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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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錫金
1945년 12월 20일 (78세) ~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웅진그룹 창업주 겸 회장으로, 아호는 문봉(文奉)이다.
영업사원 출신으로 시작해 30대 그룹 회장까지 올라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국의 다른재벌들과 다르게 일가 친인척이 납품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국가의 기관사업을 바탕으로 성장하지 않고 본인의 힘만으로 30대 그룹을 만들은 샐러리맨 신화이다. 그러나 극동건설로 인한 부실로 법정관리에 가게 되며 신화가 빛을 바랬다. 그러나 윤회장은 1년 6개월만에 채무를 모두 조기상환하고 법정관리를 졸업한다. 재계에서 법정관리를 겪고도 유일하게 감옥에 가지않고 그룹을 다시 일군 인물로 행적 하나하나에 많은 의의가 있다.
1945년, 충청남도 공주군 유구면 (現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의 옛 이름이 '웅진'인데, 이는 후일 세울 그룹사의 명칭으로 따오게 된다.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후 1971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주)에 입사하여 출판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는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열심히 일하며 뛰어난 영업실적으로 한창기 대표이사의 눈에 들자,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사업국 상무를 지냈으나, 1980년에 갑작스럽게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후, 도서출판 헤임인터내셔널을 세우고 본격적인 사업 커리어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동명의 일본회사로부터 영어교재 '메슬'을 수입하다가 1981년에 최초의 자체교재 '헤임고교학습'을 만들었다. 1982년에 편집개발부를 발족해 출판업 진출을 결정했다. 1983년에 사명을 웅진출판으로 바꾸고 아동도서 출판업을 주로 하다가 1987년 동일산업을 인수하고 이를 웅진식품으로 바꾸며 '정신문화에서 생활문화까지'라는 모토를 만들 기초를 형성했으며, 1989년, 한국코웨이[1] 를 세우면서 정수기 렌탈 시장에 뛰어든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영역이었으나 방문판매의 대가인 윤석금의 전략 덕분인지 곧 정수기업계 부동의 1위로 올라선다.
1990년부터 그룹체제로 바꾸고 회장이 되며 단기간의 그룹의 외형을 갖추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출판, 식품, 정수기 사업을 축으로 안정적 기반을 다진 윤 회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사업다각화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경공업, 서비스업 중심의 기업에서 중화학공업(웅진에너지, 웅진케미칼), 건설(극동건설), 금융(서울저축은행)에 이르는 원래 사업과 상관없는 다수의 기업체를 세우거나 인수했다. 그러나 그 말로는 비참했다.
시작은 극동건설이었다. 이미 한 차례의 법정관리를 받았던 극동건설의 인수는 상당한 우려를 불러왔다. 그러나 윤석금은 자신만만했다. 2007년 극동건설 인수 후 일시적인 부동산 시장의 활성화로 회생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으나...
2012년 150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결국 부도처리가 되었다.
이후로 다른 계열사까지 통째로 흔들릴 지경에 이르자 윤석금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대로 버티다가 망할 것이냐, 아니면 몸통을 내줘서라도 그룹을 살릴 것이냐.
윤석금은 결국 주력 계열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웅진코웨이는 MBK파트너스에 팔려 코웨이로 이름이 바뀌었고, 웅진식품은 2013년에 한앤컴퍼니에, 웅진케미컬은 일본의 도레이에 넘어가 도레이케미칼로 이름이 바뀌어 2019년 도레이첨단소재로 합병됐고, 또한 이 무렵에 산하 게임단인 웅진 스타즈도 해체되었다.
이렇듯 그룹이 조각조각 찢어져나가는 과정에서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게된다.
윤회장이 서울저축은행이 부도위기에 빠지자 계열사들에게 서울서축은행을 불법적으로 지원하게했다는 것이다.
(법정관리 당시 사기성 어음발행 혐의 등 언론에서 다수의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검찰조차 혐의없으로 결론내었다. )
윤회장은 서울저축은행이 부도가 나게 되면 사회적 피해가 커지기 때문에 개인사재 1,000억을 넣어 정상화를 시켰다고 말했다. 정상화된 저축은행이기에 불법지원이 아니고 계열사가 투자를 한것이라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차명계좌, 분식회계, 횡령이나 세금포탈 등은 없었다.
윤회장은 서울저축은행 불법지원 건 등으로 1심에서는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되다. 그러나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30대 그룹의 오너였기에 여론을 의식해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나 실질적으로 구속을 하지 않고 그 판단을 고법으로 넘겼다는 평가이다.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게되고, 검찰과 윤회장 모두 상고를 하지 않아 형이 확정된다.
이로써 윤석금 회장은 30대 그룹 오너중에 유일하게 검찰조사때부터 형이 확정될때까지 구속이 안된 오너가 되었다. 또한 30대 그룹 오너 중 유일하게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음에도 검찰이 상고를 진행하여 대법원까지 가지 않은 오너가 되었다.
배임혐의가 있었지만 평소에 투명경영을 강조하며 횡령이나 분식회계 등을 멀리한 것이 결국 윤회장을 살린것이다.
그룹사의 사정 악화와 회장의 구속 등으로 망하는듯 했던 웅진그룹은 윤 회장의 빠른 결단력으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웅진에너지 중심의 태양광 기업으로서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전 그룹사로서의 위용은 사라졌지만, STX처럼 그룹 자체가 없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상태이다. 두산그룹이 위기 때 주력 사업인 OB맥주를 매각하고 위기에서 벗어난 후 중공업 그룹으로 성공적으로 변모했듯이, 웅진 또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尹錫金
1945년 12월 20일 (78세) ~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웅진그룹 창업주 겸 회장으로, 아호는 문봉(文奉)이다.
영업사원 출신으로 시작해 30대 그룹 회장까지 올라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국의 다른재벌들과 다르게 일가 친인척이 납품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국가의 기관사업을 바탕으로 성장하지 않고 본인의 힘만으로 30대 그룹을 만들은 샐러리맨 신화이다. 그러나 극동건설로 인한 부실로 법정관리에 가게 되며 신화가 빛을 바랬다. 그러나 윤회장은 1년 6개월만에 채무를 모두 조기상환하고 법정관리를 졸업한다. 재계에서 법정관리를 겪고도 유일하게 감옥에 가지않고 그룹을 다시 일군 인물로 행적 하나하나에 많은 의의가 있다.
2. 세일즈맨에서 그룹사 회장이 되기까지
1945년, 충청남도 공주군 유구면 (現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의 옛 이름이 '웅진'인데, 이는 후일 세울 그룹사의 명칭으로 따오게 된다.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후 1971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주)에 입사하여 출판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는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열심히 일하며 뛰어난 영업실적으로 한창기 대표이사의 눈에 들자,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사업국 상무를 지냈으나, 1980년에 갑작스럽게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후, 도서출판 헤임인터내셔널을 세우고 본격적인 사업 커리어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동명의 일본회사로부터 영어교재 '메슬'을 수입하다가 1981년에 최초의 자체교재 '헤임고교학습'을 만들었다. 1982년에 편집개발부를 발족해 출판업 진출을 결정했다. 1983년에 사명을 웅진출판으로 바꾸고 아동도서 출판업을 주로 하다가 1987년 동일산업을 인수하고 이를 웅진식품으로 바꾸며 '정신문화에서 생활문화까지'라는 모토를 만들 기초를 형성했으며, 1989년, 한국코웨이[1] 를 세우면서 정수기 렌탈 시장에 뛰어든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영역이었으나 방문판매의 대가인 윤석금의 전략 덕분인지 곧 정수기업계 부동의 1위로 올라선다.
1990년부터 그룹체제로 바꾸고 회장이 되며 단기간의 그룹의 외형을 갖추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3. 사업다각화와 몰락의 시작
출판, 식품, 정수기 사업을 축으로 안정적 기반을 다진 윤 회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사업다각화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경공업, 서비스업 중심의 기업에서 중화학공업(웅진에너지, 웅진케미칼), 건설(극동건설), 금융(서울저축은행)에 이르는 원래 사업과 상관없는 다수의 기업체를 세우거나 인수했다. 그러나 그 말로는 비참했다.
시작은 극동건설이었다. 이미 한 차례의 법정관리를 받았던 극동건설의 인수는 상당한 우려를 불러왔다. 그러나 윤석금은 자신만만했다. 2007년 극동건설 인수 후 일시적인 부동산 시장의 활성화로 회생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으나...
2012년 150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결국 부도처리가 되었다.
이후로 다른 계열사까지 통째로 흔들릴 지경에 이르자 윤석금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대로 버티다가 망할 것이냐, 아니면 몸통을 내줘서라도 그룹을 살릴 것이냐.
윤석금은 결국 주력 계열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웅진코웨이는 MBK파트너스에 팔려 코웨이로 이름이 바뀌었고, 웅진식품은 2013년에 한앤컴퍼니에, 웅진케미컬은 일본의 도레이에 넘어가 도레이케미칼로 이름이 바뀌어 2019년 도레이첨단소재로 합병됐고, 또한 이 무렵에 산하 게임단인 웅진 스타즈도 해체되었다.
4. 배임 혐의와 구속
이렇듯 그룹이 조각조각 찢어져나가는 과정에서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게된다.
윤회장이 서울저축은행이 부도위기에 빠지자 계열사들에게 서울서축은행을 불법적으로 지원하게했다는 것이다.
(법정관리 당시 사기성 어음발행 혐의 등 언론에서 다수의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검찰조차 혐의없으로 결론내었다. )
윤회장은 서울저축은행이 부도가 나게 되면 사회적 피해가 커지기 때문에 개인사재 1,000억을 넣어 정상화를 시켰다고 말했다. 정상화된 저축은행이기에 불법지원이 아니고 계열사가 투자를 한것이라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차명계좌, 분식회계, 횡령이나 세금포탈 등은 없었다.
윤회장은 서울저축은행 불법지원 건 등으로 1심에서는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되다. 그러나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30대 그룹의 오너였기에 여론을 의식해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나 실질적으로 구속을 하지 않고 그 판단을 고법으로 넘겼다는 평가이다.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게되고, 검찰과 윤회장 모두 상고를 하지 않아 형이 확정된다.
이로써 윤석금 회장은 30대 그룹 오너중에 유일하게 검찰조사때부터 형이 확정될때까지 구속이 안된 오너가 되었다. 또한 30대 그룹 오너 중 유일하게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음에도 검찰이 상고를 진행하여 대법원까지 가지 않은 오너가 되었다.
배임혐의가 있었지만 평소에 투명경영을 강조하며 횡령이나 분식회계 등을 멀리한 것이 결국 윤회장을 살린것이다.
5. 태양광 사업으로의 사업 중심 이동
그룹사의 사정 악화와 회장의 구속 등으로 망하는듯 했던 웅진그룹은 윤 회장의 빠른 결단력으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웅진에너지 중심의 태양광 기업으로서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전 그룹사로서의 위용은 사라졌지만, STX처럼 그룹 자체가 없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상태이다. 두산그룹이 위기 때 주력 사업인 OB맥주를 매각하고 위기에서 벗어난 후 중공업 그룹으로 성공적으로 변모했듯이, 웅진 또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6. 가계도
-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1945 ~ ) / 妻 김향숙
- 1남 윤형덕 웅진투투럽 대표이사 (1977 ~ )
- 2남 윤새봄 놀이의발견 대표이사 (1979 ~ ) / 妻 유설아 배우 (1984 ~ )
- 1남 윤시훈 (2015 ~ )
[1] 1992년, 웅진코웨이로 사명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