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1. 二重
"두 겹"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어.
2. 진서의 인물
李重
(253 ~ 300)
서진의 인물. 자는 무증(茂曾). 이강의 아들.
강하 종무현 사람으로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어 동생들과 함께 살았고 우애가 있는 걸로 알려졌다. 약관에 중정이 되었지만 사양했고 후에는 시평왕문학이 되었으며, 구품에 관계없이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해야 토단법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않았다. 왕은의 진서에 따르면 젊어서 이름이 있어 이부랑, 평양태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태자사인, 상서랑을 지내고 태중대부 염화가 한나라의 공광, 위나라의 서간 등의 논의를 들어 왕공들에게 노비의 수를 제한하고 사람들이 집 파는 것을 금지하도록 상소를 올리자 이를 위한 방법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사례교위인 석감이 욱림태수 개등이 다스리는 것이 관할을 벗어나서 소환해야 한다고 상주를 올리자 이중은 이에 대한 상주를 올렸으며, 태희 초에는 정위평으로 옮겼다가 한단취와 함께 정위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고 중서랑으로 옮겼다.
상서이부랑으로 옮겨 은둔한 선비들 중에서 유능한 사람을 천거해 북해의 서곽탕, 낭야의 유형, 연국의 곽원, 풍익의 길모를 발탁해 비서랑으로 제왕의 문학에 앉혔으며, 당시 연국의 중정 유침이 곽원을 한소로 천거했지만 사도좌장사 순조가 집안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거부하게 하자 이중은 이를 반박하고 곽원을 등용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이는 시행되었다. 또한 함녕, 태강 시기에 재야들을 등용한 것을 언급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정에 난이 일어나자 끝내 따르지 않다가 나가서 토로호군이 되었다가 평양태수가 되었으며, 3년 동안 있다가 동생인 이억이 사망하자 표를 올려 관직을 떠났다.
영강 초에 사마륜이 이중의 명망으로 인해 상국좌사마로 삼았는데, 이중은 사마륜이 장차 난을 일으킬 것이라 여겨 질병이라면서 취임하지 않았다. 사마륜이 핍박해 이중은 스스로 목숨을 보존하지 못해 병세가 위중하게 되었으며, 극도로 고달픈 채로 임명되었다가 수 일이 지나 48세로 죽자 산기상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성(成)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