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알 만수르
재위 946년 5월 17일 ~ 953년 3월 19일
생몰 914년 1월 ~ 953년 3월 19일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3대 칼리파. 부왕 때에 발생한 베르베르 인들의 카와리지파 반란을 이어받은 이스마일은 다른 베르베르 유목민인 지리 부족의 도움으로 947년 그를 진압하였고 이에 승리자, 즉 알 만수르로 칭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새로운 수도 엘 만수리야 (المنصورية)를 건설하곤 그곳으로 천도하였다. 같은해인 948년, 그는 시칠리아를 재정복하며 알 칼비를 총독으로 두었고 그의 후손들은 1053년까지 아미르로서 섬을 다스렸다. 서쪽에선 모로코를 두고 후우마이야 왕조와 대결하는 동시에 알 만수르는 이집트를 넘보기 보다 이프리키야 본토의 재건에 공을 들였다. 953년, 그는 안정된 제국을 남긴채 병사하였다. 이에 아들 알 무이즈가 계승하였다.
2. 치세
이스마일은 914년 라카다에서 왕자 시절의 알 카임과 아글라브 왕조의 마지막 아미르 지야다탈라 3세의 노예였던 카리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카심이 있었음에도 훗자 (후계자)로 책정된 이스마일은 946년 4월 12일에 공식적으로 차기 이맘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부왕이 사망하자 이맘으로 즉위하였다. 이는 슬라브 출신 환관이었던 자우하르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2.1. 승리왕
946년 5월, 자우하르의 친위 쿠데타와 함께 즉위한 이스마일은 수스에서의 승전보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카이라완의 봉기 소식에 친정에 나선 이스마일은 5월 28일 도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6월, 이스마일은 카이라완 외곽에서 '신의 대리자'를 상징하는 장막 아래에서 '알리의 검'으로 알려진 두을 피카르를 차고 마크라드와의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마일은 부왕 알 카임에게 그 승리의 공을 돌렸다. 이후로 약 2개월간 카이라완을 공격하던 마크라드는 마침내 8월 14일 포위를 풀고 아우레스 산지로 철수하였다. 한편 같은해 마크라드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우마이야 함대는 그의 패배를 전해듣곤 회군하였다. 그리고 마크라드의 후방을 괴롭히던 음실라 총독 알리는 베자를 수복하고 카이라완의 파티마 군대와 합류하였다. 10월 25일, 이스마일은 불어난 군대와 함께 직접 제리드로 남하하여 마크라드의 추격에 나섰다.
946년 12월 초엽, 이스마일은 반군이 장악한 마지막 항구 도시인 비스카라를 수복하였고 그곳에서부터 서쪽의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투브나를 점령하였다. 이에 마크라드는 마카라에서 파티마 군대와 맞섰지만 12월 9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서쪽의 자발 살라트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스마일은 음실라를 거쳐 그를 추격하였는데 마크라드는 파티마 군대를 회피, 우회하여 음실라를 포위하였다. 이에 이스마일은 구원에 나서 음실라에 입성하였다. (947년 1월 30일) 재차 달아난 마크라드는 그해 3월과 4월 두차례에 걸쳐 추격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접전 끝에 모두 패배하였다. 이후 마크라드는 알제리 북부의 키야나 성채 (60년 이후 바니 함마드 성채가 그 부근에 세워짐)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4월 26일 시작된 최후의 공성전은 칼라트 키야나가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까닭에 3개월간 이어졌다.
947년 8월 13일, 요새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반란군은 밤을 틈타 마크라드와 아부 암마르를 밖으로 피신시키려 하였지만 파티마 군대의 습격으로 무산되었다. 아부 암마르는 살해되었고 마크라드는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채 포로가 되었다. 이스마일은 죽어가던 자신의 적수를 친히 심문하였고 그의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였다. 8월 19일, 결국 마크라드는 부상이 도져 사망하였다. 그의 시체는 불태워졌는데 그 전에 벗겨낸 피부는 짚을 넣어 박제된 후 카이라완과 알 마디야의 개선식 때에 진열되었다. 마크라드의 아들 파즐은 잔당들을 이끌고 아우레스 산지와 가프사 오아시스에서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948년 6월 토벌군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이후 마크라드의 남은 아들들은 안달루스로 망명하였다. 5년여간 파티마 조를 뒤흔든 반란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이스마일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고 이에 그는 '알 만수르'라 칭하며 정식으로 이맘-칼리파로 즉위하였다.
2.2. 안정적인 내치
마흐디가 오기 전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닷잘, 즉 적그리스도 역할의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가 제거되자 이제 파티마 제국은 진정한 마흐디의 시대를 준비하였다. 알 만수르는 카디 아흐마드 알 말와루디 등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할 캐논의 집필을 맡겼고 말리키 법학파에게도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여 모두를 포용하는 지도자가 되려 노력하였다. 한편 반란을 겪으며 내륙의 중요성을 절감한 알 만수르는 카이로완에서 2km 남쪽으로 떨어진 외곽에 알 사브르 알 만수리야 (지속적인 승리)라는 궁전 도시를 세웠다. 반란 당시 파괴된 옛 수도 라카다의 자재를 활용해 지어진 100 헥타르의 도시는 바그다드처럼 원형도시로 지어져 압바스 칼리파와의 체제 경쟁을 상징하였다. '대중들의 도시' 카이라완에는 40여년만에 말리키 학파 출신의 카디가 선출되었고 '이맘의 도시' 알 만수리야에는 파티마측 카디가 선임되어 두 축의 공존을 상징하였다. [1]
948년, 마크라드의 반란으로 인해 일어난 혼란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시칠리아에 튀니스 총독 하산 알 칼비가 파견되었다. 그는 팔레르모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시칠리아에 남은 영토에 대한 습격을 중단하는 대가로 동로마 측이 지불하던 연공을 다시 받아내었다. 이후 동로마 당국은 후우마이야 왕조와 동맹을 맺었고 코르도바의 대사원에는 비잔틴 모자이크가 장식되었다. 그러자 하산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를 침공,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에 동로마 당국은 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952년) 한편 이듬해 3월 만수르는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마아드 알 무이즈는 부친의 공신이기도 한 자우하르의 도움을 받아 친족들을 알 마디야에 감금시키고 이맘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제 2의 건국자' 알 만수르 때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파티마 왕조는 찬란한 전성기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1] 마이클 브렛은 이러한 도시/궁전의 분리가 이전 아글라브 왕조가 라카다를 세운 것과 비슷하다고 평가하였는데 동시에 대중들과 떨어진 마디야 대신 카이라완으로 돌아온 것은 보편 제국을 세우려는 취지의 발현이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