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1854)

 




1. 개요
2. 일생
2.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결과
2.2. 사이비 사학
3. 참고문헌


1. 개요


(1854~1922)[1]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자진 해산한 고부 민란을 과하게 탄압하여 동학 농민 혁명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 친일행위가 너무 분명해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친일인명사전 모두 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탄압한 일진회는 1908년 12월 이전에 활동한 간부는 자위대 따위 다른 활동경력이 없으면 친일파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2]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다.

2. 일생


1854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출생한 곳은 경기도 안성, 본관은 전주, 자는 경도이며 이중환의 양부다.[3]
1873년 식년시 생원3등 153위로 입격하고, 1885년 증광시 병과 8위로 합격해 9월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된다. 1887년 10월에 영국과 독일과 러시아와 이탈리아와 프랑스 주재 참찬관을 거치고, 1890년 9월 남양부사를 거치고, 1892년 4월에 장흥부사를 거쳤다. [4]
1894년 2월에 동학농민전쟁에서 고부군 안핵사에 임명되고 농민들을 탄압, 학대, 약탈을 했고 4월부터 1895년 6월까지 경상북도 금산군에 유배됐다. [5] 사면후 1897년 2월 중추원 2등의관을 지내고, 1899년 9월 평리원 재판장을 내고, 1900년 4월부터 1907년 7월까지는 여러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지낸다.[6] 1901년 1월부터 3월까지 특명전권공사로 미국에서 활동했고 귀국 직후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고, 5월 주일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된다.[7] 1902년 8월 의정부 참찬으로 비서원경, 장례원 장례, 규장각 학사를 겸한다. 1904년 3월에 중추원 부의장, 5월에 내부대신, 9월 육군부장, 1905년 3월에 중추원 찬의를 역임한다.[8] 1905년 11월 규장각 한사에 임명되고 을사늑약 채결을 무효화하고 매국의 적신들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9] 1906년 6월에 궁내부대신 인시서리사무와 예식원경에 임명되고 8월부터 11월까지 비서감경과 경효전 제조 등을 역임. 1907년 2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고 나인영, 오기호 등 을사오적 살해 기도에 운동자금을 제공하다 4월 경무청 고문부에 체포된다. 평리원 평결로 유형 10년에 처해져 7월부터 1908면 3월까지 전라남도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1908년 8월 기호흥학회 찬무원을 맡고 11월에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고 1909년 7월에는 광부의 친목과 단결을 목적으로 광부구원회를 조직했다.[10]
1908년에는 친일단체인 대한산림협회에 참여하였다.[11]
1910년 8월에 일본은 조선귀족이라는 특수계급을 창출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강점과 함께 일본은 일본의 화족제도를 준용하여 '조선귀족'이라는 특수계급을 창출하였다. 일본이 이 특수계급을 만드는 것은 오키나와, 타이완과는 다른 조건과 다른 식민지 경로를 가진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시행하는 데 '''기존의 지배계급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 체제 내로 포섭하고 조선귀족에 서작된 인물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배 초기에 직면하게 될 적잖은 정치적 부담과 저항을 다소나마 완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3-1, 2009, 257

일제가 강점 직후 조선귀족이라는 특수계급을 창출하였던 의도는, 대한제국이라는 구체제를 식민지 조선이라는 식민지 권력 질서로 재편하기 위한 구조적인 필요성과 함께 '황실의 번병'이라는 화족과 유사한 지위와 세계관을 부여함으로써 '''구 지배계급에 대한 동화와 자발적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사회 문화적 필요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3-1, 2009, 259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이용태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용태는 '''너무 기쁜 나머지 신발을 신은 채 방에 들어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남작을 받은 것에 대해 "희열"을 느낀다'''.[12][13] 1911년 1월에 은사공채 2만 5천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2년 8월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에 종5위에 서임되었다. 1915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18년 12월에 정5위로 승서된다.[14]
고종의 충신과 친일파 행적이 모순되지 않고 상반되지 않는점을 보여주는 인물.

2.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결과


41

이름:

이용태

생몰년:

1854~1922

친일반민족행위:

남작

은사공채 2만 5천원, 한국병합기념장, 정5위 서위

적용법호:

7호

19호

선정결정:

30차(07.02.27)

39차(07.07.10)[15]


2.2. 사이비 사학


2019년 12월에 이용태를 미화하는 주장이 있으나 그 주장의 근거가 전문가의 논문이 아니고 1차 사료조차 아닌 '''네이버 블로그'''다. 네이버 블로그를 사실이라 주장하는 측은 블로그 글의 출처가 주한일본공사관기록문서라고 주장하나 그 주장에 대한 증거가 없다. 아닌게아니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문서의 교서본은 '''28권'''인데 28권중 어디서 가져온건지도 모른다. 즉 출처라면서 출처의 어디인지 모른다. 오히려 근거라 주장된 글의 대부분은 블로그가 출처다. 사료해석에 필수인 시대맥락 파악력도 신뢰성을 저하한다. 시대맥락을 파악할 전문가의 연구가 출처에 전무하다. 즉 해석의 근거가 되는 시대맥락파악의 출처가 전문가의 연구자료가 아닌 네이버 블로그다. 역사 갤러리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마이너 갤러리의 글을 증거로 가져온 것과 다름 아니다. 아닌게아니라 증거라 주장되는 블로그의 신뢰성이 두 갤과 비견될 수준이다. 예를 들면 출처가 된 블로그는 동학란에서 '고종의 자발적 청군요청설은 정설이 아니며 논란이다'고 주장하며[16] 그 증거가 2019년에 '최근 발굴한 양호초토등록'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국가기관)에서 "단기4290"('''1957년''')에 '''공개적'''으로 발간한 '동학란기록 상'에 수록된 자료이다. 단기는 단군기원을 지칭한다는 사실에서 공개시기가 오래됐다는 점을 실감시킨다. 이 사실은 전문기관도 필요없고 RISS에서 검색하면 '''초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전공자도 '전공자'라고 말하기가 민망할정도 매우 기본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1957년 국가기관에서 공개적으로 발간할 자료를 60년이상이나 사료오류를 내며 2019년 최근 발굴된 자료라 주장한다. 즉 비전공자도 가졌을 기본적인 사료판별력조차 전무하고 엉터리라는 의미다. 이러면 사료해석에 있어서도 사료성격에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이 문제점은 겨우 '''학계의 공인이 되지 않았다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면 박사학위가 있는 학자라도 유사역사학이라 비판 받을 행동으로 이미 이덕일은 박사학위가 있음에도 사료해석 수준때문에 유사역사학자란 비판을 받았다.

3. 참고문헌


  • 동도문변 "고부기요변" 항목 참조
  • 친일파 이용태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2,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3-1, 2009
  •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8
  • 이용창, 일제강점기‘조선귀족’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2012
[1]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2] 일진회 문서 참고[3]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4]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5]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6]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7]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8]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9]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10]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7~48[1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3-1, 2009, 297[12]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8[13] 이용창, 일제강점기‘조선귀족’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359[14]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8[1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2, 2009, 63[16] 실제로는 논란이 아니다. 고종문서와 동학농민혁명문서에서 여러 논문들이 자세히 나열되어있다. 고종이 청군을 요청했다는 점은 조선 중국 일본 자료들이 교차검증되며 역사학계 대다수의 정설도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