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 변천사'''
'''중정'''

'''안기부'''

'''국정원'''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中央情報部
國家安全企劃部
國家情報院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Agency for National Security Planning'''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1961 ~ 1998)'''
'''정보는 국력이다 (1999 ~ 2008)'''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2008 ~ 2016.06)'''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2016.06 ~ 현재)'''
'''중앙정보부'''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image]
'''창설'''
1961년 5월 20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상급 기관장'''
대한민국 대통령
'''전신'''
중앙정보연구위원회
'''후신'''
국가안전기획부
[image]
퇴계로 쪽에서 바라본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 전경. 왼쪽 위에 있는 건물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지하실(6국)이다.'''
좌측 상단의 건물은 중앙정보부 본관의 우측에 위치했던 제 1 별관 건물로 1996년에 발파 해체되었다.
동아일보 보도
6국 건물은 위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사진의 중앙 앞쪽에 보이는 구 감찰실 건물(2017년 철거)의 오른쪽에 위치했고 서울특별시청 남산별관과 균형발전본부로 사용되었다.
2017년 8월 16일 서울시에서는 해당 건물을 지하실까지 정밀 해체하고 '중앙정보부 6국'과 부끄러운 역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 6"으로 명명했다. 해체된 지하실은 기억 6 전시실 지하에 다시 재현된다고 한다. 공사는 2018년 8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서초구로 이전하고, 남산 르네상스 계획을 세우면서 일부 건물이 철거되거나 현재 서울특별시청 남산청사,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서울종합방재센터,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중앙의 구 감찰실 건물은 tbs 교통방송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16년에 방송국이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로 이전하면서 2017년 3월 현재 철거되었다.
중앙 뒤에 바로 보이는 건물이 현재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중앙정보부 및 안기부 본관은 서울유스호스텔로 바뀌었고 맞은 편의 '''6별관'''(일명 지하 벙커. 위의 6국과는 별도의 건물이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바뀌었다.
과거 중앙정보부가 소유하고 있었던 부지 일부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중정 부장의 공관으로 쓰던 집은 현재 문학의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소방재난본부 건물 인근에 있으며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지하에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1. 개요
2. 특징
3. 중앙정보부장
4. 고문 수사
5. 역대 중앙정보부장
6. 관련 사건
7. 관련 문헌


1. 개요


대한민국의 옛 정보기관. 그 전까지 국내외 첩보 업무는 경찰사찰과에서 했었다. 이승만 시절은 경찰이 엄청난 위세를 떨쳤기에 경찰에서 첩보 업무도 했던 것.
표어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약칭은 '''중정''', 영어 약칭은 '''KCIA'''. 흔히 '''남산'''이라고도 불렸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이며 미국 중앙 정보국을 모방해서 창설했다고 스스로는 밝히고 있다. 다만 CIA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국내 파트는 FBI가 담당한다.[1][2]
흔히 중정 하면 남산을 떠올리기 쉽지만, 남산 청사는 남파간첩 및 좌익사범을 색출하는 국내정보담당 부서가 있었고 대외, 대북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해외정보 부서가 입주한 이문동 청사가 별도로 있어 각각의 역할이 나뉘어져 있었다.[3]

2. 특징


중앙정보부의 전성기에는 각 부처마다 요원들이 상주하여 공무원 동향을 감시하기도 하고 검찰, 경찰, 교정기관을 배후에서 휘두르면서 수사권 뿐만 아니라 기소권까지 실질적으로 행사했다.
형식상으로는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한 다음 검찰에 송치를 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대한민국 검찰청이 중앙정보부에서 송치한 범죄자를 거부할 수는 없었으므로 검찰은 그냥 장식에 불과했다. 교도소 역시 중정 요원들이 비전향장기수 등 좌익 재소자 사상전향 공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이후 검찰의 힘이 막강해진 것은 검찰을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조직인 안기부(중정의 후신)의 권한이 매우 약해진 것도 한 이유다.[4]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방첩 활동까지 육군 특무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권 및 월권 문제로 말이 많았던 터라 순수하게 민간의 방첩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기관의 창설이 필요했다.[5]
제2공화국 당시부터 이런 계획이 있었고 5.16 군사정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제2공화국 하에서 이런 정보기관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후락이다.[6]
일반적으로 중앙정부의 기관들 중 '~부'로 끝나는 곳의 수장은 장관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 장관'''이 되어야 하지만 '''중앙정보부 부장'''인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장관을 수장으로 하는 부는 대통령국무총리→각 부처 장관으로 이어지지만 중앙정보부는 지금의 감사원이나 국가정보원처럼 대통령 직속 기관이기 때문에 장관이 아니라 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국무회의 참석권도 없다. 단, 국가 비상 사태나 안보 회의에는 참석한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과 같이 일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은 관계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의 지위는 '''부총리'''급으로 장관보다도 높았다. 국무총리 바로 밑이었으며 역시 부총리급인 경제기획원 장관과 동급이었다. 일부 드라마들을 보면 국가안보회의에서 중앙정보부장이 국방장관 아래에 앉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설정으로 실제로는 모든 장관들의 상석이자 국무총리 바로 아래에 앉는다. 부에서 원으로 격하당한 현재도 국정원장은 장관급으로 대우한다.
2공화국 때부터 미국 CIA 한국측 인사가 창설에 도움을 주었지만 중정이 일반 정보 기관으로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수사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FBI의 수사권을 본따서 공안 사건에 한정해 수사권 발동을 가능하게 한 중앙정보부에 관한 법률이 생겨서 가능해졌다. 즉, '''검사 없는 단독 수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당연히 간첩을 잡는 목적이어야 하지만 악용된 경우가 엄청 많았다.[7]
대표적인 사건으로 대내적으로는 4대 의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대외적으로는 코리아게이트가 있다.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윤이상의 경우는 외국의 사정이고 뭐고 무시하고 일을 벌였기에 당시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기도 했었다.

3. 중앙정보부장


주로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인물들은 7대 부장인 법조인 출신 신직수[8]와 마지막 중정부장이자 초대 안기부장인 유학성(정훈 1기로 임관)을 제외하고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초대 중정부장은 김종필이며 박정희 정권과 유신 정권 시절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박정희의 측근으로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도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고,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였다.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인물들의 경우, 제3공화국에서 있었던 2인자 라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며 견제도 많이 받았다.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사람들이 대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도 이런 권력 집중의 폐해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최장기 정보부장 재임자인 김형욱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삼선 개헌이 통과된 후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박정희가 비서실장 이후락과 김형욱을 같이 잘라버렸다. 김형욱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워낙 많았기에 백수가 되자 보복을 피하려 망명길에 올라 미국에서 코리아게이트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하여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폭로했고, 그와 관련된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79년 실종되었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설이 김재규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믹서기에 던져져 살해되었다는 이야기와 차지철이 보낸 암살자가 김형욱 부장을 납치해 청와대 지하실로 산 채로 끌고 오자 박정희가 손수 카빈총으로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둘 다 도시전설이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의 발표에 따르면 김재규의 부하들이 현지에서 살해하고 낙엽으로 덮었다고 하는데, 정부 공식 발표가 이러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건 사실인 모양.
그나마 김종필은 부장 퇴임 후 6공 출범 전까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지만 국무총리를 두번 지내고 대선까지 출마하는 등 무난한 삶을 살다 2018년에 저세상 갔으며, 이후락은 중정부장에서 잘린 후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절대 충성을 약속하며 국회의원까지 지냈고 전두환 집권 이후에는 정권과 간신히 합의를 봐서 살아난 경우라고 보면 된다. 운이 좋았다지만 이 양반도 전두환 집권기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서 크게 고생하다가 말년을 허망하게 보내고 2009년에 사망했다. 본인이 사망 전에 공개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의 재직 중 벌어진 정치 공작은 전부 박정희가 모르게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한다. 정말인지 아니면 이후락이 대인배인지는 본인만이 아는 일.
역대 중앙정보부장 목록은 하단 참조.

4. 고문 수사


들어가면 제발로 나오기 힘들다는 속칭 (남산) 지하실로 악명이 높았는데 얼마나 사람들을 혹독하게 다뤘던지 중정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 중에는 꿈에서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지방에는 폐공장 등으로 위장한 분실들이 있어서 시시한 피의자들은 주로 거기서 처리했다. 연행된 이들은 입고 있던 평상복을 벗고 국방색 민무늬 군복을 입은 채 수사를 받았으며, 특히 간첩사건 같은 경우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잡혀가 무수한 곤혹을 치렀다. 심지어 수사관들은 고문으로 인한 상흔을 숨기기 위해 생고기 등으로 멍을 뺐다. 고문에는 나이와 지위고하가 없기에 1971년에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등 민주공화당 실세 4인방이 오치성 내무부장관 항명파동 건으로 끌려와 무수한 고문을 당했으며, 특히 김성곤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카이젤 수염이 뽑혀졌다.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전두환 시절에 거슬리는 놈들 잡아다 물 먹이고 두들겨팼다는 얘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9] 박정희 시절, 중정은 안기부보다 훨씬 더 자주, 더 잔혹하게 고문했다. 그 수법은 CIA와 슈타지는 쨉도 안되고 스탈린 시절의 NKVD, 일제강점기일본 헌병, 중남미 독재국가의 비밀경찰이나 중국이나 북한 정도는 되어야 견줄 수 있었다.
5.16 이후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낸 송원영은 중정에 많은 시달림을 당했는데 맹장염 수술 이후 마취에서 깨어나자 '''"여기 정보부요?'''" 라고 묻더랜다. 그의 부인은 "여긴 서울대학병원인데..." 라고 대답했으나 송원영은 희미한 목소리로 "'''아냐. 명칭만 그럴 거야.'''" 라고 대답했다고.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 겸 번역가로 일하던 안정효의 회고담에 의하면 사무실을 이전하려고 출처가 불분명한 어떤 회사의 건물을 샀는데 알고 보니 그 '회사'가 중앙정보부의 분실이었다고 한다. 급히 이사하느라고 고문실을 철거도 안한 채 그대로 넘겨주고 갔는데 섬뜩한 구조였다고.
이런 모든 수치들은 국정원이 안고 가야 할 부담이다. 이런 과거 때문인지 1960년생 이전 태어난 사람 중 상대방을 협박할 때 자신이 중앙정보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만큼 정보부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크다는 이야기.
이 시절 중정의 친구로는 보안사가 있는데, 군 소속이지만 하는 짓거리는 똑같다.

5. 역대 중앙정보부장




6. 관련 사건



7. 관련 문헌


[1] 미국은 정보분야에서도 국내와 국외를 엄격히 분리하는 정책을 취하여, 국내정치에 대한 개입에 관해서는 CIA보다 FBI가 구설수에 오른다. 가령 존 에드거 후버가 국장을 맡던 시절의 미국 FBI는 미국 주요 유력 인사들을 사찰해 그들의 여러 비밀들을 쥐고 있었고, 덕분에 후버는 죽을 때 까지 FBI 국장으로 재임하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룰 수 있었다.[2] 이러한 시스템은 영화 시카리오 시리즈에서 잘 묘사가 되는데 CIA요원들이 미국내에서 작전할 일이 생기자 국내 요원인 FBI 요원들을 대동하는 등, 그러다 마찰이 생기자 서로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등 두 정보 기관의 알력 다툼과 암투가 잘 묘사되어 있다.[3] 현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4] 그래서 일부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에서는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5] 이때 육군 특무대장이 그 유명한 김창룡이었으니 인권이나 월권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물론 김창룡만 있는 게 아니고 원용덕의 헌병 사령부도 야당 정치인 등 민간인 대상 감찰 업무를 수행한 막장 오브 막장이었고 '김성주 치사사건'이나 '동아일보 불온선전물 사건' 등의 정치공작을 진행한 바 있다.[6] 실제로 이후락은 5.16 직후 체포되기까지 했다. 제3공화국때 정보부 수장이 되었다는 점을 보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이후락이 능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7] 초기 중앙정보부법에는 검사의 지휘권 발동이 불가능했지만 너무 초법적 권한이라는 반발을 사자 개정되어 사라지긴했다.[8] 군법무관으로 복무했을 뿐 직업군인은 아니었다.[9]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물론 이 쪽은 경찰이 행한 짓이지만 5공시절에 사람 고문하는 것은 경찰이나 안기부나 거기서 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