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1907)
1928년 조선혁명당 위원장 현정경의 지령을 받고 청원, 유하, 반석 등지에 청년동맹을 조직했으며, 반(反) 국민부 세력인 공산주의 엠엘(ML)파가 결성한 재중국한인청년동맹에 대항했다. 1929년엔 국민부 중앙위원으로서 교양부에서 활동했으며, 1930년 환인현 신흥학교 교원으로 피명되었고, 1930년 친일단체인 선민회 분쇄를 위해 노력했다. 1932년 하르빈에서 타제동맹(打帝同盟)을 조직, 활동했고 1935년 조선혁명당 위원장 김원봉의 지령에 따라 남북 만주에서 선전활동부, 남경군관학교에 청년을 파견하려 하다가 체포되어 용정촌에서 1년간 복역했다.
1937년 민족혁명당 화중주판 책임자로 비밀 활동을 수행했으며, 1938년 국내로 잠입해 민족혁명당 지부를 조직하려 했지만 신변이 위험해지자 만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1939년 신경 및 봉천을 중심으로 반제동맹을 조직해 극비리에 활동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7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