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

 


1. 개요
2. 왜 일어났나
3. 그 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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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간첩단 사건의 피고인으로 나온 고 박노수씨(앞줄 오른쪽) 등이 법정에 앉아 있다.
박노수 교수는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 법대를 마치고, 196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초청으로 유럽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케임브리지대 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으로 일하다 1969년 2월 귀국했다. 귀국 2개월여 뒤인 1969년 4월 29일 박 교수는 중앙정보부에 불법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1967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1]으로 당선된 김규남 의원은 1969년 5월 1일 중정에 불법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1960년대 유럽에 있던 이들이 동베를린과 평양 등을 방문한 사실을 빌미로 연행, 불법 구금하며 강압적인 수사를 벌였으며 검찰은 유럽에서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이들을 기소하였다. 박 교수는 북한 공작원에게 지령과 공작금을 받은 뒤 북한 노동당에 입당, 독일 등지에서 간첩활동을 한 혐의를, 김 의원은 대학 동창인 박 교수와 이적 활동을 한 혐의를 받았다.
1970년 대법원에서 박 교수와 김 의원의 사형이 확정되었고, 1972년 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검찰은 중앙정보부가 수사기관의 영장없이 가혹 행위를 가하며 수사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소를 하였고, 법원은 자백 외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형식적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2. 왜 일어났나


이 사건 조작의 배경에는 3선 개헌이 있다는게 일반적 분석이다. 당시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려하자 김종필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으며, 김종필계 의원들도 반대가 심한 상황이었다. 당시중정부장이던 김형욱은 이런 김종필계의 반대를 누르기위해 갖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탓에 무려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도 갖가지 이유로 중정에 끌려와 고문을 받아 결국 3선개헌에 찬성하는 쪽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형욱의 눈에 띈게 박노수와 김규남의 동베를린 및 평양 방문이었다. 당시 중정이 동백림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박노수와 김규남이 동베를린과 평양 방문 사실을 알게된것으로 보이지만 동백림 사건에서 박노수와 김규남은 빠져있다가 이 시점에 그 사실을 다시 들춰내서 간첩으로 조작한걸로 보인다. 특히 김규남이 김종필의 추천으로 전국구 의원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이 사건은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김종필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작되었을걸로 여겨진다.#

3. 그 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중앙정보부의 불법 연행과 강압 수사, 협박, 고문 등으로 박 교수 등이 허위 자백하였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이에 사형 선고 후 43년 만인 2015년 12월 29일 박 교수 등 세 명은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확정 받고 누명을 벗었다.
이후 2016년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7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였는데 2017년 정부는 유가족에게 23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1] 딱 보면 알겠지만 '''여당 국회의원'''이라는 사람까지 사형을 당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