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삼국지)
1. 劉晙
삼국지연의의 가공인물
유장 수하의 장수로 마한과 함께 면죽관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이 때 유비는 가맹관에서 마초를 항복시킨 후에 면죽관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유비에게 보고가 들어오면서 조운이 유준과 마한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해서 출진했는데, 유준은 조운의 창에 죽었고 유비가 마초를 대접하는 자리를 다 차리기도 전에 조운이 그 머리를 잔칫상에 바쳤다.
유준과 마한의 살아남은 부하들은 성도로 돌아가 유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1.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6에서는 성도의 전투에서 등장해 아군의 본진과 가까운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삼국무쌍7에서는 성도의 전투에서 등장해 남쪽의 5개의 진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북쪽의 3개의 진채 중에서 여예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동쪽에 해당하면서 장임이 지키는 면죽채가 있는데, 면죽채가 함락되면 이대로 버릴 수 없다면서 면죽채 쪽으로 촉군을 공격하기 위해 그 방향으로 군사를 이끌고 간다.
삼국지 시리즈에선 삼국지 3에서 등장한다.
2. 劉俊
(? ~ 268)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여흥이 손서를 죽이고 위나라에 투항하자 곽익이 교지, 일남, 구진 등을 평정해 교주를 빼앗긴 상황이었는데, 유준은 265년에 교주자사로 임명되었고 교주를 되찾기 위해 268년 10월에 수칙, 고용 등과 함께 앞뒤 세 갈래로 3차례에 걸쳐 교지를 공격했지만 모두 양직에게 격파되었다. 양직이 모경, 동원 등을 파견해서 합포를 공격하자 합포성에서 진나라의 군사와 싸우다가 수칙과 함께 전사했으며, 이 때 울림과 구진 등이 진나라에 귀부했고 패배한 오나라의 병사들은 합포로 흩어졌다.
그가 죽은 후에는 후임으로 우사가 임명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면서 도황이 교주자사에 임명되어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냈다.
2.1. 미디어 믹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에서 등장하는데, 219년 출생으로 설정되어 239년부터 재야 장수로 나와 합포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62/무력 58/지력 40/정치력 57. 제사, 누선, 투석을 가지고 있다.
3. 庾峻
(? ~ 273)
서진의 인물. 자는 산보(山甫). 유민의 아버지.
영천군 언릉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생각에 재치가 있었으며, 이전에 경사로 나가 소림에게 학문을 배웠다. 소림이 늙어서 병에 걸렸다고 해서 집에 머무르자 가서 문안하면서 통곡했다.
군의 공조를 역임하고 계연으로 천거되었다가 주의 종사로 벽소되었으며, 태상 정무가 유준을 보고 큰 그릇이라 여겼고 박사로 추천되었다. 당시 장자, 노자 등이 중시되어 유교 경전과 역사 서적이 무시되자 이에 대해 염려하면서 조용히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조모가 태학으로 행차해서 상서에 대해 질문하자 왕숙의 이론을 지지하는 답변을 했는데, 조모는 왕숙의 이론을 대놓고 공격하는 발언을 하자 굽혔다. 비서승으로 옮겼다가 장안의 큰 옥사를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해서 유준이 시어사에 임명되어 처리하자 조야에서는 공정하다고 칭찬했다.
진나라가 건국되자 관중후에 봉해졌고 사공장사, 비서감, 어사중승을 지내다가 시중으로 옮겼고 간의대부를 더했다. 황제의 가까이에서 시경을 강론했고 중서자 하소와 시경의 풍, 아, 정변설에 대해 논쟁하다가 하소가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풍속은 다른 사람과 서로 비교하고 예의바르면서 사양하는 태도가 침체되자 이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며, 당시의 겉만 화려한 풍조를 싫어하고 명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글을 너무 크거나 많게 하지는 않았다.
273년에 사망해 조복 1구, 옷 1벌, 30만 전을 하사했으며, 조서를 통해 아침에 죽었으므로 저녁에 빈소를 차려 복건과 포의를 갖추고 날짜를 골라 장사지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