이순신이 잡혀가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는 장면에서는 "From the best admiral in human history to the worst admiral in human history.(인류 역사상 최고의 제독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제독으로)"라는 댓글도 달렸을 정도. 다만 그가 저지른 악행들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냥 무능한 장수 정도로만 알려진 상태다. 하여튼 조선 수군 뿐 아니라 인류 해군 역사의 수치 중 하나다.
  •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좌우 불문하고 전부 반응이 좋지 않다. 오죽하면 워낙 명성이 있는 작자인지라 일본 최고의 명장이라고 하는 우스개도 있을 정도다.
  •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에는 칠천량해전공원이 건립되어 있다.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그 곳이다. 평택에 있는 원균 기념관과는 다르게 원균의 패악과 역사를 잊으면 다시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곳이다. 다만 옥의 티로, 칠천도를 강조하다 보니 '조선 수군은 이 곳 칠천량에서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라는 낡은 학설이 깔려 있다. 원균이 결정적으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곳은 통영 춘원포이다.
  • 고려시대 카다안 침입 당시 결사대를 이끌고 카다안 반군을 물리친 장수 원충갑이 그의 조상이다.

[1] 일단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후에 생존한 원균을 봤다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있는 편이다. 생존설 항목 참고.[2] 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원균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들 원균 급으로 개차반인 인물이다.[3] 의병을 모아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4] 형의 부관으로 칠천량 해전에 형제가 같이 참전했는데 형이 도망친 반면 동생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원문] 史臣曰: "閑山之敗, 元均可磔, 而將卒皆無罪焉, 何也? 均之爲人, 乃麤暴一無知人也。 初與李舜臣爭功, 百端構捏, 逐舜臣而自代。 外爲大言, 有若一擧而殲賊者然, 及智窮兵敗, 捨船登陸, 使士卒盡爲魚肉, 當時之罪, 誰執其咎? 閑山一敗, 湖南繼沒, 湖南覆沒, 而國事不可更爲矣。 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5] 칠전량 패전의 책임은 원균의 몫이 크다고 비변사에서 말하였는데, (이순신 대신 원균을 임명했던) 선조가 '원균 핑계대지 말라.'고 감싸자 한 사관평이다.[6]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 후 윤계선이란 선비가 쓴 소설이다.[7]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시절 70~100척을 자침시켰고 칠천량 해전 이전에 32척, 칠천량 해전 때는 70여 척을 잃었다. 참고로 이 때 이순신 없이 원균이 대장이였을 적에 얻은 전과는 겨우 18척, 교환비는 10:1이다. 이순신은 자신이 잃은 배는 1척도 없고 왜군 배만 500여 척 넘게 박살내었다. 역시 원균은 명장이 맞았다.[8]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9] 학자들이 이순신을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인데 군대란 전시 체제 돌입시 국가 재정을 많이 소모할 수 밖에 없는데 이순신은 개전 내내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물질, 재물적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조정에서 물자 지원을 안 해줘서 졌어요'해도 할 말이 없는 전투를 오히려 단 1번의 패배도 없이 승리로 이끌었다.[10] 학살당한 조선 백성들의 수급까지 취했다.[11] 하지만 원균의 동생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하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그나마 원연은 아버지 원준량의 형 원수량의 양자로 갔다.) 동생들은 의병이 되거나 칠천량 해전에서 아군이 개털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하는 등 개념인의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보면 동생들이 돌연변이(?)인 셈. 사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례는 제법 많은데, 고려를 보면 경대승이 그 케이스이다. 아버지 경진은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아 재산을 쌓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부정하게 얻은 땅들을 다 국가에 환속시켰음은 물론 무신정권의 집권자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권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개념인이었다.[12] 북방 평정에 공을 세운 이일이나 신립과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물론 이일인 경우는 이순신을 모함하는 등 원균과 비슷한 행동을 한 적 있으나, 상주에서 1:200의 열세에서도 장렬히 싸웠고, 신립은 비록 배수진이라는 뻘짓을 했지만, 탄금대 전투에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장렬하게 싸웠다. 저 두 명과는 비교가 안 된다.[13] 다만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작 불멸과 달리, 작중 여진족 토벌 당시의 원균도 실제 역사의 원균처럼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무고한 백성들을 야인(여진족)놈들과 밀통했다며 죽인 것, 그 백성들과 거래한 여진족들을 모조리 붙잡은 후 참수하여 여러 여진 부족들의 반조선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여러 여진 부족들이 연합하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작중에서 이순신이 여진족이 포로로 붙잡아 갔던 여인(조산보 수호장 오형의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북병영 휘하의 군영들이 포로를 잡으면 북병영으로 보내어 포로끼리 교환할 수 있도록 호소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록 허구이긴 해도 원균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극적 장치였던 셈이다.[14] 명종 19년(1564) 입시 부정 논쟁으로 낙방한 뒤 다시 응시하여 급제한 것 같다.[15] 하버드-옌징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융경원년정묘식년문무과방목(隆慶元年丁卯式年文武科榜目)』[16]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사관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은 수령으로 있을 때 '''평가가 바닥을 기었습니다'''. 근데 겨우 반년이 지나서 전라 좌수사라는 큰 일을 맡기시다니, 실력 위주 인사 원칙을 거스르는 일이라 세상이 다 비웃습니다. '''해고하시고''', 각별히 젊고 무예와 지략을 갖춘 사람을 전라 좌수사로 보내주십시오."[17] 불멸의 이순신에선 '''단 일주일 만에, 그것도 한참 환영회를 열고 있을 때''' 파직되었다고 각색했다. 그 교지를 받드는 원균의 패악질은 덤. 게다가 그 만행을 당시 원균의 초청으로 자리에 있던 이순신도 보고 있었다.[18] 무관들 수준이 떨어지니 문관들을 차출하여 메웠는데, 고려 시대는 물론이고 조선 시대에도 문관을 차출하여 무관의 역할을 겸하게 한 경우도 많았다. 당장 조선 초기에 4군 6진을 개척한 김종서도 문관이고, 동시기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권율도 식년 '''문과'''시에 합격한 문관 출신이다. 게다가 동래 부사인 송상현 역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의 최고급 문관이었다.[19] 식년무과와 별시의 난이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별시 합격해 근무하면서 경력 쌓은 다음 식년 무과를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이 식년 무과 급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온양의 부자였던 방진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넉넉하게 과거 준비를 할 수 있었던 덕이다.[20] 태종 ~ 세종 시대의 명장 이순몽은 대마도 정벌과 여진 정벌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인격적으론 세상에 유례 없을 희대의 개쓰레기였다. 그러나 장군으로서 능력만큼은 끝내주게 좋아서 태종, 세종 누대에 걸쳐 총애받았다. 사실 이런 무장들은 정말 흔했다. 예외적인 사례가 최윤덕인데, 이 쪽은 폭행사건 한 번 일으키지 않아 문신들에게도 인정받았다.[21] 1601년에 압송당한 이유부터 부하를 그냥 살해한 혐의였다.[22]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성도 이때 외성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 진주성은 거의 두배 가까운 면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전후 성을 복구(1,605년)하면서 외성이 약간 축소되었고 일제시대때 외성벽들이 철거되어 현대의 진주성은 내성뿐이다. 즉, 임진왜란시기의 진주성은 현대의 진주성(내성)을 포함하여 거의 세배 가까이 큰 성이다.[23] 이때 이운룡이 만류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수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 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출처. 원균은 배에다 불을 질러 버린 후 도망치려 했던 것이다.[24] 만약 이때 배를 자침시키지않고 적의 형세를 본 뒤, 전라좌수영으로 함대를 끌고가 이순신과 연합하여 함대를 재편하였으면 임진왜란 초기의 형세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25] 원균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지휘권에 도전하는 등 쓰레기 행각을 계속 벌인다.[26] 이는 비판의 여지가 없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애시당초 경상 우수영이 조선에서 가장 큰 수군 기지이고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사는 모두 경상우수사가 겸직한 점을 보면 진작 원균이 적당히만 잘 했어도 그 삼도수군통제사는 자신이 앉을 자리였던 것이다. 자기가 삽질로 조선 최대 수군전력을 날려먹고 뒤에서는 그나마 전력을 온전히 가져 삼도수군 통제권을 가진 이순신을 시기하는건 현대의 관점에서도 이성적이게도 감정적이게도 옹호받기가 힘들다.[27] 이 당시 원균 본인이 쓴 장계가 육군 30만을 동원해서 섬을 일단 정벌하면 해군도 따라 나서겠다는 내용. 원균 병크의 대표주자이자 원균 맹장론 최대의 반론이다. "원균 10만 해병대 양병론"이라는 비아냥도 있다.[28] 안중홍(安重洪)으로 동암처사라 불렸다.[29]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천상(元天祥)이다. 153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언보(元彦輔), 할아버지는 원익(元翊), 증조부는 원치(元菑)이며 외조부는 파평윤씨 윤현손(尹賢孫)이다.[30] 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31]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비유하면, '이번 경기에 어떤 전략으로 임하실 것입니까?' 라는 물음을 받으면 맵의 특성이 어떻고 상대 선수는 어떤 전략을 잘 쓰니 어떤 전략으로 상대하겠다 운운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그냥 일꾼 열심히 뽑아서 자원 열심히 채취하고, 병력 열심히 뽑아서 어택땅하면 되지요' 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자 확보 수단을 마련하고 제대로 된 지휘 및 전술 체계를 확립하는 등 조선 수군을 크게 강화한 이순신의 대전략과 크게 비교된다.[32] 종이 위에서 논하는 병법.[33] 판옥선을 만드는 데에는 산에 있는 소나무를 모두 베어야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싼 이다.[34] 이후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이라고는 겨우 판옥선 12척 뿐이었으나, 이 배로 이순신은 기적같은 승리를 일군다.[35] 아무리 일본군이 크게 증원됐어도 판옥선을 운용하려면 꽤 많은 인원 수가 필요한데다가 자신의 부하들이니 이순신이었다면 이들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력은 꽤 중요했고, 당시 조선의 인구를 생각해보자. 판옥선을 운용하려면 젊은이들을 많이 징집했을 것이고, 이들은 전란이 끝나면 국토 회복과 경제에 중요한 재산이다. 근데 이들을 버렸다는 것은...[36] 물론 난중잡록에 기록된 칠천량 해전의 정황도 정확하지는 못하다. 조선군이 식수와 땔감을 구하다 기습받은 장소를 영등포로 적은 것이 대표적인데, 실록에는 기습받은 장소를 가덕도로 적고 있으며, 해소실기에는 영등포에서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고만 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37]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정유일기』 7월 8일)[38] 여기에서 원균의 첫번째 졸장 면모가 드러나는데, 적의 본진을 공격하러 간 입장에서 야간에 경계를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이 점령한 땅에서 숙박을 하게되면, 경계를 강화하는게 정상이다. 이순신이 단 한차례도 적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던 점과 대비되는 부분인 것이다.[39] 김완의 후손들이 김완의 글과 시문(詩文) 등을 모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 수록되어 있음.[40] 즉, 경계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으려고 오버하냐?"''' 하고 되려 적반하장 격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41] 이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일 것이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 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42] 지금의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 및 안정리 지역[43] 김완은 나중에 탈출해서 조선으로 돌아온다.[44] 원균이 사실상 지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못했다는점을 볼때 원균의 명령에 불복하고 이순신이 통제사로있었을때 받아왔던 지휘를 생각하여 독자적으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있다.[45] 원균이 지휘권을 놔버렸다고 하면 그 휘하의 장수들은 임시방편으로 자신들끼리 세력을 유지하며 퇴각했을것이다. 이순신과의 경험은 헛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6] 비슷한 상황으로 이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시마즈 요시히로 역시 패퇴 도중 관음포를 해협으로 착각해 빨려들어가 도주로가 막혔다.[47] 엄밀히 말하면 시작은 이미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음으로써 전선이 크게 확대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사실상 정유재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48] '''1마리의 토끼가 이끄는 사자 100마리보다 사자 1마리가 이끄는 토끼 100마리가 훨씬 강하다'''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49] 원균을 실드치겠다고 한 발언인데 이건 오히려 원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발언이다. 임진년부터 명량해전까지 해전은 모두 경상도 바다에서 벌어졌고, 그 자리엔 원균도 함께 있었다. 부산을 공격한 부산포 해전 역시 원균은 이순신을 따라서 같이 출전했고 무려 원균은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였다. 저 논리라면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이래 경상도 바다의 특성에 대해 무지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반면 이순신은 1597년 1월 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 바다에도 불구하고 부산까지 나갔다가 신나게 왜군을 두들기고 돌아온다. 백번 원균을 이해할려고 해도 이순신은 더 열악한 조건에서도 해냈다.[50] 애초에 방송 시작 전에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겠다고 패널들이 되도 않는 뉘앙스를 깔긴 했다.[51] 저 위에 있는 사관평이 바로 이 개드립에 붙인 사관평이다.[52] 다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선조가 원균의 생사 확인을 방해했다는 것 정도이며 그가 죽었는지를 정말 알았거나 알아보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53] 이는 1990년대에 인기를 끈 '원균 그리고 원균' 같은 소설 및 기타 매체에서 이순신 노량 해전 생존 음모론이 횡행했던 것의 패러디 성격이 짙다.[54] 이순신의 이름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에도시대에 류성룡의 징비록이 유행하면서부터다.[55] 거기다 엄연히 졸장이라도 직책이 삼도수군통제사인데 목을 베고 왔다면 그 사람은 파격승진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싸움은 고사하고 "죽여서 수급을 챙겼다."라는 기록이 없으니...[56] 이는 평택시의 국회의원이 원유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균가문의 후손이다.[57] 카카오맵에서 '엉규이무덤'을 검색하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58] 하지만 실상은 휴전 기간에 일본군의 뒷통수를 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배 3척과 병사 47명을 잃었지만, 반대로 조선 수군은 판옥선 1척, 고성 현령 조응도, 병사 140명을 잃었다. 자세한 내용은 칠천량 해전 항목 참조.[59] 선조실록 30년 7월 7일 기사에 조선 수군이 다대포에 정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60] 노를 젓는 병사들.[61]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 16일자 기록.[62]부산시 북구 화명동 수정 마을.[63]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에는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어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64] 1593년 2월 28일 기록. [65] 1594년 3월 13일 기록. [66] 중국의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송나라의 당진이라는 무장이 식탐이 심해 늘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배야, 내가 널 저버리지 않았단다!"라며 (실로 황당한)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걸 보고 기가 막혀서 "장군은 장군의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장군의 배는 장군을 저버렸구려. 장군은 장군의 배를 그렇게 정성스레 먹여 살리는데 배란 놈은 장군을 위해 계책 하나 내놓지 않으니 말이오!"라며 비웃었다.[67] 휘하 장수들도 자살 행위라며 전부 반대했다.[68] 3번이나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 이유가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과정에서 수군이 부산포에 출정해 시위를 하면 적들이 물러날 것이라 주장하였고, 그 주장이 먹혀들어 이순신을 파직시킨 후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그러나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에 오르자, 원균은 부산포 출정이 육군의 원조 없이는 안 된다고 말을 바꿨다. 즉, 이순신이 자리에 있을 때는 수군이 부산포에 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에 오르자 말을 바꿔서 불가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권율이 볼 때 원균이 하는 행위는 출세를 위해 임금을 속인 것과 다름없이 보였다. 이는 기군망상죄(임금을 속인 죄)로, 전시였기에 망정이었지, 평시였으면 사형당해도 할 말 없는 중죄였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순신이 파직당한 이유 중 하나가 부하의 잘못된 공로 보고로 인한 기군망상죄였다.[69] 저 상황에서 권율이 원균의 모가지를 쳤으면 조선 수군은 살았겠지만, 대신 권율이 죽었을 것이다. 원균은 권율이 아니라 선조가 임명했기 때문에... 원숭환만 해도 모문룡을 참수한 것 때문에 숭정제한테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70] 원균의 셋째 동생인데, 관련 기록을 보면 연락관 노릇을 많이 했다.[71] 본래는 원균의 묘역 앞에 있었으나, 물이 나고 낡아 현재의 위치인 묘 뒷편 언덕으로 옮겨 세웠다.[72] 이순신이 죽자 '''남도의 백성들'''이 모두 통곡하고 상여를 붙잡아 운구행렬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였다.[73] 근데 이마저도 원균이 원군 요청이고 뭐고 튀려던걸 부하가 겨우겨우 뜯어말리고서야 한 거다.[74] 선조수정실록은 기존의 실록이 너무 북인 쪽의 시각으로 쓰여졌다고 여겨 인조서인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인데,(사실 선조실록이 문제가 없던 것도 아니라서 분량부터가 사초가 많이 소실되어 한달치 분량이 보통 실록의 하루치 분량만도 못한 경우도 많았고 선조수정실록이 서인에게 좀 봐주는 성향이 강했던 만큼 선조실록은 서인들 말대로 서인까 성향이 강했다.) 서인 계통의 인물인 원균이 서인에게 까이는 상황에서 조선 때도 원균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바로 알 수 있다.[75] 이전 내용은 불천위에 모셨다고 하였으나 불천위에 관한 내용은 없고, 또 한문 부분은 어디서 교지 중간 부분을 잘아온 것 같은데, 내용이 오기된 듯 하다.[76] 일례로 임진왜란 초반에 조선 정규군 대부분을 말아먹고 자살한 신립도 선무 2등 공신이 되었다.[77] 당시 조상이 대단한 일을 하면 후손들까지 줄줄이 덕을 보았다.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정보란 사람이 껴 있어서 참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가 정몽주의 후손임을 알게 된 '''세조'''가 귀양형으로 낮춰 주었다. 세조가 명색이 왕이고, 왕을 죽이려 했음은 곧 반역인데, 그 반역죄를 저지를 죄인조차도 조상 덕에 살았다. 이 정도니 공을 세워 인정받음은 가문의 영광이다. 근데 원균 이 인간은 반대로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더군다나 원균의 그 '원씨'는 조선 최초의 후궁인 성비 원씨를 냈을 정도로 그 위세가 아주 대단했는데, 그게 무색할 정도로 후손인 원균이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았으니...[78] 게다가 죽은 후에는 '려' 라는 악시를 받았다. 이게 얼마나 악시인지는 시법 참조[79] 본 문서의 작호 항목을 참조.[80] 왜영 방화사건은 안위, 김난서가 왜영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이순신이 이를 보고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1일 기사) 그러나 이후 김신국이라는 인물이 "이순신이 한게 아니라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연이 한 일인데요?"라는 장계를 올렸고(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기사) 이 사건으로 이순신이 왕을 기망했다며 조정이 뒤집어 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신국이라는 인물의 거짓 장계일 확률이 높은데 관련 내용을 참고. 그리고 1월 27일에 선조가 "그거 이순신이 올린 장계가 맞어."라며 인정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81] 崇文賤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다.[82] 그런데 사실 점잖게 원흉(...)이라고 표현하긴 했어도 지금의 한국어로 풀어보면 개X같은 X끼라고 보는게 합당할 것이다.[83] 본인의 사견이 잔뜩 들어갈 수 있는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목격담이나 원균의 직속 부하 등의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공문 등의 증거물들을 바탕으로 올바른 비판이나 팩트폭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순신만큼 원균을 잘 아는 이도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란이 터진 임진년부터 원균이 사라지는 정유년까지, 원균과 그야말로 동고동락한 사람이 이순신이기 때문이다. [84] 방답(防踏)은 인명이 아니라 지역명이며,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충무공과는 동명이인)을 말한다. 정3품인 우수사가 아니라 한계급 아래인 종3품의 첨사가 병력을 보냈으니 현대로 치면 사단 병력이 오는 줄 알았는데 연대 병력이 온 셈. 이 우수사는 이억기 전라 우수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85] 난중일기에서는 같은해 2월 1일부터 비가 계속 내렸고, 역풍이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같은해 2월 5일. 보성 군수의 소속 함대가 비 때문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그래도 바람세를 포함한 기상 여건이 불순했고, 거기에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함대는 신안 앞바다 기지 함대들까지 우수영에 모여야 하고, 여기에 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견내량까지 이동 거리를 감안하면 원균 함대보다 10일 정도 더 수고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균은 이걸 따져보지도 않고 이억기가 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끈한거다.[86] 이같은 원균의 험담은 원균을 두둔하는 대신들에게 '원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왔지만 이순신과 이억기는 때마다 늦었기에 원균이 화가 나서 단독으로 출동하고자 했다'고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뭐병[87] 이 날은 웅포 해전을 한 날이다.[88] 禿沙伊項, 현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89] 적군도 아니고 고기잡는 자국민을 잡아다 목을 베어 공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는것이다...[90]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 대장들이다. 계속 언급되겠지만 부하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무능했다.[91]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92] 참고로 이 시기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93] 전략된 내용에서는 탐망꾼이 보고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웅천에 있던 적선 4척이 자기네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 척이 나왔는데 19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남은 배들은 부산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얘기는 이걸 공격하자는 얘기 같은데... 새벽 2시에 떠나자면 취침 중인 병사들을 깨워서 출동 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서 웅천에 도착하면 정오쯤. 수비력이 가장 탄탄할 시간이다. 때문에 작전 제의를 하려면 수사들간의 정보 분석 → 작전 입안 → 출동준비 → 출항 순으로 절차가 있는 법인데 원균은 그런거없이 그냥 가자고 한거다. [94] 6월 10일 새벽 2시에 온 원균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이 공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 계획안과 작전 회의 요청서를 보낸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출정하자고 공문을 보냈던 본인은 전날 마신 숙취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지 인사불성이었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자신이 출정하자고 요청했으면 바로 답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안을 구체화하여 다른 수사들과 논의를 하고있어야 하는데...[95]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96] 사실 이럴만한 이유도 있는게, 전쟁 초기엔 이순신도 왠만하면 경상 우수사나 영남 수사, 원 수사, 때로는 영감이라며 평범하게 적었었다. 그러나 이 해(1597년) 3~4월 '''원균의 모함'''이 시초가 되어 서울로 압송돼 죄인 취급되었다가 겨우 백의종군을 전재로 석방되었고, 죄인이었기 때문에 4월 13일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음에도 시묘살이조차 못했다.(당시엔 부모상을 당하면 전쟁 중이라도 고향에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했다. 임진왜란 직후 저술된 소설인 김덕령전에서, 왜군을 막겠다고 출정하는 김덕령에게 어머니가 "부친상을 치러야 하는데 그걸 외면하고 전쟁터에 나가냐 '''후레 자식아'''"라고 까는 부분이 있고, 이에 김덕령은 '''엄마 몰래 나가서 왜구 소탕을 해야 했다.''' 또, 몇백년은 뒤인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이 서울 진격 작전을 앞에 두고 부친상을 챙기러 내려가는 바람에 13도 창의군이 와해된 일도 있었다.)[97] 松峙: 순천시 서면.[98] 우치적 : 순천 부사.[99] 백의종군 하던 당시.[100] '여수 본영'에서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뿌리며' 하소연했다. 여수는 전라 좌수사 겸 3도 수군 통제사의 본영이고, 한산도는 둔치고 있는 진이다. 도대체 원균이 무슨 짓을 했으면 여수 본영 사람들이 이순신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뿌릴까...? 이건 원균이 부임한지 이제 겨우 석달 지났는데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짐작가능하다.[101] 전략된 내용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명령으로 편지를 보내 억지로 조상했다는 내용이 있다.[102] 원균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했다는 증언이다. 더구나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당시 머문 지역은 오늘날 합천으로 그 근방에 삼국 시절 격전지인 대야성이 위치한다. 거기에서 김춘추 사위 품석이 동일한 짓거리를 하는 덕에 백제한테 점령당하는 결과를 부르고 여기에서 화랑 죽죽이 역사상에 알려진다.[103] 申蓁. 신진.[104] 원균의 주장이 정당한 것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부산포 공략 떡밥을 뿌린건 원균 자신이었으니 동정할 필요가 없다. 자업자득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안골포와 인접한 곳에 있는 조선 육군은 김응서 경상 우병마사의 병영 뿐인데, 고작 수천 명 뿐이며, 그나마도 낙동강 하구부터 초계까지 수비 작전 중이었다. 이 병력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몰아낸다는게 말이 되는가?[105] 主將, 원균을 뜻한다.[106] 도원수 권율(權慄).[107] 맨날 되도않는 모함만 하던 원균으로부터 상석에 앉아 대접받는 꿈을 꿔서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현실에선 사고치고 총대장한테 붙잡혀 갔다는 얘기.[108] 이 내용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그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109]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 후 윤계선이란 선비가 쓴 소설이다.[110] 전원일기의 종기 아버지로 유명한 배우. 태조 왕건에서는 원균과는 정반대로 강직하고 진중하나 그로 인해 끔찍한 최후를 맞는 승려 석총을 연기했다.[111] 1992년 생. 왕과 비에서 연산군아역을, 여인천하에서 명종의 아역을 맡았다. 2008년의 천하일색 박정금을 마지막으로 연예계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112] 불멸의 이순신과 원작 소설 불멸의 이러한 내용 때문에, 불멸의 이순신은 유일하게 원균의 아역배우가 존재하는 사극이 되었다.[113] 54화에서 실험 제작했던 거북선이 진수식 때 뜬금없이 침몰하는 장면이다.[114] 이 장면을 쓴 작가 윤선주는 사극에서 나와선 안 될 무리수 스토리를 남발하여 악명을 떨친 작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사극 자체에 맞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15] 참고로 이 말을 한 이는 극중에서 주현의 매니저였던 이동욱.[116]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작전 중에 군선에 기생을 태우고 논 건 사실이나, 귀양은 엄연히 처벌이라 반성하고 근신해야 한다. 장희채처럼 빽이 든든하다면 모를까 귀양지에서 방탕하게 보내면 조정과 왕의 눈밖에 나고, 생명줄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17] 이쪽은 징비록(드라마)에서 신립을 맡았다.[118] 이일재는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에 버금가는 졸장이자 원균과 마찬가지로 사욕을 위해 이순신 장군을 모함한 바 있는 이일로 나왔었다. 야인시대에서는 두뇌파 주먹패 두목 김동진으로, 연개소문에서는 백제의 용맹스런 맹장 윤충으로, 천추태후에서는 강감찬의 부장 김종현으로,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 화랑의 믿음직하고 강직한 지휘관이며 감독관인 풍월주 호림으로 나오는 등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사극에서는 명장이자 충신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올곧은 역할을 맡는데, 어째 조선시대 사극에만 나오면 대조되는 무능한 졸장과 간신 역할 같은 악인만 맡는다는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2019년에 이일재가 폐암으로 별세하면서 그가 조선 시대 사극에서 명장이나 충신 같은 바른 역할을 맡을 일은 영원히 없어지고 말았다.[119] 작중에서 주인공인 류성룡이 전생이전에 친구가 보여준 케틀벨 저글링을 새로운 신체단련법이라 알려주며 발등이나 깨지라고 했지만 머리 맞고 죽어버리면서 효과 좋내라는 평만 남겼다[120] 해당 글에서는 당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 당파라는 이름 자체도 이미 기원전부터 사용되었다.[121] 충무공이 전과를 너무 정직하게 기록한 탓에 참수기록이 격침 기록에 비해 너무 적어 공과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는 걸 고려해보면 그야말로 개소리다.[122] 이 사람은 그 원균의 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균과는 차원이 다른 위인이다.[123] 현재 관광객들이 타는 승마용 말들도 조선시대 말들보단 체격이 크다.[124] 당연한 소리지만 공신 교서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 원균이 받아서 가치가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125]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선산의 묘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실제 묘지는 통영시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실제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은 방치된 상태이며(해당 링크의 기사는 부산일보 8월 기사, 후손들이 벌초비용을 보내고 성묘도 온다고 한다), 77번 국도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126] 그런데 정작 최재성은 이를 굴욕으로 여기지 않는 듯. 오히려 불멸의 이순신 방영 전 인터뷰에서 "원균이 세간에서 평하는 것처럼 악랄한 인간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캐스팅을 거부했을 것"이라며 원균이 역사의 피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최재성이 불멸의 이순신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외운 대사(칠천량 해전에서 죽을 때 유언)가 "이순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였음을 감안한다면 최재성은 원균을 신으로 숭배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