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리지파
الخوارج (al-Khawārij)
1. 개요
초기 이슬람의 한 분파. 하리지, 하와리지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과의 협상을 반대하며 자신의 뜻과 다른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상은 '심판은 오직 신에게 속한다'는 그들의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극단적인 평등주의을 주장하여, 하층민들과 흑인 노예들의 지지를 받았다.이슬람 움마에서 발생한 최초의 분파
2. 교리
"하나님 외에 심판은 없다."는 규칙에 따라 꾸란 지상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시아파가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를 중시하는 것에 비해 이들은 공동체 내부의 합의를 중시하였다.
3. 역사
중재는 오직 신 만이 가능하다
4. 성립기
카와리지, 혹은 하리지파의 형성은 3대 칼리파 우스만 사후의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 대한 바이아 (충성 맹세, بَيْعَة )를 거부한 세력들이 우마이야 가문의 주도 하에 반란을 일으키자 알리는 토벌군을 이끌고 657년 7월 시핀에서 그들과 격돌하였다. 전황은 칼리파 군대에 유리해졌고 이에 궁지에 몰린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병사들의 창 끝에 쿠란 구절을 달고 '쿠란의 심판에 따르자'며 알리에게 협상을 제안하였다. 쿠란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던 알리는 무슬림끼리의 유혈 충돌을 끝내고자 승리를 목전에 두고도 이를 수용하였다. 656년 낙타 전투 이후 계속된 전쟁에 지친 군대의 여론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 진영 내에서 바누 타밈을 중심으로 주전론자들이 협상에 반발하였다. 이는 무아위야의 기만책에 불과하며 '오직 알라만이 진정한 심판자'이니 정명에 의거하여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가 협상을 지속하자 그들은 칼리파 진영을 이탈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중재를 따르는 것은 신의 명령을 인간의 판단으로 대체한 것'이라며 알리와 무아위야를 비난하였다. 한편 알리와 무아위야의 협상은 각각 양측의 대표를 맡은 아부 무사 알 아슈아리와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사이에서 진행되었는데 후자가 대화를 주도하며 결국 알리와 무아위야 모두 사퇴하고 움마의 슈라, 즉 공동체의 협의에 맡기기로 하였다. (658년 2월) 하지만 무아위야 측이 협정을 위반하고 칼리파를 칭하자 알리 역시 협정 파기를 선언하며 내전은 장기화 될 조짐을 보였다.[1] 이 무렵 이탈자들, 즉 카와리지 측은 알리에게 그가 신 대신 인간의 중재를 받아들인 '죄'를 인정하고 참회한다면 칼리파 진영에 복귀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결정이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알리는 참회를 거부하였다.
결국 카와리지에게 알리는 '알 카피르', 즉 비신자로 규정되었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를 세우며 또다른 전쟁으로 이어졌다. 알리는 쿠파에서 출정하여 미래의 바그다드 동쪽에 위치한 나흐라완에서 카와리지 군대를 격파하였다. (658년 7월 17일)[2] 이 전투에서 카와리지 측은 주력군의 전멸과 초창기 지도자인 압달라 이븐 와흐브 알 라시비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카와리지는 알리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증오심을 극대화시켰다. 한편 비슷한 시기 아미르 이븐 알 아스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후 무아위야가 이라크 북부를 정복하며 알리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그리고 661년 1월 29일[3] , 카와리지 암살자 아브드 알 라흐만 이븐 물잠이 쿠파의 대사원에서 라마단 기도 중이던 알리를 암살하였다. 칼리파 알리의 암살은 순니와 쉬아를 막론하고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카와리지는 모두의 적으로 공인되었다.
그들 중에서 아미르 알 무미닌으로 압둘라 이븐 와합 알 라시비를 선출하였다. 그는 알 아즈드 지역의 촌락 라시브 출신의 평범한 무슬림이었는데 쿠라이쉬 부족 출신 칼리파를 주장하던 당시 순니와 알리 가문의 칼리파를 주장하던 쉬아 무슬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리지파는 원래 1차 피트나의 시핀 전투에서 4대 정통 칼리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편에서 무아위야 이븐 수피안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알리가 무아위야의 책략에 넘어가 협상을 하려 하자, 주로 젊은 층으로 이루어졌고 최전선에서 용감히 싸우던 그들은 알리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하여 진영을 이탈하였다.
그리고 협상이 진행 중이던 661년 1월 27일, 무아위야에 의해 매수된 하리지 파의 아브드 일 라흐만 이븐 물잠이 쿠파의 대모스크에서 라마단 기도 드리던 알리를 독이 묻은 단검으로 찔러 죽이며, 하리지 파는 알리의 후예가 칼리파가 될 수 있다던 시아파 전체의 적이 되었다.
물론 하리지파는 무하마드의 일족 쿠라이쉬 부족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수니파 역시 적대하였으며 이후 이라크 남부 바스라 일대에서 일어난 반 잔즈 반란에서도 하리지 파는 에티오피아 노예 흑인도 칼리파가 될수 있다고 설파하며 활약하였다. 하리지파는 여러 분파로 갈라졌으나 그 강경 극단적 태도로 인하여 거의 소멸하고 현재는 가장 온건파인 이바디파가 오만에서 존속하고 있다.
하리지 파의 평등 교리는 당시의 약자인 흑인, 여성, 노예 등을 포함한 그 누구나 칼리파가 되어 신의 뜻을 대신할 수 있다고 설파하여, 중세의 이단아이자 이슬람의 민주주의파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서북아프리카에서도 적지 않은 하리지파들이 꽤 있다.
일부에서는 최초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 보기도 하지만 정작 현재 하지리파를 계승한 이바디파는 온건적인 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현대적인 의미에서 테러질하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라 항목에 나와있는 신학적, 종교 내부적 의미로 근본주의적 분열 집단이었다는 의미이다.
[1] 합의에 따라 알리는 칼리파 퇴위 의사를 밝혔지만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알리가 무아위야의 칼리파위를 인정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미 알리는 쿠파로 회군하여 군대를 해산한 상태였고 재차 군대를 모았지만 오직 안사르 만이 호응하여 무아위야 측에 제대로 반격할 수 없었다[2] 히즈라력으로는 38년 사파르 9일[3] 히즈라력으로는 40년 라마단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