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왕은
王隱
?~?(생몰년 미상)
중국 서진, 동진의 역사가. 자(字)는 처숙(處叔). 예주 진군 진현(현재의 허난성 저우커우시) 사람. 당나라의 진서 82권에 왕은전이 있다. 아버지는 왕전(王銓), 형은 왕호(王瑚), 왕호는 자(字)는 처중(處仲)이라 하고, 왕은과는 달리 무(武)를 중히 여겼다. 성도왕 사마영의 거병에 따라 참군이 되어 공적을 쌓고 유격장군이 되었다. 상관이 전횡을 심하게 했고, 이를 배제하려 했으나 거꾸로 주살당했다.
아버지 왕전은 대대로 가난한 가문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저술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서진을 섬기고 역양현령이 되었으며 사적으로 진나라의 사적이나 공신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은은 평소 자신을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다스리고, 뒷배경을 가진 이들을 사귀지 않았으며 박학하고 많이 들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서진의 옛 일을 보고 연구했다.
건흥(서진 진민제의 마지막 연호)년 동안에 강남으로 피하여 승상군자좨주인 탁군의 조납과 친해졌고, 그는 왕은을 동진의 중종 진원제에게 추천하였으나 당시 동진은 아직 초기상황이어서, 사관이 기용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태흥 원년(318년) 제도가 마련되고 왕은은 곽박과 함께 사관인 저작랑으로 진나라의 사서를 저술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또 왕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적이 있었기에 평릉향후 작위를 하사받았다. 저작랑인 우예는 사적으로 진서를 모았으나 장강 동남쪽 태생이었기 때문에 서진 조정의 사실을 몰랐고 왕은의 처소를 여러 번 방문하여 그의 저서를 베꼈다. 이 후에 왕은은 병에 걸렸고, 우예는 권력자와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당파를 이루어 왕은을 배척하고 면직시켰다.
왕은은 가난하여 사서를 쓰는 데 쓸 만한 자산도 없었기 때문에 계속 진서를 쓸 수 없어, 무창에서 정서장군 유량을 의지했는데 그가 붓과 종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진서를 완성할 수 있어 궁중에 이를 헌상했다. 70세 남짓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 진서 93권[1] , 교광기(交廣記), 촉기(蜀記) 등이 있고 모두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 주석으로 인용했다. 그 밖에 왕은집 열권이 있다.
관찬 진서(왕은의 진서와는 별개)에서 왕은은 저술을 좋아했지만 문장이 천박하고 난잡하다, 조잡하고 차례가 없다. 진서에서 차례를 볼 것은 왕은의 아버지가 쓴 곳이며 문장이 혼탁하고 의미가 이상한 곳은 왕은의 쓴 바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을 싣고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관찬 진서와 왕은의 진서가 일치하고 있으며 사마소의 북지군 영주(靈州)현 원정이라던지 사마소가 왕의를 죽인 일 등은 몇몇 부분은 왕은의 진서가 더 사실에 가까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따지고 보면 관찬 진서도 왕은 진서를 다짜고짜 욕할 정도로 그렇게 신뢰성 있는 사서냐면 그건 또 아니고, 왕은 진서는 당대 진나라 사람이 쓴 사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배송지도 정사 삼국지에 인용한 주석에서 왕은의 저서에 대해서 비판했으며 종회가 방덕의 유해를 업에 안장한 이야기나 손권이 관우를 사로잡아 등용해 유비와 조조가 맞서게 하자는 얘기, 곽충이 인용한 제갈량의 다섯가지 일이 말이 되느냐며 비판했다. 다만 배송지는 멸망전 촉한의 재정상황을 확인하는 용도로 촉기를 인용한 바 있고 비판을 하면서도 왕은의 저서를 꽤 인용했다. 또 곽충 오사의 경우 1사인 제갈량의 법치에 대해선 자치통감에도 인용되어 정설로 여겨지며 5사에 대해서도 많은 사서에서 몇몇 내용이 잘못되었을 뿐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냐는 학자들의 연구로 촉한의 병력교체 시스템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화로 여겨지고 있다.
王隱
?~?(생몰년 미상)
1. 소개
중국 서진, 동진의 역사가. 자(字)는 처숙(處叔). 예주 진군 진현(현재의 허난성 저우커우시) 사람. 당나라의 진서 82권에 왕은전이 있다. 아버지는 왕전(王銓), 형은 왕호(王瑚), 왕호는 자(字)는 처중(處仲)이라 하고, 왕은과는 달리 무(武)를 중히 여겼다. 성도왕 사마영의 거병에 따라 참군이 되어 공적을 쌓고 유격장군이 되었다. 상관이 전횡을 심하게 했고, 이를 배제하려 했으나 거꾸로 주살당했다.
2. 생애
아버지 왕전은 대대로 가난한 가문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저술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서진을 섬기고 역양현령이 되었으며 사적으로 진나라의 사적이나 공신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은은 평소 자신을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다스리고, 뒷배경을 가진 이들을 사귀지 않았으며 박학하고 많이 들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서진의 옛 일을 보고 연구했다.
건흥(서진 진민제의 마지막 연호)년 동안에 강남으로 피하여 승상군자좨주인 탁군의 조납과 친해졌고, 그는 왕은을 동진의 중종 진원제에게 추천하였으나 당시 동진은 아직 초기상황이어서, 사관이 기용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태흥 원년(318년) 제도가 마련되고 왕은은 곽박과 함께 사관인 저작랑으로 진나라의 사서를 저술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또 왕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적이 있었기에 평릉향후 작위를 하사받았다. 저작랑인 우예는 사적으로 진서를 모았으나 장강 동남쪽 태생이었기 때문에 서진 조정의 사실을 몰랐고 왕은의 처소를 여러 번 방문하여 그의 저서를 베꼈다. 이 후에 왕은은 병에 걸렸고, 우예는 권력자와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당파를 이루어 왕은을 배척하고 면직시켰다.
왕은은 가난하여 사서를 쓰는 데 쓸 만한 자산도 없었기 때문에 계속 진서를 쓸 수 없어, 무창에서 정서장군 유량을 의지했는데 그가 붓과 종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진서를 완성할 수 있어 궁중에 이를 헌상했다. 70세 남짓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 진서 93권[1] , 교광기(交廣記), 촉기(蜀記) 등이 있고 모두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 주석으로 인용했다. 그 밖에 왕은집 열권이 있다.
3. 평가
관찬 진서(왕은의 진서와는 별개)에서 왕은은 저술을 좋아했지만 문장이 천박하고 난잡하다, 조잡하고 차례가 없다. 진서에서 차례를 볼 것은 왕은의 아버지가 쓴 곳이며 문장이 혼탁하고 의미가 이상한 곳은 왕은의 쓴 바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을 싣고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관찬 진서와 왕은의 진서가 일치하고 있으며 사마소의 북지군 영주(靈州)현 원정이라던지 사마소가 왕의를 죽인 일 등은 몇몇 부분은 왕은의 진서가 더 사실에 가까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따지고 보면 관찬 진서도 왕은 진서를 다짜고짜 욕할 정도로 그렇게 신뢰성 있는 사서냐면 그건 또 아니고, 왕은 진서는 당대 진나라 사람이 쓴 사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배송지도 정사 삼국지에 인용한 주석에서 왕은의 저서에 대해서 비판했으며 종회가 방덕의 유해를 업에 안장한 이야기나 손권이 관우를 사로잡아 등용해 유비와 조조가 맞서게 하자는 얘기, 곽충이 인용한 제갈량의 다섯가지 일이 말이 되느냐며 비판했다. 다만 배송지는 멸망전 촉한의 재정상황을 확인하는 용도로 촉기를 인용한 바 있고 비판을 하면서도 왕은의 저서를 꽤 인용했다. 또 곽충 오사의 경우 1사인 제갈량의 법치에 대해선 자치통감에도 인용되어 정설로 여겨지며 5사에 대해서도 많은 사서에서 몇몇 내용이 잘못되었을 뿐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냐는 학자들의 연구로 촉한의 병력교체 시스템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화로 여겨지고 있다.
[1] 현재는 대부분 소실되었고, 청나라의 학자 탕구(湯球)가 모은 집본 11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