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
李志常
(1193 ~ 1256)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인 구처기의 제자이자 전진교 7대 조사로 자는 호연(浩然), 도호는 '''진상자(眞常子)'''.
산동성 병주 관성현 출신으로 1220년에 스승인 구처기를 따라서 산동에서 오아시스 길의 북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곳을 4년 간 돌아다니다가 귀향하고 스승인 구처기가 여행 과정에 대해 구술한 것을 듣고 장춘진인서유기라는 여행기를 편찬했다.
1251년에 몽케 칸이 자신을 도교의 우두머리, 선교승 해운을 불교의 총수로 임명하자 카라코룸에서 정치적인 영향을 획득하기 위해 <노자팔십일화도>라는 책으로 노자가 서역에 갔는데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는 의견을 펼치는 등 불교와 대립하였다.
또한 1255년에는 사찰을 점거하고 불상을 파괴하거나 유교의 공묘 등을 파괴하였으며, <태상혼원상덕황제명위황호성불경>을 편찬하면서 <노자팔십일화도>를 재간행하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 전진교는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1193 ~ 1256)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인 구처기의 제자이자 전진교 7대 조사로 자는 호연(浩然), 도호는 '''진상자(眞常子)'''.
산동성 병주 관성현 출신으로 1220년에 스승인 구처기를 따라서 산동에서 오아시스 길의 북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곳을 4년 간 돌아다니다가 귀향하고 스승인 구처기가 여행 과정에 대해 구술한 것을 듣고 장춘진인서유기라는 여행기를 편찬했다.
1251년에 몽케 칸이 자신을 도교의 우두머리, 선교승 해운을 불교의 총수로 임명하자 카라코룸에서 정치적인 영향을 획득하기 위해 <노자팔십일화도>라는 책으로 노자가 서역에 갔는데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는 의견을 펼치는 등 불교와 대립하였다.
또한 1255년에는 사찰을 점거하고 불상을 파괴하거나 유교의 공묘 등을 파괴하였으며, <태상혼원상덕황제명위황호성불경>을 편찬하면서 <노자팔십일화도>를 재간행하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 전진교는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