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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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제3공화국의 유일한 집권당이자 제4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인 박정희 정부의 여당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여당이다.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국민의힘계 보수정당의 기원 중 하나로 본다. 약칭은 공화당.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굳이 정당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2인자 김종필은 일본의 의회정치에 매력을 느꼈기에 그가 설계한 대로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
김종필의 고안에 따라 중앙당·사무처 시스템 등 근대적인 조직 형태를 도입했는데, 이는 한국의 역대 정당 중 최초였다. 민주공화당 이전에 창당된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스 위주의 파벌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라는 비판을 받았었다.
2. 역사
2.1. 창당과 정권내 분파, 숙청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세력은 군사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립하여 활동하는 중 군정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약속에 따라 1963년에 만든 당이다. 그러나 군부 출신 인사들 외에도 자유당[6] , 민주당 등 기성 정치권 출신 세력, 정구영 등의 학계 인사,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내내 민주공화당의 총재를 역임했다. 하지만 민주공화당과 박정희 개인의 관계는 결코 순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의회민주주의를 불신한 박정희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으며, 민주공화당은 때때로 행정부에 반발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독재 성향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민주공화당과의 '정권 내 충돌'이 간간이 벌어지게 된다.
1969년에 벌어진 4.8 항명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문서 참조. #관련기사.
4인방이라고 불리던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의 "10.2 항명 파동"(1971년)도 있다. 4인방은 김종필의 득세를 막기 위해 키워졌으나, 이원집정부제(의원 내각제 요소 도입)를 구상하는 등 박정희 일인체제에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박정희는 오치성 내무장관을 발탁하여 기존 경찰 조직의 4인방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실미도 특수군 사건(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사건. 한진빌딩 노동자 난입사건. 기동경찰 총기 난사 사건 등으로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이 야당에 의해 표결에 부쳐졌고, 여기에 4인방이 동조하여 가결된 것이 바로 항명파동.
박정희 일인체제 구축을 위한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의 과정에서, 김종필[7] 은 물론 기존 주류 대다수가 숙청되었다. 게다가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의 '친위세력'인 유신정우회가 생겨나면서, 소외된 것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해갔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전의 8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보다 지지율이 10%나 하락하였고,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의회 정치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셈. 한마디로 제4공화국 기간 동안 민주공화당의 존재는 있으나마나한 것이었다.
2.2. 박정희의 사망과 와해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후 김종필 총재 체제가 출범하였다. 김종필은 평소 내각제에 대한 소신이 있었고 이 때문에 박정희한테 찍힌 것도 있어서인지 간선제를 못마땅해했고[8] , 민주헌법에 따라 직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했다. 연장선상에서 박찬종, 남재희, 오유방, 정동성 의원 등은 과거를 반성하자는 정풍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일장춘몽이라고 1980년 5.17 내란에 따라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다른 정당들과 함께 해산되었다. 그 후 당원들 대부분은 김종철, 이만섭을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과 전두환의 신군부가 창당한 민주정의당으로 들어갔다.[9] 이때 박찬종 등 일부는 전향해 민주한국당이나 신한민주당으로도 갔다.
직계라고 하지만 구색정당이었던 한국국민당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 후 와해되었고, 이후 구성원들은 민주정의당과 진정한 직계인 김종필이 1987년 민주화 후 창당한 신민주공화당으로 흩어졌다. 이후 이 세력들은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의 1990년 3당 합당으로 현 한국 보수정당의 실질적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민주자유당에 다수 흡수되었다.
3. 역대 당직자
4. 역대 선거결과
-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46.6% 당선
-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10/175 33.5%
-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51.4% 당선
-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29/175 50.6%
-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53.2% 당선
-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113/204 48.8%
- 1972년 제8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2357/2359 당선
-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73/146(219) 38.7%
-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2577/2578 당선
-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68/154(231) 31.7%
5. 마지막 민주공화당 출신 제10대 국회의원[10]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제3공화국 출범 직전 계승[2] 이후 당의 재산은 민주정의당에 "기부"됨[3] 지금의 서울특별시교육청 용산도서관 자리이다.[4] [image] 잘 보면 문서 상단의 로고와 달리 리본에 "자주•민주"라고 적혀있다.[5]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목록 (지역구별) [6] 주로 이기붕계 인사들[7] 김종필 개인은 10월 유신 직전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민주공화당과 김종필이 분리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김종필은 10.26 이후 민주공화당 총재가 되었음에도 정국을 주도하지 못한 채 신군부에 축출당하고 만다.[8] 박정희가 2선만 하고 물러나면 당연히 자신이 민주공화당 차기 대권 후보가 될 것이라고 여겼으나, 현실은 토사구팽이였다.[9] 신군부 세력이 정당법을 이용하여 민주공화당의 재산, 조직을 사실상 민주정의당에 흡수했다.[10]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목록 (지역구별) [11] http://www.segye.com/content/html/2009/04/15/20090415003727.html [12] http://ko.wikipedia.org/wiki/%EC%A0%95%EB%9E%98%ED%98%81[13] http://ko.pokr.kr/person/19401160 [14] 박경원 자료 [15] http://www.rokps.or.kr/m4_profile_view.asp?num=1108 [16] 정희섭 [17] 이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