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가의 창시자'''
'''太上老君 老子 | 태상노군 노자'''
'''당 추존 황제'''
'''大聖祖 天皇大帝 | 대성조 천황대제'''
'''묘호'''
성조(聖祖) → '''대성조(大聖祖)'''
'''시호'''
고상대광도금궐현원태상천황대제
(高上大廣道金闕玄元太上天皇大帝)

'''별호'''
노자(老子) / 태상노군(太上老君)
''''''
이(李)
''''''
이(耳)
'''부황'''
선천태상제(先天太上帝)
'''모후'''
선천황후(先天皇后)
'''생몰 기간'''
? ~ ?
1. 개요
2. 이름과 호칭
3. 생애
4. 여담
5. 책 《노자 (도덕경)》
5.1. 개괄
5.2. 판본
5.2.1. 죽간본 원문과 번역
5.3. 《노자》의 사상적 성격
5.4. 《노자》의 기타 특징
5.5.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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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제자백가의 시초격인 인물로, 당대 최초로 통치자가 지향해야 하는 바, 걸어가야 할 길(道)을 제시한 인물이다. 대표 저서로는《도덕경》[1]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도가의 창시자로 불린다. 도교에서는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고 부른다.
노자의 사상은 '백성들을 시켜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무위자연'[2]과, '권력과 재산을 더 가지려고 무리하게 애를 쓰지 말라'는 '공수신퇴'[3]로 요약되는데, 이는 《노자 도덕경》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장에서 쓴 처세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처세술을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힘을 '매번' 100% 쓰지 말라는 것. 인생의 꼭대기(peak)를 만들어 놓으면 내려갈 일밖에 없으므로, 70~80%의 힘으로 오래가는 것이 인생을 사는 참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을 잡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자리에서 내려올 줄도 알고, 가진 게 많으면 적당히 주변에 나눌 줄도 알아라고 노자는 조언한다.

2. 이름과 호칭


<사기> '신한노장열전'에 따르면 본명은 이이(李耳), 는 담(聃)이다. 도교의 태상 노군 전설에도 이씨라고 나온다. 노자(老子)라고 불리는 이유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태아 상태로 있다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옆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오얏)나무를 나의 성씨로 해 주시오'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이 오얏나무 '李'(리)가 되고, 이후에 성장하면서 귀가 컸기 때문에 이름은 '耳(귀 이)'자가 되었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에 따르면 본명은 이중이(李重耳) 자는 백양(伯陽)으로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현대에는 노자의 성이 노(老)씨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3. 생애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여, 여러 전설이 전해져오고 그런 연유로 노자로 추정되는 고대인물들도 많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인데, 노자는 초나라 출신으로 주나라에서 도서 관장[4]을 지냈으며, 공자가 주에서 잠깐 머무를 때 노자에게 배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도 한다. 재미있는 게 노자와 공자는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이게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난다. 노자는 공자에 대해 사기꾼이자 위선자와 같다고 비판한 반면, 공자는 노자를 가리켜 처럼 변화무쌍하고 감히 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극찬했다.
노자는 이후 소를 타고 함곡관 밖으로 가 종적이 묘연해졌다 하는데, 출관하기 전에 문지기인 윤희[5]에게 5000자로 된 책을 전수하니, 이것이 '도덕경'이라고도 불리는 《노자》[6]이다. 이대로면 노자는 춘추 시대 말엽의 사람이 되나, 문제는 함곡관이 지어진 것은 전국 시대인 진(秦)나라 효공 시대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설화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기·신한노장열전》에는 이 외에도 전국 시대의 인물인 태사담(太史儋)이 노자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해진다. 이 때문에 노자가 한나라 이후 창조된 가공의 인물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이전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노자 사본이 발굴되어 이 설은 힘을 잃는 등 여전히 정확한 생존여부를 비롯한 실체 자체가 불분명하다.

4. 여담


  • 일부 학자들은 노자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주나라 왕실문서에 전해지는 '처세술 모음집'이라고 주장한다.[7]
  • 노자가 서쪽으로 떠나 인도에 도착해 펼친 가르침이 불교가 되었다는 이른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에 퍼지기도 했다. 도교의 도사들은 이를 가지고 자신들이 불교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청정법행경》이라는 위경을 지어 공자는 유동 보살(광정 보살)의 환생이고 노자는 가섭 보살의 환생이라는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노자와 석가모니는 서로 사상이 다르다. 노자의 사상은 무위자연, 공수신퇴 등이 핵심인 반면에, 석가모니의 사상은 사성제, 팔정도가 핵심이다. 다만, 불교의 공(空) 사상만이 노자의 사상과 비슷한데, 공사상은 석가모니 사후 대중부 불교에서 시작했으므로, 굳이 따지면 노자의 사상이 먼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사상은 인도에서 숫자 ' 0 ' 이 만들어질 때 생겨난 개념이므로 인도 고유의 사상이기 때문에, 노자와 불교의 선후를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 노자의 사상적 계승자로는 장자열자가 거론된다.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크게 보면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장자의 경우는 노자의 주요사상 중 하나인 상대주의를 극대화 시킨 유형으로 해석 할 수 있다.
  • 당나라의 추존 황제이기도 하다. 당나라 때 같은 씨라고 도교를 숭상 했던 역대 당나라 황제들이 조상이라고 윤색했으며, 당현종 같은 경우 노자를 아예 황제로 추숭 하기도 하였다.
  • 사마천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며, 이때 노자는 공자를 위선자라고 비판했으나, 공자는 오히려 노자를 범접할 수 없는 용같은 존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법가가 유가와 도가를 동시에 까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이제이적 이야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한비자의 책을 보면 도가의 처세술을 설명하면서, 유가의 고리타분함을 까는 글들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도가가 당대 제자백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기에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 역시도 적지 않다.[8]

5. 책 《노자 (도덕경)》



5.1. 개괄


'''《도덕경》'''.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도교에서 핵심 경전으로 삼는다. 《도덕경(道德經)》이란 이름은 상편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의 "道"와 하편의 "상덕부덕(上德不德)"의 "德"을 합해 부른 이름이다.

5.2. 판본


기존에 《노자》에는 3개의 주요 판본이 있었다. 하나는 한대에 성립된 하상공본(河上公本),[9] 또 하나는 삼국 시대의 왕필#s-2이 주석한 왕필본(王弼本), 그리고 당대의 학자 부혁이 전한 부혁본(傅奕本)이 그것이다. 이 중 왕필본의 권위가 가장 인정되어 후대에 나온 대부분 《노자》 텍스트들은 대부분 왕필본을 따랐다.[10][11]
하지만 왕필본 《노자》의 권위는 20세기에 새로운 자료들이 출토되어 조금씩 무너졌다.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돈황 문헌에서 《노자》의 판본이 발견되면서, 왕필본의 내용이 진짜 《노자》 원본대로인지 의문을 품었다.
이후 관련 학자들에게 경천동지 같은 소식을 전한 것은 1974년 한대 이전에 조성된 무덤 마왕퇴에서 나온《노자》였다. 이 《노자》사본은 비단에 쓰였기 때문에 '백서 노자', '마왕퇴 노자', 통칭 '백서본'으로 불린다. 백서본은 서한의 황제 고조(劉邦)문제(劉恒)의 이름이 피휘되지 않아, 지어진 시기가 한대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으로써 《노자》가 한대 이후에 만들어진 위작이 아니라는 것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또한 백서본은 편집 순서가 왕필본과 다르게 상편(도경)과 하편(덕경)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본래의 《노자》는 덕경-도경 순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993년에는 후베이성 징먼시 궈뎬촌(곽점촌)의 한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무덤(기원전 3세기 초 이전) 곽점에서 대나무 죽간에 쓰여진 《노자》의 사본이 발견되어, 《노자》가 한대 이후 위작되었다는 설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곽점에서 출토된 사본을 죽간 노자, 초간 노자, 곽점 노자 등으로 부르지만 보통 '죽간본'이라고 통칭한다. 죽간본은 갑, 을, 병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후 연구결과, 백서본은 죽간본 《노자》의 주석서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죽간본은 실존하는 《노자》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 되었다.
죽간본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왕필본 《노자》와 성격이 다른데, 기존 왕필본 《노자》의 중요한 특징인 '반 유가적 성격'이 후대에 와서야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왕필본으로 《노자》를 바라보았던 후대의 수많은 주석서들을 모두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초기 노자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또한 죽간본과 기존의 여러 판본들은, 내용과 사상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 이는 《노자》가 처음 지어진 이래로 수많은 후대 사람들이 변형하고 추가했음을 보여준다.

5.2.1. 죽간본 원문과 번역


'''죽간 노자'''
갑(甲)본
죽간본 1장 - <통행본(왕필본) 19장> <백서본 88장>에 해당. (이하 마찬가지)
絕智弃辯 民利百倍 絕巧弃利 盜賊亡有 絕偽弃慮 民复季子 三言以爲事不足 或命之, 或乎續 視素保朴 少厶寡欲
꾀를 끊고 말재간을 버리면 백성들은 백배 이로워지며,
재주를 끊고 이익냄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지며,
거짓됨을 끊고 생각을 비우면 백성들은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위의 세 문장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듯하여 이야기를 덧붙이면 어떨까 한다.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소박함을 지켜라.
사사로움(私)을 줄이고 원하는 것을 적게 하라.
죽간본 2장 - 통행본 66장, 백서본 45장
江海所以爲百谷王 以其能爲百谷下 是以能爲百谷王 聖人之在民前也 以身後之 其在民上也 以言下之 其在民上也 民弗厚也 其在民前也 民弗害也 天下樂推而弗厭 以其不爭也 故天下莫能與之爭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까닭은
그가 수많은 계곡의 아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이 백성들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을 뒤로 하기 때문이며,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는 것은 말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그가 백성들의 앞에 있어도 백성들은 해롭게 느끼지 않는다.
천하가 그를 즐거이 받들며 싫어하지 않는다.
성인은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을 것이다.
죽간본 3장 - 통행본 46장 후반부, 백서본 13장
罪莫厚乎甚欲 咎莫慘乎欲得 禍莫大乎不知足 知足之爲足 此恆足矣
벌(罪)은 심해지길 바라는 것보다 더 부담드는 것이 없고,
허물은 가지려 욕심부리는 것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으며,
재앙은 만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만족할 줄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만족해지니, 이것이 영원한(恆) 만족감이 되는 것이다.
죽간본 4장 - 통행본 30장, 백서본 104장
以道佐人主者 不欲以兵强於天下 善者果而巳 不以取强 果而弗伐 果而弗縣 果而弗矜 是謂果而不强 其事好
도로써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는 군대로써 천하를 강압하려 하지 않는다.
훌륭한 자는 결과를 얻으면 그만두니,
강압하지 않는다.
결과를 얻은뒤 짓밟지 않고,
결과에 교만하지(얕보지) 말고,
결과로 위협하지 말라.
이를 '결과를 가지면 강압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좌하는 것이 좋은 일이며, 오래 가는 것이다.
죽간본 5장 - 통행본 15장, 백서본 84장
長古之善爲士者 必微妙玄造 深不可識 是以爲之容/豫乎! 如冬涉川/猶乎! 其如畏四鄒/儼乎! 其如客/渙乎! 其如釋/敦乎! 其如撲/混乎! 其如濁/孰能濁以靜者, 將徐淸/孰能安以逗者, 將徐生/保此道者, 不欲常盈
태고에 훌륭했던 선비들은 미묘현달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이를 말해 보자면,
그 예상은 겨울 시내를 건너는 듯하고
그 망설임은 사방의 적군을 경계하는 듯하며
그 삼감은 손님과 같고
그 마음이 풀리는 것은 얼음 녹는듯 하며
그 진실됨은 꾸밈이 없어 수수하고
그 아무렇게나 하는 행동은 우둔해 보였다.
누가 우둔할 수 있음으로 차분해져서 장차 마음을 서서히 맑게 하겠는가.
누가 평온할 수 있음에 머물러서 서서히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러한 도를 지키는 자는, 항상 가득차 있음을 바라지 않는다.
죽간본 6장 - 통행본 64장 후반부, 백서본 41~43장
爲之者敗之 執之者失之/是以聖人無爲, 故無敗/無執, 故無失/臨事之紀
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敎不敎, 復衆之所過/是故聖人能輔萬物之自然/而不能爲
하려고(爲) 하면 그르치고 잡으려고 하면 멀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려함이 없기 때문에 그르침이 없고
잡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일에 임하는 바탕은 일의 마무리를 처음처럼 신중히 하는 것이며,
이렇게 처사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도다.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가르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뭇사람들이 지나쳐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렇듯 성인은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죽간본 7장 - 통행본 37장, 백서본 마지막 장
道恒無爲也 侯王能守之 而萬物將自爲 爲而欲作 將定之以無名之撲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萬物將自定
도는 항상 억지로 하고자함이 없다.
제후나 왕이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
하려는 것에 욕심이 생긴다면,
이름 없이 꾸미지 않음으로써 진정케 한다.
대저 만족함을 알아라.
만족함을 알게 되어 차분해지면
만물은 스스로 안정을 이룬다.
죽간본 8장 - 통해본 63장 1절/3절, 백서본 26장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之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
무위(無爲)를 하려고 하고,
일 없애기를 일삼으며,
즐기지 않음을 즐겨라[12].
크고 작은 일들을 쉽게 대함이 잦아지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쉽더라도 오히려 어렵게 대하기 때문에,
고로 어려움이 없게 된다.
죽간본 9장 - 통행본 2장, 백서본 68~70장
天下皆知美之爲美也, 惡巳/皆知善, 此其不善已/有無之相生也 難易之相成也 長短之相形也 高下之相盈也 音聲之相和也 先後之相隨也 是以聖人居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而弗治也 爲而弗侍也 成而弗居 夫唯弗居也 是以弗去也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을 알기를
아름답다고 여기면, 추할 따름이다.
모두가 좋다고 알면,
이는 그 좋음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형성해내고,
길고 짧음이 서로를 만들어내고,
높고 낮음이 서로를 메우고,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고,
앞과 뒤가 서로를 뒤따른다.
때문에 성인은 하고자함이 없는(無爲) 일에 머무르며,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만들어지지만 다스려지지는 않으며,
하더라도 길러주지 않아서,
다 자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죽간본 10장 – 통행본 32장, 백서본 105장, 107장
道恒無名 撲雖細 天地弗敢臣 侯王如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會也 以輸甘露 民莫之命 而自均焉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所以不殆 卑道之在天下也 猶小谷之與江海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꾸밈없음은 매우 작지만
천지도 감히 부릴 수 없다.
제후와 왕이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따를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모여 단이슬을 내리며,
백성들은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질서를 지킬 것이다.
비로소 이름을 만들더라도,
이름(명성) 역시 다함이 있다.
대저 그칠 줄을 알아야 되는데,
위태롭지 않은 것에서 그쳐야 됨을 안다.
낮은 도가 천하에 있는 것은, 작은 계곡물들이 강과 바다에 합쳐지는 것과 같다.
죽간본 11장 - 통행본 25장, 백서본 98장
有狀混成 先天地生 寂廖獨立不改 可以爲天下母 未知其名 字之曰道 吾强爲之名曰大 大曰逝 浙曰遠 遠曰反 天大地大道大王亦大 域中有四大焉
王居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세상의) 모양이 혼탁함에서 가지런해지니,
먼저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어 홀로 존재하며 바뀌지 않으니,
가히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아직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나, 글자로는 ‘도(道)’라고 한다.
나는 억지로 그것에 이름을 붙여 '크다(大)'라고 말한다.
크면 뻗어나가고,
뻗어나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돌아온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도도 크고 왕 또한 크다.
나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죽간본 12장 - 통행본 5장 중반부, 백서본 74장
天地之間 其猶棄籥與 虛而不屈 動而愈出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풀무[13]와도 같다.
그것은 텅 비어 있으나 쇠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샘솟는다.
죽간본 13장 - 통행본 16장 전반부, 백서본 85장
至虛極也 守盅篤也 萬物芳作 居以需復也 天道芸芸 各復其根
텅 빔에 이르름은 끝없어서,
텅 빔을 지키기를 진심으로 한다.
만물은 다 함께 일어나서 (각기) 쓰여지는 곳으로 돌아간다.
하늘의 도는 둥글고 둥글어서, 각기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죽간본 14장 - 통행본 64장 1~2절, 백서본 39~40장
其安也, 易持也/其未兆也, 易謀也/其腕也, 易判也/其微也, 易散也/爲之於其無有也 治之於其未亂 合抱之木生於毫未 九層之臺起於累土 千里之行始於足下
안정된 것은 지키기 쉽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일을 꾸며가기 쉬우며,
연한 것은 나누기 쉽고,
조그만 것은 흩어버리기 쉽다.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리라.
아름드리 나무도 한 터럭의 싹에서 시작하고,
구층 누대도 한 줌의 흙에서 시작하며,
천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죽간본 15장 - 통행본 56장, 백서본 28장
知之者弗言 言之者弗知/戒其悅, 寶其門/和其求, 迵其訢/分其賏[14], 解其紛/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亦不可得而疏/不可得而利, 亦不可得而害/不可得而貴, 亦可不可得而賤/故爲天下貴
똑똑한 자는 말이 없으며, 말을 하는 자는 아는 것이 없다.
기뻐함을 경계하여 그 방법을 보배로 여기고,
요구하는 바는 뜻을 맞춰서 기쁨을 함께하며,
많은 재물은 나누어서 다툼을 해결한다.
이를 일러 '깊이 하나가 되는 것(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가까이 할 수 없고 또한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가 없고 또한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또한 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된다.
죽간본 16장 - 통행본 57장, 백서본 29장
以正治邦 以奇用兵 以無事 取天下 吾何以知其然也/夫天多忌諱, 而民彌貧/民多利器, 而邦滋昏/人多知, 而奇物滋起/法物滋彰, 盜賊多有/是以聖人之言曰/我無事, 而民自富/我無爲, 而民自爲/我好靜, 而民自正/我欲不欲, 而民自撲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사를 부리며,
일하지 않음으로 천하를 얻는다.
내가 어떻게 그러한 이치를 알겠는가.
대저 세상에 꺼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편리한 물건들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며,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이한 것들이 더욱 일어나고,
법률이 많아질수록 도적들도 많아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나서서 일을 벌이지 않으면 백성들은 스스로 넉넉해지고,
내가 무위(無爲)에 머무르면 백성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며,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바라지 않기를 바라면 백성들은 스스로 순박해진다.
죽간본 17장 - 통행본 55장, 백서본 29장
含德之厚者, 比於赤子/蜂䘍蟲蛇弗螫 攫鳥猛獸弗拍 骨弱筋柔而提固/未知牝牡之合朘怒, 精之至也/終日呼而不嗄, 禾之至也/和日常知和曰明 益生曰祥心使氣日强 物壯則老是謂不道
덕을 품음이 두터운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벌, 전갈, 벌레, 독사도 쏘지 못하고
사나운 새나 맹수도 덮치지 못하며
뼈가 연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붙잡음이 굳세다.
암수의 합을 모르는데도 곤두서는 것은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로움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조화로움은 일상적인 것인데,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밝다(明)고 하고,
생명을 더하는 것을 상서롭다(祥)고 한다.
마음이 기를 통제하는 것이 날로 강해져서
물건이 장성하면 노쇠하게 되니,
이를 일러 도가 아니라고 한다.
죽간본 18장 - 통행본 44장, 백서본 10장
名與身執親 身與貨執多 得與亡執病 甚愛必大費 厚臟必多亡 故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명예와 몸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몸과 재물 중 무엇이 더 귀중한가?
얻음과 잃음 중 무엇이 더 문제인가?
과도히 애착하면 반드시 큰 댓가를 치르게 되고, 무겁게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그러므로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죽간본 19장 - 통행본 40장, 백서본 6~7장
反也者, 道動也/弱也者, 道之用也/天下之物, 生於有/生於無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약해 보이는 것은 도의 쓰임이다.
천하 만물은 있음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죽간본 20장 - 통행본 9장, 백서본 78장
持而盈之 不若已 揣而君之 不可長保也 金玉盈室 莫能守也 貴富驕 自遺咎也 功遂身退 天之道也
가져서 가득 채우려는 것은 그만둠만 못하다.
많이 뭉쳐 모으면 오래 보존하지 못한다.
금과 옥으로 가득 찬 집은 지켜낼 수가 없다.
귀하고 부유하다고 하여서 교만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니,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을(乙)본
죽간본 21장 - 통행본 59장, 백서본 31장
治人事天, 莫若嗇/夫唯嗇 是以早/是以早備, 是謂/不克/不, 則莫知其極/莫知其極, 可以有國/有國之母, 可以長/長生久視之道也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낌 만한 것이 없다.
오직 아낄지라.
이렇게 함으로써 미리미리 갖추게 된다.
미리미리 갖춤을 일러 ‘덕을 두둑이 쌓는 것’이라 하며,
덕이 두둑이 쌓이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으면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맡을 만하며
나라의 근본을 맡으면 (그 나라는) 오래 갈 수 있다.
이것을 이르기를 깊은 뿌리, 굳은 토대의 덕이라 하며 오래오래 존재하는 도라 한다.
죽간본 22장 - 통행본 48장 전반부, 백서본 16장
學者日益 爲道者日損/損之或損, 以至無爲也/無爲而無不爲
학문을 배우는 자는 나날이 쌓아가며,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에 이르게 된다.
그는 함이 없는데도 하지 않음이 없다.
죽간본 23장 - 통행본 20장 초반부, 백서본 89장
絶學無憂/唯與訶, 相去幾何/美與惡, 相去何若/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공손함과 성냄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꺼리는 것에는, 나 또한 꺼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간본 24장 – 통행본 13장, 백서본 82장
人籠辱若瓔 貴大患若身 何謂籠辱 籠爲下也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籠辱驚 若身/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及吾無身, 或何/爲天下, 若可以託天下矣/愛爲身爲天下, 若可以寄天下矣
사람들은 명예와 수치를 갓끈처럼 여기며,
번뇌를 자신의 몸뚱이처럼 귀중히 여긴다.
어째서 명예와 수치를 (갓끈이라) 하였는가?
명예는 아랫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도 그것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을 잃어도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기에 명예와 수치를 일러 갓끈이라 한다.
어째서 ‘번뇌를 자신의 몸뚱이처럼 여긴다’고 하였는가?
나에게 번뇌가 있는 까닭은 나에게 (‘나’라고 느끼는) 몸뚱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게 몸뚱이가 없는 경계에 이른다면 어찌 번뇌가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천하를 대하듯 자신을 다스리면 가히 천하를 맡을 수 있다.
천하를 대하듯 자신을 사랑하면 가히 천하를 이끌 수 있도다.
죽간본 25장 - 통행본 41장, 백서본 4장
勤能行於其中 中士聞道 若聞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弗大笑 不足以爲道矣 是以建言有之 明道如䀟 夷[道如類] [進]道若退 上悳如浴 大白如辱 廣悳如不足 建悳如[偸] [質]貞如渝 大方亡隅 大器曼成 大音希聲 天象亡型 道[褒亡名] [善貸且成].
높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그 정수를 행하고,
중간 사람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해하고,
낮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큰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도다.
고로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며,
평탄한 도는 굴곡진 듯하며,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듯하며,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은 듯하며,
큰 순백함은 탁한 듯하며,
큰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엷은 듯하며,
바탕되는 본자리는 변화하는 듯하며,
거대한 모서리는 모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대기만성),
거대한 소리는 희미하게 들린다.
하늘의 형상은 형체가 없고, 도는 성대하지만 이름이 없으며, 훌륭한 느슨함으로써 만물을 완성시킨다.
죽간본 26장 - 통행본 52장 중반부, 백서본 25장
閉其門, 塞其穴/終身不敄/啓其穴, 濟其事/終身不來
(의식이 반응하는) 그 문과 구멍을 닫으면 죽는 날까지 어려움이 없다.
그 구멍을 열고 일을 좇으면 죽는 날까지 본처로 돌아오지 못한다.
죽간본 27장 - 통행본 45장 중반부, 백서본 11장
大盛若缺 其用不敝 大盈若盅 其用不窮 大巧若拙 大成若詘 大直若屈
진정 성대한 것은 부족한 듯 보이나, 그 쓰임에는 모자람이 없다.
진정 가득한 것은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에는 끝이 없다.
큰 재주는 둔한 듯 보이고,
대성한 것은 궁지에 빠진 듯 보이며,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 보인다.
죽간본 28장 - 통행본 54장, 백서본 26장
燥勝凔 靜勝熱 淸靜爲天下定.
화롯불은 차가움을 이기고,
고요함은 뜨거움을 이기니,
맑고 고요함은 천하의 바탕이 된다.
죽간본 29장 - 통행본 17장, 백서본 86장
善建者不拔/善保者, 不脫/子孫以其祭祀不絶/修之身, 其德乃貞/修之家, 其德有餘/修之鄕, 其德乃長/修之邦, 其德乃豊/修之天下 家 以鄕觀鄕 以邦觀邦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
(도를) 잘 심은 자는 뽑히지 않고,
잘 간직한 자는 벗어나지 않으며,
자손들로부터 제사가 끊이질 않는다.
(도로써) 자신을 다스리면 덕이 본자리에 안정되며
집안을 다스리면 덕이 넘쳐나며
마을을 다스리면 덕이 자라나며
나라를 다스리면 덕이 흥왕해지며
천하를 다스리면 덕이 모든 곳에 닿는다.
집안을 집안으로써 보고 마을을 마을로써 보고 나라를 나라로써 보고 천하를 천하로써 보라.
내가 어찌 천하의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병(丙)본
죽간본 30장 - 통행본 18장, 백서본 87
大上下知有之 其次親警之 其次畏之 其次梅之/信不足, 焉有不信/猶乎! 其貴言也/成事遂功/而百姓日, 我自然也. 故 大道廢, 焉有仁義/六親不和, 焉有孝慈/邦家昏, 焉有正臣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만 알며,
다음 가는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이 친근하게 여기고 찬양하며,
그 다음은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다음은 아랫사람들이 업신여긴다.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있게 되는 것이로다.
오히려 말함을 줄이면 일을 이루고,
마침내 공을 세웠을 때 백성들은 ‘내가 스스로 해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도가 무너져서 인의가 나오는 것이다.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여 효도와 자애가 나오는 것이다.
나라 안이 어둡고 혼란하여서 바른 신하(正臣)가 나오는 것이다.
죽간본 31장 - 장통행본 35장 전반부, 백서본 109장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坪大 樂與餌 過客止 故道[之出言] 淡呵,其亡味也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而不可旣也
큰 상(象, 본질)을 잡으면 천하가 운행하게 되고
그 운행에는 걸릴 것이 없으며 안정되고 태평하다.
음악과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나,
도에서 나오는 말은 밋밋하여 아무 맛도 나지 않고 보아도 볼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을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은 끝이 없다.
죽간본 32장 - 통행본 31장 중~후반부, 백서본 105장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故曰, 兵者/得已而用之/銛襲爲上, 弗美也/美之, 是樂殺人/夫樂以得志於天下/故吉事上左, 喪事上右/是以偏將軍居左/上將軍居右 故殺 則以哀悲莅之/戰勅, 則以喪禮居之
군자는 평상시에는 왼쪽(生)을 높이고 병기를 쓸 때는 오른쪽(死)을 높인다.
그래서 ‘병기는 군자의 물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쓸 때에는 담담하고 옅은 것이 가장 좋으며 그 행위를 미화하지 말라.
미화하는 것은 살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대저 사람 해치는 일을 좋아하고서는 천하에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길한 일에 있어서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에 있어서는 오른쪽을 높인다.
그래서 편장군(낮은장군)은 왼쪽에 자리하고 상장군(높은장군)은 오른쪽에 자리하는데
이를 설명하자면, 장례로써 자리를 잡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많은 인명을 죽이는 일이니 슬픈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장례로써 자리를 잡아야 한다.
죽간본 33장 - 통행본 29장
爲之者敗之 執之者失之 聖人無爲 故無敗也 無執 故/愼終若始, 則無敗事矣/人之敗也, 恆於其且成也敗之/是以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之所過/是以能輔萬物之自然, 而弗敢爲
하려고(爲) 하면 그르치고 잡으려고 하면 잃는다.
성인은 하려고 함이 없기 때문에 그르치는 일이 없으며,
잡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일의 마무리를 처음처럼 신중히 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도다.
사람이 일을 그르치는 것은 항상 그 이뤄내려함 때문이며,
그래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
고로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배우지 않기를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쳐온 곳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기 때문에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수는 있으나, 감히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5.3. 《노자》의 사상적 성격


노자의 사상은 '억지로 하려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놔두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마음가짐과 '이름을 알리려하지 말고 혹시라도 명성을 얻더라도 유명세가 커질수록 자신을 낮추어야 된다'는 공수신퇴(功遂身退)의 처세술이라 할 수 있다. 명성이나 재물을 가득채우면 이후에 잃어버릴 일만 남게 된다고 하여 '비어 있음'을 강조하였고,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미추(美醜)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인데 이를 굳이 구분해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하였다. 노자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비웃을 것이라 하였는데, 노자는 도리어 '뛰어난 재주는 오히려 서툴게 보인다'고 말하면서, 비웃음을 받지않으면 도(道)라 하기 부족하다고 하였다.
왕필본으로 대표되는 《노자》는 일반적으로 반 유가적이면서 역설적인 격언을 담은 문헌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는 특히 《장자》가 갖는 성격과 연동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출토 문헌은 그러한 이해에 대하여 의구심을 던져주고 있다. 가령 왕필본의 "絶聖棄智, 民利百倍(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로움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란 문장이 "絶智棄辯, 民利百倍(지식을 끊고 변론함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으며[15], 왕필본의 "國家昏亂, 有忠臣(국가가 혼란해져야 충신이 생긴다)"란 문장도 "邦家昏亂,安有貞臣(나라가 혼란해지면 어디에 바른 신하가 있겠는가)"으로 바뀌어 있어 반유교적인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16] 오늘날 이러한 문제는 학자들 중에서 치열하게 토론되고 있는 중이나, 지금까지 이해했던 노자의 모습은 최초의 노자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기초하여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언어, 개념, 인식의 상대성을 강조하고,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관계에 주목한다. 특히 강함, 단단함, 높음, 그리고 채움에 대비하여 약함, 부드러움, 낮음, 비움, 그리고 겸손함을 강조한다. 억지로 그리고 작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함을 반대하고 명예와 이익에 대한 추구 그리고 지나친 욕망 등을 비판하고,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하여 일이 자발적 또는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게끔 함을 주장한다. 통치자의 욕심으로 인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결국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피해가 되니, 통치자는 헛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명령과 법률을 시행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또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맞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오래 사는 것이라는 문장도 있다. 이렇게 통치자와 관련된 구절이나 유, 무에 대한 구절들에 주목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왕필 등이고, 뒤의 '오래 사는 것'(장생불사)에 주목하여 양생론적, 종교적으로 보는 쪽이 하상공 그리고 도교의 노자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입장이다. 이밖에 노자의 정치 철학은 소국과민이다. 이는 나라는 작게 하고 백성은 적게 하라는 말로써, 노자는 원시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긴다.
여기에서 간과되기 쉬운 사실은, 노자의 사상은 유가법가와는 확연히 다른 수단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치자가 지향해야 할 바'''를 논한다는 점이다. 노자 사상의 이른바 도교적, 양생론적 측면을 주목하는 입장에서는 노자 사상의 이러한 통치 규범적 측면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래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도가"적이라고 묶이게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덕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17]과, 장자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 등을 종합하여 노자의 상대성, 자연, 부드러움 등에 대한 태도가 결국 "부드러운" 형태의 '''통치술'''을 논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라고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특히, 한비자의 "해로" 부분이나, 황로학파 등은 아예 노자가 유가, 법가, 묵가 등보다도 더 섬세한 고도의 통치술을 이야기한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후대의 왕필본에서는 이게 권모술수에 대한 서술인지, 자연적 원리에 대한 서술인지 애매하게 읽히는 부분들이 나온다. 실제로 이렇게 애매한 몇몇 부분들은 '''죽간본에는 없다'''. 대표적으로 36장. 다만, 죽간본에 있는 부분들만 놓고 봐도 유가와는 대비되는 통치 기술서로 읽을 여지가 없는 게 아니다.
이런 면을 보면, 왜 한비자가 노자에 주석을 달았고, 병법가, 무술가들이 은근히 노자에서 영감을 얻거나 비유를 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한 초기, 특히 한문제 같은 경우 무위지치의 도라고 해서 노장사상의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했으며 그의 부인인 두태후에 의해 한무제 초기까지도 통치이념으로 남았다. 대놓고, 억지로 의도를 내비치면 상대가 반발할 것까지 미리 예상하고,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몇 수 앞을 읽어 행동하는 교활한 통치자나 전략가야말로 도에 맞추어 사는 사람일 수 있으니까. 병법서에서도 거국적인 외교술을 다루고, 격투기나 무기술에서도 음양수라고 해서, 실로 허를 치고, 허로 실을 치고, 허를 드러내는 것과 같이 기묘한 원리들을 다루는데, 노자를 이러한 맥락으로 읽을 가능성도 열려있다는 점이 노자의 묘미이다. 당연하지만 노자식 사회를 이상사회로 긍정적으로 평하는 학자들은 노자를 "권모술수를 담은 책"이라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둘 다 노자를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읽은 관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5.4. 《노자》의 기타 특징


《노자》는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서들과는 달리 시적인 운율이 중시되어 상당히 많은 구절에 압운이 되어 있고, 역사상의 고유 명사가 단 하나도 출현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보인다. 이 점은 《노자》의 저작연대나 작자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5.5. 바깥 고리


'''관련 링크'''
한글 번역

[1] 《도덕경》을 《노자도덕경》, 또는 《노자》라고 하기도 한다.[2] 무위자연(無爲自然): 억지로 하려고 하지말고 스스로 그러하게 놔둬라는 뜻.[3]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을 이루고 나면은 이내 물러 나야 한다는 뜻.[4] 정확히는 문서 기록을 담당하는 관직. 당시 이 관직의 명칭이 '사'(史)였는데, 이것이 후에 '역사'를 뜻하는 글자로 쓰이게 된다. '史 記事者也 從手持中 中正也(史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글자의 형태는 '손'이 글자의 한 부분이고, 中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고대 중국에서 中은 제법 중요한 글자 중 하나인데 대강 얘기하자면 올바르게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정도로 얘기할 수 있다.) -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역사 교육학 배우면 한번 이상은 꼭 지나치는 기록이다.[5] 윤희(尹喜, ?~?)는 중국 주나라와 전국시대 진나라의 도가(道家) 철학자이다. 그가 맡았던 관직의 이름을 따서 관윤(關尹)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씨 연원에 따르면 윤희가 관직 이름을 따서 관(關)을 성으로 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자가 주(周)의 쇠함을 보고 주를 떠나려고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인 윤희(尹喜)에게 부탁받아 《도덕경(道德經)》 5천여 자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관령 윤희가 즉 관윤(關尹)으로 노자의 제자가 된다고 한다. 《장자(莊子)》의 〈천하편(天下篇)〉에 관윤의 말이라 하여, "사람은 아집(我執)을 버리면 자연(自然)대로의 동작이 발휘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동(動)하기 물과 같고, 그 고요함이 거울과 같으며, 적(寂)함이 청(淸)과 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잡가(雜家)의 대표작인 《여씨춘추(呂氏春秋)》 〈불이편(不二篇)〉에는 "관윤(關尹)은 청(淸)을 귀히 여긴다"고 평하고 있다.ㅡ위키백과.[6] 사실 노자가 그와 친분이 있어서 미리 준 것은 아니고 노자가 은둔하기 위해 관문을 떠나려 할 때 문지기인 윤희가 '''선생님께서는 이제 곧 은거하실 테니 쉬운 부탁은 아니겠지만 떠나시기 전에 소인을 위해 글을 남겨주고 가십시오.'''라고 부탁했는데 평소에 언어를 통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며 글 자체를 남기지 않았던 그도 윤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문지기를 위해 자신의 유일한 저서를 집필한다. 사실 노자는 학문이나 책 자체를 그가 주장하는 도에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아주 몹쓸 것으로 취급하던 사람이다. 도덕경만 봐도 이미 책읽고 공부한 학자(혹은 지자 = 똑똑한 자)라는 인간들을 평범한 사람들 상대로 '(인)위'(현혹이나 선동에 가까운 것들을 의미한다.)하려 하는 자로 간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음모(?)에 맞서 도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은 백성이 무지(無知)하고 바라는 게 없는 것(無欲), 즉 무위라 봤다. 참고로 여기서 무지(無知)는 기존의 서술과 같이 무식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나 작위적인 것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근현대적 의미의 작위라는 것도 부족한 설명으로, 노자의 '무위'에서 핵심이 되는 관점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 판단할 기준을 두지 않는 것'이다. [7] 김경일 교수의 「유교탄생의 비밀」[8] 실제로 노자는 사기에서 한비자와 함께 실렸다. 법가가 도가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당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러 가지 기록과 주석의 사상적 경향으로 보아 한대로 추정하고 있다[10] 왕필은 노자의 주석을 16세에 달았다. 또한 주역의 주석도 달았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위진 시대 현학(玄學)이 발전할 수 있었다. 위진 현학의 3대 경서가 바로 《노자》, 《장자》, 《주역》임을 생각한다면 왕필은 정말로 천재였다. 결국 젊은 나이에 역병에 걸려 요절하였다.[11] 이 외에도 그 시기에 노자를 언급한 비석들도 참고가 된다.[12] 味는 취향. 즐기는 바를 뜻함.[13]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또는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14] 원래는 上尒下賏 모양으로 '많은 재물'들을 뜻한다.[15] 성과 지라는 한글자가 바뀌었는데 뜻이 바뀐다. 글씨 일부만 조금 지워져도 둘이 모양이 헷갈리는 형태의 글자라[16] 기존에는 반유가적인 성격이 많이 부각되었다. 군사 정권 시절 다석 류영모, 함석헌 등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이 노자 연구를 많이 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물론 노자에 반유교적인 모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측면이 발전되고 부각됐을 뿐이다.[17] 왕필본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백서본, 죽간본 출토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함축적인 운문 형태인 노자 텍스트의 특성상 한 글자만 다르게 읽어도 뜻이 천지 차이로 벌어지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