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1890)

 

성명
장기영(張基永)
이명
장기영(張基榮)

관하(觀河)
생몰
1890년 ~ ?
출생지
경기도 장단군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기영은 1890년경 경기도 장단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했고,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 평양지회 간사원을 역임했으며, 평양 대성학교 교사를 맡았다. 1911년에는 연해주 수청 신영동에서 사범학교(師範學校)를 설립하고, 1913~1914년에는 국자가 광성학교(光成學校)와 나자구 대전학교(大甸學校)에서도 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1912년 음력 12월 간민회(墾民會) 부회장을 맡았으며, 1914년 3월에는 간민회 민적조사과장, 4월에는 간민회 산하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와 청년친목회(靑年親睦會)가 통합하여 결성된 동제회(同濟會)의 인사부장 등을 역임했다.
1915년 지린성 와룡동중학교(臥龍洞中學校)에서 결성된 '군무부(軍務部)'의 명칭을 결사대(決死隊)로 변경하고 참모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16년 3월경 왕청현(汪淸縣)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주도로 조직된 제1고등국민학교(第1高等國民學校)의 직원으로 활동했다. 1918년 1월 노령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족회(韓族會) 총무 겸 서기로 활동했으며, 1920년 2월에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의 항명을 권유하는 격문을 배포했다. 또한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보(韓人報)> 주필을 맡았고, 1921년 신민단(新民團) 모연반장(募捐班長) 등으로 활동했다.
1923년 2월 대한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해 개조파로 활동했고, 같은 해 6월에 창조파를 비판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이후 1923년 10월부터 1925년까지 액목현에서 적기단(赤旗團)의 비서위원장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장기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