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

 

1. 대한제국의 포퓰리즘 친일단체
1.1. 개요
1.2. 상세
1.3. 평가
2. 항일 단체
3. 학교 폭력
3.1. 관련 항목


1. 대한제국의 포퓰리즘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
[image]
1907년 일진회가 서울 남대문에 설치한 대형 아치

1.1. 개요


1904년 8월 송병준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등이 세웠으나 진보회와 합동이후 동학세력이 주도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포퓰리즘 친일 단체. 일진회의 일은 '''日'''이 아닌 '''一'''이다.
애국계몽운동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분제 철폐를 추진한 면모도 있다.

1.2. 상세


워낙 회원이 없어서 일제의 지원이 아니면 명맥을 유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곧 '''이용구'''가 이끌던 동학계 개화 운동 조직인 진보회가 일진회에게 흡수당했기 때문에 규모가 확대. 일진회는 일본인을 고문(우치다 료헤이 등)으로 채용하는 한편 일본군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아 활동했다. 일진회 회원은 창립 당시 300명, 진보회와 통합한 뒤 곧 수만의 회원이 되고, 1910년 경에는 '전국에 100만명에 달하는 회원'을 가지는 거대 조직이라지만, 실제는 10만 명쯤 되었다. 매일신보라는 신문에는 일진회 회원들이 총 140,725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외로 삼남지역보다 이북지역에 일진회 회원수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이게 현지인들만 포섭한 건지 아니면 삼남지역의 일진회 회원들을 이주시킨 건지는 안 나와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어쨌든 진보회와 통합한 뒤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되어 동학 역사에 있어서는 뼈아픈 흑역사. 덕분에 손병희는 이들과 연을 끊고 천도교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이용구와 그 추종자들은 독립해서 시천교를 차렸는데, 사실상 일진회의 일반 회원들은 거의 시천교도(구 동학도)였다. 그런데 교리상으로는 천도교와 시천교가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분리 후에도 시천교였다가 천도교로 전향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천도교였다가 손병희와 대판 싸우고 시천교로 가버리는[1] 경우도 있었다.
일진회는 진보회와 합치기 전까지는 명백한 어용 단체였고, 합쳐서 민간 단체가 된 이후에도 일본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친일 선전에 전력했다. 우치다 료헤이 등 일진회의 고문직을 역임했던 사람들부터가 극우 일본인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대의 조선 지식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본과 한국을 한 나라로 만들자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다시피 일진회의 주 활동은 친일 선전 및 선동이었다. 대표적인 선전 사례로 위에 사진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사진은 1907년 일진회가 일본 황태자 다이쇼의 조선 방문 때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로, 사진에는 일진회의 이름이 담긴 대형 아치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해있으며 아치의 중간에 '받들어 맞이한다'는 의미의 '봉영(奉迎)'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런 친일 세력이 무려 전 국민의 5%나 되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건 아시아주의에 입각해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처럼 양국이 동등한 관계로 합병되자는 주장이였다.[2] 일본 우익에서 지어낸 '대동합방'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용구가 나중에 합방 청원하면서 쓴 표현으로는 '정합방(政合邦)'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일본 쪽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주장이었지만, 일본은 이들이 대한 제국을 자진해서 다스리게 하기 위해 겉으로는 이러한 '합방'을 지지하는척 했다.
한편 1907년에는 당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교수형 언도를 받은 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가 일진회의 총재 자리를 권고받은 일이 있었다. 적어도 당시의 정부를 디스하려는 점에서는 일진회나 박영효나 생각이 같아서, 박영효는 일진회 당(?)의 총재가 되어 공화정의 대통령에 도전할 심산으로 몰래 귀국해 부산에 머무른다. 그러나 결국 박영효는 한일병합엔 관심이 없었고 일진회도 공화정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양자간의 접촉은 별 성과가 없었다. 이후 일진회는 그냥 일진회대로 마이웨이를 가고 박영효는 대한제국 정부에 싹싹 용서를 빌고 궁내 대신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일진회를 이끌며 내각에도 참여했던 송병준이 대한제국 총리 이완용과 사이가 더럽게 나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를 판 다음에 얻고자 하는 통치 체제의 형태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송병준이 바랐던 (혹은 일본이 그렇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합방은 기존 조선 정부의 해체 그리고 대아시아주의에 기반한 일본으로의 완전한 통합이었던 반면,[3] 이완용은 일진회의 대동합방 신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고 오히려 설령 합방을 하더라도 한국 황실의(격하되었지만) 명맥을 보존할 것과 조선에 대한 차별화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 사망 직후인 1909년 12월, 안그래도 이토 따라 죽고싶다는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나 씨부리던 중 이완용이 이재명으로부터 칼빵을 맞고 진짜 이토 따라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사태가 급변한다. 같은 때에 일진회는 '한일 합방 성명서'를 발표했고, 병탄 연착륙파의 수장이었던 이토가 사라진 일본 역시 본격적으로 한국을 먹으려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은 그나마 일진회 방식으로 다 뒤엎자는 합방을 막고 기존 한국 기득권층(황실, 대신, etc)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직접 나라를 파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완용은 송병준과 사이좋게 매국 경쟁을 했고, 결국 일본이 병탄의 그물을 슬슬 치려고 할까 하는 사이 물고기가 먼저 뛰어든 꼴이 되어,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가 이루어지고 1주일 뒤 8월 29일 공표되며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결과적으로는 이완용의 구상에 가깝게 온건한(?) 병탄이 이루어졌으므로, 급진적(?)이었던 일진회는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토사구팽'당한 꼴이 되었다. 일제는 병탄 직후 일진회에게 해산을 명령했고, 실제로 강제로 그렇게 되었다. 물론 일진회가 그간 5년여에 걸쳐 일제로부터 많은 활동비를 받아먹었지만, 1910년 시점에 일진회는 회원들의 대규모 만주 이주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이주 자금을 호쾌히 약속했던 일제는 병탄 후 입을 싹 닦았다.
일진회가 만주로 이주하고자 한 이유는 회원들이 막판에 하도 막장 친일짓을 하고 다녔던 고로 원래 살던 집들이 다 테러당해서[4]이기도 하고, 만주로 넘어가서 일본·조선·만주를 관통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하려는 이상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더이상 이용가치가 사라진 일진회는 일본에게 강제해산 당한다. 해산비 명목으로 15만엔을 주엇다고 하지만 신도들에게 실질적으로 돌아간 돈을 얼마 되지 않는다. 이후 송병준의 경우는 나름 친일 경력을 발판삼아 재빨리 주류 사회로 발돋움한 것 같지만, 일진회원(=시천교도)들의 실질적 책임자이자 교주였던 이용구는 자기가 일제에 속고 배신당한 덕택에 2천만 한국인을 일본의 2류 국민으로 전락시켰다는 자괴감 속에 중병을 앓다가 1912년 일본 스마에서 사망한다. 이후 시천교는 송병준계와 김연국계가 갈등하다가, 김연국이 교주가 되어서 교도들을 싹 데리고 상제교(=천진교)로 독립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 일진회나 시천교라고 하는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매우 복잡한 대중단체로 평가받는다.
재평가의 시작은 2005년부터이다. 그 이전엔 단순한 친일 매국단체라는 2005년 이후엔 대한제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대중적인 포퓰리즘 단체'''였으나 대한제국 말기에는 복잡한 이유로 친일 매국 단체로 타락했다는 평가이다.
문유미와 김종준의 박사학위가 재평가의 시작이며 학계에서 이들 연구는 인정받는다.
김종준의 박사학위논문
문유미의 박사학위논문

1.3. 평가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에 나타난 일진회의 정합방론은 외교권은 일본에 위임하되 황실은 존치하고 내각 및 의회를 자치하는 국가형태로서, '내정자치'를 통해 그동안 정권참여를 갈망해온 민당의 정치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표방하였다.

(...)합방청원서가 일제의 병합 단행 임박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일본측이 수용 가능한 제안이었어야 하는데, 정합방론은 오히려 일본측의 대폭 양보를 요구하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진회의 정합방론이 합방청원서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궤변이고 견강부회에 불과한 것 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이러한 정체 수립을 기대했던 것인지 그 신뢰성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천착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용구 역시 내각과 의회를 통한 내정자치를 주장하면서도 현존하는 지배권력으로서 통감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군회, 면회 등 지방자치제의 전통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적으로 일본의 부현회와 같은 지방자치 참여를 차선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즉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 권력지향적 계몽운동단체들과 제휴가 지속되었더라면 합방이후에 안정적인 친일내각을 수립하는 것이 최고 목표였을 것이나 그것이 좌절된 이후에는 일진회 단독으로라도 지방권력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의 지방자치 구상으로도 당시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하층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일정 정도는 수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과거 최제우의 동학에 의해 동원되고 일부 각성되었던 소민들의 정치적 욕망은 일진회의 정합방론의 틀을 빌어 다시 한번 왜곡된 형태로 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진회에 참여한 소민들에게는 '''오래동안 억눌려온 양반지배체제에서 해방되려는 욕구가 자주독립 유지라는 대의명분보다 우선하였을 수도 있다.'''

서영희, 국민신보를 통해 본 일진회의 합방론과 합방정국의 동향, 역사와현실,(69), 2008, 43~44('''2007년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주한 학술연구용역비로 연구됨'''.)

위의 연구에서 나온 것처럼 일진회의 행동 이유엔 오랫동안 소민들을 억눌러온 양반지배체제에서 해방되려는 욕구가 있었다. 동학 시절 각성되었던 일부 욕구가 일진회로 재표출된거였다.
그래서 위원회에서도 일진회라고 다 친일반민족행위로 선정하진않고 어느정도 조건이 충족해야 선정됐더.
일진회원 간부중 1908년 12월 이후 특정 행적이 존재해야만 선정됐고 없으면 예비후보에 올라도 탈락된다.[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정하는 친일파가 인터넷에서 생각하는 것과 기준이 다르다.
선악 이분법이 그렇게 단순한 단체는 아니였다. 일진회에 대한 재평가는 문유미[6]와 김종준의 박사학위 논문이 자세하니 여기서 생략한다.일진회 연구로 문유미와 김종준이 유명하다는 건 학계에선 유명하다. 학계에선 너무 유명한데 대중매체에선 반영이 전무하다.

2. 항일 단체


한자는 '日'進會로 구한 말의 친일 단체 '一'進會와 다르다. 1942년 이홍장(1926~1945. 8. 12) 등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단체로서 독립 운동을 벌였다. 만주로 망명하려 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1944년 해체되고 말았다.

3. 학교 폭력


청소년 폭력 조직을 부르는 은어 중 하나.
조직의 우두머리격을 '''일짱'''(그 밑의 언더 보스(?)는 이짱, 더 아래는 삼짱)으로, 그 똘마니들을 '''일진'''으로 불러서 일진회라고 한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에 당시 컬럼을 쓰던 이규태는 "일제 시대의 굴욕을 청소년들이 만든다"며 한탄한 적이 있다.
조폭 항목에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3.1. 관련 항목


[1] 대표적인 인물이 이용구 사후 시천교주가 된 김연국.[2] 즉,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대한제국의 황제를 겸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권에서 유럽식 동군연합은 생소한 제도였고, 정작 일제는 대한제국을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면서 사실상 일진회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어 버렸다.[3] 일진회의 고문 우치다 료헤이가 흑룡회의 창설자임을 보면 알만하다.[4] 일진회 단체가 하도 막장짓을 많이한데다 1907년 이후 의병 활동이 대거 활발했을 때 이들 일진회는 의병들 진압할 이른바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 토벌에 적극 앞장섰으며 심지어 의병을 '폭도'로 여겼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매국 행각은 당시 의병들로부터 커다란 격분을 사게 되었는데,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입은 일진회원의 피해는 사살자 9,260명, 부상자 10명, 소각 가옥 360호, 재산 손해액 5만 501원 31전에 달할 정도였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무수한 일진회원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2, 186~188[6] 구하긴 쉬운데 언어가 영어다. 미국에서 일진회 연구로 박사학위논문 취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